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스스스스스--
삼색이 잠깐 고민에 빠진 사이에도 슬라이프는 그야말로 전속력으로 탑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끄으...!"
그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은 비명도 채 끝내지 못하고 삼켜졌고.
"젠장, 진짜 빠르네!"
뒤늦은 삼색과 미호의 공격에도 잠시 움찔거릴 뿐 전혀 멈추지 못했다.
이제 인공태양이 설치된 탑까지 몇km도 남지 않았다.
슬라이프의 유일한 위협이자 삼색의 입장에서 보면 유일한 희망.
[좌표 재지정.]
물론 인공태양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모니터로 보고 있던 제어실에서는 쉬지 않고 렌즈를 이리저리 틀었지만...
[두 번 당하진 않는다.]
삼색과 미호가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렸듯 이미 드러난 패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렌즈는 거대한 몸집에 걸맞게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번쩍!
?
놈은 순식간에 건물 사이로 몸을 숨기고 인공태양의 빛은 애꿎은 바닥만 비춘다.
"지금 해!"
[하지만, 놈이 눈치챈다면...]
"못 피하게 하면 돼."
놈이 알면서도 낚일 수밖에 없는 방법을 쓴다. 지금껏 가장 얄밉게 자신의 앞에서 쫄랑댄 놈을 미끼로 던진다면 어떨까.
삼색이 재빨리 놈의 앞을 가로막더니 꼬리를 살랑이며 말한다.
"주인한테는 꼼짝 못 하더니 우리한테는 신났다?"
멈칫
그렇게 공격을 쏟아부어도 서지 않던 놈의 신형이 순간 우뚝 선다. 하지만 이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깟 어설픈 도발에 넘어갈 만한 내가...]
"내가 싸워봤는데, 핌불이 훨씬 나은 것 같아. 걔는 주인이랑도 잘 싸웠는데 너는 우리도 못 잡냐?"
자존심이 높아 서로를 끔찍이 싫어한다는 점을 교묘하게 이용해 삼색의 혀가 쉬지 않고 날름거린다.
"역시 물이 최고지. 어둠은 기껏해야 낮이 오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데 물은 무려 지구의 70%에 해당한다고!"
"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엘리가 공부할 때 옆에서 자다가 주워들었다."
"우리 삼색이 똑똑하기도 하네."
이제는 미호까지 합세해 쌍으로 슬라이프의 자존심을 긁어댄다.
"내 생각에 세 군주 중에 제일 떨어지는 게 어둠이야. 네가 봤어야 해. 저놈 저번에 지구로 오는 게이트에 반쯤 끼어서 못 나왔다니까?"
"진짜? 그건 좀 추하다."
"그것뿐만 아니야. 나중에는 어떻게든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나는 살쪄서 못 나오는 줄 알았다니까."
꿀렁
`...저건 화낼만하지.`
주변에서 지켜보던 뿌리의 대원들이 순간 흠칫할 정도의 조롱이다.
게다가 삼색의 눈썹 한쪽은 치켜 올라갔으며, 표정은 익살스럽게 슬라이프를 비웃는다.
"크아아아아!"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발끈할 만한 모욕에 슬라이프가 마침내 방향을 틀고 단번에 삼색에게 치닫는다.
"우리가 놈에게 먹히면 가동해."
삼색이 이리저리 몸을 틀면서 일부러 종이 한 장 차이로 놈의 공격을 피해댄다.
[위험합니다!]
"빨리해야 돼. 주인 쪽 상황은 어때?"
[좋지는 않습니다.]
"그럼 더 빨리 해야지."
단번에 지휘실을 침묵시킨 삼색이 이번에는 성지 곳곳에서 빛나는 마법진들을 흘겨보며 말했다.
"그건 어떻게 되고 있냐."
[암흑가 쪽은 에너지 전송 완료했습니다. 이쪽도 순조롭게 흘러가고요.]
"그럼 됐다."
저것만 잘 작동하면 된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단 `한 번`을 위한 준비니까.
"그럼 갈까?"
"언제든지."
삼색은 미호와 함께 길 중앙에 멈추어 섰다.
어둠은 순식간에 밀려오고, 한치도 들여다보이지 않는 그 밤 속으로 둘은 오히려 앞으로 뚜벅뚜벅 걷는다.
"밖에 있어도 된다."
걸어가는 와중에 삼색이 미호에게 말했다.
하지만 미호는 오히려 자신의 남자친구를 서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같이 갈 거야. 어차피 놈은 두 번 당해주지 않아."
한 번 자신이 외부에서 도와줘서 어둠에서 탈출했으니 이제는 통하지 않을 거다.
"위험할 거다."
"널 몇백 년간 기다린 것보다 더 위험할까?"
"...그건 평생 얘기할 거냐?"
"당연하지."
후우욱-
마침내 슬라이프가 담소를 나누는 커플을 삼키고 둘은 이때다 싶어 자신들의 빛을 내뿜는다.
파아앗!
화르르륵!
최대한 신수의 힘을 발휘해 주변을 밝혀보지만...
[어림없다.]
?
자신의 영역 한복판에 떨어진 이상 금방이라도 꺼질 반딧불이의 마지막 발악이다.
이대로 가면 몇 분도 되지 않아 삼켜져 흔적도 남지 않을 터.
[놈의 움직임이 둔해졌습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부에 힘을 집중하면 그에 따른 반작용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물론 그래도 느릿느릿한 인공태양을 피할 정도는 될 거다. 하지만 놈이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면 어떨까.
[방출.]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삼색은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태양은 두 번 뜬다."
놈들의 정보로는 절대 알 수 없던 사실.
카렌의 인공 드래곤하트로 만든 태양은 두 개다.
하나는 지금 성지에 떠있는 태양.
또 하나는 비어드가 지하 기지에 만든 태양.
원래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인류의 방주 역할을 맡았다. 침략자들의 눈에 띄게 된다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지. 하지만...
"알 게 뭐야."
주인의 말이 옳다. 비참하게 지하에서 삶을 구걸하는 것보다 이기고 당당하게 사는 게 낫지.
째애애앵!
붉은 태양이 하늘 위로 높이 떠 오르며 안 그래도 둔해진 슬라이프의 움직임을 묶어버린다.
[좌표 재설정. 목표 고정.]
"어둠을 멸하소서."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신성력을 듬뿍 담은 성지의 태양이 이글거리며 슬라이프를 향해 다신 한 번 직격한다.
[크아아아악!]
놈이 괴성을 지르며 어둠이 다급하게 꿈틀거린다.
"지금이야!"
삼색이 소리쳤다.
아까도 놈의 몸이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콘크리트 벽이 튀어나왔지.
같은 방식에 두 번 당하지 않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번쩍!
내부에서는 청룡의 번개와, 주작의 화염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외부에서는 빨간빛과 하늘빛의 태양이 일제히 슬라이프에게 내리쬔다.
[크아아아악!]
"어둠은 사라지리라."
성녀가 끔찍한 괴성과 함께 흐려지는 어둠을 보며 선언했다.
* * *
"됐군."
카렌은 움츠러든 혼돈의 블랙홀을 보며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따사로이 연합의 전 시민들을 감싸 안았던 태양은 이제 카렌의 적을 억제하고 있었다.
화르르륵...
이때를 놓치지 않고 카렌의 빛이 어둠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단번에 반 이상의 블랙홀이 순식간에 증발했고 곧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출렁!
거대한 해일이 카렌에게 치닫는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순간 카렌의 고개가 홱 돌아가더니 주변의 은빛 물결이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해 쏘아져 나간다.
`마지막이군.`
이제 실드는 자신을 보호하는 최소한만 남아있을 뿐이다.
용암, 블랙홀, 해일.
한 생물이 이 세 가지와 맞서 싸우는 것도 이미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니 여유 따위는 없었다.
쩌저저저적!
물론 얼음덩어리는 그에 따른 값은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쑤욱 하고 해일 속으로 들어가더니 그 주변을 순식간에 얼려버렸으니까.
"아! 이게 귀찮음이구나!"
그런데 놈의 입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온다.
"너의 눈물을 보는 걸 방해받아서 너무 귀찮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는데 그 과정이 귀찮아. 이렇게 쓰는 거 맞지?"
카렌은 놈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 잠깐 해일에 한눈판 사이에 놈의 어둠은 반쯤 그 기세를 회복했다.
아무래도 거리도 멀고 간접적인 힘이니 이 정도가 한계다. 그래도 반이나 억제해 주는 게 어딘가.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지끈
카렌이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보이지 않게 안쪽 입술을 씹었다.
자신이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어디까지나 인간.
이렇게 속성이 다른 거대한 힘들을 한꺼번에 다루기는 힘들다.
"봐. 어차피..."
"얼음과 마뱀이.
"
그래서 잠깐 조력자들을 부르기로 했다.
"부탁한다."
아무리 세계수에게 받은 반지가 있어도 자신은 정령사로서 재능이 없다.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은 짧으니 지금 꺼내는 게 적절하다.
얼음이가 거대한 빙산에 쏙 들어가 사납게 해일을 막아섰으며, 마뱀이는 바다에 잠수해 용암과 부딪힌다.
"얼음, 좀 더 왼쪽으로."
"어? 들켰네?"
정령들은 생긴 것 만큼 순순하니 놈의 깊은 계략까지 파악하는 건 무리다.
대략적인 지시는 내려줘야 한다.?
번쩍!
주 공격은 물론 카렌이 만들어낸 태양이다.
싸움의 기본은 상대방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
카렌은 놈의 블랙홀이 약해진 틈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두통 속에서도 카렌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마침내 바늘만한 구멍을 찾아냈다.
꿀럭!
카렌의 심장이 폭발적으로 뛰면서 태양의 빛을 그야말로 폭주시킨다.
"또 물결에 반사 시키려고??"
틀렸다. 이번에는 물결이 아니라...
번쩍!
방금 왼쪽으로 살짝 이동시킨 얼음이다. 괜히 대놓고 놈의 계략을 떠든 게 아니다.
"크윽..."
빛이 얼굴에 닿자 놈의 몸체가 살짝 떨리면서 얼굴이 찡그려진다.
처음으로 명중한 유효타. 하지만 카렌의 상태는 더 심각했다.
주르륵-
카렌이 한줄기 입가에 흐르는 피를 재빨리 소매로 훔친다.
여전히 두통은 극심하고 이제는 심장에서마저 통증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이 통증의 의미를 카렌은 잘 알고 있었다. 벨리알에 떨어진 초창기에나 겪었던 현상.
`마나 고갈.`
최근에는 자신의 마나를 모조리 쓸 일이 없어 아예 생각지도 않던 복병이다.
까드드득...
뇌와 심장.
인간의 신체 중 가장 중요한 두 곳이 경고를 보내자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신경이 전달하는 고통은 근육을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게 만들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린다.
"와...너 진짜 대단하다."
혼돈은 카렌의 상태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는 아낌없는 감탄을 보낸다. 그리고 세심하게 관찰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품위라는 건가?"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카렌의 표정은 평소와 똑같다. 아니, 오히려 뒤꿈치에 힘을 주고 허리를 뻣뻣이 편다.
그리고 누구보다 오연하게 전장을 주시한다
`이 정도는 해야지.`
지금 자신의 어깨에 올라가 있는 무게를 알고 있기에.
[카렌님. 암흑가, 성지 쪽 마무리됐습니다. 이제 영지만 남았습니다. 다만 예상치 못한 문제로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그때 강이사의 죄송스러운 목소리가 이어폰으로 들려온다.
모니터로 카렌의 생체신호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는 상황실은 침울했다.
두근! 두근!
심장박동은 일반인이라면 당장 터져버렸을 빠르기에다.
으드득
이제는 비틀린 근육에 의해 뼈마저 비명을 질러대고 있으니까.
"내 상태는 말하지 말도록. 부담 주지 마라."
애초에 영지 쪽이 가장 힘들 거라는 건 예상했었다.
핌불의 속성인 물을 상대할 신수가 없었으니까.
현무와 백호. 비슷한 속성이라 하위의 힘이다. 당장 집어 삼켜지겠지.
삼색과 미호. 전기와 불로 물을 상대로 뭘 하겠나.
[카렌님. 잠시 몸을 피하시고...]
"그럴 수 없다."
지금 자신을 보며 여전한 미소를 짓고 있는 놈에게 시간을 주면 지금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 올 거다.
그리고 애초에 자신은 물러나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때 벨리알에서 한 맹세를 지킬 때니까.
?
-손 잡아도 돼요?
?소중했던 아이를 잃었을 때.
-모셔서 영광이었습니다.
기사들을 잃었을 때.
-왕이시여.
백성들을 잃었을 때 한 맹세.
'이번에는 지킨다.'
??여기서 자신이 만난 소중한 인연들을.
"내가 버티겠다. 천천히 하라고 전하도록."
카렌은 부르르 떨리는 두 팔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리고 앞으로 내밀어 ?자신을 지키던 최후의 실드마저도 앞으로 내보냈다.
"음..."
그 모습을 보고 혼돈은 눈앞의 카렌이라는 인간의 본질을 깨달았다.
이 인간은 결코 자신의 고통 따위로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