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완)
후우우우욱-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가 레일을 훑고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기분 좋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하압!"
채린이 한 입 크게 솜사탕을 삼키고 헤-웃으며 카렌을 올려다봤다.
티 없이 밝은 그 얼굴에 카렌의 양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말려 올라간다.
"카렌도 이거 먹어! 진짜 맛있다."
채린이 슬쩍 물려주는 솜사탕이 스르르 카렌의 혀에 녹아 사라지고, 달달함이 몸을 기분 좋게 휘감는다.
"맛있어. 되게 달콤하다."
"그치? 모양도 엄청 귀여워!"
요즘 한창 유행하는 노란색 곰 모양의 솜사탕을 보자마자 채린은 망설임 없이 달려가 사 왔었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핫도그, 치콜, 떡볶이 등 질리지도 않은지 아까부터 여러 간식을 끝도 없이 먹고 있었다.
"저기 머리띠도 있어!"
채린이 소리친다.
어쩐지 아까부터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훑어보더니만 저걸 찾고 있었나.
음식들은 그냥 찾는 김에 보여서 겸사겸사 사왔나 보다.
반짝, 반짝!
채린이 머리띠들을 사고는 이쪽으로 오고 있는 와중에 시험 삼아 자신의 머리 위에 하나를 써본다.
카렌은 하트 모양의 빛을 내는 머리띠가 생기 넘치는 채린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참...
"방금 귀엽다고 생각했지? 나 발 아픈데 잠깐 저기로 가서 앉자!"
채린이 구석에 위치한 인적이 거의 없는 벤치를 가리켰다.
둘은 손을 꼭 잡고 살짝 빠른 걸음으로 벤치에 앉았고 자연스럽게 무릎이 서로의 방향으로 향했다.
손은 여전히 꼭 잡은 상태로 얼굴은 마주 보니 잠시 침묵이 흐른다. 어색함이 아닌 편안함에서 오는 휴식 같은 조용함이다.
"좋다."
카렌은 솔직한 속마음을 내보였다.
활기 넘치는 이 놀이동산의 분위기도.
지금 앉아 있는 살짝 까끌한 나무벤치도.
지금 자신의 손에 닿는 따뜻한 채린의 손도.
무엇보다 채린과 같이 있는 이 소중한 순간이 참 좋았다.
"카렌. 내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뭘?"
"네가 나한테 맨날 귀엽다고 하잖아. 정말 그래?"
단순히 떠보는 말이 아니다.
그저 채린에게는 익숙지 않은 단어여서 그렇다.
복싱부터 헌터생활까지. 온몸에는 상처들이 가득하고 심지어 얼굴을 가로지르는 치명적인 흉터까지 있는 자신인데...
"네가 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귀여워. 나는 너라는 사람이 귀여운 거야."
카렌은 예전에 잊어버린 밝은 빛이 채린에게는 여전히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눈에 채린은 항상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카렌도 귀여워!"
"응?"
카렌이야말로 자신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말에 순간 광대가 씰룩인다.
차라리 잘생겼다는 얘기도 아니고 귀엽다니?
오히려 처음 보는 사람마다 차갑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다.
"그런데 카렌. '귀엽다'라는 말이 되게 위험한 거 알아?"
"위험하다니?"
잠시 생각하느라 카렌이 살짝 얼굴을 갸웃거리자 채린이 '풋' 하고 웃었다.
"그래, 그런 게 귀여워. 이렇게 상대방 행동 하나, 말 하나가 귀엽게 느껴지면 끝난 거래."
그제야 채린의 말을 이해한 카렌이 씨익 웃었다.
"맞아. 사실 예전에 끝났지. 나 때문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응? 뭘 기다려?"
"좋아해. 이채린."
몇 년을 기다려 온 순간이 현실로 왔지만, 오히려 채린은 순간 돌처럼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머릿속에서는 자신이 방금 들은 말을 그 짧은 사이에 수백 번 되씹는다. 아마 평생 잊히지 않겠지.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리며 수줍게 답변을 말한다.
"...나도."
카렌이 자신이 잡고 있던 손을 부드럽게 당기자 채린이 못 이기는 척 끌려와서 자연스럽게 안긴다.
"이건 좀 불편한데?"
앉은 채로 허리만 돌아가니 뭔가 어색하다.
"읏차!"
채린은 손을 카렌의 목에 두르고는 엉덩이를 훌쩍 띄우더니 자신의 다리를 넘겨 카렌의 허벅지 위에 착지했다.
"이건..."
갑자기 너무 가까워진 채린과의 거리에 순간 당황한 카렌이었다.
"왜? 앞으로 맨날 이럴 건데?"
하지만 채린의 눈에는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너 쓰러졌을 때 얼마나 가슴 졸였는 줄 알아? 이제 안 놓칠 거야."
"그건..."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이렇게 돌아왔으면 됐지."
채린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카렌의 얼굴에 고양이처럼 볼을 비볐다.
"그런데 내가 왜 좋아?"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하는 채린의 질문에 순간 카렌의 머리는 바쁘게 움직였다.
'망설이면 안 된다.'
채린이 물은 지 1초도 채 지나지 않아 카렌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책임감 있는 모습도 멋있고, 잘 웃어서 좋고, 먹는 모습도 예쁘고, 자는 모습도 귀엽고, 웃는 얼굴이 자엽스럽고, 내 앞에서 보여주는 다른 모습이 신선하고, 내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알았어!"
놔두면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은 카렌의 입술에 채린이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이제는 내가 용기를 내야지.'
채린은 굳게 결심하고는 한 번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볼을 잡고는 카렌의 얼굴을 천천히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쪽!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고 둘은 눈을 살포시 감았다.
"고마워. 나를 좋아해 줘서."
잠시간의 꿈같은 시간이 지나고 채린이 달콤한 숨결과 함께 카렌의 귀에 속삭였다.
"나야말로 너 같은 사람을 만나서 행운이야."
그렇게 또 잠시 둘은 이 시간을 음미하다 서로 떨어져 눈동자를 그윽하게 바라본다.
"맞다. 머리띠 씌워 줘야지."
순간 채린이 주섬주섬 꺼내 드는 물건을 보는 카렌의 얼굴이 미세하게 살짝 일그러질 때까지는 말이다.
"이거 엄청 예쁘지 않아?"
당연히 사랑하지만, 서로의 취향을 이해하는 데는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 * *
"백년해로...아니, 이건 너무 짧군."
현무가 자신의 말을 주워 담으며 적절한 말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겨우 백 년 따위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둘에게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닐 테니까.
"둘 다 엄청 잘 어울린다."
"맞아요."
채린과 엘리가 지금 저 앞에서 나란히 서 있는 삼색과 미호를 보며 감탄했다.
인간의 몸으로 변해 정장을 입은 삼색과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미호는 정말 말 그대로 천생연분이다.
"근데 쟤답지 않게 엄청 긴장했네?"
"그러게요? 미호 언니보다 더 떨려 보여요."
카렌과 주변의 사람들은 삼색의 손에 촉촉이 맺힌 땀을 보고 키득거렸다.
"옛날 생각나는군요."
유부남들인 강이사와 영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저 자리가 얼마나 떨릴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긴장될 수밖에요. 혹시나 지금 뭐 잘못하면 평생을 아내한테 놀림 받습니다."
둘은 경험에서 오는 교훈을 모두에게 말해준다.
"미호 언니는 엄청 행복해 보여요."
"몽!"
채린의 품 안에 안겨 있던 동글이가 동의하며 살짝 자신의 몸을 튀겼다.
동글이 말고도 지금 숲 속의 예식장 안에는 채린과 카렌의 지인 말고도 정령들이란 하객들로 가득했다.
세계수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꽃들의 정원과 조명 대신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신랑, 신부를 비추는 햇볕.
나무로 만든 의자 식탁까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삼색과 미호만의 결혼이 진행되는 중이다.
"긴 세월이라는 풍랑 속에서 그대들은 서로 안타깝게 헤맸지."
현무가 인자하게 둘을 바라보며 마지막 주례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만나서 서로 한 곳을 바라보니 나는 이것 또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다네. 평생 두 손 놓지 말고 잘 살게나."
현무가 담백하게 둘을 축복하고 둘은 서로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준다.
"제 선물이에요."
세계수가 박수를 짝짝치면서 슬쩍 자랑했다.
삼색과 미호는 괜찮다고 했지만 세계수는 자발적으로 엘프의 은인에게 자신의 눈물로 만든 결혼반지를 선물했다.
'여기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저거 한 쌍이면 나라를 사겠어.'
카렌은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돈 생각을 털어내려 물을 한 모금 들이키고는 일어섰다.
"주인!"
"아버님!"
저기서 자신을 부르는 삼색과 미호가 요청한 축사 차례다.
'원래 주례 있으면 축사는 안 하지만...'
꼭 해달라고 해서 그냥 짧게 해주기로 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둘이 처음 만났을 때는 우연이었지."
조선시대. 왕궁의 연못에서 서로 운명적으로 만난 미호와 삼색, 어느새 친해지며 감정이 싹텄다.
-물고기 잡아주라!
미호의 은근한 요청에 못 이기는 척 삼색이 건네 준 물고기 한 마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자신을 향해 눈을 반짝이는 삼색을 잠깐 보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며 카렌이 말했다.
"하지만 우연은 서로의 노력과 사랑으로 부부라는 결실을 맺었다.
미호의 노력 끝에 삼색은 마침내 사랑할 준비가 되었고, 오늘까지 이어왔다. 그리고 남은 일은...?
"행복하게 살아라."
카렌의 축사는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둘에게 전해주고 끝이 났다.
카렌이 내려가고 갑자기 분위기가 확 바뀌더니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럼 부케 던지는 시간!"
"부케?"
어느새 엘리가 또르르 나와 미호의 손에 노란 민들레와 흰색 은방울꽃으로 만들어진 부케를 들려 주자 카렌이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받을 사람이 있어?"
지인들만 초청하는 스몰웨딩으로 열어서 그 과정은 생략하는 줄 알았는데?
"나!"
?있었다.
카렌은 자신의 옆에서 앞으로 나가는 채린을 순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언니가 꼭 받고 싶다고 했어요."
물론 카렌은 좋았다.
그만큼 자신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있다는 의미니까.
"근데 부케가 좀 특이하네?"
"아빠도 아시다시피 노란 민들레의 꽃말은 행복, 은방울꽃은..."
"와아아아아!"
모두가 미호가 높게 던진 부케를 채린이 2m를 훌쩍 뛰어 잡아채자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다시 찾은 행복이래요."
꽃말의 의미를 들은 카렌은 저 앞에서 한껏 배를 잡고 웃는 삼색, 부케를 껴안은 채 웃고 있는 채린, 그런 채린을 다정하게 안아주는 미호를 보았다.
백호와 현무는 허허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강이사와 영준, 재민은 흐뭇하게 박수를 친다.
한길과 세계수는 잠시 눈을 감고 저들의 앞날에 무한한 축복을 빌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카렌이 순간 덜컥 겁이 날 정도의 감정이 물밀듯 밀려온다.
"아빠."
"응?"
그때 엘리가 자신을 바라보며 말한다.
"여신님이 저번에 못했던 말 전해주시래요."
"아! 그거?"
자신을 포탈로 밀 때 다음에 알려 준다고 했던 말인가?
벨리알과 지구 사이에서 고른 자신의 선택지에 관해 얘기해준다 그랬지.
'삼색이랑 드라마를 볼 때 했던 말.'
여러 번 생각해봤지만 아직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던 여신의 뜻이다.
"아빠가 드라마는 해피엔딩이 좋다고 하셨다면서요?"
맞다. 분명 얘기한 적이 있다.
카렌은 지구로 와서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봤고, 배드엔딩, 열린 결말 등 많은 끝을 봤지만 역시나 행복하게 끝나는 게 좋았다.
"여기서부터는 여신님이 전해 준 말을 그대로 들려 드릴게요. 큼!"
엘리가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카렌을 쳐다보며 여신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한다.
"네가 고른 선택이 나는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해. 이제 편히 쉬어."
그런가.
카렌이라는 인간의 드라마. 그 끝은 신이 보기에 그러했을까.
다만 자신의 생각은 예전과 달리 조금 바뀌었다.
카렌은 주변의 떠들썩한 소리를 들으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저도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이 남았다.
자신이 과거에 한 번 실패했던 일.
"이제 지킬겁니다."
친할 수록 더 아껴주려 노력하고.
말과 행동으로 서로 우정을, 애정을, 사랑을 표현할 거다.
다시 찾은 행복을 지키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160년만에 돌아온 연금술사는 조용히 살고싶다. 완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