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2/140)

  효율이란 무엇일까

  [그런데 꼭 인간의 모습일 필요가 있습니까?]

  군주 중 한 명이 묻자 혼돈이 자기 몸을 내려다보며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러면서 인간에 대해 배운다고. 너희도 해보면 재밌을걸?"

  [하지만 천박한 종족...]

  "그만. 이미 핌불과 슬라이프가 패퇴했지. 저들을 낮추는 건 우리를 낮추는 거나 다름없다."

  단호한 혼돈의 말에 물과 어둠의 거대한 형체가 굴욕감에 부르르 떨린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군주의 말에 둘은 수긍하며 받아들인다. 그 자신감 넘쳤던 놈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다.

  [쯧, 수치로다. 대군주께 심려를 이렇게 끼치다니...]

  유일하게 지구에 강림하지 않았던 불의 군주가 이때다 싶어 둘을 비웃는다.

  [하티...네 놈이라고...]

  그때 바람결에 한 목소리가 실려 온다.

  "마지막 불덩어리는 하티라고 불리는군. 그럼 네 이름은 뭐냐?"

  [너는...]

  한 남자의 등장에 지구에서 한 번 강제로 쫓겨났던 물과 어둠이 출렁이며 맹렬한 분노를 뿜으며 순간 공기가 떨린다.

  ?

  일반인이라면 단번에 무릎을 꿇었을 기세가 자신에게 집중되었지만, 은발의 남자는 너무나도 태평한 표정이다.

  "오랜만이네."

  오히려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면서 타고 있던 백호의 등에서 풀쩍 땅으로 뛰어 내리더니.

  "고마워요."

  뒤이어 내리는 아샤에게 손을 내밀어 내리는 걸 도와준다.

  [이...]

  "네가 저번에 봤던 인간이구나."

  당장이라도 카렌을 공격할 것 같던 핌불과 슬라이프가 혼돈의 한 마디에 단번에 입을 꽁 다문다.

  `과연...저 자존심 강한 놈들이 꼼짝 못 하는군.`

  명백한 상하 관계에 카렌의 눈이 순간 반짝인다.

  이어서 자신의 뒤에 선 아샤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신호를 보내며 앞으로 나선다.

  `준비해.`

  자신은 아샤가 준비한 마법을 펼칠 때까지 시간을 좀 끌어야 하니까.

  "네 이름이 뭐냐니까?"

  "너희가 혼돈이라고 부르던데? 난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그렇게 부르도록 해."

  매끄럽게 이어지는 대화. 말할 때 움직이는 작은 몸짓까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지나가다 보면 그냥 잘생긴 청년으로 보일 정도로 말이다.

  "저건 아직 멀었어?"

  그런데 혼돈이 목을 쭈욱 빼고는 카렌의 등 뒤에 있는 아샤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알았나?"

  "당연하지. 저렇게 엄청난 힘이 모이는데? 공격 쪽은 아닌 것 같아서 내버려 두고 있었어. 무슨 재밌는 걸 하려고? 그 마법이라는 거지?"

  카렌은 이쪽을 향해 눈빛을 반짝이는 놈을 보고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번에 마법에 대한 진의를 알아채는 본능과 식견도 그렇고, 무엇보다...

  `유연하군.`

  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저 뒤에 있는 놈들처럼 생각이 오만하지 않고, 적에 대해 알기 위해 자신들이 열등한 종족으로 여기는 인간으로 몸을 바꾸기까지.

  적으로서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유형이다.

  "카렌, 좌표 설정 끝났어."

  그 사이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아샤의 지팡이가 빛을 발한다. 이 정도 재료가 아니라면 엄청난 마력이 담긴 이 힘은 어떤 도구든 당장 산산조각 냈으리라.

  ?

  "바로 시작해."

  "...정말 괜찮겠어?"

  이제 지팡이를 단 한 번만 휘두르면 계획은 시작된다. 하지만 아샤는 저 놈에게서 아까부터 끔찍한 불길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야.`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20대의 남자. 하지만 마법사의 눈에는 보인다.

  피부에 단번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느껴지는 공포, 절망, 무력함.

  단번에 머리가 하얘지며 굴복하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지만...

  "괜찮아."

  자신의 앞을 든든하게 막아선 사람의 한 마디에 모든 불안감이 씻은 듯 사라진다.

  "...알았어."

  아샤가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음? 이건...]

  군주들이 흐려지는 자기 몸을 보며 당황한다.

  순간이동 마법의 전형적인 현상.

  ?

  물의 군주 핌불은 카렌의 영지로.

  불의 군주 하티는 암흑가로.

  어둠의 군주 슬라이프는 솔라리 교단의 성지로.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순간이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저항하지 마라. 끝내고 바로 여기로 오도록."

  아샤에게 카렌이 있다면 군주들에게는 혼돈이 있었다.

  놈은 맑은 목소리로 당황하는 군주들을 단번에 진정시키더니 곧바로 아샤에게 물었다.

  "이 셋을 어디로 이동시키려고?"

  "어떻게 알았지?"

  "너희가 즐겨 쓰는 마력이란 게 이동하잖아. 너희만 볼 수 있는 줄 알아?"

  혼돈이 마법의 본질을 꿰뚫으며 막힘없이 대답한다.

  스르르륵...

  마침내 셋이 사라지고 모든 마력을 쓴 아샤갸 비틀거린다.

  "헉...헉..."

  대마법사의 전력도 모자라서 모든 엘프 종족의 마나를 끌어모아 시전한 대형마법.

  그만큼 침략자들의 힘과 존재감은 엄청났다.

  "백호, 아샤를 데려다주고 너도 계획대로 해."

  카렌이 아샤를 부축해서 백호의 등에 조심스레 앉힌다.

  "...조심해라."

  백호의 인사를 끝으로 마침내 둘만 남은 혼돈과 카렌.

  둘은 서로 물끄러미 서서 말없이 서로를 관찰한다.?

  "왜 안 막았지?"

  ?

  침묵을 먼저 깬 건 카렌이었다.

  만약 모두가 합세해서 공격했다면 카렌도 순간이동 마법을 성공시키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다.

  왜 그랬을까.

  이 놈도 결국 다른 군주들처럼 오만함을 벗어나지 못한 걸까?

  "그게 너희가 좋아하는 효율이잖아."

  "효율?"

  전혀 예상치 못한 인간적인 단어에 순간 카렌이 입맛을 다신다.

  "방금 그 이동시키는 힘. 엄청난 전력이 들어간 거 아닌가?"

  정확하다.

  아샤를 포함해 모든 엘프는 이제 전투 불능이다. 그것도 모자라 일주일 동안은 기초마법도 못 쓰는 마력 고갈 상태겠지.

  "그리고 방금 그 엘프 여자는 솔직히 좀 성가셨거든. 이렇게 스스로 전투에서 빠지다니 그야말로 효율적이지."

  저 놈의 눈에 그렇게 보일 정도면 아샤는 과연 대마법사라 불릴 만한 존재다.

  "다른 쪽으로의 효율은 생각 안 하나?"

  "다른 쪽?"

  "우리가 너희를 각개 격파하겠다는 효율."

  "...진심이야?"

  놈은 카렌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진심이구나? 넌 정말 재밌어."

  아무도 없는 들판에 허리를 꺾으며 웃는 놈의 목소리는 마치 메아리처럼 기분 나쁘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인간을 흉내 내며 괜스레 눈물도 없는 눈가를 훔친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괴하군.`

  역시나 흉내는 내도 근본적인 것들까지는 부자연스럽다. 애써 감정을 따라하는 로봇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내가 진짜 신경 쓰는 존재는 너밖에 없어. 군주들이 너희가 설치한 함정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분이나 걸릴 것 같아?"

  "글쎄..."

  "만약 너만 없었더라면 인간이고 엘프고 예전에 끝났어. 이렇게 번거롭지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그건 사실이다.

  핌불에 의해 타락자 엘프들은 점점 늘어났겠고.

  슬라이프와 하티에 의해 연합은 분열되고, 점점 잠식당했겠지. 하지만...

  "그 말을 돌려주지. 너만 배우는 게 아니야 우리도 학습한다."

  카렌이 지구에서 놈들의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은 덕분에 놈들은 6개월의 정보가 없다.

  마치 감정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듯 이번에는 카렌이 자연스레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웃음은 뭐지?"

  아까부터 카렌의 표정 하나, 하나를 관찰하고 있는 혼돈이 궁금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보면 내 팬인 줄 알겠어.'

  아까 신경쓰인다는 말도 그렇고, 놈에게서 따가운 시선, 더 나아가 집착이 피부로 느껴지자 카렌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어차피 친해질 수 없는 사이.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뿐이다.

  스으으윽

  카렌의 몸에서 은빛 물결이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려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이내 사납게 제 영역을 확장하더니 마침내 하나의 거대한 은빛 호수가 카렌을 중심으로 완성되었다.

  이제는 혼돈의 차례.

  "역시..."

  카렌은 혼돈의 뒤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보고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놈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혼돈의 몸 뒤로는 물이 뻗어나가 거대한 해일을.

  뒤이어 어둠이 그 세를 확장해 작은 밤을 만들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불꽃이 혀를 날름거리며 지옥을 만들어낸다.

  "다채롭군."

  저 놈이 다른 군주들의 꼭대기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속성을 다룰 수 있는 군주들의 대군주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은 이걸로 해볼까?"

  놈의 말에 세 속성 중에 화르륵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앞으로 제 몸을 내세운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 상위의 무언가. 막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에 더 가까우리라.

  꾸물꾸물, 붉은 애벌레가 기어 오듯 용암이 카렌에게 다가온다.

  화르르륵!

  그 자체의 온도만으로 닿지도 않은 주변에 불을 붙이며 그야말로 지옥을 만들어낸다.

  "이건 보기에만 그렇고 별로 안 뜨겁잖아. 그렇지?"

  하지만 이것도 부족한지 혼돈은 붉은 용암에 슬쩍 색을 덧입히기 시작한다.

  '지금이다.'

  카렌의 물컹한 실드가 제 모습을 날카로운 창으로 벼리더니 단번에 놈의 본신으로 치닫는다.

  저 놈이 준비를 끝날 때 까지 왜 기다리나.

  "어...어? 인간들은 이러면 비겁하다 하지 않아?"

  혼돈이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카렌을 본다. 하지만 카렌은 코웃음치며 오히려 더 빠르게 공격의 속도를 높인다.

  "그런게 어딨어. 죽으면 끝이야."

  한때 자신의 기사들에게도 우월한 숫자를 이용하라고 아예 교범으로 못 박아둔 사람이 카렌이다. 그딴 걸 신경쓸리가 있나.

  "으..."

  놈이 이를 악물더니 간신히 용암의 색을 완전히 바꾸어 내 자신의 앞에 펼친다.

  치이이이익...

  코 앞에서 막힌 은빛 창.

  그런데 티라노사우르스가 정면으로 부딪혀도 흠집도 나지 않았던 카렌의 실드가 녹기 시작했다.

  그럴만 하다. 저건...

  ?

  '청색의 용암이라.'

  평범한 용암은 보기에는 위협적이어도 저번에 오즈로가 만들어낸 백색 불꽃에 비하면 오히려 온도는 더 낮다.

  백색을 지나, 청백색, 이윽고 한계까지 도달하더니 마침내 불꽃이 낼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색.

  "또 하나 배웠어. 이런 게 허를 찌른다는 거구나."

  ?

  혼돈의 말과 함께 이번에는 제 차례라는 듯 청빛을 띈 용암이 제 몸을 이끌고 전진한다.

  제아무리 튼튼한 장애물이라도 저 앞에서는 녹아 불타 사라지리라.

  우우우웅...

  용암이 만든 아지랑이와 열기로 근처의 공기가 울렁거리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상황.?

  카렌은 상상에 빠졌다.

  누가 보면 이런 긴박한 와중에 뭐 하냐고 소리치지 않을까.

  하지만 대항할 방법은 이뿐이다.

  `자연을 정면으로 이기는 방법은 자연이다.`

  용암을 가로막을 수 있는 태초부터 있었던 천연 방파제.

  `바다.`

  카렌은 드넓은 태평양을 머릿속으로 그린다. 보기만 해도 한없이 작아지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물결.

  그 짠 내 나는 공기 속에서 탄생하는 수많은 생명과 죽음들.

  출렁!

  카렌의 실드가 이에 반응해 제 몸을 변화시킨다. 오염되지 않은 청량한 바다가 카렌의 부름에 응답한다.

  "가라.

  "

  ?

  물론 단순한 물은 아니다. 상상력이 얼마나 생생했는지 소금기와 카렌의 마나를 잔뜩 머금은 거대한 물결이 앞으로 나아가더니.

  ?

  치이이이이이익!

  마침내 용암과 바다가 제 몸을 맞대면서 흰 연기가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단숨에 시야를 가릴 정도로 퍼진 안개들.

  후드드득!

  막상막하.

  승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평화로이 날던 새들이 거품을 물고 땅으로 추락할 뿐.

  "독..."

  카렌이 인상을 찌푸린다.

  용암과 바닷물이 만나며 벌어지는 화학 현상. 저 연기는 피부와 폐를 녹여버리는 유독물질로 가득 찬 죽음의 독무다.

  하지만 이미 실드가 주변의 공간을 빈틈없이 장악한 카렌의 근처는 다른 차원.

  그 여파로 불쌍한 동식물만 죽어날 뿐이다.

  휘이이잉

  들판에 바람이 휘날리며 서서히 걷히는 연기 속.

  그 사이로 보이는 카렌의 모습을 보며 혼돈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감탄하며 인정했다.

  "역시 내 적은 너 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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