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9/140)

  겨울이 오고 있다

  퍼어억!

  "다음."

  섬뜩한 타격음과 함께 또다시 쓰러지는 헌터들. 이제 상대방들의 수준은 B급에서 어느새 A급까지 올라가 있었다.

  무대 밖에서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를 연상케 한다.

  사회 어딜 나가도, 대접받고, 존중받는 A급 헌터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무력하고도 공포에 질린 모습들.

  "다음."

  그럴 수밖에 없다.

  "으아아아아아!"

  2m에 달하는 거구가 커다란 쇠뭉치로 있는 힘껏 찍어도.

  "아...안 통해! 씨ㅂ... 크어어억!"

  "다음."

  아무리 날렵한 움직임으로 독을 날리고, 암기로 카렌을 노려도.

  "끄으으으..."

  "다음."

  어떤 강력한 능력으로도 지지고, 태우고, 얼려도.

  "이게 대체 뭐야. 안 돼! 오지마! 으아아아악!"

  "다음."

  무대 위를 반 이상 장악한 거대한 은빛의 반투명한 액체에는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꾸잉, 상어가 있는 수족관에 들어가는 불쌍한 물고기 같다."

  삼색이 제출한 감상문은 정확했다.

  '동시에 되긴 되는데...'

  카렌은 자신의 특기인 공간장악 속,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꿈틀거리는 포식자 한 마리를 만들어 보았다.

  '스스로 움직이지는 못 하는 군.'

  자유분방한 정령에서 영감을 얻은 아이디어.

  하지만 아무리 자유의지를 가진 뭔가를 상상해 봐도 소용이 없다. 당장은 무리인 걸까, 아니면 불가능한 걸까.

  "으..."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적들에게는 충분한 공포다. 카렌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상어가 힘차게 꼬리로 놈들을 패대기친다.

  "다음."

  이어지는 고저없는 목소리. 그런데 한 헌터가 자신을 위해 마련된 무대 위에 서는 걸 거부한다.

  "나...나는 안 할 거야!"

  "거부할 수 있나?"

  "특별한 사유 없이 도전을 거절할 경우 헌터 자격 정지입니다. 최소한 올라오셔서 항복은 외쳐주셔야 합니다."

  심판의 말에 그제야 안색이 흙빛에서 조금 돌아온 헌터가 무대에 올라선다.

  "시합 시작!"

  "항...크어억!"

  오히려 괘씸한 듯 단번에 얼굴부터 쳐버리는 괴생물체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진다.

  저 카렌이라는 남자의 의도는 명백했다. 죽이지는 않지만, 그것뿐.

  최소 일주일 이상은 족히 요양해야 할 부상을 선물해준다.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지금껏 헌텨 협회의 역사에서 이렇게 랭킹전을 악용한 전례가 없다. 아니,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단 표현이 정확하리라.

  저 은발의 남자는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헌터에게 도전할 수 있다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B등급 말단부터 천천히 깨부수고 있었다.

  "잘 생각해 봐. 왜 그럴까? 다음."

  "으...아아아악!"

  그 와중에도 또 한 무더기의 A급 헌터들이 처참히 행동 불능이 되어 버린다.

  `이유가 뭘까? 그렇다고 모두를 저렇게 만드는 건 아냐 띄엄띄엄 불러내고 있어. 그 규칙은...아!`

  한 머리 좋은 헌터가 마침내 뭔가를 짐작해낸다.

  채린이 보증을 서준 헌터. 그리고 요즘 채린은 협회 파업을 주도한 자들과 싸우고 있다.

  "우월주의자들!"

  뇌에 짜릿 번개가 치며 답을 도출해낸다. 헌터의 외침에 모두의 눈이 커진다.

  "그러고 보니..."

  기절한 자들, 지금 저기 가지런히 줄 서 있는 헌터들 대부분 극단적 우월주의자들과 그 지지자들이다.

  "이제 도둑 찾기 하는 건 질렸거든. 들어보니까 너희는 자발적으로 침략자에게 꼬리쳤더라?"

  심기가 약해서 반쯤 최면이 걸린 시민들은 무고한 희생자라 말할 만하다. 하지만 지금 당하고 있는 헌터들은 제정신이면서도 오로지 자신을 위해 협조했다.

  힘을 위해.

  신념을 위해.

  권력을 위해.

  게다가...

  `침략자들의 수법도 교묘해지고 진화한단 말이지.`

  신세계에서 잡힌 헌터들을 심문해 본 결과.

  자신들의 기운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자 힘을 원하는 헌터들에게 무슨 붉은 약을 줬다고 했다.

  아마 불의 소행이겠지. 인간의 체내에서 융화되어 뭐 어떻게 기운이 검출되지 못하게 했다는데...이제 카렌은 정화고 뭐고 질려버렸다.

  다행히도 물이나 어둠처럼 불은 게이트로 나올 생각은 없는 듯하고...그래서 택한 가장 빠른 길.

  ?

  "일단 솎아내고."

  심증은 있는데 증거가 없어서 채린도 손을 못 썼던 약삭빠른 놈들. 하지만 이렇게 합법적으로 시스템을 이용해서 하면 되지 않나.

  "쓰레기들 빼고 재투표할 거다."

  카렌은 물론 소중한 한 표를 존중한다. 하지만 만약 유권자가 어떤 사정(?) 때문에 못 하는 건 어쩔 수 없겠지.

  "저...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손을 든 한 헌터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하다.

  "진짜 우월주의자도 아니고, 약도 안 먹었습니다. 그냥 찬성표만..."

  "그거야. 아무것도 안 해서 그래. 너는 평소 행실이 안 좋아서 대표로 뽑힌 거다."

  카렌이 여기 모인 헌터. 그리고 지금 무대를 찍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보고 있는 헌터들의 폐부를 깊숙이 찌른다.

  "다음은... S급 헌터입니다."

  마침내 모든 헌터의 꿈이자 랭킹의 최종 등급이 등장했다.

  모두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 찬다.

  A급과 S급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혹시나 그들이라면 저 남자의 폭주를 멈출 수 있지 않을까.

  "랭킹 3위. 심우진."

  온 몸에 두터운 갑주를 두른 한 검사가 무대 위에 당당히 걸어 나온다.?

  익숙한 성.

  이 모든 일의 시발점. 영준의 데뷔 제물이었던 심명길의 아버지다.

  ?

  "여기까지다!"

  심우진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발을 구르자 '쿵' 하는 묵직한 진동이 울려 퍼진다.

  과연 S급 헌터.

  대형 길드장의 이름은 그만한 무게가 있었다.

  스르릉...

  심우진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고는 카렌을 겨눈다.

  "재투표라니? 정당한 보상과 우월함에 걸맞는 대접을 받겠다는 게 뭐가 이상한가? 오히려 항상 보호받기만 하는 시민이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어차피 우리가 없으면 모두 죽었을 비천한..."

  과연, S급 헌터다운 패기와 대형 길드장의 말솜씨. 또한 우월주의자들의 대변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카렌에게는 전혀 와닿지 않는 발언일 뿐.

  "죽었을 사람들?"

  카렌이 칼 같이 놈의 말을 중간에 잘라버린다.

  그리고는 코웃음 치며 입가를 비틀며 모두를 둘러본다. 가소로움이 한껏 담긴 얼굴에 헌터들이 움찔거린다.

  "당연하지. 그래서 우리 같은..."

  또다시 장황하게 이어지려는 녀석의 개소리를 카렌이 가차 없이 다시 차단한다.

  "내가 없으면 지구의 인류가 다 죽었어. 이 어린 놈의 새끼야. 어디서 나도 안 하는..."

  [주인, 꼰대질.]

  "꼰대질이야."

  그저 투정으로 들리는 놈의 말을 받아주고 있다는 귀찮음과 짜증.

  엘리와 채린이 고통받고 있다는 분노.

  우우우우웅...

  카렌의 감정에 호응한 상어 한 마리가 감히 주인의 심기를 거스른 놈을 향해 유유히 허공을 헤엄친다.

  "흐아앗!"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지른 놈의 대표적인 능력은 `관통`. 자신의 검에 닿는 모든 걸 그야말로 뚫어 버린다.

  물컹...

  하지만 물에 잠시 구멍을 내서 뭘 할 수 있을까.

  이미 카렌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몸을 액체로 변화시킨 상어는 그대로 검을 삼켜버리고는 그대로 상승한다.

  아드드드득!

  단번에 팔목이 비틀어지는 소리와 함께 놈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검을 버리고 물러난다.

  "크윽..."

  냉철한 판단이다. 그대로 있었으면 손목 뿐만 아니라, 온 몸이 빨래처럼 짜였을 테니까.

  텁...

  하지만 거기까지다.

  무기는 잃었고, 무대 위는 좁았고, 한 팔은 못 쓴다. 이미 결과를 예측한 모든 헌터들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크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역시나 지금까지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S급마저 허무하게 실려 나가자 모두는 두려움과 경외심을 동시에 담은 눈빛으로 은발의 남자를 본다.

  "너희도 알고 있다시피 침략자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이기적으로 굴고 있지. 지금은 분열을 일으킬 때가 아니다."

  카렌은 주변을 둘러보며 낮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한다.

  주위를 단숨에 휘어잡는 카렌의 몸에서는 여러 가지 분위기가 섞여 나온다.

  마치 아이를 꾸짖는 선생님처럼, 신하를 다스리는 군주처럼.

  "너희는 한때 영웅이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에게서 시민들을 지키는 헌터라는 영웅."

  대격변 때 몬스터들을 해치우고, 사람들을 구하며 생겨난 새로운 직종.

  시작은 고결했으며, 이타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너희를 봐라. 기름진 것들을 먹고, 화려한 옷들을 걸치며,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카렌은 잠깐 말을 멈추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영웅이 될 마지막 기회다. 특권을 가지고 싶나? 그건 그렇게 추하게 얻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처럼 떼써서 뺐듯이 쟁취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어쩌라는 걸까. 왜 저 남자의 말은 회초리처럼 헌터들의 아직 남아 있던 양심과 초심을 아프게 때린다.

  "받는 것이다. 저들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너희가 행동하는 것이다. 침묵을 깨라. 침략자에 맞서 싸워라. 너희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일개 헌터 나부랭이가 저런 말을 했으면 당장에 미친놈으로 여겨 무시했을 말이다.

  하지만 저 남자는 잔뼈가 굵은 헌터들을 기세로 찍어누른다. 분위기로 감화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B급부터 S급까지 단번에 올라오며 자신의 무력을 보여주었다.

  아직 남은 S급 1위 2위가 있지 않느냐고? 그들과 저자가 방금 눕혀버린 3위, 심우진은 그렇게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저 사람은 불과 몇 분 만에 헌터의 정점이 되었다.

  "물론 일방적으로 너희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겠다."

  카렌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며 눈매가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그것만으로도 얼음장 같던 주변이 사르르 녹으며 훈풍이 부는듯하다.

  딸그락

  그리고 카렌의 품에서 나오는 작은 약통.

  "이건 마력환이다. 오영준 헌터를 A등급으로 만들어 준 약이지."

  누가 저 말을 했다면 사기꾼 취급받았겠지만, 말하는 사람이 카렌이다.

  지구에서 가장 ?강한 인간.

  힘이 있으니, 말에 무게와 권위가 생겼고.

  살아있는 증인이 있으니, F급에서 A급으로 올라 온 영준이란 헌터였다.

  "그럼 재투표를 하자. 내용은 파업 취소와 침략자에 대한 대비다."

  헌터들은 모두 워치로 자신의 표를 던질 수 있으니 언제든지 할 수 있다.

  S급 헌터의 권한으로 채린이 모든 헌터의 워치에 의결을 제안한다.

  찬성은 초록색, 반대는 빨간색.

  "침략자들을 막으려면 당연히 마력환을 줄 텐데, 수량은 한정되어 있고, 역시 의지가 있는 헌터들에게만..."

  일부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린 카렌의 말에 헌터들의 손가락이 일제히 초록색으로 향했다.

  "흠..."

  그 모습을 카렌이 귀엽게 바라보며 팔짱을 낀다.

  `이제 정말 끝났군.`

  놈이 말한 지구의 힘을 깎는 시도는 모두 무산시켰다.

  얼마 전에 엘리를 통해 전해준 여신의 반가운 소식. 지구로 향하는 침략자들의 행성은 총 3개.

  불, 물, 어둠의 영지들이었다.

  `그 혼돈으로 보이는 놈은 따로 행성은 없나 보네.`

  너절한 수작들을 모두 막아냈으니 이제는 전면전을 준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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