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이유
"쿠울-"
조용한 병실에 귀여운 코 고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코골이의 주인공인 엘리는 오늘도 의자에 앉아 침대에 누워있는 카렌의 팔을 꼭 쥐고는 엎드려서 졸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세요. 여길 이렇게 맨날 또 올 줄은 몰랐어요."
채린이 병실을 지키고 있던 한길의 인사를 받으며 혹시나 엘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담요를 어깨에 덮어 주었다.
카렌이 있는 이곳은 채린의 동생이 입원했던 헌터 관계자 전용 VVIP 병원이다.
이 방은 그중에서도 병원장의 직접적인 케어를 받는 하나밖에 없는 병실이고.
"그러고 보니 채린님의 동생분도 이제는 완벽하게 나으셨군요."
채린과 문 앞에서 만나 같이 들어 온 강이사가 기억을 되짚으며 감상에 빠졌다.
그때는 민들레 재단의 직원들을 스카웃하고 다녔는데 말이다.
"너무 건강해서 탈이에요. 어제 동생들이랑 같이 와서 카렌을 보고 갔어요."
"저기 추가된 꽃도 두고 가셨죠?"
"맞아요. 이미 많다니까 그래도 주고 싶다고 그러더라고요."
채린이 앉은 채로 잠시 병실을 둘러보자 마치 잘 가꿔진 정원에 와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병실 안에는 많은 사람이 보내온 꽃들과 편지들이 가득했으니까.
"카렌님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죠."
일반 시민들은 모르지만, 각계의 주요 인사들은 카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솔라리 교단, 뿌리, 암흑가, 엘프, 민들레 재단의 사람들이 아주 극성이다.
"그래도 설마 마법까지 걸 줄 몰랐어요."
무려 아샤라는 대마법사가 시들지 않도록 보존 마법을 건 덕분에 꽃들은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정도는 해야죠. 카렌이 눈을 뜰 때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으면 좋겠네요."
"아샤님? 이러다 또 다 오겠네."
아샤가 엘프다운 가벼운 발걸음으로 어느새 병실 안으로 사뿐사뿐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병원으로 바로 순간이동은 안 했어요."
저번에 그렇게 들어왔다가 한 번 병원 전체가 뒤집힌 뒤로 인간들의 평범함과 상식을 공부하고 있는 아샤였다.
"바쁘실 텐데 괜찮으세요?"
"어차피 요즘 엘프들과 인간들의 교류를 논의하는 외교사절단으로 연합에 머물고 있어요."
벌써 카렌이 잠든 지 일주일이 지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모인 덕에 이 병실이 이제는 아지트처럼 느껴질 정도다.
"엘프들의 은인이자 이 행성의 구원자에게 종족을 대표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샤갸 자신의 지팡이를 살짝 휘두르자 병실 안에 있는 꽃봉오리가 펴지면서 손바닥만 한 소녀가 그 안에서 걸어 나온다.
"세계수님이 원하셔서요."
"언니!"
"여기."
채린이 이제는 익숙하게 허리를 굽혀 세계수를 자신의 손바닥 위로 올리고는 곧바로 어깨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엘리는 자요?"
"꽤 시끄러운데도 안 깨. 많이 피곤했나 봐. 요즘에는 아예 여기서 자더라고."
"그래서 이 병원 근처가 통제되었군요."
강이사가 드디어 의문이 해소되자 후련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대외적으로 시민들은 침략자들을 막아낸 일등 공신은 솔라리 교단으로 알고 있다.
엘리의 신변은 이제 대놓고 연합의장보다 강화되었고 근처 구역 전체가 성전사들의 관리하에 들어간다.
"계수야. 너도 바쁘지 않아?"
"아뇨. 신은 원래 평화로우면 딱히 할 일 없던데요? 그래도 요즘 솔라리 언니랑 많이 친해져서 좀 덜 심심해요."
은근히 친화력이 좋은 세계수다. 이제는 인간의 여신과도 자매가 되었으니 말이다.
'근데 굳이 경호가 필요 있나?'
강이사는 그 '경호'에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물론 성전사들의 의무라지만...이 병실에 S급 헌터부터 대마법사, 그리고 무려 대놓고 현신하는 '신'이 있는데?
"우리 왔다!"
거기다 추가로 한 마리의 신수가 어슬렁거리며 병실 안으로 또 걸어 들어온다.
인간의 몸인 삼색의 품 안에는 꼬리가 두 개 달린 조그마한 여우가 안겨 있었다.
"벌써 꼬리가 났어?"
"예전과 달리 지금은 신수의 힘도 있어서 금방 자랄 것 같아요."
미호가 자신을 쓰다듬는 삼색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말했다.
"혹시 필요하거나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맞습니다."
채린의 말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미호의 여우구슬이 심장으로 변한 덕 덕분에 카렌이 저렇게 살아나지 않았나.
"전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전 지금이 진심으로 좋은걸요? 삼색, 그치?"
"...나도 좋다."
모두가 미호의 얼굴에 담긴 만족감과 삼색의 한 발자국 늦은 대답을 통해 알아차렸다.
'삼색은 앞으로 절대 미호를 못 이기겠군.'
자신을 위해 몇백 년을 기다리고 모든 힘을 버린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나.
덜컥!
"허허! 삼촌은 오늘도 안 깨어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병실 바닥이 들썩이더니 갑자기 웬 커다랗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비어드님? 어떻게 거기서 나오십니까?"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지. 간이 포탈이야. 맨날 오기 귀찮아서 인간들 말로는 땅굴을 팠다네."
"병원 허락은...아닙니다. 제가 해결하죠."
"역시 강이사야! 오늘 밤에 술이나 또 한 잔 하자고!"
비어드가 털털하게 웃으며 강이사의 등을 두드렸다.
공사를 같이 진행하면서 어느새 술친구가 된 둘이다. 물론 강이사가 처리하는 일이 더 늘어난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사르르륵
그때 부드러운 온풍이 병실 안으로 들이닥치고 모두가 이제는 바람을 향해 익숙하게 인사를 건넨다.
"백호님, 현무님. 어서 오시죠."
"여기가 좋단 말이지."
백호와 현무는 오자마자 카렌을 한 번 살피고는 부드럽게 카렌의 몸을 바람과 물로 휘감았다.
백호의 바람은 하루밤 사이에 카렌의 몸에 쌓인 먼지들과 청소했고, 현무의 물은 온몸을 방금 목욕한 것처럼 뽀송뽀송하게 만들었다.
"이제 엘리 차례군."
"깨지 않을까요?"
"걱정 말게. 마치 엄마의 뱃속에 있는 것처럼 아늑할 테니."
현무는 물로 엘리의 주변에 조그만 막을 만들었다.
저 안에서는 피부에 쌓인 모든 노폐물이 빠지며, 단 몇 시간만 자도 몸이 개운할 거다.
"그러고 보니 주인이 엘리를 부러워 했었는데 말이다."
지금 현무가 쓰는 능력을 은근히 편리해 보인다고 자신도 엘리처럼 해달라는 눈치를 줬었지.
"모두 안녕하십니까."
"결국 오늘도 다 왔군요."
마지막 민재와 영준까지 오자 결국 1인실치고는 지나치게 드넓은 병실이 딱 적당하게 북적인다.
"음료라도 드시죠."
"역시 영준이다!"
둘 다 양손 가득 들고 온 음료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순식간에 여러 손이 와서 각자 취향에 맞는 음료들을 가져간다.
"..."
그리고 오늘도 자신의 주인을 기다리는 한 음료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딸기라떼.
카렌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다.
"일어나시면 드시고 싶어하실 것 같아서요."
항상 영준은 똑같은 딸기라떼를 타오고,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분명히 그럴 거다."
삼색은 자는 카렌을 쳐다봤다. 당장에라도 일어나서 좋다고 저 음료를 마실 것 같다.
"근데 언제 주인이 깨어..."
"아빠?"
카렌이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아샤에게 카렌의 상태에 물으려고 하자 엘리가 순간 고개를 번쩍 치켜든다.
출렁!
엘리의 몸을 감싼 물방울들이 자연스럽게 대기 중으로 사라지고 채린이 황급히 다가가더니 부드럽게 위로한다.
"괜찮아. 꿈꾼 거야."
엘리는 카렌이 저렇게 된 이후로 번번이 악몽을 꾸고 있었다.
'괜히 집에 안 들어가는 게 아니지.'
같이 살던 집 안, 하나하나 카렌의 손길이 닿은 곳을 보고 엘리는 견딜 수 없던 거다.
무엇보다 자기 전 항상 불을 꺼주던 아빠의 허전함이 그토록 행복했던 집에 냉기가 흐르게 만들었다.
"움직였어요!"
"응?"
그런데 오늘은 상태가 좀 이상하다.
악몽을 꾼 후의 우울한 표정이 아닌 환희와 기대감이 엘리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빠의 손가락이 움직였어요."
순간 병실이 침묵에 휩싸였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카렌의 몸에 향한다.
꿈틀!
"우와와아악!"
이번에는 손목이 움직였다. 뒤이어 살짝 떨리는 카렌의 눈을 보고 모두가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질렀다.
"음..."
이어서 입술에서 나오는 희미한 신음에 어느새 모두의 몸이 침대에 바짝 붙어 있었다.
'밝군.'
카렌이 의식을 찾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자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게다가 겨우 눈을 떠보니 얼룩처럼 보이는 색깔들로 앞이 가득했다.
살구색, 검은색, 금색 등 앞이 가로막혀 있었다. 이게 대체 뭘까.
잠시 눈을 깜빡이자 서서히 적응되어가는 눈.
안개가 걷히든 맑아지는 시야에 카렌은 마침내 얼룩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리며 자신도 중얼거렸다.
"밝아."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수많은 얼굴이 참 밝았다.
"카렌님. 여기 딸기라떼 있습니다."
그때 자신의 손에 쥐여지는 차가운 음료 한 잔.
위장이 놀랄 걱정은 없다.
마법과 신수의 힘으로 카렌의 몸은 더없이 건강했으니까.?
"어떻게 됐어? 모두 괜찮아?"
깨어나자마자 자신들을 걱정하는 지극히 카렌다운 모습에 모두가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렌님이 누워계시는 일주일 동안 암흑가는 다시 재건을 시작했고 나머지 피해 입은 성지나, 영지도 이미 복구가 끝났습니다."
"내가 했지!"
누가 술친구 아니랄까봐 강이사의 말에 비어드가 어깨를 으쓱대며 추임새를 더한다.
하긴 능력으로 몇 시간만에 건물 한 채를 건설하는 드워프가 있는데 그 정도 속도도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카렌은 그런 것들보다 주위의 인물들을 하나하나 둘러본다.
"다친 사람은? 미호? 왜 꼬리가..."
"미호가 여우구슬로 주인의 심장을 만들었다."
여신이 자신의 심장이 바뀌었다는 게 이런 의미였나.
"덕분에 삼색이 더 잘해줘서 좋아요."
"고맙다."
"아니에요. 아버님 덕분에 삼색과 이어지고 이렇게 언니랑 모두랑 만났잖아요."
미호는 오랜 세월동안 허전함에 많은 일들을 했고, 직업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래도 채워지지 않던 공허함이 요즘에는 말끔하게 사라졌다.
"그럼 모두 무사하구나."
카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모두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
"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엘리의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에 카렌은 방금 느꼈던 허전함의 정체를 마침내 깨달았다.
여기 당연히 있어야 할 인물 중 누군가가 빠져 있었다.
* * *
"여기구나?"
광장 안.
다양한 사람들이 조각된 동상 앞에 카렌과 엘리가 섰다.
[영웅들.]
침략자들에 맞서 지구를 지킨 사람들을 조각해 놓은 동상의 이름이다.
"근데 얼굴들이 미묘하게 다르네?"
"정체를 숨기고 싶으신 분들은 100년 후에 자동으로 진짜 얼굴로 바뀔 거예요."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때쯤 되면 누가 알아볼까 귀찮지도 않겠지.
"아빠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영웅 1순위로 추후에 역사책에 기록될 예정이구요."
"영웅이라..."
벨리알에서는 망나니였던 자신이 미래에 그렇게 불린다는 생각에 참 새삼스럽다.
"그럼..."
카렌이 준비해 온 꽃을 누군가의 앞에 두었다.
[절지아.]
생전의 여유로움과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얼굴을 한 성전사들의 전설이다.
"구구절절한 말은 이 꽃이 대신해주겠지."
노란 민들레의 꽃말은 행복과 감사.
절지아가 처음 보고 감탄했던 자신의 카페 이름이기도 했다.
"흑..."
절지아를 생각하며 울먹이는 엘리를 카렌은 안아 주었고 부녀는 잠시 그렇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추모했다.
"네가 행복하면 절지아도 좋아할 거다."
"맞아요. 할아버지도 그걸 원하실 거예요."
"그리고 이거..."
카렌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한 서류를 꺼내 엘리에게 건넸다.
"절지아의 앞에서 보여주고 싶었단다."
서류를 보는 엘리의 눈이 동그래진다.
"가족관계증명서?"
부모에는 카렌. 자녀의 이름에는 엘리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물론 이미 내 딸이지만 그래도 법적으로..."
"고마워요. 아빠!"
누구에게는 당연한 단 한 장의 서류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걸로 제 리스트는 완성됐어요."
"리스트?"
"저랑 아빠가 처음으로 여행 갈 때 작성했던 종이 기억나세요?"
"아!"
그때 러시아 쪽으로 뿌리를 만나러 갈 때 강이사, 채린 등 선생님들과 함께 엘리가 작성한 카렌과 하고 싶은 리스트.
[아저씨 졸리지 않게 직접 과자를 입에 넣어주기. ★★★★★]
이런 식으로 난이도 별로 점수가 매겨져 있는 항목들이다.
"보여 드릴게요."
부스럭-
"그거 아직도 갖고 다녀?"
"네! 소중한 추억이니까요!"
엘리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수첩에서 그때 적은 리스트를 꺼내더니 마지막 장을 펼쳐 보였다.
[아저씨랑 가족이 되기! ★★★★★★★★★★]
무려 별 10개짜리다.
"나도 고맙구나."
카렌이 엘리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자신의 가족이 되어주어서.
자신의 희망이 되어줘서 말이다.
"그랬구나."
"네?"
순간 뭔가를 깨달은 카렌이 중얼거렸다.
[지구에서 조용히 살고싶다.]
?
자신이 지구에 온 목적은 틀렸다. 스스로 조차 마음 속 싶은 곳에 꽁꽁 숨겨놨던 진심.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게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거야."
160년만에 돌아온 끝에 마침내 자신의 목표에 이르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