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1/140)

  마지막 전투의 축포

  "다 끝났나?"

  비어드가 이마에 흥건하게 흐르는 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엄청난 크기의 중장비들, 낮에 일해 피부가 새까매진 인부들.

  모두 자신과 5개월간 함께 한 인연들이다.

  "네, 끝났습니다."

  강이사가 후련한 표정과 목소리로 토해내듯 말했다.

  차고 있던 워치로 다시 한 번 체크해봐도 모든 항목에 줄이 가로로 쭉쭉 그어져 있다.

  "정말...고생 많으셨습니다."

  카렌의 영지 전체 개조.

  암흑가에 모든 장비 설치.

  이제는 성지로 탈바꿈한 도시로 '그걸' 옮겨 오는 작업.

  그리고 모든 지역에 카렌이 요청한 마법진 등.

  모든 작업자들과 과학자, 연금술사, 시민, 엘프들이 힘을 합쳐 일궈낸 작업들이다.

  "같이 고생해놓고 무슨 말이야? 나는 내 것만 했지, 자네는 거의 모든 일을 총괄했잖나."

  ?

  강이사는 카렌을 구심점으로 모인 사람들을 연결해주는 윤활유 역할에 충실했다.

  모든 분야부터 인간과 엘프 종족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합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강이사뿐었으니 말이다.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한때 제약회사의 일개 회사원이었던 자신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지금은 무려 지구를 구하고 있다.

  '슈퍼 히어로가 된 것 같은 기분이네.'

  비록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몸이지만 이렇게 보통 사람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 카렌님 아닐까.

  "자네가 없었다면 이렇게 제시간에 끝내기는 힘들었을 걸세. 이제 끝났으니 이거 한 잔 마시라고!"

  비어드가 강이사의 등을 텅, 텅 치며 근처 냉장고에서 아껴뒀던 맥주 한 잔을 꺼내온다.

  "감사합니다. 그럼..."

  꿀꺽, 꿀꺽.

  과연, 술에 대한 기준은 엄격한 드워프의 맥주답다.

  보글거리는 거품은 먼저 입술을 부드럽게 축였고, 그 뒤로 이어지는 황금빛 액체는 깔끔한 시원함과 함께 목울대로 꿀럭 넘어간다.

  "크으..."

  자연스레 나오는 감탄사.

  맛에 대한 감상이자, 지금껏 고생한 자신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기도 했다.

  "그렇게 술을 먹는 사람이 지금껏 한 잔도 입에 안 댔어? 참 독해."

  무려 5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강이사는 철저하게 초단위로 스케줄을 짜고 움직였다.

  "아무리 그래도 카렌님의 선견지명이 없었으면 제시간에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 삼촌이 나에게 준 인공 드래곤 하트부터 암흑가에 미리 새겨 둔 마법진, 성지에 떠 오른 태양까지 말일세."

  만약 뭐 하나라도 없었다면 결코 완성될 수 없었던 작전이었다.

  "카렌님은 여기까지 보고 우리를 이렇게 모으셨을까요?"

  지구로 온 지 몇 년 만에 걸어온 그 발자취로 일대기를 만들고 싶은 심정이다.

  꿀꺽, 꿀꺽.

  어느새 옆에 자신의 키만 한 오크통을 모두 비운 비어드가 '크으' 소리를 맛깔나게 내뿜고는 입을 열었다.?

  "나 같은 경우는 지구로 우연히 왔는데...잘 모르겠네. 우연과 인연이 겹친 거지. 좀 있다 삼촌 만나면 물어보자고. 오늘 다 같이 만나잖나."

  그렇게 저녁에 카페에서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비어드는 진짜 카렌에게 물었다.

  모두가 일제히 말을 멈추고 카렌만을 바라본다. ?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받은 장본인이 망설이지 않고 입을 떼더니 하는 말.

  "필연이니, 우연이니 무슨 소리야. 그냥 160년 동안 고생하다가 조용히 살고 싶어서 지구에 왔는데. 너희도 한 달간은 푹 쉬어."

  너무나도 카렌다운 말에 모두가 일제히 웃고 삼색은 미호의 무릎 위에 앉아서 묻는다.

  "주인, 그럼 이번 일 끝나면 어떻게 할 거냐?"

  "아무것도 안 할 거야."

  지구에 처음 왔을 때의 생활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까.

  드라마나 보고, 숲과 호수로 산책이나 다니겠지. 다만 그때보다 주변에 사람들은 많이 생겼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쉽지 않으십니까?"

  온갖 일을 처리한 강이사는 카렌에 대한 사심을 빼고 객관적으로 담백하게 말한다.

  "뭐든 하실 수 있습니다."

  돈. 마력석 광산 하나만으로도 말할 필요도 없다.

  권력. 만약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연합의장도 당장 자리를 내놓겠지.

  명예. 지구를 구한 자. 끝이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봐 왔다고 생각해? 내 시대는 예전에, 지구도 아닌 벨리알에서 이미 끝났어."

  오랜 세월 동안 물러날 때를 모르는 자들을 보며 숱하게 다짐했던 자신이다. 아니, 이미 지구의 역사책만 대충 훑어봐도 나오지 않는가.

  불로초를 찾고, 쓸데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거대한 동상을 짓고, 피로 목욕을 한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그럼 오늘은 마시자고. 엘리는 주스마시고."

  "네!"

  "좋다!"

  "삼색, 너는 적당히 마셔라."

  "응?"

  "뭘 '응?'이야. 너 저번에 술 제대로 마셨다가 숲에 번개로 고속도로 냈잖아."

  세상에 주사부리는 신수가 어디있나.

  이 녀석도 나중에 크면 백호와 현무처럼 근엄해지긴할까. ?

  "걱정마세요 아버님."

  하긴 미호가 있으니 알아서하겠지.

  그렇게 잠시 바빴던 카페는 오랜만에 활기를 찾아 밤새 손님들을 맞이했다.

  * * *

  1개월 후.

  삐이이이이이!

  [경보! 경보! 모든 시민들은 대피소로 가주시기 바랍니다.]

  요란스러운 경고음이 길가에 울려 퍼지지만.

  깜빡, 깜빡.

  을씨년스러운 거리에서 이에 응답하는 건 신호등뿐이다.

  몇 개월 간 지겹도록 해왔던 공지.

  이미 얼마 전부터 연합의 시민들은 모두 지정된 대피소로 들어간 지 오래였다.

  우우우우웅...

  하긴 저 광경을 보고 맨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행성 세 개는 금이 쩌억 갈라지고, 조각조각 부스러지며 음울한 기운을 내뿜은 채 지구를 노려보고 있는 듯했다.

  이제 시민들이 지하 대피소에서 할 수 있는 건 두 손을 모으고 할 기도뿐.

  어떤 이는 기도가 무의미한 짓이라 했다.

  나약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다.

  이제는 인간의 간절함에 응답하는 여신이 있는 걸 누구도 의심하지 않으니.?

  그들의 간절함은 신앙이 되었고, 신앙은 무형의 힘이 되어 하얀 빛줄기가 되어 하늘로 향한다.

  [내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

  여신이 응답하니, 이들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빛줄기는 하나의 형체를 이루어 이내 동그란 태양을 만들어낸다.

  어두컴컴한 우주 속에서 믿음으로 잉태한 태양.

  여신이 자신의 아들과 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원흉을 제거하고자? 자신의 손을 뻗는다.

  파아앗!

  여신의 손을 따라 태양이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세 개의 빛줄기로 나뉘어 행성으로 쏘아낸다.

  지이이이이잉!

  수천도의 고열이 안 그래도 수명이 다해 바스락거리는 행성 사이사이로 파고들고 이내 점점 스며든다.

  [음...]

  여신이 이를 악문다.

  지금껏 모아 둔 신성력과 전 인류의 염원을 담아 쏘아내는 전력.

  세 개의 행성의 표면은 붉게 달아 오르고 이어서 여신의 빛이 행성들의 속으로, 맨틀로 파고든다.

  '조금만 더...'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지키는 것.'

  인간들을 지킨다.

  자신은 인간들의 신이자 앞을 밝혀 주는 '태양'이니 이제 의무를 다할 때다.

  마침내 행성들의 핵에 도달한 빛.

  쩌어어억!

  침략자들이 지구를 침공하기 위한 이유는 자신들의 행성의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던 행성들은 결국 크고 작은 조각들로 변해 우주로 흩어진다.

  [어...근데 저건 어떡하지?]

  무심코 나온 여신에게서 평소의 맹한 목소리가 튀어 나온다.

  이미 엄청난 속도로 날아 오고 있던 행성들은 이제 크고 작은 조각들이 되어 그대로 지구로 쇄도하고 있었다.

  그대로 놔두면 침략자들 때문이 아니라 저것들이 지구로 떨어져 멸망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

  [걱정하지 마세요.]?

  그때 여신의 주변에 인간의 형체를 한 누군가가 나타난다.

  엘리 이전에 한때 솔라리 교단에서 성자라 불렸던, 이제는 천사가 된 남자.

  [저기...]

  성자가 안절부절못하는 여신을 달래며 말하며 지구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푸르른 지구에서도 유난히도 초록색이 뚜렷하게 보이는 그곳.

  오로라.

  신의 탄생의 필수 조건은 충분한 인구다.

  툭...

  세계수의 나뭇 가지에서 엘프의 아기를 담은 마지막 열매가 땅으로 떨어지자.

  우지지지직...

  자연을 꼭 닮은 초록색 빛을 세계수가 내뿜는다.

  밑으로는 안 그래도 깊이를 알 수 없었던 뿌리가 더욱 굵고 길게 땅 속으로 뻗고.

  위로는 ?하늘 끝에 아슬아슬하게 닿아 있던 거대한 나무줄기가 기지개를 펴듯 자신의 키를 더 키운다.

  세계수가 반신의 한계였던 지구에서 마침내 우주로 제 영역을 확장하고 나뭇가지를 뻗어낸다.

  [왔구나!]

  여신이 반색하며 새로운 신의 탄생을 반긴다.

  신으로의 격상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정말 위험했다. ?

  파아아앗!

  우주로 진출한 가지들은 이내 파릇파릇한 풀들과 꽃을 만개시킨다.

  후드드득...

  자신의 온 몸으로 행성들의 파편들을 받아내는 모습은 그 명성 그대로 자연의 어머니라 할만하다.

  [이대로 끝났나?]

  비록 여신과 세계수의 힘은 모두 소진했지만, 행성은 부서졌으며 파편 또한 무사히 막아냈다.

  지금까지의 준비는 아깝지만 사용할 일이 없는 게 최상이다. 하지만...

  [저건...]

  [역시나 뭔가 더 있었군요.]

  아까 떨어져 나간 파편 중 하나가 자신의 색을 바꾼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색.

  빨강, 얼음, 검은색이 일렁이며 만들어낸 이질적인 빛깔.

  [...이게 다 미끼였다고?]

  놈들은 자신들이 지구로 가기 위해 부하들로 가득 찬 세 개의 행성을 버려 버렸다.

  그리고 예정대로 행성이 부숴져 신들의 눈을 가리자 미리 준비해 둔 파편으로 우회했던거다.???

  [저게 그때 카렌님이 봤던 혼돈인가 봐요.]

  세계수가 살짝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파편은 카렌과 시야를 공유했을 때 본 그 놈의 색을 똑 닮았다.

  [저곳에 모두 타 있군요.]

  부하는 어떻든 자신들만 있으면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걸까.

  과연 그 자신감에 걸맞게 저 조그마한 파편에서 엄청난 힘이 뿜어져 나온다.

  [우리 일은 끝났어. 그리고 밑에는 카렌이 있잖아.]

  [맞습니다.]

  화르르르륵...

  신들을 뒤로하고 대기권에 진입하며 빨갛게 달아오르는 파편은 이내 지구의 상공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쉽게 되지는 않는군요."

  카렌의 영지. 지하기지의 상황실.

  연합 의장과 강이사가 화면에 나타난 운석 덩어리를 본다.

  "요격 준비."

  위이이이이잉!

  비어드의 지시에 기지 전체가 진동하더니 이내 마법진이 잔뜩 그려진 거대한 포신 한 개가 위로 솟구친다.

  그리고 이내 오즈로마저 잠시 묶어 뒀던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총구들이 따라 올라오고.

  "장전."

  명령에 따라 수천 개의 마력석들이 대포에 에너지를 공급하기 시작한다.

  "내 역작이지."

  비어드의 자신감과 함께 푸른색으로 달아오른 포신.

  ?

  두두두두두두

  코스요리가 나가듯 먼저 전채로 비교적 소화기들이 포탄을 쏘아대며 행성을 달군다.

  지이이이이잉!

  마력석에서 나온 에너지의 특징 중 하나는 조용함이다. 거친 출력을 자랑하는 자동차를 만들어도, 헬기를 만들어도 똑같다.

  화약 무기 특유의 폭발 없이 거대한 대포는 그저 푸른 레이저를 올곧게 파편으로 쏘아낸다.

  "됐다!"

  모두의 외침대로 직격을 맞아 조각조각 갈라져버린 파편.

  부산물들은 이제 나머지 포대들이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저 정도 화력이면 그 안에 있던 놈들도 죽지 않았을까?

  "아..."

  하지만 하늘에서 서서히 하강하는 한 무리의 침략자들을 보고 모두 탄식을 토해냈다.

  거대한 형체의 불, 물, 어둠의 수장들이 거대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무엇보다 중앙에 있는 놈.

  "저 자가 혼돈이군요."

  카렌이 경고했던 그 놈이다.

  "됐어. 계획대로다. 다시 주 대포 집어넣고 곧 도착할 다른 에너지를 받아들일 준비 해!"

  "맞습니다. 저희는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이죠."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강이사는 모니터 속의 한 남자에게서 잠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엄청난 화력 속에서도 혼돈은 손 끝 하나 다차지 않은 채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주위를 둘러본다.

  "정말 아름다운 별이군."

  놈은 마치 사람처럼 성대를 이용해 말하며,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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