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8/140)

  하지 못한 말

  "안 돼! 안 돼!"

  삼색이 비행기 창문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카렌을 내다보며 절규했다.

  불안정하다는 백호와 말이 무색하게 예지는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저 정도 거리라면..."

  백호가 바람으로 변해 카렌의 옆에 나타났다.

  휘이잉!

  그리고는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조금이나마 회복된 힘으로 간신히 카렌을 바람에 실어 부드럽게 땅에 뉘인다.

  "살아 있어!"

  백호가 카렌의 옅은 숨소리를 감지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역시나 대단한 인간이다.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고 무리를 해도 목숨을 부지하다니 말이다.

  "잠깐...뭐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삼색보다도 월등한 청각을 가진 백호의 귀가 쫑긋거린다.

  "역시 심장박동 소리가 이상해."

  백호가 살짝 카렌의 가슴에 자신의 앞발을 올렸다.

  빠지직...

  그런데 들려야 하지 말아야 할 섬뜩한 진동이 앞발을 타고 백호에게 전해진다. 차라리 대보지 말 걸 그랬다.

  "아..."

  백호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카렌의 심장이 조각조각 부스러지고 있었다.

  "주인!"

  순간 들려오는 목소리에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백호를 사로잡는다.

  제일 지금 만나지 않고 싶은 삼색이 미호와 함께 달려오고 있었다.

  "왜 그러냐?"

  자신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백호의 시선을 마주하자 삼색의 마음이 덜컥 가라앉는다.

  "아빠?"

  그 뒤로 채린이 엘리를 업고 도착하고 모두 누워 있는 카렌을 살핀다.

  "치료할 수 있지? 아직 주인은 살아 있다."

  삼색은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숨만 붙어있으면 말끔하게 살릴 수 있는 신성력을 가진 성녀가 있지 않나.

  화아악!

  "그렇지! 그거다!"

  삼색의 기대대로 엘리 특유의 푸른 신성력이 특유의 따뜻한 기운과 함께 카렌을 감싸 안는다.

  이미 슬라이프와의 일전에서 지친 엘리지만 자신의 힘을 한계까지 짜내면서 온 몸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빠, 이렇게까지 했어요?"

  하지만 자신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한 카렌의 육체를 보며 엘리가 입술을 질근 씹었다.

  몸에서 멀쩡한 곳을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다.

  뼈는 대부분 아스러져 있고, 입술은 의식을 잃지 않으려 얼마나 깨물었는지 살점이 움푹 떨어져 나갔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치료가 안 돼. 왜?"

  처음 보는 증상이다.

  심장이 점점 부스러지는 것도 그렇고, 뭔가 흉폭한 기운들이 몸 안에서 신성력과 충돌하고 있었다.

  "그놈의 기운이야."

  맨 처음 카렌을 진단한 백호가 말했다.

  혼돈의 마지막 기운들.

  카렌의 몸에 스며든 놈의 집념이 주인의 원수를 갚으려는 듯 카렌의 몸 안에 똬리를 틀고는 신성력과 대치하고 있었다.

  "으으으.."

  주르륵-

  애초에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고, 곧 한계를 넘어선 엘리의 코에서 피가 터져 나온다.

  [안 돼!]

  그때 이어폰에서 날카로운 고음이 들려온다.

  "아샤?"

  백호가 세 군주를 순간 이동시키고 지친 아샤를 데려다준 곳은 지하기지의 회복실.

  집중 치료를 받고 간신히 의식을 차린 아샤가 상황을 보다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지른다.

  [말려요!]

  모두가 깜짝 놀라 몸을 부르르 떤다.

  하지만 이어지는 아샤의 말에 왜 저렇게 아샤가 말하는 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엘리 말리라고요! 저렇게 하다가 죽어요!]

  하지만 그 다급한 말을 듣고도 모두는 차마 엘리를 카렌에게서 떼어내지 못했다.

  "아빠, 아빠..."

  계속 서럽게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아빠를 살리려는 딸의 모습은 너무나도 구슬펐고, 차마 손 델 수 없는 경건함마저 느껴졌으니까.

  [자기 딸이 죽으면 카렌은 어떻겠어요? 그리고 어차피...]

  "...알았네."

  백호가 아샤가 차마 마치지 못한 뒷말을 짐작하고는 엘리를 카렌에게서 부드럽게 떼어내려 했다.

  "안 돼요!"

  백호를 뿌리치고 와락 카렌을 껴안은 엘리는 계속 신성력을 주입하면서 생각했다.

  왜 신성력이 효과가 없을까.

  ?

  '내 힘이 부족해서 그래.'

  "여신님..."

  간절하게 빌어보지만 솔라리 여신님도 이미 행성을 막느라 대부분의 힘을 소진해서 응답이 없다.

  '신성력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그러면 저 힘들도 몰아내고, 아빠를 살릴 수 있어. 제발...'

  너무나도 간절한 엘리의 기도.

  우우웅...

  그때 뭔가 공명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순식간에 엘리의 기도대로 하얀빛이 환하게 몸을 휘감는다.

  ?

  "어...? 팔찌?"

  카렌이 엘리에게 준 팔찌다.

  항상 어디를 가든 차고 다니던 엘리의 소중한 팔찌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먼.]

  "오즈로 할아버지?"

  예전에 벨리알로 떠난 오즈로의 씁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말한 마지막 선물일세. 이 팔찌는 벨리알에서도 하나뿐인 최고 신물이야.]

  카렌이 가진 물건 중 가장 귀한 물건이다. 듣기로는 강력한 힘을 가진 신들이 힘을 모아 이 팔찌를 만들었다 했으니까.

  [원래는 착용자에게만 발동하지만, 내가 특별히 손을 봐서 카렌이 위급할 때 작동하게 바꿨다네. 부디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엘리가 순식간에 차오르는 신성력을 느끼며 지금쯤 벨리알에 있을 오즈로에게 깊이 감사를 표했다.

  ?

  "이거라면!"

  그리고는 곧바로 카렌의 몸에 곧바로 손을 얹었다.

  화아아아아악!

  카렌의 몸에 신성력이 들어찼고 마침내 독한 혼돈의 기운을 서서히 몰아내기 시작했다.

  우드득...

  부러진 뼈는 붙어 제자리로 돌아갔으며 피부에는 새살이 돋는다.

  꿈틀!

  마침내 혼돈의 원념들은 신성력에 완벽하게 정화되었으며 카렌은 완벽하게 치유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심장, 심장이 안 돌아와요!"

  모든 신성력을 물처럼 들이부었지만 심장이 재생되지 않는다. 죽기 직전의 사람마저 살리는 신성력이건만 대체 왜 이럴까.

  [...심장은 안 돼요.]

  그때 아샤가 침울한 목소리로 아까 채 끝마치지 못한 말을 다시 잇기 시작했다.

  [그 증상은 무엇으로도 치료할 수 없어요. 마법사가 마나 고갈 후에 무리하게 마나를 쓰면 그렇게 돼요.]

  오즈로처럼 고위 마법사들이 카렌처럼 불사도 아니건만 긴 수명을 자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심장에서 마나를 뽑아 쓰니 자연스럽게 튼튼해지며 덜 늙으니까.

  [너무 무리했어요]

  하지만 그 말은 마법사들의 심장은 수명과 직결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

  아무리 전설의 비약인 엘릭서라해도, 기적 그 자체인 신성력이라해도, 수명을 늘려줄 수는 있지만, 영원히 살게 해줄 수는 없다.

  "아...아..."

  엘리의 입에서 이제는 짐승과도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며 맨바닥에 허물어진다.

  "그래서 이렇게 편안한 표정이구나."

  채린은 자신의 무릎 위에 카렌의 머리를 올리고는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 남자는 오히려 기뻐했겠지.

  자신의 사람들을 지켰다고 만족했겠지.

  하지만...

  "끝나면 대답을 들려준다고 나랑 약속했잖아."

  제대로 사랑해보지도 못했다.

  끝나고 행복하게 살 줄 알았다. 마침내 연인이 될 줄 알았다.

  "너랑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

  놀이동산에 한 번 더 가서 머리띠를 쓴 귀여운 카렌의 모습을 또 보고, 영화관에 가서 커플석에도 앉아 보고..

  ?

  이런 애매한 사이가 아니라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당당하게 자신의 남자라 얘기하고 싶었다.

  뚝-

  채린의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들이 카렌의 이마에 떨어진다.

  금방이라도 눈을 떠 카렌답게 말없이 자신의 눈물을 닦아 줄 것 같은데.

  "미안해. 고마워..."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이 두 마디밖에 없었다.

  웅-

  "삼색!"

  옅은 빛이 카렌에게 흘러 들어간다.

  삼색은 자신의 발을 카렌의 몸에 대고는 멍하니 있었다.

  그 많은 신성력도 치료 못 한 카렌을 삼색이 살려낼 리가 없었지만 이미 삼색은 넋이 반쯤 나가 자신의 힘을 계속 짜낸다.

  "안 돼!"

  그 위태한 광경에 미호가 화들짝 놀라 삼색에게 달려든다.

  "내 잘못이다."

  삼색의 중얼거림과 풀려버린 눈은 순간 미호에게 과거의 악몽을 떠오르게 했다.

  '이 눈동자...그때와 똑같아, 아니 더 심해.'

  숙종이 죽었을 때, 같이 따라 죽으려고 했던 삼색이다.

  그런데 자신의 예지로 카렌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짓누르는 지금은 어떨까.

  [...카렌님이 남기신 말씀이 있습니다. 음성을 틀겠습니다.]

  눈물을 쏟았는지 반쯤 쉬어버린 강이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어차피 나의 몸은, 심장은 수명을 다했다. 와줘서 고맙다.]

  하지만 이미 삼색의 마음은 카렌의 심장처럼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안 돼...'

  미호는 절망했다.

  아버님을 잃고, 이제는 몇백 년 만에 간신히 만난 자신의 소중한 님을 잃기 직전이다.

  "제발..."

  옛날에는 삼색의 기억을 지워서라도 간신히 살렸지만 지금 충격은 그때랑 비교도 안 된다.

  아버님은 아마 죄책감에 빠질 일행을 위해, 삼색을 위해 저 말을 남겼지만 삼색의 절망은 그 이상으로 깊었다.

  그렇다면 남은 결말은 죽음밖에 없다.

  "그렇겐 안 돼."

  어떻게 만났는데,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야 행복해 지나 싶었는데 이럴 수는 없다.

  화악!

  미호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피어오른다.

  구미호 본연의 투시능력으로 카렌의 몸을 본다.

  카렌의 심장은 점점 흩어지며 이제는 손톱만한 크기만 남아 가련하게 생을 유지하고 있었다.

  '살려야 돼. 제발...'

  자신에게 엘리나 삼색처럼 치료능력은 없지만.

  -또 하나의 기적을 더하고 싶어서다. 지금 말하면 오히려 방해될 거다.

  여기로 출발하기 전, 백호가 방해가 될 수 있다며 아꼈던 말이다.

  하지만 눈치가 빠르고 똑똑했던 미호는 백호가 했던 말이 자신을 향했음을 알고 있었다.

  신수 중 가장 따뜻한 남쪽이자 여름을 관장하는 새.

  가장 많은 생명이 태어나는 계절을 담당하는 주작은 그에 걸맞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소생(蘇生)

  '제발 한번만! 다시 잃을 수는 없어.'

  미호는 너무나도 원(?願)했다.

  삼색을 기다린 수백년 동안 응어리진 한(恨)이 그에 더해 처절하게 소리를 지른다.

  원(?願)?과 한(恨)?이 하나로 합쳐져 강력한 소원이 되었고.

  화르르르륵!

  ?

  이내 그 소원은 기적이 되어 ?엄청난 불길로 미호의 몸에 나타났다.

  촤르륵!

  미호의 아홉 꼬리가 좌우로 붉게 달아오르며 마치 불새의 날개처럼 펴진다.

  '진짜 될 줄이야.'

  백호가 굳이 모두를 데려온 이유가 마침내 빛을 발했다.

  모든 문화권에서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는 전설이 있다.

  재에서 살아나는 불사조, 영원불멸하게 살아가는 봉황.

  이처럼 엄청난 명성을 자랑하는 권능이지만.

  '나도 처음 보는군.'

  문제는 백호도 들어 보기만 봤지 모른다는 거다.

  자연으로 돌아간 자신의 친우조차 생전에 저 능력을 쓴 적이 없으니까.

  누구에게 쓸 일도 없었고, 혹시나 부작용이 생길까봐 시도도 하지 않았고, 죽을 때는 격변하는 지각에 빨려 들어가 권능을 써 볼 기회조차 없었다.

  '안 돼...부족해.'

  권능을 각성했어도 미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삼색의 예지가 불안정했듯, 자신의 소생 또한 아직 미숙하다. 그렇다면-

  둥실

  미호의 입에서 여우 구슬이 튀어나온다.

  "미호?"

  "괜찮아."

  평생을 소중히 간직해 온 이 구슬이 사라지면 자신은 다시 꼬리 한 개 달린 일미호로 돌아가겠지.??

  "네가 평생 옆에서 지켜줄 거잖아."

  이까짓 힘 따위 전혀 아깝지 않다.

  앞으로 삼색과 같이 지낼 행복할 시간은 자신 혼자 지내 온 외로운 시간에 비하면 한없이 소중하고 가치있을테니까.

  스르륵

  소생의 권능을 한껏 머금어 마치 심장과도 같이 붉은색으로 물든 여우 구슬이 카렌의 가슴으로 스며든다.

  * * *

  "여긴..."

  하얀빛이 가득한 세상에서 카렌이 눈을 비빈다.

  몸을 내려다보자 끔찍했던 통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자신은 깔끔한 흰색 옷을 입고 있었다.

  ?

  "카렌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카렌이 고개를 홱 든다.

  꿈에도 그리웠던 목소리.

  익숙한 얼굴들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벨리알에서 자신의 친구였던 재상, 잃어버렸던 아이, 그리고 자신의 동료이자 기사였던 자들.

  "어떻게..."

  순간 카렌이 주위를 홱 둘러본다.

  혹시나 무슨 정신공격이나 현혹에 당한 게 아닐까?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 기운은 너무 편안하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것이...

  신과 대화할 때 느꼈던 그 아늑한 기분이다.

  ?

  "카렌!"

  "엘리?"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금발의 작은 어린아이를 보면서 카렌이 반사적으로 껴안으려 팔을 뻗었다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냐, 너무 어려.'

  이제는 채린만큼이나 훌쩍 커버린 자신의 딸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리의 키는 처음 봤을 때처럼 너무나도 작았다.

  "여신님이군요. 저는 죽은 겁니까?"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어."

  여신이 털털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다. 만약 인간이 듣는다면 신이 뭐 그러냐고 당장 까무러치지 않을까.

  "너에게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압니다. 제가 죽을 걸 보셨겠지요."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관장하는 '지구의 인간'의 생과 사 정도는 알고 있는 여신이다.

  '이유가 뭘까.'

  카렌의 경우에는 벨리알에 오래 살다 와서 그럴까. 아니다. 이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안심해. 좋은 의미로 내 예상이 빗나간 거야. 유일하게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너희가 썼거든."

  "그게 뭡니까?"

  "희생."

  신조차 예측할 수 없는 남을 위하는 숭고한 마음.

  ?

  "그게 운명을 비틀었어. 그래서...

  "

  파앗!

  여신이 손짓하자 양방향에 두 개의 포탈이 열렸다.

  "너에게 선택지를 줄게. 지구를 구했고, 옛날에 내 요청을 들어준 보상이기도 해."

  언젠가 주기로 했던 솔라리 교단의 정상화에 대한 보답을 여신이 꺼냈다.

  "저기 벨리알의 사람들, 보이지?"

  "진짭니까?"

  "지금은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지. 하지만 정말로 만날 수 있다면 어떡할래?"

  카렌의 눈이 커진다.

  전염병으로 갑작스럽게 잃었던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죽은 인간들을 대부분 환생시키지만 벨리알 쪽 신은 좀 조금 다른가 봐. 무슨 공간을 만들어서 자신의 마음에 든 사람들의 영혼을 모은대."

  "갈 수 있는 겁니까?"

  여신은 침략자에게 모든 힘을 쏟지 않았나?

  "물론 당장은 안 돼. 내가 네 영혼을 보관했다가 힘을 회복하면 저쪽으로 보내는 거니까. 이미 벨리알의 신들과 얘기는 끝냈어."

  너무나도 달콤한 제안이다.

  "가면 네가 그렇게도 원하던 휴식을 원 없이 할 수 있어. 고통도 없고, 아픔도 없고, 심심함도 없이 아주 즐거울 거야."

  "마치 천국 같군요."

  "맞아! 쟤들은 그렇게 부르더라."

  정말 이름과 똑 닮아 있는 낙원이다.

  "그럼 다른 선택지는 뭡니까?"

  "다시 지구에서 눈을 뜨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균형은 어떡합니까? 제가 살아나는 건 예측 못 하셨다면서요."

  "...역시 알았구나?"

  카렌의 눈을 여신이 죄책감에 살짝 피한다.

  오즈로와의 싸움을 말릴 때 세계수와 함께 균형을 맞춘다고 약속했던 여신이었다.

  "당분간 힘도 없으시고요."

  그때는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운명대로라면 그 전에 카렌이 죽었을테니까.

  "내가 정말 미안해.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 네 심장이 바뀌었거든."

  "...?"

  순간 놀란 카렌이 자신의 가슴 쪽에 손을 올렸다.

  "내가 저번에 얘기했듯 균형이 무너진건 네가 반쯤 벨리알 인간이 되어서 그랬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심장부터 바뀌어서 완벽하게 지구인이 됐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다. 하지만 더 이상 균형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겠지.

  "그렇군요."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 순간 카렌은 자신의 몸에서 뭔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다 끝났군요."

  여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 균형 때문에 벨리알에서 지구로 도망치듯 건너왔던 ?자신에게 전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떡할래?"

  신의 말에 카렌이 저쪽 너머 있는 자신들의 소중했던 벨리알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수없이 꿈에서조차 눈물을 흘렸던 아픈 추억과 그리움이 동시에 몰려온다. 그럼에도...

  "지구로 가겠습니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잘 생각해. 기회는 한 번밖에 없어."

  "변함없습니다."

  "왜?"

  "저들도 그걸 원할테고."

  -왕이여. 저희는 괜찮습니다.

  -살아남으세요.

  자신은 저들을 너무나도 잘 안다. 분명 이렇게 말했었고, 또 만나도 분명 똑같이 말하겠지.

  ?

  "저도 그걸 원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감싸주고.

  자신의 현재를 만들어준 사람들.

  자신은 미래를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좋아! 그럼 내 손을 잡아."

  여신이 환한 표정으로 펄쩍 뛰며 카렌에게 다가와 작은 손을 내밀었다.

  "여전하시군요."

  그 발랄함에 카렌이 슬쩍 웃었다.

  "너는 많이 변했어."

  "제가요?"

  "너 처음 지구로 왔을 때는 엄청 지쳐 보였거든. 역시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건 같은 사람밖에 없는 것 같아. 너희를 보고 나도 많이 배웠어."

  "철드셨군요."

  "그거 신에게 엄~청 무례한 말이거든! 요즘 엘리도 은근히 그런 식으로 얘기하더라? 하지만 너희니까 봐줄게."

  카렌은 여신의 귀여운 투정에 무심코 평소에 엘리에게 하던 습관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간신히 참았다.

  "여기로 들어가면 돼."

  어느새 얘기하다 보니 포탈 앞에 도착했다.

  "나중에 또 만나죠."

  "그래! 그리고 너에게 해줄 말이 있어. 원래 신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안 되지만, 너니까 괜찮을 거야."

  "뭡니까?"

  여신이 카렌의 손을 놓으며 해맑게 카렌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너희가 드라마 볼 때 나도 같이 봤거든? 그때 너와 삼색이 한 말이 떠올랐어."

  "제가 한 말이요?"

  자신과 삼색이 나눈 대화가 한 둘인가.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어?"

  그런데 여신은 씩 웃으며 대답을 기다리는 카렌의 가슴을 부드럽게 포탈 안으로 밀었고, 순간 느껴지는 부유감에 카렌이 숨을 삼켰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그것까지 드라마를 따라하십니까."

  마무리까지 참 인간 그 자체인 여신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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