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은 항상 중요하지
새벽임에도 환하게 조명이 켜진 방 안.
한 남자가 안주도 없이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거지 같은 세상. 지랄 맞을 인생 같으니라고!"
듣는 사람도 없지만 괜히 한 번 중얼거려 본 한탄.
남자의 눈 밑가는 거뭇하게 다크써클이 내려왔으며 피부는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 해 푸석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밤에 꼭 밝은 곳에 있어 주시길 당부 드립니다. 그리고 근거 없는 유언비어는...]
"크흐흐흐...밤에 나가지 말라고?"
남자가 소주를 벌컥 들이키면서 TV에서 팔자좋게 양복을 차려입고 지껄이는 아나운서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럼 나는?"
남자의 직업은 화물 운송업. 교통이 막히지 않는 새벽에 보통 일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밤이 인간의 영역이 아니게 된 이후로 남자는 강제로 언제 끝나는 지도 모르는 무급휴가를 받았다.
차르륵
손으로 창문 앞의 커텐을 살짝 들춰보니 자신의 일거리를 빼앗은 놈이 보인다.
"저...씨...으아악!"
뭐라고 고함치려다 순간 일렁이는 어둠에 남자가 재빨리 커텐을 치고는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다.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쉰다. 머릿속에서는 놈들에 대한 소문이 떠오른다.
-빛이 없는 곳에 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불...불..."
남자가 재빨리 머리 맡에 놔 둔 촛불을 찾았다.
-불은 귀신을 쫓아낸다.
신세계란 신생종교에서 퍼뜨린 말. 처음에는 코웃음 치며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켜 놓으니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든다.
무엇보다...
"아..."
어둠 때문에 두려웠던 마음. 하지만 하얀 초위의 불꽃 특유의 매끈한 붉은 곡선은 불안했떤 마음에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남자의 입에서 맥빠지는 숨이 흘러 나오고 눈빛은 몽롱해진다.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는 남자의 동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불공평하지 않나?
그리고 들려오는 속삭임.
-세상 사람들은 항상 행복하고 현실감 없는 말들을 늘어 놓지.
맞다.
TV나 SNS에서 보이는 맛있는 음식들과 여행지.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는 자신도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뭐였지? 그 꿈은 어디로 갔지? 누가 그렇게 만들었나? 정당한 보상은 어딨지?
"이팀장 이 개새끼..."
돌아온 건 가증스러운 얼굴로 무급휴가 대상에 자신의 이름을 집어 넣은 관리자 놈. 평소에 대충 대충 일하는 놈은 팀장과 친하게 지낸다고 주간 근무로 빠졌다.
-부조리 하지않나? 세상은 잘못 되었다. 너는, 우리는 이런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차별 없는 세상, 새로운 '신세계'를 건설하자.
점점 불꽃은 속삭임음 커지고 더 크게 목소리를 낸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는 방에서 일어났다.
달그락
주방에 있는 칼을 집어든 남자는 거침없이 집 밖을 나서고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 *
민들레 카페. 잠시 인사를 나눈 뒤? 카렌은 모두를 자리에 앉히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화! 정화!"
"...그래, 프로젝트 이름은 정화라고 하자. 그럼 광신도들부터 얘기하지. 의장?"
"이들의 증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급격하게 광폭해지거나, 우울해지거나. 저희가 한 놈을 잡아 검사해보니 뇌 쪽의 편도체와 전전두피질 쪽이 뭔가 이상하더군요."
"쉽게 말해봐."
카렌의 말에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편도체는 들어봤는데 대체 그 전...어쩌고는 정말 생소했다.
"두 부위 모두 행복, 즐거움, 죄책감, 우울감, 분노 등의 감정을 조절합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이상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공통된 뭔가가 있었나?"
"세상이 꺼진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꾸잉?"
소설이나 만화에 나올 법한 말을 연합 의장이 하자 카렌이 의장을 쳐다봤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진짜 꺼졌어?"
오로라에 같이 갔다 온 채린도 놀라서 모두를 둘러봤다.
"밤중에 잠깐 연합의 모든 전력 시설이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전기를 총괄하는 연합전력에서 근무하는 누군가의 소행이었죠. 물론 금방 복구되긴 했지만 모두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랬겠지."
현대인에게 전기가 끊기는 건 엄청난 사항이다. 결제, 난방, 조명, 교통부터 현관문까지 요즘은 전부 전기로 작동하니까.
"그 이후로 달이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사람들을 납치하는 귀신이 나타났죠. 연합에는 극심한 혼란이 찾아왔고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제가 말할게요.
"
엘리가 한 손을 들고는 의장의 말을 받았다.
"신흥종교, 신세계에서 가까운 곳에 불을 두면 어둠 속의 귀신이 달려들지 못한다고 퍼뜨렸어요."
"불? 이 불?"
화르륵!
카렌의 손바닥에서 불이 생겨나자 마법을 좋아하는 엘리의 눈이 반짝인다.
하지만 이내 집중하려 고개를 흔들어 성녀로 다시 돌아오고는 입을 열었다.
"맞아요. 그 이후에 급격하게 광신도가 생겨났죠."
톡, 톡.
찾아온 달을 가리는 어둠. 그 속에서 생겨난 귀신들.
그리고 그 틈을 타 핌불에게 세뇌당한 엘프들이 설립한 종교, 신세계가 퍼뜨린 소문.
그리고 생겨난 광신도들.?
얼핏 보면 별 연관 관계없는 키워드들을 이어보니 답은 명확했다.
"불과 어둠을 이용해서 감정을 자극하고 있군."
불을 바라보다 보면 사람은 순간 멍해진다. TV에서 최면을 걸 때도 괜히 라이터의 불꽃을 이용하는 게 아니다.
거기다 어둠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심리적인 안정감과 의존성을 이용한 거다.
"감정을 갖고 노는 놈들이야. 광신도가 된 사람들은 배경이 모두 비슷하지 않나?"
"맞습니다. 연합에서 비밀리에 파악한 바에 의하면 광신도 대부분이 우울증이 심한 사람들과 사회에 불만이 많은 시민들입니다."
이게 그 놈이 말한 지구의 힘을 깎을 계획이었나.
확실히 핌불의 방식과는 달리 다수의 대상으로 진행되어 확장성이 대단하고 교묘하다.
"그래도 직접적인 세뇌는 아니니 돌릴 방법이 있지?"
"강한 충격을 받으면 돌아오는 것 같긴 합니다. 다만 연합에서 나서서 하기에는 인권 문제가 좀..."
"그럼 됐군."
"아빠, 그럼 제가 해볼까요? 보니까 신성력으로도 되는 것 같은데..."
"혼자서 어떻게 다 하려고. 그건 나랑 같이하자. 시범을 보여줄게."
이제는 딸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작정이다. 아직 어린나이에 어른보다 더 일하는 것도 서러운데 퇴근은 최소한 제때 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너희도 해줄 게 있다."
자신들에게 내려진 첫 카렌의 부탁에 모두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꿀렁거린다.
"의장은 침략자에 대한 정체를 시민들에게 알리도록. 외부의 적을 통해 연합을 하나로 모아야 해."
"지금 말씀이십니까?"
의장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안 그래도 혼란에 극에 달한 상황에서 대형 폭탄을 떨어뜨리는 거나 마찬가지다.
"걱정 마. 동시에 하면 되니까. 엘리는 신세계를 침략자들이 보낸 적이자 이단으로, 광신도는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이라 공표하고."
"네. 알겠어요."
신세계가 무섭게 세를 확장해도 솔라리 교단은 연합의 국교이자 아직도 반 이상의 시민이 믿고 있는 종교다.
의장의 말에 충분한 지원사격이 될 거다.
"강이사는 재계 쪽에 얘기해서 도시 복구와 긴급 지원금을 지원해. 이놈들은 사람들의 감정의 취약점을 파고든다. 일단 최소한의 생계가 가능하게 만드는 게 급선무야.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일단 돈을 뿌려."
"맡겨 주세요. 재단의 회원님들 협조를 구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맨드레이크를 이용한 치료로 시작한 모임이었지만 이제는 엄격한 회원제로 운영되어서 진짜 부자를 증명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버린 모임.
재계에서 강이사의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커져 있었다.
"민재는 연금술사의 이미지를 높일 좋은 기회다. 빛을 내는 발광석을 만들어서 무료로 뿌려. 지원은 재단에서 해주지."
"발광석이요?"
"헛소문은 없애는 것보다 덮어쓰는 게 효과적이야. 불 대신 마석으로 만든 발광석이면 그 놈들이 말하는 귀신도 쫓아낼 수 있어. 마법의 단어들 있잖아. 집중력이 좋아지고, 아이들 공부에 좋다 그래."
"그럼 귀여운 캐릭터들 안에 넣거나, 무드등으로 만드는 게 효과적이겠군요."
하나를 가르쳐주면 최소한 두 개는 깨닫는 자기 제자를 카렌이 흡족하게 바라봤다.
"미호. 암흑가는 어때?"
어떻게 보면 놈들의 유혹에 가장 취약한 곳이 암흑가다.
"걱정마세요, 아버님. 제 능력으로 암흑가 정도는 통제할 수 있어요."
"좋아. 그럼 빛을 내는 발광석을 만드는 데 부족한 인력은 암흑가에서 보충해. 앞으로도 주요 수입원이 될 수 있을 거야."
"안 그래도 일자리가 부족했는데 잘됐네요.
후르르릅 머리를 썼더니 당이 더 땡긴다. 카렌이 남은 딸기라떼를 단숨에 들이마시며 마무리했다.
`역시 카렌님이시다.` 의장의 눈꼬리에는 눈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얼마나 힘든 나날들이었나.
갑자기 원인은 모르는 현상들이 일어나며 시민들에게 욕은 바가지로 먹었다.
암울한 보고서들은 책상에 쌓이고 자신은 그야말로 무력했다.
`내가 잠시나마 의심했다니.`
자신만이 이 그룹에서 카렌의 말에 반문했던 사실이 부끄러웠다. 그저 얌전히 알았다고 해야 했거늘.
"그런데 나는 뭐해?"
삼색을 쓰다듬고 있던 채린이 슬쩍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
처음으로 카렌의 말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채린이 딱히 주도적으로 뭔가를 할 일이 없었다.
"저...혹시 헌터협회를 잠깐 방문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때 민망한 카렌을 구해주는 목소리가 의장에게서 들려왔다.
"저는 은퇴했어요. 협회도 안 가본 지는 꽤 됐는걸요?"
"요즘 협회가 좀 심상치 않습니다. 창천이라는 헌터를 중심으로 우월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소문이 심상치 않게 들려와서요."
저번에 영지에 와서 꼴사납게 기절만 하다 간 연합에 몇 없는 S급 헌터. 채린이 제일 싫어하는 놈이다.
"그 병ㅅ...아니, 후...알았어요."
채린이 엘리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언니, 우월주의자들이 뭐예요?"
"각성자는 비각성인 보다 우월하다. 선택받은 진화된 인류라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야."
"조금...덜떨어진 사람들이네요!"
웃으면서 뼈를 때리는 엘리의 말에 모두가 피식 웃었다.
"협회에서 혹시 문제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 너는 그만 과일 좀 먹어라!"
카렌이 슬그머니 또 자신의 목걸이 아공간을 뒤적이는 고양이의 앞발을 톡 쳐냈다.
"내가 먹으려는 게 아니다! 주인도 모두에게 나눠 준다고 하지 않았냐."
"...알았다. 알았어."
억울한 표정을 잔뜩 지은 삼색의 말에 카렌이 못 말린다는 듯 아공간을 열어 테이블 위에 과일을 쏟아 내었다.
"꾸잉, 이거 먹어 봐라! 엘프들이 직접 키운 것들이다."
귤, 감, 키위, 살구, 복숭아 등 눈을 즐겁게 해주는 갖가지 색의 향연에 모두 즐겁게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와아아! 이거 진짜 맛있어요."
"몸에도 좋다."
"어쩐지 삼색이가 못 본 사이에 저렇게 살찐 이유가 있었네요."
"...끄응...운동 할 거다."
미호마저 길쭉한 하얀 손가락을 자신의 배를 콕 찌르자 삼색이 몰래 집었던 과일을 내려놓았다.
카렌이 새삼스레 삼색을 쳐다보았다. 자신이 말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그래도 여자친구인 미호가 말하니 효과가 확실하다.
"곧 엘리랑 운동이나 가자."
"아까 말씀하신 시범이요?"
"그래, 신세계의 본진을 쳐야겠어. 비어드에게 새롭게 영감을 얻은 방법도 좀 시험해보고. 잘 되면 한 번에 끝낼 수 있을거야."
요즘 세력이 불어나는 것도 심상치 않고 무엇보다 신세계는 연합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침략자들의 전초기지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좀 귀찮으실 거예요. 본진의 규모가 너무 커서 저희도 쉽게 못 건드리고 있거든요."
엘리가 카렌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해서 미리 눈치 빠르게 말했다.
?
"...그럼 성전사들도 좀 빌리자."
"물론이죠! 성전사님들도 좋아하실 거예요. 이 과일도 갖다 드려도 되나요?"
"이미 한길에게 맡겨뒀어."
"아빠!"
엘리가 포옥 카렌에게 안기고 사람들은 웃으며 밀린 여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껏 연합에서 고생했던 사람들에게는 잠시나마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
카페 밖으로 도란도란 말소리가 나오고, 바로 앞의 숲속에서는 벌레 울음소리들이 맞장구치며 노래하고 있었다.
* * *
?
일주일 뒤.
"이 도시 전체가 신세계의 본진이라고?"
어느 깊게 검은 장막이 드리운 밤.
이제는 위험한 영역이 되어버린 깜깜함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겁도 없이 밖에 나와 있었다.
"네. 신세계의 본진 맞아요."
검정색 밴 안의 조명 속에서 엘리가 말했다. 옆에는 절지아와 한길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그나저나 아무리 작은 도시라지만 전체가 종교의 본거지라니..."
"저희도 놀랐습니다. 뿌리에서 물류 유통량을 추적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잘됐어. 그럼 시작하지."
드르륵
카렌이 밴의 문을 옆으로 열며 엘리의 손을 잡으며 나갔다.
그 뒤를 절지아가 따르면서 귀를 톡톡 두드려서 무전을 보낸다.
우우우웅...
그러자 잘 포장된 도로 위로 마석 엔진이 탑재된 무소음 대형 버스 수십 대가 달려온다.
끼이익.
타이어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멈춰 선 버스들.
기이이잉-
버스의 출입문이 열리면서 하얀 외투를 걸친 이천에 가까운 성전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꾸벅
일제히 이단 심판관과 성녀에게 예를 표한 이들은 둘의 뒤에 잘 훈련된 군대처럼 오와 열을 맞춰서 선다.
"프로젝트 정화. 시작한다."
카렌과 엘리가 선두에서 걷자 거대한 순백의 물결이 일제히 도시로 흐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