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3/140)

  뭉쳤을 때 가장 아름답다

  [여긴...]

  갑자기 빛에 휩싸여 사라졌던 불의 군주 하티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 파악에 나섰다.

  자신의 감성으로 봐도 형편없는 곳.

  주변으로는 더러운 쓰레기들, 집들은 얼기설기 지어져 산들바람에도 삐걱거리고 있었다.

  `저 빛나는 것 들은 뭐지?`

  곳곳에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는 마법진들이 보인다. 일단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데...

  쏴아아아아아!

  그때 조용한 물줄기가 하티의 생각을 방해하며 빛살처럼 쏘아진다.

  [어딜!]

  하지만 이미 한껏 경계하고 있던 하티다.

  눈동자가 팽그르르 돌면서 향한 곳에 순식간에 불의 장벽이 거대하게 펼쳐지고 단번에 기습을 막아낸다.

  [이런 어쭙잖은 수작 말고 모습을 드러내라!]

  감히 자신에게 이런 무례한 공격이라니. 분개한 하티가 소리친다.

  "호...역시 나는 잘 안되는군."

  어기적, 어기적. 건물들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던 거대한 거북 한 마리가 머쓱한 표정으로 나타난다.

  "체면도 버리고 그 인간의 방식대로 기습해봤건만..."

  사방신의 신수중 현무다.

  요즘 삼색과 카렌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조금이라도 쉬운 길로 가보려고 해봤다.

  `금묘, 아니 삼색이 녀석이 ?뭐랬지...선빵필승?`

  그런데 급했던 건 자신만이 아니었나 보다. 하티의 몸이 화르륵 타오른다.

  [시간 없다. 죽어라.]

  대군주가 이놈들을 처리하고 곧바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라 했으니 명령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

  단번에 자기 몸을 거대한 푸른 용암으로 변화시킨 하티가 망설임 없이 얄미운 거북이를 덮친다.

  "이런..."

  쏴아아아아아!

  현무가 다이아몬드도 뚫어버릴 물줄기를 입으로 쏟아붓지만...

  `넓군.`

  빌딩만한 거대한 몸체는 너무나도 컸다. 게다가 물을 퍼뜨리자니 화력이 분산되어 아무 쓸모가 없다.

  쩌저적...

  비록 자신의 물줄기를 집중시킨 곳은 용암이 식으며 검은 돌로 변해 멈추지만.

  [하! 그깟 알량한 힘 하나 가지고 나를 불러내?]

  하티의 비웃음처럼 단지 일부분을 저지할 뿐이다.

  [고통스럽게 다리부터, 머리까지 천천히 녹여주마.]

  자신을 강제로 이동시킨 것도 괘씸한데, 준비한 게 이런 덜 떨어진 거북이 한 마리?

  이건 자신에 대한 모욕이다.

  `역시 핌불과 슬라이프놈이 멍청했던 거지. 이런 놈들에게 그렇게 당해?`

  지구에서 그렇게 우스운 꼴을 보였으니 자신까지 한 묶음으로 얕보인 게 아닌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놈의 표정이 너무 평온한데?`

  순간 하티의 마음 한 쪽에 경각심이 피어난다. 자신은 그놈들처럼 망신당할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기에.

  `더욱 범위를 늘린다.`

  본체를 펼칠수록 자신의 핵이 혹시나 만약의 공격으로 파괴당할 확률이 줄어든다.

  그렇게 하티가 잠시 멈춘 뒤 재정비할 때.

  휘이이이이잉!

  뜨거운 용암의 열기를 뚫고 바람 한 줄기가 볼을 간질인다.

  "왔군."

  이런 바람을 가진 이는 하나뿐이니.

  눈처럼 하얀 털을 가진 거대한 흰색 호랑이 한 마리가 어느새 현무의 옆에 당도했다.

  "그런데 너무 늦게 왔구먼."

  "때를 노리고 있었다네. 그나저나 나이 먹으니 자네 힘도 예전 같지 않아?"

  하티의 예상대로 백호는 하늘에 떠서 카렌이 알려준 대로 놈의 약점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핵을 찾지 못했고 놈의 면적이 더 커지자 포기하곤 내려왔다.

  "듣던 것과 달리 신중한 놈이군."

  카렌에게 오만함의 결정체들이라 들었는데 말이다. 한 번 호되게 당해서 그런 걸까.

  [둘이 힘을 합쳐봤자...]

  "과연 그럴까. 우리가 사방신 중에서도 가장 친한 이유가 있지."

  백호는 서쪽(西)이자 가을.

  현무는 북쪽(北)이자 겨울.

  방위로나, 계절로나 가장 친밀하며, 오랜 세월 항상 서로 붙어 다녔던 친우.

  쏴아아아아아!

  현무가 힘껏 물줄기를 쏘아내고, 백호가 바람으로 인도해 회전시킨다.

  휘이이이잉!

  둘의 환상적인 연합으로 거대한 물 폭풍이 만들어진다.

  ?

  "단순히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네."

  먼저 폭풍의 거센 바람은 용암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고, 이어지는 물세례는 한껏 기세가 죽은 용암을 굳힌다. 그야말로 완벽한 합동 공격.

  "나이는 그냥 먹은 게 아니지."

  "자네가 예전에 그런 식으로 말했다가 카렌에게 혼쭐이 난 게 기억나는구먼!"

  "이 신수가..."

  "허허허허!"

  연륜이란 이런 것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두 마리의 신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지."

  허허 웃던 두 마리의 신수가 눈을 마주치며 표정을 굳히자 주위가 갑자기 살기로 가득 메워진다.

  "친우들의 복수를 해야지."

  "대격변을 일으킨 우리의 원수여."

  둘의 기세에 반응해 물 폭풍이 더욱더 거세게 요동친다.

  삐걱, 삐걱.

  안 그래도 위태롭게 서 있던 판잣집들이 바람에 하늘로 솟구치고, 물들은 주변을 강타해 단번에 자신의 족적을 남긴다.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지."

  오즈로가 카렌을 가르칠 때 여신에게 들어서 전해 준 사실.

  침략자들은 이렇게 지구로 파편을 타고 번거롭게 들어 올 계획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때 지구로 향하는 통로를 뚫으려다 대격변이 일어났고.

  "전대 청룡과 백호여. 그대의 한을 풀겠네."

  자신들의 오랜 죽마고우가 대격변을 막다 자연으로 돌아갔었다. 아직도 그때의 상처가 흉터로 변해 현무와 백호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한때는 괜히 인간을 탓했지만...`

  고마움을 모르는 종족이라 여겨 무시했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피해자일 뿐.

  진정한 적은 눈앞의 이놈이다.

  [이까짓!]

  하지만 하티도 둘의 기세에 지지 않고 자신의 몸을 더더욱 불사르더니 사방으로 폭발을 일으킨다.

  그리고 서서히 전진하기 시작하자 백호와 현무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온다.

  "크윽..."

  노회한 신수 둘이 힘을 합쳐도 힘든 걸까. 푸른 용암 앞에 물 폭풍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한다.

  과연 불의 군주라는 힘에 어울리는 능력이다. 백호와 현무는 자연을 이용하지만 저건 자연 그 자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멍청한 것들. 이런 곳으로 불러와?]

  하티가 생각할 때 어차피 시간문제다. 하지만 대군주의 명을 받들어야 하는 자신은 그 시간마저 아까웠다.

  `저거다.`

  하티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주위에 가득한 나무집들. 게다가 이 도시 전체가 엄청난 밀집 구역이다.

  하티의 눈에는 하나의 장작더미일 뿐.

  화륵!

  백호와 현무와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에도 거대한 불줄기 하나가 제 손을 집들로 뻗고.

  순식간에 나무 벽으로 불이 붙으며 이내 지붕, 그리고 옆집까지 번져 나간다. 그리고 이제는 재질에 상관없이 한 구역, 두 구역,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불길들.

  [이걸로 끝이다.]

  이 도시가 자신의 새로운 힘이 되어 줄 거다.

  현무와 백호가 안간힘을 쓰면서도 하티를 향해 말한다.

  "말했던 것처럼 나도 인간은 별로 안 좋아했지만...그래도 배울만한 점은 있다고 생각했네."

  하티는 코웃음 쳤다.

  다가오는 죽음에 미쳐버렸는지 유언이라도 늘어놓는 걸까.

  그래봤자 어차피 죽은 목숨이거늘.

  퍽!

  [음?]

  그때 뭔가 터지는 소리가 굉장히 거슬리게 하티를 자극한다.

  퍽! 퍽! 퍽!

  이어서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폭발음에 하티는 순간 당황해 몸을 뒤로 돌린다. 어차피 백호와 현무는 묶어 놨으니 잠시는 괜찮을 터.

  [음?]

  순식간에 사방으로 뻗어나간 불의 통제력이 약해지며 허탈감이 몰려온다. 그 원인은...

  [눈?]

  인간의 계절에 대해서는 자신도 알고 있었다. 겨울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얼음덩어리 아닌가.

  [아냐, 저건...]

  뭔가 달랐다.

  눈보다 훨씬 보드랍고 고운 입자. 무엇보다 저 가루들이 닿자마자 불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단순한 물로는 절대 저렇게 만들 수 없다.

  "인간들은 소화기라고 부르더군."

  일정 이상 열을 받으면 사방으로 화재진압용 분말들을 퍼뜨리는 대형 화재 감지식 소화기.?

  물론 가정용은 아니다. 이미 있던 소방용품에 민재 휘하의 연금술사들이 특별하게 개발한 특제품이니까.

  [빨리 해! 미호님과 카렌님의 명령이다.]

  암흑가의 전 주민들이 교육을 받아 전 구역의 집에 다 함께 설치한 장비들이다.

  삐용 삐용!

  그게 끝이 아니다.

  어디 숨어 있었는지 형광 줄무늬가 곳곳에 새겨져 있는 방염복을 입은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다.

  뒤로는 산소통을, 얼굴에는 마스크를 낀 이들은 소방차에 타서는 특수 용액을 분사하기 시작했다.

  "훈련받은 대로 해!"

  이들은 헌터다. 일반인들은 아무리 방염복을 입었어도 이런 화마와 저놈의 기세 속에 견뎌낼 수 없으니까.

  "젠장...더럽게 뜨겁구만. 어떻게 맨날 이 일을 하는 거야?"

  6개월간 쉬지 않고 자신들을 교육했던 선생님들, 소방관들에게 잠시 존경을 표한 뒤 헌터들은 철저하게 분업해 불을 끈다.

  "그쪽에는 방화선 만들고, 잔불 처리해. 그리고 빨리 트럭 들여와!"

  뒤이어 들어 오는 거대한 스피커를 짐칸에 실은 트럭들.

  [이런...]

  하티가 인간들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불꽃으로 차들을 태워버리려 했지만.

  "우리가 자네를 이길 수 없지만..."

  현무와 백호의 물 폭탄이 정면으로 들이닥쳐 하티의 발을 묶는다.

  제압은 어림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두 마리의 신수다. 잠시간 잡아 두는 정도는 충분했다.

  기이이이잉...쿵

  그 사이에 트럭들이 지지대를 땅에 고정하고 뒤에 실린 거대한 스피커가 하티 쪽으로 향한다.

  "소리 트럭 가동해!"

  [으윽...]

  스피커에서 우웅 거리며 저주파가 퍼져 나오고 하티가 낮은 비명을 지른다.

  "효과가 있어!"

  100hz의 저주파를 쏘아내 산소 유입을 차단해 온도를 낮추는 대형 소리 소화기.

  아직 개발 중이었던 기술을 연합의 전 과학자들의 인력과 돈을 천문학적으로 쏟아 부어 실용화한 장비들이다.

  거기다 앞에 렌즈를 부착해 좁은 지점의 불을 집중적으로 끌 수 있다. 그야말로 하티의 본체를 상대하기에 최적화된 무기.

  "그런데 이미 도시는 반쯤 탔는데?"

  "상관없댔어. 그냥 계속 쏴!"

  지금껏 암흑가에 만들어 놓은 시설이 안타깝긴 했지만, 카렌과 의장, 미호는 합의를 이미 끝냈다.

  암흑가는 오늘로 사라진다.

  [어차피 암흑가라고 하면 평생 따라붙을 꼬리표. 차라리 화려하게 불태운다.]

  그리고 다시 재 속에서 일어날 거다. 안 그래도 암흑가의 지원에 대한 연합의 여론이 그다지 좋지는 않은 상황.

  침략자들을 막아내고 그에 대한 피해복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여론과 실리 둘 다 잡는 계획.

  "자...그럼... "

  도시의 불은 마침내 모두 꺼졌다.

  뒤쪽에서는 소방 장비들의 총구가 모두 하티의 본체로 향하고.

  앞쪽에서는 현무와 백호가 만들어 낸 물 폭풍이 가로막는다.

  신수, 헌터, 과학, 연금술이 조합된 공격 앞에 하티의 몸이 크게 일렁인다.

  "복수의 시간일세. 인간들도 너희들에게 농락당해서 화가 많이 났더군."

  두려움으로 말이다.

  * * *

  [암흑가 쪽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에 깔아 놓은 마법진의 에너지도 잘 전달되고 있습니다.]

  귀의 이어폰에서 들리는 기분 좋은 소리에 카렌은 전방을 주시한다.

  혼돈의 용암과 자신의 바다가 충돌해 쌓인 거대한 검은 대지.

  `작은 성 같군.`

  용암이 굳으며 점점 올라가면서 천연 성벽이 만들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 두 마리의 인간이 충돌한 결과라고는 믿기지 않는 광경.

  "역시 대단해. 그러면 조금 변주를 줘 볼까?"

  놈의 말에 따라 이제는 어둠이 제 몸을 꿈틀거리며 앞으로 나선다.

  "지구의 용어에 대해 아주 잘 아는군."

  "조금 학습했거든. 그런데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어. 신기하게 너희는 슬퍼도, 기뻐도 울더라?"

  아까 놈이 애써 눈물을 흉내 내려 했던 이유도 인간을 이해해보려 한 시도일까. 하긴 겉으로 보기에는 어렵긴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너에 대해 궁금해. 너는 지금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어?"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묻듯 혼돈은 카렌을 보며 순수하게 질문했다.

  "나는..."

  혼돈이 카렌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어떤 대답이 나올까.

  그런데 과연 카렌의 입에서는 혼돈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귀찮음."

  자신의 지구에서의 휴양을 망친 눈앞의 놈에 대해 귀찮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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