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8/140)

  처음 보는 종류

  "여긴 뭐야?"

  세계수의 몸체에 연결된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바뀐 주위.

  분명 한 발자국 걸어들어왔을 뿐인데, 작은 정원에 온 듯 나무둥치들과 꽃들이 만발해있다.

  "봐라, 주인. 요즘에는 자기 걸 이렇게 직접 못 챙기면 호구다."

  "..."

  카렌은 어느새 나무둥치에 올라가 털썩 주저앉은 고양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

  자신이 새로운 시대에 적응을 못 하고 뒤처진 게 아닐까.

  "그래도 세계수를 그렇게 두드린 건 너무했어. 엘프들이 기절하기 직전이었다고."

  "그건..."

  "다음부터 그러면 안 돼."

  ?

  아니다. 채린이 삼색에게 하는 말이 순간 흔들릴 뻔한 카렌의 마음을 바로잡았다.

  `역시 저 녀석이 좀 많이 앞서 나간 거지.`

  요즘 세대의 생각을 천천히 따라가야겠다는 마음은 든다. 세상을 바꿀 순 없으니 적응을 조금씩 하면 되지 않겠나.

  "근데 여기 주인은 어딨냐?"

  사르르륵

  대답하듯 정원에 있는 나무줄기들이 스르르 움직여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 낸다.

  나뭇잎과 똑같은 색깔의 초록 피부를 가진 어린 소녀가 머리에 꽃으로 만든 둥근 월계관을 쓰고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맑은 숲의 공기처럼 청량한 목소리. 세계수다.

  소개는 하지 않았어도 모두 단번에 소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근데 왜 겁먹은 것 같지?'

  말을 살짝 더듬는 것도 그렇고, 뭐가 자꾸 두려운듯 몸이 삐걱인다.

  "오! 보상 줘라!"

  역시나 세계수를 향해 시작된 고양이의 행패. 카렌은 분명 이 녀석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어...제가 힘이 아직 많이 없어서요. 카렌님 드릴 보상밖에 지금은 없어요."

  "주인은 또 받는다고? 그럼 우리는?"

  "그..."

  "보상! 보상!"

  사실 카렌도 세계수의 본신을 이렇게 직접 본 적은 처음이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바로는 저렇게 여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저래 봬도...

  "야, 그래도 세계수는 반신이야. 너무 억지 쓰지 마. 나중에 해주겠지."

  언젠가는 주지 않겠나. 그새 삼색에게 옮았는지 카렌도 은근히 여지를 남겼다.

  `음, 좋아. 이렇게 하면 되겠지.`

  요즘 트렌드를 따라가는 한걸음에 카렌이 스스로 만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불타면 안 되는데..."

  그런데 카렌이 말하자마자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세계수. 삼색이 말할 때랑은 반응이 전혀 다르다.

  "안 되는데...불타면 죽는데..."

  세계수의 눈에 갑자기 그렁그렁하게 눈물이 고이자 제일 당황한 사람은 카렌이었다.

  `반신이 울어?`

  자신은 삼색에게 시달리는 세계수를 도와주려고 했던 말이다.

  기껏해야 10살? 겉모습은 엘리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눈물에 글썽이며 몸을 떨자 마치 자신이 나쁜 놈이 된 느낌마저 든다.

  "어..."

  삼색과 카렌이 일제히 당황해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괜찮아.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그때 세계수의 앞으로 다가가서 눈높이를 맞추는 채린.

  "정말요?"

  "그럼. 혹시나 이유 없이 그러면 언니가 말려줄게. 자, 약속."

  "약속?"

  "여기 손가락을 걸면 돼."

  너무나도 익숙하게 세계수를 달래는 모습에 카렌은 채린이 한 가족의 가장이자 장녀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부모도 없이 동생 둘을 혼자 키웠지?`

  자신의 앞에서야 어리게 보이는 거지 혼자서 많은 역할을 해왔던 채린이다.

  "뚝!"

  "훌쩍, 뚝!"

  "근데 진짜 이 꼬마가 반신 맞아?"

  "삼색아!"

  "미안."

  간신히 진정시켜 놓은 세계수를 다시 자극하는 삼색을 진압하고는 채린이 부드럽게 물었다.

  "그런데 왜 카렌을 무서워 해?"

  "기본적인 정보들, 엘프들을 만들어 내고 환경을 가꾸는 일 같은 중요한 정보들은 제가 씨앗일 때 엄마에게 배웠어요. 그중에 하나가 카렌님에 대한 기억이에요."

  알고보니 삼색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라는 진실에 카렌의 입술이 순간 건조해진다.

  "엄마라면 벨리알의 세계수 맞지? 그 중요한 기억에 왜 날 굳이 집어넣은 거야? 옛날 일이야. 작은 오해가 있었다니까."

  그렇다면 세계수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대체 그 사건은 언제까지 회자될까, 카렌은 과거의 실연한 자신에게 투덜댔다.

  아샤가 정확히 씨앗을 가지고 언제 넘어왔는지는 몰라도 무조건 대격변 이후였으니 아무리 많아도 나이가 30살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겁이 좀 많을 수밖에.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인간이라고 배웠어요. 제가 신이 되면 보상은 꼭 드릴 테니 걱정 마 세요. 균형도 인간의 신과 함께 조율해드릴게요."

  말하면서도 카렌의 눈을 힐끔힐끔 피하는 게 진정성이 흘러넘친다. 그나마 채린이 달래줘서 다행이다.

  "그런데 신이 된다니? 엘프신이 새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네가 신이 되는 거야?"

  "네. 다 자란 세계수는 신 그 자체거든요. 본체가 지상에 있다는 건 장점이자 엄청 치명적인 약점이라, 그 사실은 엘프들도 몰라요."

  "어쩐지...그래서 그랬군."

  사기종족이라 생각했던 엘프 종족의 균형이 다시 맞춰진다.

  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확실히 최악이다.

  "아, 맞다! 이거 엄청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 너희도 그렇지?"

  다시 시무룩해진 세계수를 보며 채린이 삼색과 카렌을 재촉하자 둘은 고개를 끄덕인다.

  "고마워요!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제가 두 분에게 당장 줄 수 있는 게 없어서...이건 어떠세요?"

  세계수가 눈을 향한 곳의 줄기들이 일제히 뻗어 나뭇잎 한 무더기를 삼색에게 내민다.

  "저 녀석은 일반 고양이랑 달라서 그런 거..."

  "우와아악!"

  "뭐야?"

  그런데 삼색의 반응이 예상외다.

  훌쩍 잎으로 달려들어 몸을 비비고, 핥고, 심지어 먹기까지 한다.

  "저거 캣잎이야? 그것도 요즘에는 시큰둥하던데."

  "저는 모든 식물을 키워낼 수 있어요. 고양이가 제일 좋아하는 잎에 제 마력을 듬뿍 담아 봤는데 다행이네요."

  세계수의 마력이 잔뜩 들어간 잎사귀들이라, 만약 저걸 마법이 널리 퍼진 벨리알에서 판다면 천문학적인 가격을 받지 않을까.

  간단히 말하면 지금 삼색은 다이아몬드보다 비싼 잎들 속에서 뒹굴고 있는 거다.

  "난 이거면 됐다. 이 잎들 또 보내줄 수 있냐?"

  삼색이 고개를 들고는 몽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럼요. 주기적으로 드릴게요. 그럼, 채린 언니는 어떤 걸 드려야 하지..."

  어느새 세계수의 언니가 되어 버린 채린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아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있었다.

  `저 인맥은 좀 부러운데?`

  돈 주고도 못 사는 세계수의 인맥.

  아마 이 세상 누구도, 엘프마저도 세계수와의 저런 친밀한 관계는 영원히 못 얻을 거다.

  "제가 뽀뽀해드릴게요!"

  "응? 뽀뽀라니?"

  세계수는 몸을 돌리더니 채린의 볼에 자기 입술을 맞췄다.

  순간 채린의 몸에 차 있던 노폐물이 스르륵 사라지고 청량함이 채린의 온몸을 맴돈다.

  "고마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엄청나게 건강해진 느낌에 채린이 세계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언니는 앞으로 평생 모든 질병에 면역! 그리고 정령 친화력도 좀 올랐을 거예요."

  "그럼 동글이도 소환할 수 있어?"

  채린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사실 엘프들에게 이번 일의 보상으로 동글이를 어디서든 소환진을 달라 그럴까 생각해 봤지만...

  `그건 너무 삼색답잖아.`

  엘프라는 종족에 대대손손 내려온 비결을 대놓고 요구하기엔 좀 그랬다.

  "오로라에서는 무조건 응답하고 연합에서는 숲 아니면 좀 힘들 수도 있어요. 언니가 괜찮다면 제가 틈틈이 찾아가서 친화력을 높여드릴게요. 그럼 나중에는 가능할지도 몰라요."

  "정말? 그럼 나야 좋지. 귀여운 동생이 생긴 기분인데? 내 동생들은 이제 다 컸다고 혼자 놀더라."

  벌써 나타나는 인맥의 힘.

  `이야, 인간들이나 엘프들이 보면 놀라 자빠지겠어.`

  애초부터 정령 친화력이 낮은 인간은 말할 것도 없고, 엘프조차 제대로 활약하는 정령사의 숫자가 극히 적다.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의 영역을 저렇게 극복한다고?

  "그러면, 이제 카렌님 차례에요. 이거 받으세요. 제 몸에서 만든 거예요."

  채린의 무릎에서 내려온 세계수가 자신의 품 안에서 나무로 만들어진 반지 두개를 건넸다.

  ?

  "...조금 가까이 와주면 안 될까?"

  그런데 아직도 무서운지 최대한 멀리서 손가락 끝으로 반지를 주려고 노력하는 세계수에게 카렌이 한 발자국 다가가 받았다.

  그러자 다시 후다닥 채린에게 돌아가는 세계수.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

  누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무서워하는 일은 처음이다.

  카렌이 살짝 의기소침해져서 채린에게 물었다.

  "아냐, 태어날 때부터 각인 돼서 그렇지. 그나저나 저건 뭐야?"

  채린이 요령 좋게 재빨리 말을 돌린다.

  "양손에 껴 보시겠어요? 손가락은 상관 없어요.

  "

  카렌이 각 검지에 반지들을 끼자 스르르 피부 위로 녹아든다.

  "오..."

  마치 문신처럼 녹아든 반지들에 손가락을 갖다 대자 다시 수면위로 떠오르듯 원래대로 돌아온다.

  "편리하겠어."

  지금 눈으로 보지 않으면 끼고 있는 것 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편안함. 샤워할 때나 잘 때도 뺄 필요도 없겠다.

  "그 반지들을 끼고 계시면 자연의 가호가 함께 할 거예요."

  "가호?"

  "저도 정확히 카렌님에게 어떻게 작용할 지는 모르겠어요. 워낙 특이하시잖아요. 아마 마법을 쓰실 때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지. 주인이 평범하진 않지."

  ???카렌은 단번에 세계수가 자신에게 이런 물건을 준 이유를 알아챘다.

  "침략자들과 싸울 때 도움이 되겠어. 언제 오려나..."

  그 놈들을 생각하니 궁금해진다. 오늘 도망간 놈도 그렇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할지, 언제 도착할 지 말이다.

  ?

  "제가 알아요! 적들의 행성들이 지구로 충돌하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있어요."

  세계수가 수업 시간에 질문하는 학생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어떻게 알아?"

  "제 힘을 게이트를 여는 데 이용했잖아요. 그때부터 염탐했어요. 아직도 핌불의 몸에 제 기운이 살짝 남아 있고요."

  어린 겉모습에도 과연 세계수이자 반신이다. 자기 종족인 엘프의 멸망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장차 신이 될 존재.

  "그거 좋네. 우리도 보여줘."

  "그럼 제 시야를 공유해드릴게요."

  *

  [끄아아아...]

  ?

  핌불이 게이트를 넘어오자마자 비명을 질러댄다. 물리적인 고통은 없다.

  어차피 그 건방진 인간의 짐작대로 핵이 깨지면 그냥 죽으니까.

  지금의 비명은 자신의 굴욕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다.

  "핌불님?"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눈치 없는 목소리. 핌불과 마찬가지로 푸른 피부에 팔, 다리, 머리까지 달린 흡사 인간의 형태.

  "괜찮으십니까?"

  핌불이 인간과 엘프를 보고 재밌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다스리는 행성의 주민들의 생김새를 저렇게 바꿨다.

  핌불이 주민에게 자신의 본체를 뻗었다.

  "핌불...님? 으아아아악!` 닿자마자 순식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핌불에게 빨려 들어가는 주민. 그와 동시에 핌불의 몸이 불어난다.

  [다음에는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노예로 만드는 건 실패했군.]

  [...오셨습니까.]

  핌불이 한창 분에 차 있을 때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저 놈이 지도자군`

  세계수의 눈으로 보고 있던 카렌은 그 오만했던 핌불이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지금 나타난 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저건 골치 아프겠어.`

  그리고 확신했다.

  저놈은 자신의 마지막 적수가 될 거다.

  `그런데 무슨 속성인지 모르겠군.`

  핌불 같은 경우에는 색이 명확했다. 하지만 놈의 몸은 여러 색이 섞인 모양이 마치...

  `혼돈.`

  [게다가 뭔가를 달고 오기까지 했어.]

  [네?]

  순간 카렌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놈의 눈동자에 오싹함을 느꼈다.

  `알아차렸어?`

  과연 보통 놈이 아니다.

  [확실히 지금껏 만나 본 적 없는 상대긴 한가보군. 먼저 저 지구라는 행성의 힘을 깎아 놓을 필요가 있겠어.]

  분명 표정 따위 지을 수 없는 몸의 구조였지만 카렌은 알 수 있었다.

  저놈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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