04.
휑하니 비어있는 집.
불하나 켜 놓지 않아 미세한 빛 한점 보이지 않는 반 지하.
사람의 온기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적막함과 허전함.
어둡게 내리깔린 밤하늘 밑에서 오늘따라 유난히 가슴 한구석이 쓸쓸해짐을 느끼며,
도이는 아무도 없는 제 집의 현관문을 열고 발을 들여놓는다.
“휴우....”
낮게 깔린 어둠위로 지독히 낮은 한숨이 동반하여,
한층- 집 안의 분위기가 더 무거워진다.
그러나 도이는 그 무거운 분위기와 마음... 모두가 익숙한 양,
자연스레 불을 밝히며 무거운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는다.
달칵, 조용한 공간의 정적을 깨듯, 방문을 따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 안에서 도이를 맞아 주는 건....
처음 집안에 발을 들여놓을 때와 같은 짙게 내리깔린 어둠뿐이었다.
“휴우....”
다시 한번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습관처럼....
동시에, 교복 주머니 속에 잘 넣어둔 핸드폰이 드르륵~ 온 몸을 떨어댄다.
“어.... 오빠.”
[잘 들어갔어?]
퉁퉁 부운 얼굴로 투정을 부리더니, 그래도 결말은 좋았나보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유민의 음성은,
오늘 도이를 찾아왔던 하교시간과 같이 듣기 좋은 중저음이었다.
[데려다 주지 못해서 미안해.]
“다 데려다 줘 놓고는 뭘 미안해.”
[그래도, 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거 안 좋아하잖아.
더군다나 아저씨도 삼일 후에나 오실 텐데.]
“나 괜찮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일이나 보세요. 아저씨.”
[피식.... 다 좋은데, 왜 마지막엔 엇나가는 거냐?]
“뭐가?”
[좋고 좋은 말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저씨야? 하필이면.]
“내 맘이지 뭐, 후후..... 술 적당히 하고, 음주운전 하면 안 돼~ 알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피식. 연분홍의 입술사이로 아주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고, 짧은 통화가 끝이 났다.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고서도 다 데려다 주지 못했다고 말 하는 유민.
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나 깊고 아름다웠다.
다정다감한 유민과의 전화통화가 끝이 난 후.
그래도 도이는 유민 덕에 휑하니 쓸쓸하기만 했던 집안의 한기도
따뜻한 온기로만 느껴지는지, 제법 얼굴위에 생기가 돌았다.
“엄마, 학교 다녀왔습니다....”
그 환한 얼굴로, 이제까지 열지 않았던 작은 방의 문을 열어 재끼는 도이.
그 안에 불을 밝히고는 꾸벅 인사를 하는 모양새와,
작고 도톰한 입술을 움직이며 하는 말은 분명,
따뜻한 미소와 품이 제일먼저 생각나는 엄마를 향한 말이 분명했다.
허나, 어둠이 가시고 환한 빛이 자리 잡은 그 방안에서 도이의 인사를 받아주는 건....
작은 액자 속에서 환히 웃는 부인이 전부였다.
“엄마... 오늘 도이는.... 오빠랑 화해했어.
오빠가 찾아왔더라고. 엄마도 봤지?
너무 반가웠는데.... 근데... 그동안 연락이 없이 나 걱정시킨 게 너무 얄미워서...
조금 심술을 부리기는 했는데, 그래도 오빠가 다 받아줬어. 내 투정....”
“…….”
“오빠가 미안하다고 저녁도 사줬어....
약속이 있어서 자꾸만 전화가 오는데도, 나 밥 먹여 들여보낸다고 약속도 늦게 갔어.
아마 우리가 그 식당에 들어갔을 때가, 오빠 약속 시간이었나 봐.”
차가운 바닥에 엉덩이를 맞대고는, 작은 액자를 들어 무릎위에 올려놓은 도이.
쓸쓸이 대답 없는 허공을 향해 하루 일과를 낱낱이 꺼내놓기 시작한다.
마치, 일기장에 작은 일 하나까지 세세하게 기록이라도 하는 양.
“유민오빠는 정말 바본 가봐.
중요한자리 같아 보였는데, 그 약속보다 내가 더 중요하댔어.
친구도 아니고, 과 선배들이랑 약속인 것 같았는데도 말이야.
예전에 보니까 그 선배들 무서워하는 것 같았는데, 오빠가.... 피식....”
“…….”
“근데 그 말이, 너무 기분 좋았어... 행복했어, 엄마.
누군가에게 내 존재가 그렇게 중요하다는 사실이....
꼭 엄마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다시 돌아온 것처럼.....”
“…….”
“그런 착각까지..... 들었어.”
핑그르르....
마지막 말을 하면서 두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방울이
금세라도 주르르 흘러내릴 것 같아 보였지만 도이는 울지 않았다.
대신에 힘겹게, 힘겹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엄마 앞에서 바보 같은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참, 나 오늘 아침에는 참 재미난 녀석을 만났어.
음... 이름이... 이름이.....”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가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도이는 목이 메어왔다.
더 이상 한마디 한마디를 더 꺼내기가 힘겨워 보인다. 그 모습이 많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도이는 마지막까지 엄마를 위한 배려,
그 단 하나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가며 꿋꿋하게 웃고 있었다.
“아, 생각 안 난다. 엄마.
그 녀석이 자기 이름 꼭 기억해 달라고 했는데,
나중에 만나서 ‘내 이름 기억해요?’라고 물으면, 난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참, 다희는 기억하려나? 그 녀석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눈길이었는데.
내일 다희한테 물어봐야겠다.”
“…….”
“그럼, 이제 엄마 딸 도이는 씻고 자야겠다.
오늘은 그냥 피곤하네. 그냥, 한 것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피곤하네.”
“…….”
“엄마. 그럼 나 씻어요. 그때동안, 우리 잠깐만 안녕해.”
사진 속, 말없는 엄마를 보며 내내 쓸쓸한 눈길을 감추지 못하는 도이.
이내 돌아서는 눈가에 꾸역꾸역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마도 오늘 밤 도이는 엄마의 포근했던 그 가슴이 무척이나 그리운 모양이다.
.
.
똑똑똑! 쾅쾅쾅!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문.
나 좀 열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겨우 이겨내며, 아직 깨지 않은 눈으로 아침을 맞이하는 도이였다.
얼핏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시간도 여섯시 밖에 되지 않았다.
“무슨 잠을 그리 깊게 자 길래 깨워도 몰라?”
“이렇게 일찍부터 어쩐 일이야?”
반 밖에 떠지지 않은 눈에 겨우겨우 힘을 넣어 문 밖에 유민을 맞이하는 도이였다.
아직 잠옷 차림에 머리도 부스스해 보이는 도이와 달리 유민은,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이미 잠은 진작 깨도 깬 것 마냥 단정해 보였다.
적당히 짧은 갈색의 부드러운 머릿결은 살짝 젖어 있는 게 얼핏,
어제와는 다른 섹시함이 보이니, 할 말은 다 하지 않았겠는가?
“오빠가 너, 아침 챙겨왔지.”
“아침?”
“혼자 있다고 또 밥 안 먹고 빈속에 학교 갈까봐서. 걱정이 되잖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뭐, 어때서.”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인마!”
부비부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애써 잠을 쫓아내고 있는 도이를 보며 유민은 싱긋 웃는다.
작은 거실에 놓여진 탁자 위에 아주 익숙한 손놀림으로 들고 온 종이봉투를 풀어 놓았다.
그 안에는, 제법 먹음직스러운 빵과 우유가 들어있었다.
“아직 제과점 문도 안 열었을 텐데, 이건 언제 샀어?”
“그런 건 묻지 말고, 어서 드세요. 아가씨.”
“그전에 좀 씻고.”
“그럴래?”
“응. 참, 어제는 언제 들어왔는데?”
도이는 욕실 문을 열어 양치를 하면서도, 유민과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 두시쯤? 좀 늦었어. 이야기가 길어지더라고.”
“조금이 아니라 많이 늦었네. 안 피곤해?”
“괜찮아. 어차피 오늘은 오전 강의도 없거든.”
“괜히 나 때문에 잠 못 잔 거 아니야?”
“괜찮다고 했잖아. 너 학교 보내고 또 자면 돼. 난.”
“그래도 나 때문에 번거롭게....”
“아지야, 오빠가 그런 말은 하지 말랬지? 한번만 더 그런 말 하면 정말 혼난다. 너?”
유민은 가끔씩 도이에게, 강아지라는 말을 줄여 아지라고 부르곤 했다.
“피이~”
“얼른 씻고 나와. 오빠도 배고프다.”
그렇게 유민으로 인해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아침.
도이는 혼자가 아닌 둘이 되어 급속도로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