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헌터들에게 제공할 마력환 제조는 어떻게 돼가지?"
"보안 때문에 제가 엘프님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엘프들이라면 괜찮겠어."
인간이랑 애초에 가치관이 다르니만큼 유출 금지 약속을 받아 놓으면 끝.
카렌은 인위적으로 마나 양을 늘릴 수 있는 마력환의 제조법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지금은 몰라도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너도 조심하고."
"물론이죠. 요즘에는 연금술뿐만 아니라 수련도 하고 있습니다."
카렌이 묻자 민재가 요즈음의 바쁜 생활을 보여주듯 한껏 떡진 머리를 한 채 대답했다.
"수련?"
"일단 제 무력도 강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스승님처럼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눈은 초롱초롱했고, 몸 전체에서 뜨거운 열정이 흘러 넘친다.
`이제 슬슬 독립해도 되겠어.`
카렌의 눈에는 민재가 단순히 연금술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신적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다른 것들도 착착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건 연금술 협회에서도 가능해서 빠른 시일 내로 보여드릴 수 있을 겁니다. 여기 목록 있습니다."
기본인 포션부터 섬광탄, 소화기, 심지어 선글라스까지 정말 다양한 물품들이 한가득 종이에 적혀 있었다.
"협조는 잘 되고 있어?"
"과학자들과도 공동 개발입니다."
"그렇지, 편협한 시각은 항상 경계해야지."
"물론입니다."
"그래, 바쁠 텐데 가 봐."
다시 연구소로 돌아가는 제자의 모습에 카렌은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잘 성장했다는 뿌듯함과 이제 곧 자신의 길을 걸을 제자에게 느끼는 아쉬움이랄까.
"엘리가 나중에 누구를 데려오면 이런 느낌이려나?"
물론 상상이고, 먼 미래의 일이지만 순간 카렌의 미간에 주름 한 줄이 그어지며 하는 말.
"나보다 강한 놈 아니면 안 되지."
"...주인 그냥 차라리 안 된다고 말해라. 이거나 먹고 숲으로 가자. 채린이 기다린다."
카페 테이블에서 늘어지게 누워 있던 삼색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앞의 음료를 툭툭 건드린다.
"영준은 비어드와 무슨 수트 시험해본다고 일찍 나갔다. 이거는 미리 만들어 놨더라."
영준이 A급 헌터가 된 지 벌써 한 달. 이미 한 번 실전에서 데이터를 얻은 비어드에게 매일 불려 다니며 고생 중이었다.
딸랑!
벨소리가 작별 인사를 건네고 카렌은 삼색을 어깨에 올리고는 숲의 내부로 걷기 시작했다.
햇살은 나무 사이로 틈틈이 들어와 딱 알맞는 밝음을, 새들은 재잘대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니.
"맞다. 너 예지는 어떻게 됐어? 현무와 백호에게 물어본다며.
"
삼색과 같은 신수인 백호가 다스리는 영역이어서 그런가, 저번에 삼색이 한 말이 문득 떠올랐다.
"아, 도시에서 그거?"
카렌이 핵을 다룰 때 성공할 거라고 강렬하게 삼색에게 왔던 그 느낌.
"자기들도 잘 모르겠대."
"응?"
비록 한때 박 터지게 싸웠긴 해도, 카렌은 백호와 현무를 존중했다.
삼색을 불쌍히 여겨 조선 때 도와준 은인들.
자신에 비해 약하다지만 그래도 연합을 멸망시킬 뻔했던 힘.
무엇보다 그중에서도 시간으로만 따지면 카렌보다 많은 경험. 그런데...
"걔들이?"
어마어마한 세월을 쌓아 온 자신들의 전문 분야를 모를 수가 있나?
"내가 청룡이 된 지 10년도 안 됐잖아. 그래서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더라. 미호 같이 아직은 속성만 다루는 경우가 맞대."
"기적이라..."
카렌은 삼색이 앉은 반대쪽 볼에서 살랑이는 꼬리를 느끼며 생각에 빠졌다.
미호에 비해서도 아직 자기 능력에 미숙했던 이 녀석이 더 상위 능력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나 때문인가?`
미호에 비해서도 떨어지는 능력 활용법.
숙종을 잃은 과거 때문에 이 녀석의 주인에 대한 애착은 대단하다. 게다가 자신에게 한해서만 발휘되는 능력이니...
`항상 장난을 쳐도 역시...`
카렌이 삼색을 기특하게 여겨 손을 들어 카렌을 쓰다듬으려는 찰나.
"근데 이거 왜 복권은 당첨 안 되냐?"
귓속으로 들려오는 삼색의 혼잣말에 단번에 팔을 원위치시켰다.
"내가 진짜 감으로 한 20장 찍었는데 딱 한 개 맞았다. 그것도 5등. 이거 예지가 아니라 사기 아니냐?"
"..."
그래, 내가 잘못했다.
"
"응? 뭐가 잘못했냐?"
단 한 순간도 이 녀석이 예뻐 보인다는 착각을 해버리다니, 많이 잘못했지.
게다가 물욕이 이렇게 가득 찬 배 나온 고양이가 신수? 다시 한 번 생각하지만...
"세상이 말세야."
"주인, 또 재미없는 소리 한다. 요즘 미호도 안 놀아줘서 심심하단 말이다."
"암흑가에서 바쁘잖아."
방금 민재가 보여 준 물품들 생산, 그리고 비어드가 저번에 암흑가에 설치했던 마법진 개조 공사를 한다고 그랬나.
"근데 너만 아무것도 안 하네?"
어깨에서 뻐근함이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 뜨끈한 마시멜로가 얹혀진 듯한 뱃살.
지금껏 삼색이 놀고먹으면서 따라온 부산물들이다.
"나는 맡은 게 없잖냐. 내 성격에 그런 거 귀찮아서 못 한다."
하긴 이 녀석이 이끄는 조직이라...한 달, 아니 일주일도 못 가고 망하지 않을까.
"카렌!
"아빠!"
어느새 투닥대다 보니 숲의 중심부까지 도착했다. 원래는 거대한 숲이니만큼 더 걸어야 하지만 아마 백호의 배려로 안내해 준 것 같다.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채린과 엘리가 보인다.
`마치 동화 같네.`
그 옆으로는 채린을 좋아하는 흙의 정령, 동글이와 처음 보는 정령들이 둘을 감싸고 있었다.
"얘들은 다 뭐야?"
"동글이 친구들이야. 갑자기 나타났어."
채린이 동글이를 품에 안고 나무 등치에 앉아 말했다.
"몽! 몽!"
"여기 향기가 좋아서 친구들이 따라서 왔대. 있어도 좋다고 했어."
하긴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쫓아내나.
"너무 귀여워요!
"?
새끼 강아지들처럼 엘리를 포위하고 있는 정령들을 봐라. 요즘 많이 바빴던 엘리의 저런 해맑은 웃음은 오랜만에 본다.
"잘했어. 지금 침략자들 때문에 가장 힘든 사람이 엘리잖아. 조금이라도 쉬게 해줘야지."
어쩌면 지금 연합에서 가장 바쁜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잘해줘서 고맙지.'
정식으로 존재를 발표한 뒤 나타난 3개의 행성은 이제 맨눈으로도 식별할 수 있어졌다.
?
놈들의 색을 똑 닮은 개성 있는 행성들.
과학자들, 여신, 세계수가 공식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 인류에게 남은 시간.
6개월.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카운트다운 속에 당연히 온갖 유언비어와 사기꾼들이 판쳤고.
[구원의 시간이 다가왔다! 회개하라!]
[돈 100만 원에 1회 면죄부!]
[그날이 오면 온 사람들의 등 뒤에 날개가 생겨 휴거한다! 다만 몸이 무거우면 날 수 없으니 마음을 비우고 돈을...]
솔라리 교단과 연합정부는 힘을 합쳐 치안 유지를 하며 사람들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도 성지로 지정된 지 얼마 안 됐잖아. 얼마나 할 게 많겠어."
카렌이 현자의 돌로 인공태양을 상공에 띄운 곳.
기존에 있던 곳은 일반 신도의 접근성 문제 때문에 새로운 성지로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너는 괜찮고? 헌터 협회 다루기 쉽지 않잖아."
"임시직이라 괜찮아. 그리고 네가 한 번 저번에 온 뒤로 말 되게 잘 듣는다?"
"당연히 말 잘 듣겠지. 그렇게 깽판을 쳤는데."
삼색이 자기 꼬리를 살랑이며 바람의 정령과 놀면서 말했다.
"그리고 채린도 헌터랭킹 1위 찍었잖아. 어떻게 한 거야?"
비공식은 당연히 카렌이 최고지만 얼마 전 공식적인 1위에는 채린이 올랐다.
"장비전은 건틀렛 덕분에 너무 시시했고, 나중에는 대련으로만 올라갔어. 가르쳐 보면서 많이 도움이 됐나 봐. 무엇보다 불이나 물 공격이 별로 안 아프던데?"
"그건 제가 내린 축복 때문에 그래요.
"?
그때 채린의 말을 부드럽게 받으며 들려오는 청량한 목소리.
사르르륵
나뭇가지들이 자신들의 몸을 수그려 경배를 표하고, 새들은 자신들의 여왕에게 찬가를 부른다.
오로지 단 한 존재만이 만들 수 있는 광경.
사박, 사박
작은 소녀가 나무들이 만든 길 사이로 나뭇잎들을 밟으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언니! 엘리!"
하지만 위엄있는 모습도 잠시. 세계수는 두 여자에게 와락 안겨든다.
"...채린은 그렇다치고 엘리는 뭐냐?"
"제 첫 친구예요!"
"요즘 어때?
"
"아샤가 대규모 마법진 준비한다고 너무 바빠서 좀 심심했어.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좋다!"
"나도!"
이제는 많이 키가 많이 큰 엘리에 비해 어린아이 같은 세계수지만 둘이 잘 어울리긴 한다.
잠시 셋만의 수다가 오간 뒤 카렌이 물었다.
"축복이라니?"
쪽!
그대로 채린의 볼에 뽀뽀한 세계수가 말을 이었다.
"제가 이렇게 하면 불, 물, 흙, 바람에 대한 친화력이 올라가요. 당연히 채린 언니에게 오는 피해도 줄어들죠."
"그거 게임으로 치면 저항력이잖아. 그런데 채린은 근접 딜러니까...사기잖아?"
채린 같은 근접전 달인에게 몇 안 되는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원거리 속성 공격. 그것마저 반쯤 사라져 버렸다.
"카렌님도 가지고 계신데요? 몸에 가호가 깃들어 있어요."
"저번에 백호와 현무에게 받은 거야."
세계수가 얘기하다 보니 생각났다. 쓸데없다 싶었더니 주긴 줬나 보다.
"몽!"
그때 들려오는 짤막한 소리.
발치에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흙의 정령을 카렌은 슬쩍 손을 뻗었다.
기분 좋은 촉촉한 흙의 감촉. 마치 아침 이슬을 갓 머금은 비옥한 토지를 만졌을 때의 느낌과 똑같다.
"이 녀석은 날 싫어하지 않네?"
신기한 경험이다. 벨리알에서는 세계수를 불태울 뻔한 사건 이후로 슬슬 피했던 녀석들인데 이 동글이란 녀석은...
"몽..."
이렇게 기분 좋은 듯 몸을 늘어트리기까지 한다.
"저희 셋이 정령들에게 퍼뜨렸어요! 카렌님이 망나니에서 개과천선했다고, 지금은 정령들의 친구라고 했죠. "
꼭 망나니라는 단어는 까먹지 않는 넣는 세계수다.
그래도 자신을 위해 노력해준 성의가 있으니 카렌은 애써 칭찬을 해주었다.
"잘했어."
"그쵸?"
세계수가 채린과 엘리의 손을 붙잡고 방방 뛰자 청량한 숲 내음이 진하게 모두의 코로 풍겨온다.
"와..."
숲이 하나 되어 세계수의 기쁨을 공감하고, 반응한다. 그야말로 신목(神木)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잘 어울리는 광경에 모두가 탄성을 지른다.
`그렇다면...`
그런데 카렌의 머릿속에 번뜩 하나의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요즘 한창 연습 중인 기술. 헌터들과 싸울 때도 실패했고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카렌조차 반쯤 포기했던 그것.
"혹시 정령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나?"
"원래는 강력한 정령사가 아니면 숲 밖으로 나가면 소환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드린 반지가 있다면 가능하죠."
세계수가 카렌의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괜히 저걸 만드느라 언니와 삼색의 보상을 못 준 게 아니다.
"하지만 정령들이 원해야 해요."
채린과 엘리와 놀고 있던 정령들이 세계수의 시선이 느껴지자 이쪽을 돌아본다.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야."
"혹시나 아빠가 잘못되면 굉장히 슬플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정령술에 엄청난 재능을 가진 채린, 신수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공언받은 엘리의 강력한 지원사격.
이에 세계수의 그윽한 눈동자가 더해지자 두 정령이 슬그머니 이리로 다가온다.
"생김새가 각설탕과 도마뱀 같다."
삼색의 감상대로 네모난 얼음 정령, 손바닥 크기의 투명한 물의 정령의 모습.
"손을 내밀어 보세요."
킁...킁...
둘은 동시에 강아지처럼 카렌의 손가락 끝에서 맴돌더니 만족한 듯 각자 표현한다.
얼음 정령은 자신의 각진 몸체로 팽그르르 그 자리에서 돌았고, 물의 정령은 자신의 뭉툭한 꼬리를 좌우로 흔든다.
"이름을 지어 달래요."
"음...얼음이와 마뱀이로 하자."
"진짜 최악이다. 주인."
"왜?"
삼색과 엘리가 순간 엄청난 작명 센스에 굳어 버렸지만 카렌과 채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얘들이 좋다잖아."
실제로 자신의 앞에서 폴짝 뛰는 얘들이다.
"정령들이 뭘 알겠냐. 그런 면에서 보면 둘이 참 잘 어울려."
채린은 흙의 정령을 동글이라고 짓지 않나...저런게 천생연분일까.
스르르륵...
"어?"
마치 유령처럼 카렌의 양쪽 반지로 빨려 들어가는 정령들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다.
"괜찮아요. 자신들의 기운을 집어넣은 거니까. 부르면 이제 언제든지 부르면 응답할 거예요."
과연, 곧바로 밖으로 정령들이 뛰쳐나온 모습을 보면서 카렌이 양손으로 하나씩 마법을 만들어냈다.
왼쪽은 하늘 높이 솟은 얼음의 집, 오른손은 거대한 수영장을 연상시키는 물 덩어리.
"마법!"
엘리가 역시나 눈을 빛내고 카렌은 두 정령을 향해 눈짓한다.
"여기 들어가 볼래?"
까드득
출렁
카렌의 요청에 따라 각자 자신의 속성에 맞는 마법 속으로 풍덩 뛰어 들어간 얼음이와 마뱀이.
"와우...저게 진짜 되네?"
카렌의 손을 떠난 마법들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정령들을 보며 삼색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네. 진짜 되네."
역시 생각의 전환이 이래서 중요하다. 자신이 못 하겠으면 맡기면 되지 않은가.
"저거 완전...그거다."
삼색이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대격변 이후로 도로 상태가 열악해져 개발이 멈춘 최첨단 기술.
"자율주행 자동차...아니 자동 주행 마법."
이 경우에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정령들이 운전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