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길고 긴 시간이 모두 지나갔고 하루 일과를 마치는 시간.
교문을 향해 교복 입은 녀석들이 등교시간과 같이,
마치 하나의 개미떼를 연상시키듯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아침과는 달리 편안한 얼굴 이었고 무언가 화색이 돌고 있었다.
“오늘은 뭐 할 건데?”
“글쎄.....”
“오빠랑 약속 있어?”
“약속은 무슨.....”
“그럼 아직은 프리(free)한 거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재잘재잘 거리며 말꼬리를 무는 아이들 틈에 도이와 다희가 보인다.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두런두런 말을 주고받는 그들.
그러나 별 생각 없어 보이는 답이었다.
묵묵히, 마지못해 하는 느낌도 조금은 섞여 있는 심드렁한 말이었다.
그러나 도이의 답에 다희는 두 눈을 번뜩인다.
“오늘, 울 집에 가자!”
우렁찬 음성이었다. 귓가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살짝 미간이 찌푸러질만도 한데 도이는 오히려 익숙해 보인다.
“쇼핑했냐?”
“빙고!”
“옷 샀냐?”
“아니, 아니.”
“가방 샀냐?”
“그것도 아니야!”
“그럼 뭔데?”
우뚝, 잠시 도이의 걸음이 멈췄다.
평상시의 다희를 보자면 분명 옷이나 가방 등을 샀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니 조금은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다희는, 쇼핑을 하면 줄 곳 옷을 사는 모양이다.
“가보면 알아! 그러니까 우리...........”
한참 이야기가 거론되고, 많은 무리 틈에서 이제 막 교문을 지나쳤는데,
다희의 말끝이 흐려졌다.
다희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교문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편의점 앞이었다.
그 곳에 새 빨간 스포츠카 한대가 보인다.
그 안에서 천연갈색의 머리를 자연스레 넘기며
미소 짓고 있는 한 남자가 도이를 보며 손짓을 하고 있다.
새 빨간 스포츠카와 천연갈색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너무나 잘 어울렸다.
너무나 환상적인 궁합이랄까? 잠시 많은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이내 그 시선들은 어디론가 분산되었다.
한두 번, 시선을 잡을 만 하긴 했지만
아이들은 딱히, 그 차에 관심을 두지는 않는 것 같았다.
“오빠....?”
주춤, 멍하니 바라보다가 저벅저벅 다가가서는 놀란 눈으로 남자를 향해 말을 거는 도이.
반가움이 가득 베어난 음성이었다. 반면에 얼굴은 무언가가 복잡해 보였다.
“인마, 오빠를 봤으면 기뻐해야지,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언제 온 거야? 오래 기다렸어?”
“아니야. 시간 맞춰서 왔어.”
“학교는?”
“인마, 며칠 만에 봐서는 고작 그런 것만 걱정할래? 정말?”
차 문 위로 양팔을 괴고는 늘어지듯 몸을 기댄 유민.
다양한 표정 변화를 보이는 도이를 보며 내내 싱글벙글 이다.
“쓸데없는 걱정은 제발 그만 좀 하고, 얼른 타. 아가씨!”
“…….”
차 안에서 제법 긴 팔을 뻗어 도이의 가방을 뺏어가는 유민이었다.
그에 도이는 엉거주춤 차 앞을 뺑~ 돌아 보조석 쪽으로 향했다.
쇼핑을 거론하며 무언가를 자랑할 것에 신이 나 보이던 다희는 조금은 맥이 빠진 얼굴로,
도이와 유민을 향해 인사 한마디 건네고는 어디론가 발을 옮긴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왜? 갑자기 와서 싫어?”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무슨 약속이라도 있었어?”
“약속이라기보다는..... 다희가 자기네 집에 가자고 그러더라고.”
“이런, 그래서 아까 다희 표정이 좀 어두웠구나?”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유민은, 천천히 엔진을 가동시켰다.
두 사람을 태운 스포츠카는 부드럽게 학교 앞을 벗어난다.
“차유민? 뭐야......... 왜 차유민과 함께 가는 거지?”
유민의 스포츠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할 때,
어디선가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진다.
물론, 유민도, 도이도 그 서선을 의식하지는 못했다.
조금 멀지만 가까운 곳에서 꽤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몸집이 제법 굵은 나무에 몸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실장님......”
서서히 움직이는 차가 제 모습을 감추었을 때,
성민은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도이 앞에서와 달리 조금은 무게감 있는 음성으로 상대에게 무언가를 부탁한다.
“어?! 성민아!!”
그리고 그 때, 아주 간단한 전화가 끝나갈 때,
웬 계집아이 하나가 쪼르르~ 성민을 향해 달려왔다.
풍기는 분위기가 도이와는 정 반대라고 해야 할까?
무척이나 밝고 활달해 보이는 게, 성민과 닮은 부분이 많아 보인다.
그러나 성민은, 그 계집의 등장을 무척이나 꺼려하는 것 같다.
굳이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계집을 등진 체 미세하게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씨빠빠....... 첫날부터 딱 걸렸구나. 젠장.”
반면,
“어디로 갈까? 가고 싶은 데 있어?”
“없어.”
“그러면 오빠가 고를까?”
“그렇게 해.”
“…….”
처음 학교 앞에서 유민을 대할 때와는 달리, 무감감한 음성에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시선은 유민의 반대편으로 향해 있기까지 하다.
그 행동들이 차 안의 분위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잠시 유민은, 본의 아니게 도이의 눈치를 살폈고,
“오빠한테 화....난거 있어?”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러나 도이는 그에 대한 답 대신에 이렇게 말 했다.
“오빠......... 화 다 풀렸어?”
“응?”
“애초에 화난 건..... 내가 아니라 오빠였잖아.”
“그건.....”
“난 이해 할 수 없어, 오빠.... 솔직히 그래.”
도이의 이 한마디로 인해, 부드럽게 웃던 유민의 많은 표정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고 차갑게 굳거나 아무런 표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낮게 깔린 어둠이 한층, 차 안의 분위기를 더 무겁게 내리 누른다.
“지금만 해도 그래.... 삼일 째,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하물며 코빼기도 안 비추던 오빠였는데....
아무렇지 않은 양,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타나서는 히죽히죽 웃기나 하고.”
그러나 도이는 차 안의 분위기 따위는 개의치 않다는 듯 제 할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날도 솔직히, 화를 내야 하는 건 오빠가 아니라 나였다고.”
“도이야, 그건.....”
“남자들은 원래 다 그래? 아니면 오빠만 유독 그러는 거야?”
처음에는 제법 차분하게 말을 했던 도이였지만,
뜻하지 않게 점점 언성이 높아져가고 있었다.
무언가가 많이 화가 났고, 많이 서운했던 모양이다.
아이처럼 보채는 듯 칭얼거리는 음성에서 서운함이 묻어나왔다.
“민환이는 그냥, 동생일 뿐이야. 그냥 예쁜 후배일 뿐이라고.
오빠도 알잖아. 아니, 오빠가 더 잘 알잖아.”
점차적으로 도이의 음성이 높아감에 유민의 미간이 조금씩 굳어져갔지만,
화가 나는 양, 웃음이 싹 가셨지만, 이내 묵직한 한숨을 한번 내쉬고 마는 유민이다.
“원래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랑 말 하는걸 싫어해.
이번일은 오빠가 생각이 짧았던 거 아는데, 그래도 오빠도 남잔데 별수 있었겠냐?
너랑 그 녀석 사이가 좀처럼 다정해 보였어야지. 솔직히 오빠 너무 샘나더라.”
유민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부드럽게, 어린 아이를 달래고, 타이르듯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 날, 오빠가 그렇게 화내고 사라져 버린 다음에,
민환이가 나한테 얼마나 미안하다고 그랬는줄 알아?
내가 미안해해야 하는데... 미안해 죽겠는데....
오히려 사과를 받게 돼 버렸단 말야. 그 다음부터 민환이 보기가 껄끄러.”
“…….”
“그러고 보니까,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어. 도움 받아 놓고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고.
그런데도 오빠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미안하다는 사과나 받게 하고....
오빠 정말 미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