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9/140)

  예방이 치료보다 낫다

  "이거 진짜 맛있네. 좀 더 싸주라."

  "이미 아공간에 몇 톤 들어왔거든?"

  카렌이 자신의 목걸이 아공간을 쓰다듬으며 질린 표정으로 삼색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쉬지 않고 우물대는 저 볼때기를 봐라.

  "주인, 과일은 살 안 찐다."

  사과, 바나나, 블루베리, 복숭아, 파인애플, 딸기 등을 쉬지 않고 먹어대는 고양이 한 마리.

  그 뒤로는 먹고 나온 과일들에서 나온 씨, 껍질이 뒤로 주르륵 늘어져 있다. 엘프들은 오히려 숲에 거름이 된다고 좋아하더라.

  "과자나 군것질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 않냐? 그리고 훨씬 맛있고. 주인도 먹고 있으면서 왜 그러냐?"

  하긴 정작 카렌과 채린도 포도알 하나를 꿀떡 넘기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너 지금 배가 땅에 닿을 것 같아. 간신히 살 좀 빠졌는데 미호가 싫어하지 않을까?"

  "과일은 살 안 찐다니까?"

  "그렇게 먹으면 물을 먹어도 쪄! 어허!"

  카렌이 슬금슬금 아공간에 손을 뻗는 삼색의 통통한 앞발을 쳐냈다.

  "그럼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지금 일행이 있는 곳은 세계수 앞.

  오로라의 마나가 가장 집중되는 이곳에서 아샤가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물었다.

  "바로 연합으로 갈 수 있는 거야?"

  "네. 세계수님의 도움을 받으면 연합의 어디든 이동시켜드릴 수 있어요."

  핌불을 쫓아내고 엘프들의 환대를 받은 지 벌써 한 달.

  `솔직히 편했지.`

  눈 앞에 펼쳐진 대자연, 어딜 봐도 푸르른 색은 눈을 쉬게 해주었고, 공기는 맑았다.

  먹을 것? 세계수가 직접 내려 준 과일이면 맛, 포만감, 심지어 몸에 쌓인 노폐물까지 싹 빠져나간다. 하지만.

  "서울로 데려다줘. 오랜만에 엘리 만나야지."

  짧은 휴가라 생각하고 맘 편히 즐겼다. 어차피 모두에게는 몇 달 정도 걸린다고 얘기했으니까.

  "맞아. 엘리 보고 싶네. 우리는 또 숲에서 또 보자."

  "몽!"

  채린이 어느새 땅 속에서 솟아난 동글이를 품에 안고서 말했다.

  "정말 딸을 사랑하시네요."

  한 달 동안 카렌의 지구 적응기를 들은 아샤다. 그동안 제일 많이 언급한 엘리라는 소녀.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성격부터 외모까지 모두 단번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다.

  "사실 과일들도 엘리랑 사람들 주려고 싸가는 거야."

  엘리, 민들레재단, 교단에게 나눠 주려면 이것도 모자랄지도 모른다.

  "뭐? 그거 다 내 거 아니였냐?"

  "목걸이 아공간은 어차피 썩어. 세계수가 틈틈이 채린 찾아올 때 챙겨온다고 했으니까 걱정 마라."

  아샤, 오웬을 필두로 구원자들을 마중 나온 모든 엘프들이 카렌의 말에 감탄하며 존경스러운 눈길을 채린에게 보냈다.

  "아니...그...여러분은 대체 왜 그러시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여러분은 저보다 세계수랑 맨날 붙어 계시잖아요."

  "세계수님과 엘프의 관계는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숭배의 대상입니다. 오히려 채린님은 타종족이라 더 편하신 것 같더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샤가 부드럽게 채린을 향해 마치 딸을 맡기는 엄마와 비슷한 푸근한 미소를 보낸다.

  "그럼 이만 갈게. 그나저나 세계수는 언제 신으로 승격한대?"

  카렌이 엘프들에게 들리지 않게 속삭이며 자신들의 위를 올려다 봤다.

  무성하게 뻗은 굵은 가지들 밑으로 열린 커다란 열매들. 저 안에는 엘프들이 하나, 하나 자라고 있었다.

  "신이 되기까지 엘프들의 숫자가 부족해요. 최대한 노력하고 계시지만 간신히 침략자들의 행성이 지구에 도달할 때 되실 것 같아요."

  "핌불에게 한동안 잠식당해서 그런가?"

  "네. 그때의 공백이 컸어요. 적들이 굉장히 영리했던 거죠. 지금은 최대한 힘을 키우고 계세요."

  ??

  하긴, 자신에게 줄 링도 간신히 마련했다 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니까.

  "나는 다시 말했지만 캣잎이랑 과일만 계속 보내주면 더 이상 보상 필요 없다."

  "나도. 딱히 필요한 것도 없고, 동생이 계속 와준다니까 됐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누가 봐도 행복한 표정으로 배를 두드리고 있는 고양이, 한 달 동안 채린의 곁에서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세계수였으니까.

  "그럼 이제 진짜 가죠. 세 분은 저기 위에 서시고, 눈 잠깐 감으세요. 빛이 좀 강할 거예요. 깨어나시면 제가 마련해 둔 거점입니다."

  아샤가 지팡이를 땅에 찍자 거대한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과연 미리 경고할 만큼의 밝은 빛이 사방에서 포위하듯 일행을 감싼다.

  "그럼 다음에..."

  아샤의 마지막 인사와 함께 모두의 몸이 작은 잔광만 남긴 채 사라졌다.

  *

  파아앗!

  자체적으로 은은한 빛을 내는 발광석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지하.

  두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고양이가 빛과 함께 나타나 어둠을 밝혔다.

  "여긴...지하철?"

  지금은 글자의 획 몇 개만 희미하게 남은 역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꾸잉, 저기 문 있다. 근데 뭔가 마법이 쳐진 것 같은데?"

  카렌이 잠깐 방심한 사이에 그새 아공간에서 사과를 꺼내 베어 물고 있는 삼색이 유일하게 멀쩡한 문을 가리켰다.

  [출구.]

  "아샤갸 인간들이 발견 못 하게 환영 마법을 쳤나 봐. 대격변 때 버려진 곳인가 보군."

  그때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대부분의 기간시설이 파괴되었으니 지하철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들을 이용해 곳곳에 아샤가 만들어 놓은 엘프들만의 출입구.

  끼이익

  문을 열자 녹슨 사다리 위로 작은 동전 크기의 햇빛이 여러 줄기가 새어 들어온다.

  "맨홀이네."

  확실히 이러면 오가기도 쉽고 인간들의 눈에 띌 염려도 거의 없다. 하지만 카렌은 자연스럽게 다른 용도가 생각났다.

  `과연 이동용으로만 만들었을까?`

  엘프들은 보통 쓸데없는 분쟁을 싫어하지만 한 번 마음 먹으면 온 종족이 하나 되어 달려든다.

  만약 인간들과 싸우기로 했다면 연합 곳곳에 만들어 놓은 이 시설들은 단번에 쓰임새가 바뀌겠지.

  `아샤라면 충분히 생각했을거야.`

  똑똑한 엘프다.

  분명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기습할 계획도 염두에 두었을 거다.

  비록 인간들이 엘프들에 비해 수는 월등히 많다지만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 됐겠지.

  "먼저 갈게."

  카렌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채린이 성큼성큼 손잡이를 잡고 올라가고 카렌이 뒤를 따랐다.

  "나도!"

  삼색이 머리 위에 올라가자 느껴지는 묵직함. 순간 카렌의 순간 목이 뻑적지근해진다.

  "너 앞으로 살 빼기 전까지는 머리는 못 올라온다."

  "주인. 근데 위가 굉장히 시끄러운데?"

  역시나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삼색의 귀가 팔락팔락 움직인다.

  "시끄럽다고? 너 말 돌리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다!"

  카렌과 채린이 잠깐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끄아악!

  빠아아앙!

  희미하게 들리는 비명들과 자동차 경적.

  "사고라도 났나 보지. 서울 교통이 좀 복잡하잖냐."

  "어...그런가?"

  삼색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자신의 수염들은 진동을 감지하고 파르르 떨릴까.

  `연쇄 추돌사고인가? 근데 뭔가 좀 많이 들리는데?`

  인간들과 다르게 월등한 삼색의 청력은 아까부터 쉬지 않고 소음들을 감지해 내고 있었다.

  "킁..."

  그리고 무엇보다 지상에 가까워질수록 코끝에 맺히는 피 냄새.

  덜컹!

  "아씨...이거 왜 안 돼?"

  채린이 밀어 봐도 열리지 않는 맨홀 뚜껑을 보며 짜증을 냈다.

  "오래돼서 찌들었나 보지. 그냥 날려버려."

  "오케이."

  쾅!

  마치 종을 때리듯 맑은 소리와 함께 맨홀 뚜껑이 하늘로 치솟고 마침내 일행은 땅에 발을 디뎠다.

  "정말 거점을 으슥한 곳에 잘 마련해뒀네."

  "으으...난 여기서 안 내려갈 거다."

  뒷골목.

  곳곳에 취객들의 토사물이 찐득하게 남이 있고 헤진 쓰레기봉투들에서 나온 더러운 물건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다.

  "끄으..."

  "또 뭐야?"

  삼색의 살짝 짜증 섞인 시선이 앞을 향했다.

  이 침침한 골목과 대비되는 햇볕이 드리운 길가에서 노인이 보인다.

  "으..."

  그런데 상태가 심상치 않다. 신음과 함께 계속 비틀거리더니 어딘가 불편한 듯 땅에 갑자기 쓰러졌다.

  "크하하하하!"

  그때 괴성을 지르며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남자가 그대로 노인의 후두부를 거침없이 내려찍으려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저 미친놈은 뭐야?"

  채린이 단번에 튀어 나가 뒤통수에 닿기 직전, 몽둥이의 옆면을 날려 보낸다.

  "넌 뭐..."

  "너는 일단 기절하고."

  채린의 남자를 향하는 주먹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있지 않았다.

  정당방위? 어차피 S급 헌터는 사회에서 묵인된 면책특권자다. 주먹이 판사지.

  "커억!"

  단번에 남자의 턱이 돌아가고 그 안에 있던 누렇게 착색된 이빨들이 이리저리 밖으로 튄다.

  "구급차를 불러드릴게요. 조금만 버텨요."

  "소용없어."

  "응? 아직 살아..."

  어느새 채린의 근처로 도착한 카렌이 고개를 저었다.

  "못 올 거야."

  삐용삐용!

  갑자기 눈앞에서 대놓고 벌어지는 폭력에 정신없었던 채린의 귀와 눈에 그제야 주변의 소리와 광경들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자신이 방금 부르려던 구급차는 이미 주위에 많았다. 다만 모두 뒤집히거나 반파되어 있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울이 아닌가?"

  저 멀리 예전의 호캉스에서 봤던 거대한 빌딩 하나가 보인다.

  이제는 망해버린, 한때 대한 그룹의 본사였던 서울의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이자 경기도에서까지 보이는 공기가 좋고 나쁜지를 판명하는 기준점.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일제히 시끄러운 알람들이 카렌과 채린의 워치에서 울려 퍼진다.

  오로라에서는 터지지 않던 신호가 잡히면서 일제히 몰려드는 연락들이 한꺼번에 온 것이다.

  "그날을 대비해라!"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그런데 지지 않겠다는 듯 가까이서 들리는 광기에 가득 찬 목소리들.

  쾅! 쾅!

  이들은 눈이 벌게진 채로 손에 든 무기들로 차들을 내리치면서 접근하고 있었다.

  "저기! 아직 남은 놈들이 있다!"

  이쪽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하지만 카렌과 채린은 자신들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대놓고 보지도 않고 있었다.

  "채연이랑 동생은 무사하대. 너희 영지에 가 있다는데?"

  채린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런데 대체 왜 그쪽에 가 있는지 모르겠다.

  "강이사의 작품이야. 민들레재단 직원들의 가족들부터 우리와 연관된 사람들을 모두 그쪽으로 대피시켰대. 이건 뭐라고 쓴 거야? 프로토콜 헤르메스?"

  카렌은 한 번 쓱 보고 넘기긴 했지만, 예전에 잠깐 강이사가 긴급상황에 발동하는 매뉴얼들을 보여준 적이 있긴 했다.

  "역시 강이사가 능력이 있어. 엘리도 무사해. 서울 신전에 있다네."

  "그럼 됐네. 온 김에 들렀다 가자."

  "그래."

  쨍그랑!

  겁 없는 커플이 자신들을 무시하자 관심을 갈구하듯 이리저리 애꿎은 주변의 차 유리창을 부수는 사람들.

  "미친 것들인가?"

  "그래봤자 무기도 없어. 죽여버려."

  "제물이다. 구원자들이 기뻐하시겠어."

  혀로 입술을 끈적하게 핥은 놈들이 피가 잔뜩 묻은 나무 배트와 쇠 파이프, 칼들을 들고 이쪽으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네놈들을 죽여서..."

  "삼색."

  "응?"

  "물어. 타락자들이랑 비슷한 느낌 난다."

  암흑가에서 처음 마주했던 그 느낌.

  인간과 엘프 타락자들을 봤을 때의 그 불길한 기운이 저놈들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개냐?"

  우드드득!

  저렇게 투덜거려도 말은 참 잘 듣는다. 삼색이 몸을 크게 불려 호랑이 크기까지 키웠다.

  "어..."

  순간 멈칫하는 사람들. 기세등등하던 그 모습은 전신에서 스파크를 뿜고 있는 살벌한 고양이 앞에 온데간데없었다.

  "얘들은 그래도 이성이 있는데?"

  분명 광기가 가득 차 있던 눈에 돌아온 흰자위를 보고 삼색이 코웃음 치며 기다란 꼬리를 살랑였다.

  "어..."

  "좀 찌릿할 거야."

  "으그그그그극!

  이제는 하품하면서도 정화할 수 있게 된 삼색이 모두에게 전기를 내뿜었다.

  "응? 뭔가 이상하다."

  삼색이 뭔가 잘못된 듯 얼굴을 구기고는 쓰러진 채 반쯤 구워진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기운도 좀 미세하게 다른 것 같고...

  챙!

  발톱을 꺼내 한 남자의 눈꺼풀을 슬쩍 올려 본 삼색이 말했다.

  "주인, 이거 정화가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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