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몇 학년 몇 반, 이름.”
“누나~ 한번만 봐 주세요.”
“몇 학년 몇 반, 이름.”
“…….”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 발자국만 움직여도 얼굴 한가득 땀으로 흥건히 젖어오는 이른 등굣길.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도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 빨간 아이들이
힘겹게, 힘겹게 교문을 통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오른팔에 선도부 완장을 찬 도이가 보인다.
몰론, 도이의 왼손 위에는 선도부일지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에이~ 누나, 매정하게 이러지 말고, 진짜진짜 마지막으로 한번만 봐줘요.”
매끄러운 얼굴선에 웃는 모습이 제법 매력적인 사내 녀석이 서 있었다.
어디 하나 눈살을 찌푸릴만한 단점이 보이지 않는 잘난 녀석이었다.
더불어 전체적으로 풍기는 약간의 날라리틱함을 잘 가려주는 깔끔하고 단정한 복장.
얼핏 봐서는 대체 이 녀석이 무엇 때문에 걸렸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도이의 앞에서 꼼짝 못하고 봐 달라며 갖은 아양을 부리는 모양새가
무언가 잘못되긴 잘못된 것이겠지?
“진짜 마지막이야?”
“사나이 도민환 이름 석자 걸고 맹세해요!”
“그래?”
“당연하죠!”
“알았어. 일학년 오반 19번 도민환. 이름표 미착용.”
“이야~ 누나. 기억력 하나는 끝 발 난다.”
약간은 진지하게 물어온 도이의 말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하고 야무지게 말하는 민환이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묘한 매력을 발산하였다.
그렇지만 우리의 선도부 도이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 치의 망설임이나 머뭇거림도 없이 냉정하게 들고 있는 일지 위에
민환의 이름을 기록하니 말이다.
“너 같은 놈은 기억 못하면 그게 잘못 된 거지. 네가 어디 하루 이틀 걸렸어?”
“그렇긴 하죠....? 아니, 지금 이게 아니잖아요! 누나, 맹세 한다니까요?
사나이의 다짐을 뭐로 보고!!”
“넌 아침에 눈뜨고부터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일년 365일을 맹세만하고 사는 놈 아니냐.”
“누, 누가 그래요?”
“누가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지난 3개월 동안 쭉~ 경험한 바야.”
도이는 매정하게 정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름을 적었으니 볼일은 다 봤다는 태도였다.
그렇지만 민환은 아닌 것 같았다.
도이의 눈앞에 알짱거리면서 연신 그 이름을 지워달라고 쌩때를 부리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녀석의 왼쪽 가슴 위에는 버젓이 이름표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름표 미착용이라..... 무언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뜻 밖에도 녀석이 착용하고 있던 이름표위에 적힌 이름 석자는.....
한유리라는 웬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래, 그 이름이 지금, 도민환이라는 녀석의 이름 석자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름표 내 놓고 저리 가라. 응?”
“아, 진짜. 우리 사이에.”
하지만 이 녀석, 대체 이른 아침부터 무슨 심본지 모르겠다.
한유리라는 이름 석자가 못내 아쉬운 것일까?
아니, 그것보다 어쩜, 냉큼 교실로 달려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 쪽일 가능성이 커 보이는 군.
“아씨. 억울해! 내가 이 이름표 때문에 교문 앞에서 얼마나 서성이다 구한....... 헙!”
“오호라~ 그러니까 또 어떤 녀석을 협박, 혹은 유혹이라도 하셨나보지?”
“누, 누가 그렇대요?!”
“그럼 그, 한유리라는 녀석은 어디서 뭐한다니? 아직 걸린 것 같진 않은데.”
“그, 그게..... 실은..... 이름표가 두개라기에...... 하하.”
멋적은 듯 웃는 민환을 보면서 도이는 한심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뜬금없는 말까지 내뱉는다.
“도민환.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앞으로 쭉~ 내가 널, 유리라고 불러도 되겠냐?”
“아씨, 누나!! 사나이 가오가 있지,
도민환이라는 멋진 이름 놔두고 유리가 뭐야. 유리가!!”
“그럼, 이게 니 명찰이라도 되는 양 박박 우기는 너는 뭐냐?”
“씨...... 정말 치사하게. 알았어요. 적어요. 적어!”
“저기, 벌 서는 애들 보이지? 두 바퀴다.”
암만 자신의 명찰이 아니래도 한번쯤 봐줄 성도 싶은데, 도이는 참으로 냉정했다.
조금은 독하다 싶을 만큼.
두 사람 사이에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아침부터 서로 으르렁거리는 모양새가 암만 봐도 그렇게 보인다.
뭐, 아님 말고.
민환은 포기한 듯, 가방을 한쪽에 던져 놓고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꽉 조여졌던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면서.
물론! 곱게 가지는 않았다.
원래가 주는 만큼 받는 거라고, 도이가 그리도 냉정했는데,
어찌 민환이라고 곱게 넘어가겠는가?
“씨, 무슨 여자가 저렇게 독한지. 무슨 노처녀 히스테리도 아니고.
어디, 저래가지고 시집이나 가겠어?”
대놓고 들으라는 소리보다 더해 보이는, 아주 큰 민환의 빈정거림.
주위에서 선도부고 뭐고, 등교하던 녀석들까지 죄다 키득키득..... 작게 웃고 있었다.
“너한테 나 데리고 살라는 말 안 하니까 남 일에 걱정 말아라.”
하지만, 도이는 당황한다거나, 낭패스러움에 얼굴을 붉히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연스레..... 어찌 보면 민환으로써는 조금 열 받게도 곱게 그 말을 받아줬다.
그러면서도 민환에게 등 돌린 보이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원체 말이라는 게, 같은 말이라도 억양에 따라 달리 들리는 것이요,
또는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민환이 했던 말은 좋게 해석할 성질의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허나,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녀석의 웃음 때문일까?
비아냥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가볍게 웃는 듯한 특유의 부드러운 음성 때문이었을까?
그 모습이 그리 밉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비록 결말은 매정했어도 말이다.
“저기......”
그렇게, 이미 민환이 운동장을 돌기 시작했을 때,
민환 못지않게 뺀질뺀질해 보이는 녀석이 쭈뼛쭈뼛 거리며 도이에게로 다가온다.
도이는 잠시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착용한 복장이나 생김새가 판박이였다. 민환이와.
깔끔하게 잘 다려 입은 교복은 깃이 잘 서 이었고, 무척이나 단정해 보였다.
민환이와는 달리 날라리적인 성향이 풍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운 인상위로 한 성질 할 것 같은 날카로움이 공존했다.
오히려 날라리적인 성향보다 더 위험해 보일지도 모를 그런 인상이.
유난히 매끄러운 턱선과 깊이 페인 눈매.
그러면서도 묘하게..... 귀여운 느낌을 풍기는 데,
도대체 첫 인상을 딱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묘한 녀석이었다.
귀여우면 귀엽다. 날카로워 보인다면 날카로워 보인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저냥 평범해 보인다.
그런 말들이 딱부러지게 나와야 하는데, 그 어떤 말도 매치가 되지 않는 녀석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런 녀석이 대뜸, 보이를 보며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도이는 심하게 놀랐다.
하지만, 선도부라는 직업의식(?) 이었을까?
“명....찰이..... 없네.....”
라는 말로 녀석의 인사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그 와중에도
녀석의 복장을 꼼꼼히 살펴 본 모양이다.
“오늘 전학 왔거든요. 내일은 차고 올 수 있을 거예요.”
“어, 어. 그래.”
“그래서 말인데요, 죄송하지만 교무실이 어딘지 좀 알려주시겠어요?”
이상하게도 녀석은 도이와 아주 좁은 거리를 유지 한 체로,
살짝.... 아주 살짝....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왜 이리 매력적인지 모르겠다.
음..... 민환이는 어쩐지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을 발산하는 매력을 지녔다면,
이 녀석은 알 수 없이 빨려 들어가는....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짧은 시간에도 충분히 사람을 빨아들이는.....
민환이와는 다른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그냥 저기 입구로 들어가서 일층 복도를 쭉 걸어 들어가면 돼.
교무실 팻말 보일거야.”
“아, 생각보다 찾기 쉽겠네요. 감사합니다.”
설명이랄 것도 없이 아주 쉽게 교무실의 위치를 알려준 후에도
또 한번의 윙크를 선물 받은 도이.
이상하게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물론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 때문에 그 누구도 도이가 녀석으로 인해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는 없었다.
“고, 고맙긴.”
“그럼 전 이만.”
꾸벅. 처음과 매한가지로 넙죽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저벅저벅 걸어가는 녀석.
도이는 녀석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하며 못내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녀석은 복합적인 인상과는 달리 모든 말을 함에 있어
얼굴 가득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살짝 패일 듯 말 듯 페인 볼우물도 무척이나 매력적이었고,
남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눈웃음까지 쳐 대는데,
귀여움이라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쉽게 귀염을 떨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너무나 자연스레 귀염을 떨고 있으니,
어떤 여자라고 얼이 빠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