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화 (117/140)

  요즘 자기 몫은 스스로 챙겨야 한다!

  쩌쩌저저적!

  액체가 단번에 고체로 변하면서 아득거리는 소음이 사방에서 귀를 괴롭힌다.

  물이 얼음이 되는 0°C.

  물론 저놈의 몸과 지배하에 있는 물은 그보다 더 온도가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떨어진 온도는 가속도를 받아 더욱더 가파르게 곤두박질치기 시작한다.

  휘이이이잉!

  카렌이 손을 통해 직접 내뿜는 냉기가 향하는 곳곳마다 남극에서나 볼 법한 빙산이?? 생겨난다.

  [이게 대체...]

  "태어나자마자 강했고, 위기도 거의 없었고, 지금껏 그냥 힘자랑하기 바빴지?"

  핌불의 떨리는 목소리.

  카렌은 그 속에서 몇 가지 감정들을 감지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낯선 공포.

  노예와 대등한 위치로 끌어내려진 모멸감.

  "조금만 기다려. 크긴 하네."

  신나게 얼리고 있지만 여전히 겉 가지에 불과하다. 카렌이 노리는 건 단 한 부분.

  ?

  저기 지금도 푸드덕 떨리고 있는 해일의 중심부에 있는 커다란 하늘색 젤리. 저게 놈의 본체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웅...

  해일 전체가 공명하며 파동을 일으켜 카렌의 뇌로 직접 파고든다.

  전이 달콤하게 머릿속을 헤집었다면 이번에는 안쪽에서부터 수십 개의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이 몰려온다.

  "음..."

  [어떻게 멀쩡하지?]

  하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카렌은 작은 신음을 끝으로 계속 손을 움직인다.

  "멀쩡한 게 아니라 참는 거다."

  카렌도 살과 피와 이루어진 인간이다.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불안해 하니까.'

  뒤돌아보지 않아도 저 멀리 뒤에서 자기 등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삼색과 채린.

  둘의 존재가 자신에게는 부담 따위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기분 좋은 응원일 뿐.

  "너. 그 젤리 안에 뭔가 있잖아. 인간으로 치면 심장에 해당하는 핵이라든가."

  [..........]

  때론 침묵이 가장 큰 확신을 줄 수 있다. 카렌은 놈의 본체를 향해 눈을 빛낸다.

  움찔...

  눈동자에 순간 깃든 찰나의 떨림을 카렌은 보았다.

  정답이다.

  "할 거면 하나만 했어야지."

  아까 분명 칼날들을 단순하게 날려 보낼 때, 핌불은 그대로 몸으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분명 똑같은 칼들로 이루어진 꽤 큰 소용돌이를 놈에게 날려 보냈을 때 놈은 벽을 세워 막았지. 그 차이는 명백했다.

  `몸 전체를 공격받으면 위험하다. 무조건 약점이 몸 안에 있어. 아마 이동시킬 수 있겠지.`

  저놈은 소위 지구에서 말하는 금수저, 아니 행성급 수저를 물고 태어난 놈이다.

  당연히 목숨을 걸고 한 싸움의 횟수도 거의 없겠지.

  그러니 본인 스스로 약점을 드러내는 멍청한 짓을 했다.

  "기다리고 있어. 곧 부숴줄 테니까. 아니면 아까 말한 네 친구들이라도 부를래?"

  [이...이...건방지구나! 이 내가! 이 핌불이 감히 그깟 싸움만 가득 찬 머리 빈 행성놈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 같으냐?

  "]

  카렌은 지극히 초보적인 도발에 발끈하는 놈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말 속성별로 침략자들 행성이 있나 보군. 자기들끼리 사이도 별로 안 좋은 것 같고, 그렇다면 저 자존심 강한 놈들을 통제할 누군가 있을까?`

  쨍그랑!

  정보를 캐낸 것까진 좋았지만, 놈의 역린을 자극한 모양이다.

  지금껏 힘들게 얼려 놓은 외곽의 얼음들이 놈이 몸을 푸르르 떨자 단번에 박살나면서 떨어져 나간다.

  `정말...능력은 좋아.`

  카렌이 아직도 움직이는 핌불을 보며 감탄했다. 능력 면에서 보면 현무나 백호보다도 월등하다.

  몸의 상당 부분이 얼어붙어 떨어져 나갔어도 여전히 막강한 재해(災害) 그 자체.

  치이이이익...

  [죽어라.]

  놈이 힘겹게 몸을 끌고 질주하자 지나간 자리의 모든 생명이 독기에 비명을 지른다.

  쩌정

  오는 와중에도 더 내려간 기온에 점점 물들은 부서져 나갔지만 이대로 와도 충분히 카렌을 덮칠 수 있는 속도와 크기다.

  '일단 실드.'

  카렌이 다뤄서 만능 마법처럼 보이지만 실드의 원래 용도는 시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

  은빛 벽이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든든하게 앞을 가로 막는다.

  `저것만 노린다.`

  최소한의 방어는 준비됐고 전체를 얼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카렌이 양손으로 냉기를 내뿜고 있었던 마법진들을 두 손을 모아 합쳤다. 불필요한 힘의 낭비를 없애 한 곳에 집중해야한다.

  두근! 두근!

  카렌의 심장이 힘차게[ 펌프질하며 모든 마나를 끌어올린다.

  `놈의 본체. 핵을 움직일 곳도 없이 통째로 얼려 버리면 되겠지.`

  아까는 거대한 해일 안에 꼭꼭 숨어 있던 본체였지만 점점 조각처럼 깎이며 이제는 뚜렷이 보인다.

  쩌쩌쩌쩌쩍...

  점점 다가오는 웅대한 장벽에 맞서 카렌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담담히 양손을 뻗고 있었다.

  ?

  핌불의 몸이 일제히 좌우로 펼쳐지며 포위망을 좁히며 카렌을 향해 손을 뻗듯이 출렁인다.

  끼끼끼끼끼끼긱

  카렌의 생과 사를 가르는 얇은 은빛 벽 하나가 힘에 부치는 듯 금이 가며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른다.

  두 손에서 단순히 냉기만 뿜고 있는 게 아니다. 어느새 카렌의 주변에 나타난 은구슬 한 개도 바쁘게 움직인다.

  두 손이 물을 얼리자마자 카렌의 눈빛을 따라 얼음을 부수고는 다시 드러낸 푸른 속살에 곧바로 다시 냉기를 집중시킨다.

  쨍그랑!

  그 와중에 지구에서 와서 처음으로 깨져버린 카렌의 실드.

  치명적인 독수가 더 전진한다.

  ?

  이제 둘 사이를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카렌은 그저 한 땀, 한 땀, 망치와 정을 든 일류 조각사처럼 놈의 몸을 깎아낸다.

  결국은 카렌의 머리 위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죽음을 가득 머금은 물이 하늘의 태양마저 덮는다.

  ?

  "후..."

  하지만 카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비현실적인 광경이다.

  마치 영화의 정지화면처럼 카렌의 머리 바로 위에서 우뚝 멈춘 물들.

  "어딜 도망가려고."

  이렇게 된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지금껏 통제하던 누군가가 손을 놓고 슬그머니 뒤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후우우웅!

  카렌의 손이 미꾸라지처럼 뒤로 물을 헤치고 나가는 손바닥 하나 크기의 푸른 젤리를 향한다.

  쩌쩌쩌쩍..

  순식간에 쏟아지는 냉풍. 그리고 놈을 좁혀가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포위망.

  "음?"

  그런데 잡기 직전, 핌불의 몸이 갑자기 분리되어 버리면서 손가락 정도 되는 잘 보이지도 않는 푸른 뭔가가 게이트의 입구로 쏘아진다.

  "...진짜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볼품없군."

  게이트에 이미 몸을 반쯤 걸치고 있는 초라한 핌불을 카렌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두고 보...]

  "졌으면 닥치고 꺼져. 다음에는 도망칠 곳도 없을 테니까. 너희 행성 부서지고 있다며."

  [...]

  진부한 대사마저 미리 차단해 버리자 놈은 거칠게 전신을 부들거리더니 이내 쏙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핌불이 사라지자 처음 봤을 때처럼 빛을 잃어버린 게이트.

  파앗!

  또 저놈 같은 놈들이 나오는 건 사절이다. 카렌이 자신과 같이 놈을 깨부순 구슬 하나를 연결고리에 날려 보냈다.

  파칭!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자 고리 중앙으로 파고든 구슬의 크기가 급격히 팽창해 주변을 부숴버린다.

  "크흠."

  "언제 왔냐?"

  뒤를 돌아보니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 뒤로는 채린이 달려온다.

  "삼색은 또 왜 그래?"

  "쟤 민망해서 그래. 아까 그렇게 애절하게 갔는데 금방 끝났잖아."

  채린이 카렌의 귀에 슬쩍 속삭인다.

  과연, 듣고 보니 삼색이 자신의 눈을 피하며 갑자기 자신의 앞발을 핥고 있었다.

  "어휴. 무슨 어린애야? 이리 와."

  "크흠, 주인이 원하니까 가주는 거다."

  삼색이 못 이기는 척 카렌에게 다가간다.

  우우웅...

  "응?"

  "뭐냐? 또 뭔가 나오냐?"

  강력한 마력이 또다시 어디선가 새어 나오자 삼색이 털을 바짝 세우고서는 카렌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야! 발톱!"

  "미안."

  확실히 이 고양이가 당황하긴 했다.

  "연결은 끊었어. 이건..."

  삼색이 과민반응하긴 했지만, 모두 침략자의 기운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따뜻해."

  채린의 감탄대로 온종일 싸우느라 지친 일행의 몸을 따사롭게 감싸는 훈풍이 분다.

  카렌이 만들었던 단단한 얼음들이 스르르 녹고 어디선가 향기로운 냄새가 흘러 들어온다.

  "세계수가 돌아왔어."

  침식당해 검게 물들었던 세계수의 가지와 줄기가 눈을 편하게 해주는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동시에 밑동부터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들.

  마치 기지개를 켜듯 가지들이 뻗어 나가며 꽃의 봉우리들이 만개하며 색색의 꽃잎들이 휘날린다.

  "결계도 걷히네?"

  카렌이 만든 마법진들과 함께 하늘의 투명한 막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샤?"

  뒤에서 고혹적인 옷차림과 함께 기다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아샤의 뒤로 엘프들이 꾸역꾸역 숲을 헤치고 나타난다.

  "꾸잉, 뭐지?"

  삼색이 어리둥절해 엘프들을 쳐다본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원 병력을 보낸 줄 알았지만, 곧 나타나는 수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수십, 수백, 수천, 곧이어 숫자를 셀 수도 없는 엘프들이 개미처럼 주르륵 늘어선다.

  곳곳에 어린아이들까지 보이는 걸로 보아 오로라에 있는 모든 엘프가 여기 있는 것 같다.

  ?

  "무슨 일..."

  "엘프의 구원자에게 예와 감사를, 그리고 은혜에 대한 보답을 약속드립니다."

  "예와 감사를."

  아샤갸 가슴에 손을 고개를 숙이자 엘프들이 일제히 복창하며 따라 머리를 숙인다.

  엘프는 결코 허언하지 않는다. 저들의 감사는 진심이며 보답도 마찬가지.

  "됐어. 그냥 침략자가 쳐들어올 때 인가들과 같이 협력해 줘. 그리고 신에게도 잘 말해주고."

  "알겠습니다. 다만 그 외에도 뭐든 말씀해주세요. 앞으로 카렌님의 의지는 앞으로 지구에 거주하는 엘프 전체의 뜻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균형에 관한 문제도 해결되고 든든한 아군도 생겼다.

  오로라에 온 목적은 전부 달성한 카렌이 뿌듯함에 슬쩍 두 팔을 쭉 하늘 위로 뻗는다.

  통 통

  그런데 갑자기 들려오는 청량한 소리.

  엘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에 모이더니 이내 얼굴에 당혹스러움을 내비친다.

  "...삼색님?"

  ?

  역시나 방심할 수 없는 고양이다.

  어느새 삼색이 세계수의 몸통에 기어 올라가 앞발로 두드리고 있었다.

  "카렌님? 삼색님 좀 말려 주세요."

  만약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면 당장에 마법들과 화살이 날아가겠지만 저 고양이는 자신들을 구해 준 구원자 중 한 마리가 아닌가.

  아샤가 대표로 나서서 카렌에게 조심스레 부탁했다.

  "야! 너 거기서 뭐해?"

  "이거! 세계수잖냐! 신화, 영화, 게임에서 단골로 나오는 그 나무! 이그드라실, 신성한 신목, 엘프들의 요람!"

  "...그렇지."

  그걸 아는 녀석이 저러고 있다.

  "그럼 보상이 너무 짜다!"

  모두는 진심이 듬뿍 담긴 삼색의 외침에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야! 무슨 소리야. 이미 엘프들이랑 곧 태어날 신이 도와주기로 했어."

  "그건 그거고, 세계수는 안 줬잖냐."

  삼색이 눈이 세계수의 몸을 요리조리 훑는다.

  파르르

  `바람이겠지.`

  카렌은 슬며시 눈을 비볐다.

  순간 파르르 떨린 세계수의 푸른 잎들은 분명 잘 못 본 거다.

  "요즘 세상에 자기 몫은 스스로 챙겨야 하는 거다. 진짜 이걸로 끝이냐? 주인은 이미 받았다 치고, 나랑 채린이라도 줘라."

  "저...저..."

  호랑이, 아니 호랑이보다 더 큰 고양이를 키웠다는 생각에 카렌의 뒷골이 뻐근해진다.

  요즘 마음속에서 슬슬 영물까지 올라왔던 삼색의 위치가 다시 요물로 추락하는 순간이다.

  퉁 퉁 퉁

  아까보다 거세진 발길질. 엘프들이 자신들의 신목이 고양이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모습에 이제는 손을 벌벌 떠는 불안증세마저 보인다.

  "보상 줘라아아!"

  "내가 데려올게."

  더 심해지는 고양이의 진상을 보다 못한 카렌이 발을 떼는 순간.

  스르르륵

  세계수의 몸체 중앙이 열리더니 성인 남성 한 명이 지나갈 문이 생긴다.

  "봤지? 요즘은 이렇게 말해야 준다니까?"

  의기양양한 삼색의 말에 모두가 벙쪄서 세계수를 올려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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