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1/140)

  거대한 장난감

  "들어가서 좀 쉬었다 밤에 보자."

  "네, 아빠! 오늘 진짜 고마웠어요!"

  대피소의 사람들은 카렌이 나선 후 얌전해졌고 엘리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일찍 퇴근 할 수 있었다.

  엘리를 문 앞까지 데려다주고 카렌은 강이사와 함께 지하기지로 가는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비어드가 만든 우리집 지하로 대피하는 게 프로토콜 헤르메스였어?"

  "예. 사람들이 오가는 입구와 출구는 모두 숲속에 따로 있어 카렌 님의 집 근처는 평소와 똑같습니다."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밖으로 보이는 날것 그대로의 흙들 이후에 매끄러운 기지의 벽으로 보이는 것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대체 얼마나 깊게 판 거야?`

  직접 눈으로 봐도 엘리베이터의 속도는 확실히 빠른데 도무지 도착했다는 알림음이 안 울린다.

  "주인, 잘했지? 비어드랑 나랑 같이 만든 거다."

  "...그래."

  이번에는 카렌도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지하 시설이 없었다면 희생자가 많았을 테니까.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문이 열리며 펼쳐지는 광경에 카렌은 어떻게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어떻게 지하에 수용할 수 있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카렌이 순간 느껴지는 개방감에 숨을 잠깐 삼켰다.

  무슨 지하에 태양과 하늘이 있다. 물론 인공적으로 만들었겠지만, 피부에 와닿는 햇살의 따뜻함은 마치 진짜 같다.

  "이왕 만드는 김에 제대로 하는 게 드워프와 영물의 방식이다."

  은근슬쩍 자신을 껴 넣는 삼색을 무시하고 카렌은 태양을 흘낏 살펴봤다.

  '인공 드래곤 하트네.'

  저번에 비어드가 가져갔던 카렌의 역작 중 하나가 어느새 기지의 동력원이자 태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어드님의 설명에 의하면 몇천 년은 지속될 반영구 동력이라고 하더군요. 식물, 동물, 인간에게도 실제 태양과 똑같은 효과를 줘서 목축, 농사를 지을 수 있고, 기지에 비축된 식량만으로도 만 명이 최소 20년은 먹을 수 있습니다."

  강이사가 이미 외워둔 듯 카렌을 안내하며 막힘없이 설명한다.

  "운석이 직격해도 기지는 끄떡없습니다. 크기는 옛날 한국의 제주도 정도 되고 만약 마음만 먹는다면 지하로 더 넓힐 수도 있습니다."

  "그냥 또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네."

  "다 카렌 님의 덕분입니다."

  자신은 정말 한 게 없다. 그냥 얘들이 알아서 했지.

  "그런데 직원들에게 얼굴을 보여주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강이사가 문 앞에서 잠깐 멈춰서서 카렌에게 물었다.

  지금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민들레 재단의 직원들이 근무하는 상황실이 열린다. 그 너머로는 바로 또 거주지 구역이다.

  "괜찮아. 민들레 재단은 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감사합니다."

  마침내 열심히 키운 조직이 카렌의 울타리로 들어가자 강이사가 감격한 얼굴로 힘차게 열림 버튼을 눌렀다.

  화아악!

  안쪽에서 기계가 웅웅거리는 소리와 바쁘게 움직이는 10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보인다.

  "거기 자료 조합해서 보안팀 쪽에 넘겨."

  "연합 여론, 상황, 모든 걸 조합해서 재단 데이터베이스에 넣어. 혹시라도 연합 인터넷망이 저번처럼 끊길 수도 있으니 기지 쪽 서버에도 백업하고."

  저들의 목적은 단 하나다.

  카렌이 궁금해하는 단 하나의 질문과 요청을 대답하고 수행하기 위해 이들은 자료를 수집하고 모으고 대비한다.

  "어?"

  바쁘게 타자를 두드리다 잠깐 커피를 뽑으러 가려던 한 여직원이 일어서다 문 앞에 선 은발의 남자를 발견했다.

  -그 분은 은발에, 잘생기고, 보기만 해도 빛이 나더라고. 더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내가 목이 좀 말라서...술 한잔 사라고!

  토네이도를 막을 때 VIP를 도와줬던 헬기 조종사가 했던 말.

  직원이 아스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에 떨리는 손가락으로 남자를 가리키며 중얼거린다.

  "은발에...잘생겼고...후광..."

  증언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그리고 옆으로는 자신들의 보스인 강이사가 보인다.

  "VIP?"

  끄덕

  "꺄아아아아아! 진짜 잘 생겼어! 싸인! 싸인해주세요!"

  강이사가 맞다고 해주자 여직원이 환호성을 내지르고는 급하게 자신의 책상에서 A4와 볼펜을 찾아 뒤적거린다.

  "VIP라고?"

  "어?"

  단숨에 카렌에게 집중되는 이목.

  "와, 주인 팬이 몇 명이냐? 저 사람들 가족들까지 합치면 엄청난데?"

  삼색이 눈치 빠르게 카렌을 한 번 긁고는 재빨리 아공간에서 사과들을 빼서는 제일 푹신해 보이는 직원 의자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제 시작되겠지. 3, 2, 1.`

  삼색은 씨익 웃으며 속으로 카운트를 셌다.

  "저 완전 팬이에요.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맨날 VIP로만 불렀거든요."

  "...카렌이다."

  과연 삼색의 예상대로 극성 팬 미팅이 시작됐다.

  "목소리 그 녹음이 완전 똑같아!"

  카렌의 입에서 나온 단 한 마디에도 열광적으로 소리를 질러대는 직원들 때문에 삼색은 냉큼 자기 귀를 덮었다.

  바로 앞에서 듣는 주인은 더 시끄러울 거다.

  "녹음?"

  "네! 그 헬기에서 조종사와 나눈 카렌 님의 무전 내용을 저희가 퇴근할 때 맨날 듣거든요."

  대체 그건 왜 들을까. 카렌은 슬쩍 강이사를 봤지만 강이사는 어느새 슬그머니 삼색의 옆에 가 있었다.

  `강이사...너마저...`

  처음으로 강이사에게 느껴보는 깊은 배신감.

  게다가 강이사는 삼색에게 사과까지 한 알 받아들고 있었다.

  "사랑해요!"

  "이번에도 연합을 구하시죠?"

  차라리 적이었다면 뭐라도 했을 텐데. 자신이 좋다고 이러는 거니 카렌도 도무지 어쩔 수가 없었다.

  "제 가족들도 무사해요! 다 카렌님 덕분이에요."

  어쩐지 아무리 그래도 좀 과한 반응이다 싶었다.

  위급상황에서 재단에서 가족까지 이런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줬으니 카렌을 보는 직원들의 눈이 반쯤 뒤집혀 있었다.

  "싸인! 싸인!"

  "사진 찍어주세요!"

  "...줄 서라."

  마침내 카렌도 포기하고 받아들였다. 피할 방법은 없으니 이왕 할 거면 밤에는 약속이 있으니 빨리 끝내자.

  * * *

  ?

  딸랑!

  민들레 카페 출입문에 달린 방울이 경쾌한 소리를 울리며 출입자를 반겼다.

  "어서오세요."

  "여긴...좋군요."

  곳곳에 새치가 돋아난 연합 의장이 노곤하게 자신을 반겨주는 카페의 분위기에 오랜만에 평온한 얼굴을 지었다.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엘리니아 산 잎사귀 차입니다. 맨드레이크도 넣어 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고마워요."

  오는 길의 경치마저 의장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카렌의 연락을 받고 백호의 바람에 실려 오는 동안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이곳의 야경은 그야말로 비현실적.

  -와아!

  세상은 별빛, 달빛조차 정체를 알 수 없는 현상에 의해 암흑 속에 먹혀버렸지만 ?카렌의 영지에 들어오자마자 의장은 아이처럼 감탄을 나뱉었다.

  이제는 거의 멸종된 반딧불이들이 떼를 지어 숲에서 비행했고, ?은은한 달빛을 받아 빛나는 약초밭 위의 돔 모양 은빛 실드.

  그리고 동화책 속처럼 숲 옆에서 카페 창문 밖으로 새어 나오는 밝은 조명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음료 나왔습니다."

  ?

  의장은 잠시 기억을 되짚는 동안 나온 차를 받아서 이미 저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강이사를 향해 걸어갔다.

  "또 뵙습니다."

  강이사와 의장은 카렌이 받을 마석 자동차와 광산에 대한 조율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여기 앉으세요. 다른 분들도 곧 오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카렌님은 어디 계시죠? 먼저 인사를 하고 싶네요."

  "밖에 확인할 게 있다고 하십니다."

  "지금요? 하지만 밤에는 침략자들의 하수인들이 나와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밝은 빛이 없으면...아!"

  위험을 경고하려던 의장은 강이사의 여전한 미소에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 멈췄다. 그리고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내가 누구를 걱정하는거야.'

  그 속에서 지금 활보하고 있을 카렌의 모습을 떠올리자 통쾌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저벅, 저벅

  의장의 예상대로 어둠 속에서는 카렌과 삼색이 한가로이 산책하듯 걷고 있었다.

  "과연, 밤에 귀신이 출몰한다는 얘기가 그럴듯해."

  지금 자신의 몸을 끈적하게 뒤덮은 이 어둠,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꾸잉, 영지 밖으로 나오니 분명 방금까지 하늘에 있던 빛이 안 보인다."

  "이놈이 막아 버린 거야."

  언급하기 무섭게 알 수 없는 뭔가가 불청객들을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뻗는다.

  기기기긱...

  하지만 카렌이 주위에 둘러놓은 실드에 막혀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만 소름 끼치게 서늘한 밤공기를 타고 울려 퍼진다.

  "이 놈은 딱 봐도 어둠 속성인가? 진짜 네가 말한 게임 같네. 물 다음에 어둠이라... 이젠 다음에 뭐가 나오려나."

  "꾸잉, 요즘은 현실이 더 게임 같다. 개판이라니까?"

  핌불 녀석은 자신이 흙 밑으로 숨자 거의 힘을 쓰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음?"

  카렌이 지금껏 했던 것처럼 실드로 만든 매개체 위에 상상력을 덧씌워 빛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매개체나 마법진 없이도 그냥 마법을 쓸 수 있겠는데?`

  좋은 쪽으로 말이다.

  카렌이 손가락을 보자 반지들이 자신의 마력과 공명해 은은하게 세계수의 잎을 닮은 초록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된다.

  파앗!

  "끼에에에에엑!"

  "으아악! 내 눈!"

  카렌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나오자 양쪽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 곳은 당연히 어둠 속의 무언가. 다른 쪽은 삼색이었다.

  "아, 미안. 너도 시각이 예민하지."

  자신의 마력이 들어간 만큼 빛은 카렌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옆에 있던 삼색에게는 그야말로 봉변이다.

  "주인! 내가 엄청난 반사신경으로 눈을 안 감았다면 위험했다!"

  "크흠..."

  하긴 대낮처럼 밝아진 주위를 보니 보통 인간이었다면 운 나쁘면 실명까지도 될 수 있었겠다.

  "끄륵, 끄륵..."

  "후, 이젠 좀 적응됐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귀신이냐?"

  "...벌써?"

  몇 초나 됐다고 눈을 껌뻑거리는 이 고양이의 정체는 뭘까. 정말 지옥에 떨어져도 혼자서 유유히 살아나오지 않을까.

  "확실히 생각대로 빛에 좀 약하네. 그나저나...이 인간을 닮은 생김새는 뭐야?"

  카렌이 자신의 손아귀에 잡힌 놈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흔히 추리소설이나 만화에 나오는 흑막을 표현하는 온몸에 검은 타이즈를 뒤집어쓴 인간 같다.

  인간과 일부러 비슷하게 만들어 공포를 극대화하려고 한 건가? 어찌됐든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절로 나빠진다.

  "크륵, 크륵, 크륵!"

  놈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지만 이미 카렌의 오른손이 빛을 내면서 단단하게 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렇게 잡아 둘 수 있고, 그렇다면..."

  화르르륵!

  "불에서 나오는 빛은 어떨까."

  이번에는 카렌의 왼손에 화염이 피어오른다.

  "확실히 편해. 세계수가 좋은 선물을 줬어."

  마법을 쓰는 과정 중에 귀찮은 과정 하나가 생략되었다.

  `그 녀석이 이걸 보면 거품을 물겠지?`

  세계수의 본체로 만든 반지들이라... 만약 오즈로가 알게 된다면 아마 자신의 남은 수명을 모두 걸고 지구로 다시 넘어오지 않을까.

  "끄르르르륵..."

  불을 가까이 대자 어둠으로 이루어진 놈의 몸이 일렁이면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온다.

  "일단 빛이면 되는 건가? 삼색, 네 번개로도 해 봐."

  "알았다."

  파지직!

  이번에는 전기를 머금은 토실한 삼색의 꼬리가 놈의 하체로 향하자 똑같이 어둠이 움츠러든다.

  "됐어. 실험은 끝났다. 삼색, 눈 감아."

  "알았다."

  카렌이 마력을 손아귀에 불어 넣자 지금까지는 약과였다는 듯 엄청난 빛이 뿜어져 순식간에 어둠을 흔적도 없이 소멸시켜 버렸다.

  "근데 주인, 적이지만 좀 불쌍하다."

  표정은 없었지만 여러 가지 실험 후 죽을 때 왠지 마지막에 편안해 보인 건 기분 탓일까.

  "160년 넘게 갑자기 다른 세계로 떨어졌다가 쉬러 돌아왔는데, 여기서도 세상을 구하고 있는 내가 더 불쌍하지 않냐."

  "그러네."

  "카페로 돌아가자. 단 거 먹고 싶네. 슬슬 사람들이 다 왔을 거야."

  "나도! 내가 미리 영준에게 연락해 놓겠다."

  *

  띠링!

  "딸기라떼 두 잔 나왔습니다."

  카렌은 삼색과 같이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영준이 미리 주문받은 음료를 건넨다.

  저쪽 테이블에서는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이렇게 됐지.`

  카렌은 걸어가면서 자신을 환한 얼굴로 반기는 이들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연합 의장을 시작으로 참 각계의 사람들이 모였다.

  채린. S급 헌터.

  강이사. 재계의 넓은 발.

  미호. 암흑가의 수장.

  엘리. 종교계의 최고 지도자.

  한민재. 연금술 협회장.

  '그나마 혼자 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지구에 온 지 벌써 3년쯤 됐나. 그새 여러 인연들이 많이 생겼다.

  이들을 한 자리에 모두 불러 모은 카렌이 입을 열었다.

  "그럼 연합 정상화 작업을 시작해볼까?"

  "주인! 프로젝트 이름은 '정화'로 하자니까? 멋있지 않냐?"

  "..."

  그리고 뭘 하든, 어디서든 존재감 넘치는 이 고양이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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