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8/140)

  노력의 천재는 때를 기다렸다

  `보인다.`

  영준이 흘린 땀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며 스며든다. 하지만 그래도 몸은 계속 쉬지 않고 움직인다.

  B급을 어렵지 않게 이기고, A등급 헌터와의 대련.

  비록 끝이 뭉툭한 창끝이라지만 마나가 실린 덕에 맨몸으로 맞으면 바로 뼈 하나는 우습게 부러진다.

  슉, 슉

  뱀처럼 휘어오는 창대.

  착시가 아니다. 상대방의 각성 능력이다.

  `자기 몸이나, 몸에 닿은 무기를 유연하게 만든다.`

  영준은 F등급 시절부터 등급은 낮았어도 정보 하나는 빠삭했다.

  까드드득...

  명길을 상대할 때처럼 방패로 공격을 흘리면서 돌진하려 했지만.

  "어딜."

  상대는 단번에 창을 회수하더니 다른 부분을 찔러온다.

  역시나 말석이라지만 그래도 A급 헌터.

  `후...게다가...`

  경기장 밑에서 이쪽을 독사처럼 노려보는 명길의 아버지. 자신이 지목한 이 헌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참 필사적이다.

  "뭘 준다고 했습니까?"

  잠시 둘 다 숨을 고르는 사이 영준이 상대방에게 슬쩍 물었다.

  "다리 하나만 부러뜨리면 내가 원하는 장비 하나를 준다더군. 개인감정은 없어. 깔끔하게 해줄 테니 걱정 마."

  별생각 없이 창대를 휙휙 돌리는 헌터를 보며 영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망 못 가게 한 다음에 병원에서 죽일 생각이네.`

  F급이지만 나름 헌터계에서 오래 있었던 영준은 대형길드의 더러운 이면을 잘 알았다.

  아마 약물을 `실수`로 투입하거나, 어느 날 갑자기 창문에서 떨어지겠지.

  자신의 아들을 이겨버린 건방진 헌터에게 본보기를 보일 셈이라. 그렇지만...

  "가겠습니다."

  전혀 두렵지 않다.

  자신의 뒤에는 그깟 대형 길드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세력이 있다.

  저기서 평온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은발의 남자.

  "이러다 영준이 지는 거 아니냐? 상성이 너무 안 좋은데?"

  삼색의 걱정대로 고대부터 창이라는 무기는 공간만 있으면 길이를 활용한 극한의 효율을 자랑한다.

  상대가 맨손이다? 말할 것도 없다.

  "지면 어쩔 수 없지.

  "

  영준에게도 B급 헌터를 이길 때 말해 놨다. 이제는 져도 상관 없으니 편하게 하라고.

  "카렌?"

  그때 카렌의 옆자리로 채린이 다가오고, 주위에서는 절단의 마녀를 보고는 슬금슬금 알아서 자리를 피한다.

  콩! 콩!

  채린을 보고 삼색이 유리를 앞발로 두드린다.

  "왜? 간식 달라고?"

  삼색이 자기 귀를 앞발로 가리키자 카렌이 그제야 눈치채고는 여분의 이어폰을 채린의 귀에 꽂아준다.

  "들리냐?"

  "오? 잘 들려."

  "미호가 보고 싶다고 전해달라 그랬다! 요즘 바빴잖냐."

  "맞다. 연락 한다고 했는데..."

  정말 자기 할 말만 하는 고양이다. 하지만 카렌이 보기에도 채린의 얼굴이 핼쑥해진 게 느껴진다.

  `고생 많이 했네.`

  메시지로는 혼자서 해본다고 하면서 일체의 도움도 요청하지 않은 채린이다. 아마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했겠지.

  "그런데 이게 다 무슨일이야? "

  채린은 혼란스러웠다.

  이런 번잡한 곳과 일을 싫어하는 카렌의 심사 요청.

  그리고 저기 무대위에 올라가서 A급 헌터와 싸우고 있는 영준까지.

  카렌은 채린에게 설명 할 수 있었고.

  장황하게 목적과 계획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저 카렌은 속에 있는 진심을 툭 하고 던져 본다.

  "보고 싶어서 왔어."

  오로라에서부터 항상 붙어 있었던 사람인 만큼 느껴지는 빈자리도 그만큼 컸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니 그냥 말하고 싶었다.

  "뭘 보고 싶다는..."

  나?

  채린이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카렌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

  갑작스러운 기습에 채린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몸을 살짝 꼰다. 그리고 입을 열고는.

  "나도."

  역시나 지지 않고 원래 성격대로 자신의 마음을 시원하게 표현한다.

  `...저 마녀가 저런 모습도 있었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누님?`

  채린과 적대적인 사람들부터, 친분이 있는 헌터들까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모두 일제히 채린의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저 남자 알아?`

  `몰라. 헌터는 아닌 거 같은데? 한 번 봐도 저렇게 더럽게 잘생긴 얼굴을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아무리 검색해 봐도 나오지 않는 은발의 남자에 대한 기록.

  "둘이 뭐하냐? 저기서 영준이 열심히 싸우는 거 안 보이냐?"

  "큼..."

  둘 사이에 낀 삼색이 불편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헛기침하는 카렌과 채린.

  "주인은 무뚝뚝해 보이면서도 은근 이런 거 잘하더라."

  "무뚝뚝한 거랑 무심한 거랑 다른 거야."

  "맞아. 그리고 카렌은 우리한테만 이런다고. 아무한테나 그러지 않아."

  "어휴...저거나 봐라! 영준이 불쌍하다!"

  결국 커플에게 져 버린 삼색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괜히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린다.

  `미호가 그립다.`

  삼색이 괜히 서러울 때 영준의 경기는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타닥!

  지금껏 영준이 이미 몇 번 실패한 파고들기. 역시나 이번에도 우월한 무기의 길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창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대로 돌진하면 단번에 치명상이다. 하지만 이를 아득 깨문 영준은 오히려 발에 힘을 주며 앞으로 몸을 내민다.

  "어?"

  푸욱.

  복부 쪽에 그대로 박혀버린 창날에 오히려 공격한 사람의 입에서 당황 섞인 반응이 나온다.

  물론 재질이 나무인 만큼 아무리 마나를 실었다고 해도 몸 전체를 관통하진 않는다. 그래도...

  주르르륵

  지금 바닥에 뚝, 뚝 떨어지는 피가 증명하듯 더럽게 아프다. 거기다 영준의 기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덥썩.

  사람이 뭔가에 찔리면 고통과 본능 때문에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오히려 영준의 두 억센 손이 창대를 그대로 잡는다.

  헌터가 당연하게도 자신의 무기인 창을 빼려고 온 힘을 쓰지만.

  "끄으으..."

  ?

  지금 들리는 신음에서 알 수 있듯이 꼼짝도 하지 않는다.

  마나량.

  영준이 카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상승시킬 수 없던 그야말로 재능의 영역.

  각성 능력.

  영준은 오로지 `신체 강화` 하나뿐이다. 대부분의 B급 헌터 이상은 이외에도 더 가지고 있다. 이것 또한 재능이다.

  "이..."

  창대가 다시 휘어지려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하지만 영준의 손등에 힘줄이 불끈 솟으며 저지한다.

  `내가 노력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근력.

  다른 헌터들의 재능을 조금이나마 따라잡고자 카렌을 만나기 전부터 꾸준히 쌓아온 탑.

  마나를 상승시킬 수 있게 된 이후에는 더 독하게 노력했다.

  친구와 새벽마다 달리고, 운동하며 일할 때도 몇십 킬로에 달하는 쇳덩어리를 발과 손목에 찼다.

  그리고 그 노력은 마침내 충분한 마나량과 만나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무슨..."

  헌터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영준을 바라본다. 그제야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공격 때문에 곳곳이 찢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근육들.

  "미친..."

  마침내 힘이 빠져버린 헌터가 창을 영준에게 뺏긴다.

  "더...하시겠습니까?"

  피를 저렇게 흘리고도 자신을 향해 투지를 발하고 있는 중년의 독기를 보며 헌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졌어."

  방심했고, 실제 창이었다면 단번에 죽었을 거라는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저쪽도 아까 그 이상한 장비를 썼으면 훨씬 유리했을 테니까.

  "의료반! 빨리 올라와요!"

  이번에는 심판이 도전자의 승리를 선언할 겨를도 없이 소리쳤다.

  애초에 이렇게 연속으로 랭킹전을 뛴 사람도 드물었고, D급에서 A급으로 올라온 경우도 없었으니.

  "빨리 지혈하고, 의료실로 옮겨!"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탈진과 과다출혈이다.

  `그래도 해냈어.`

  영준은 흐려가는 의식 속에서도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훅 스쳐 지나가며 손에 뭔가를 쥐여 준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의 유리병.

  "포션이니 먹고 좀 자. 잘했다."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는 믿음직한 목소리에 영준은 아름답게 퇴장했다.

  "채린? 여기 삼색 잠깐 맡아주고 B급 랭킹전 얘기 좀 해 줘."

  "어? 지금?"

  "응. 지금 해야 돼."

  모든 헌터는 D급부터 차례대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

  S급 헌터의 보증을 받은 헌터는 B급부터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채린님?"

  채린이 몇 마디 하자 바로 심판이 고개를 끄덕인다. 협회에서 채린의 이름값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심판이 손짓하자 무대를 청소하는 직원들이 올라와 깨끗하게 청소를 시작한다.

  양동이 담긴 물에 의해 씻겨나가는 영준이 흘린 피와 땀.

  `충분히 가치 있었다.`

  이미 영준의 도전 덕분에 발 디딜 곳 없이 꽉 찬 랭킹실. 방송까지 합치면 거의 모든 헌터들의 주목을 끌었다.

  "뭐야? 왜 저래? 또 누가 올라와?"

  [이어서 이채린님 보증을 받은 D급 헌터 카렌님의 랭킹전이 있겠습니다.]

  채린의 요청대로 스피커로 나온 안내 말에 층 전체가 시끌벅적해진다.

  "절단의 마녀가 누굴 보증해?"

  "D급 헌터?"

  "어쩐지 상위 랭크에서 저 남자에 대한 정보가 안 나온 이유가 있었어. 설마 D급이었을 줄이야."

  덜컹!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관심에도 카렌은 그저 청소가 끝난 무대의 중앙으로 걸어가 선다.

  그리고는 그저 장내의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석상처럼 잠시 기다렸다.

  부스럭..

  이내 잠잠해진 주위에 카렌이 자신의 품을 뒤적거렸다.

  뭘 하려는 걸까.

  움직인 하나, 하나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그리고 모두의 궁금증이 폭발할 때 쯤.

  펄럭!

  손에 들린 파일 하나.

  카렌이 손가락을 까닥이며 우아하게 첫 장을 펼친다.

  "B급 헌터. 오르간."

  B급의 하위 헌터다. 그냥 B급 헌터증이나 따려는 걸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컸는지 특별한 것 없는 지목에 일제히 터져 나온 탄식.

  `이채린이 은퇴하고 뭘 하나 했더니 남자에 홀린 거였어?`

  `지금껏 누구도 보증한 적이 없었는데...역시 저 마녀도 사람이었군.`

  `잘생기긴 했다만.`

  스르르륵...

  "저건 무슨 능력이야?"

  그런데 카렌의 등에서 은빛 물결이 아름답게 퍼져 나오자 헌터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집중한다.

  정보는 생명이다. 괜히 자신들이 여기 와 있겠나. 다 경쟁자의 기술과 약점을 분석하기 위해 보는 거다.

  `얼음? 아니야. 저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모두가 분석하기 바쁠 때 금발의 근육질의 남성이 무대 위로 올라오고 심판이 카렌에게 묻는다.

  "방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거나. 저 놈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해."

  "허...?"

  여전히 한 손에는 서류를 든 채로 건방진 말을 지껄이는 도전자. 그 모습에 B급 헌터 오르간은 주먹을 마주친다.

  "대련으로 해. 내 무기를 쓰면 오래 팰 수 없으니까."

  이내 기다란 나무 봉이 남자의 손에 쥐어지고 심판은 시합 시작을 알린다.

  "너, 뭐하냐?"

  그런데 여전히 아까부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놈. 무기 대신 아까부터 한 손에 들린 파일도 여전하다.

  "흠...많군."

  바로 앞에서 말하는 남자의 말은 들리지 않는지 서류를 슬쩍 넘겨 보던 카렌이 미간을 찌푸린다.

  "이 새끼..."

  콰아아앙!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보호막에 부딪혀 기절해 버린 오르간.

  "방금...뭐였어?"

  헌터들의 웅성거림은 들리지 않는지 카렌은 계속 파일을 뒤적거린다.

  "다음은 제임스...귀찮군. 심판, 마이크 있지? 이거 받아서 불러."

  심판이 얼떨결에 파일을 받아 펼치자 수많은 헌터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이 보인다.

  B급부터 A급, 심지어는 내로라하는 S급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대체 이 미친 남자는 뭘까. 설마 헌터협회에 와서 차례대로 도장 깨기라도 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한 명씩하면 시간낭비야. 무대 위로 올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불러."

  "..."

  생각보다 더 미친 남자였다.

  "다 덤벼."

  카렌은 단 한마디로 심판을 재촉하며 목을 옆으로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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