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나 좀 보자
단기간에 쏟아진 폭우는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으...물 싫다."
지금 심통이 잔뜩 난 삼색의 얼굴을 시작으로 땅조차 투정을 부리듯 질퍽해져 늪처럼 변해버렸다.
??
모두의 몸은 솜을 잔뜩 먹은 물처럼 무거워지고 발은 한없이 밑으로 빠져들었다.
굵직한 물방울들 때문에 시야는 좁아지고, 사납게 쏟아지는 소음은 바로 옆에서 고함을 치는 소리조차 먹먹하게 만든다.
"놈들이 앞에 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타락자들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며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다.
하지만 이미 비에 젖은 활은 무용지물. 장거리 공격수단은 마법밖에 남지 않았다.
뚜벅...
그런데 지시대로 경계하던 타락자들은 일제히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고 멍해져 버렸다.
"인간...?"
자신들과 다르게 짧은 귀를 가진 은발의 남자. 그는 이 세찬 빗속에서 뒷짐을 지고 마치 집 산책하듯 여유롭게 한 발, 한 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뚜벅
반투명한 은빛 대리석같이 보이는 바닥 위를 걷고 있는 남자의 걸음은 너무나도 안정적이었고, 흠뻑 젖은 신발과 바지 밑단에는 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후두두두두둑
지금도 하늘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같은 물줄기조차 남자의 근처에 다가서면 약속이라도 한 듯 옆으로 흘러내린다.
기이한 풍경 속의 이질적인 주인공을 보며 모두 넋을 잃고 쳐다본다.
"고..공격!"
그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타락자 한 명이 소리친다.
?
하지만 카렌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이들은 조금 전까지 자신들이 앞에 있었던 고양이 한 마리를 놓쳤다.
아니, 봤어도 작은 짐승은 별로 경계하지 않았으리라.
"으라아아아아!"
그게 엘프들의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오기 전에 막았으면 모를까, 이미 삼색은 기합과 함께 훌쩍 적진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파지지지직!
첫 전격. 카렌의 요청대로 삼색은 물웅덩이가 고인 바닥에 슬쩍 전기가 실린 앞발을 갖다 댄다.
"으그그그그극!"
수십의 엘프가 동시에 몸을 떨더니 이내 털썩 쓰러진다.
눈을 보아하니 분명 맑아지긴 했지만, 너무 위력이 강했는지 흰자위를 내보이며 기절해 버렸다.
"...좀 강했나? 어쨌든 안 죽으면 되잖아?"
적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아까부터 삼색의 기분은 쭈욱 최악이었다.
?
인간처럼 단순히 축축한 느낌 때문은 아니다. 자신의 윤기 넘쳐흘렀던 털은 물을 잔뜩 먹고 쓸데없이 무거워져버렸다.
?
게다가 비를 맞아 내려간 체온은 고대 이집트의 사막에서 살았던 고양이의 본능에 빨간불을 켜 버렸다.?
"꾸잉? 이것들은 뭐냐?"
그때 삼색의 앞에 좌르륵 나타난 볼링공 크기만한 수백개의 은빛 구슬들. 당연히 카렌의 작품이다.
"기분 풀고, 내가 수비는 해줄테니 마음껏 날뛰어 봐."
어차피 정화는 삼색의 몫이다. 카렌은 이번에 보조 역할에 집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와!"
삼색의 눈빛이 단번에 바뀌며 훌쩍 구슬 위로 뛰어 오른다.
'...저렇게 쓰라고 놔둔 건 아닌데.'
삼색을 보는 카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힌다.
뭔가 신기한 게 보이면 꼭 올라가 보는 게 고양이의 본능일까?
탓, 탓, 탓, 탓!
미끄럽지도 않은지 구슬 위를 어지러히 뛰어다니는 삼색.
안 그래도 폭우 속에 정신없는 엘프들은 순식간에 삼색의 움직임을 놓쳐버린다.
파지지지직!
?
재밌게 뛰놀던 삼색은 엘프들이 뭉친 적당한 곳에 슬쩍 뛰어내려 전기를 발산한다.
또 수십 명의 엘프가 `정화`된다.
?
"바...방어벽! 이 환경은 우리에게도 유리하다!"
타락자들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선 황급히 물의 방벽을 만든다.
촤르르륵!
또 비교적 뒤에 있는 자들은 위협적인 마법을 날려 보낸다.
"이거면 된다."
타락자들은 자신들의 마법을 보고 환희에 찼다.
사방이 물로 가득찬 이 환경에서 물마법의 마력 소모는 월등히 적어졌고 위력도 평소의 몇배나 강력해졌다.
"어허...어딜."
하지만 간신히 기분이 좋아진 삼색의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이 놔둘 리가 없다.
콰아아앙!
만약 이들이 바다에서 물 마법을 쓴다 해도 카렌이 눈 하나 깜짝할까.
번쩍!
카렌의 손짓을 받은 은빛 구슬들이 빛을 발하더니 자신의 주변 친구들을 향해 서로를 향해 빛줄기를 뻗어내 촘촘한 은빛 벽을 만들어낸다.
콰아앙!
과연 물마법의 위력은 엘프들이 희망을 가질 만큼 상당했다. 다만 벽이 더 튼튼했을 뿐.
"주인! 이거 완전 멋진데? 나 잡아봐라!"
"크아악!
"
삼색이 혀를 낼름 거리고는 재빨리 다시 번개를 내뿜고는 구슬 뒤로 쓱 숨어버린다.
'저건 내가 봐도 약 오르네.'
카렌마저 그렇게 느끼는데 적들은 어떻겠나. 타락자들이 얼굴이 빨개진 채 마법들을 발악하듯 앞으로 쏘아낸다.
스윽
하지만 카렌이 내젓자 구슬들이 다시금 벽을 세운다.
그렇게 카렌이 마치 지휘하듯 손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타락자들을 괴롭힐 동안 삼색은 재빠르게 어디론가 또 사라져 버렸다.
"저 이상한 구체들! 저것들을 노려!"
그래도 바보만 있는 건 아닌지 티라노사우르스가 타락자의 명령을 받고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아예 벽을 구성하는 구슬들을 향해 달려든다.
타락자들은 보기에는 별 거 없어 보이는 구슬들이 산산조각이 날 거라 예상했지만...
콰아아앙!
몇십 톤에 달하는 백악기 최고의 육식동물이 전력으로 부딪힌 충격에도 구슬들은 작은 기스조차 나지 않는다.
이어서 트라케라톱스들과 합동으로 돌진해도 여전하다.
"꾸잉, 멍청이들. 그걸 누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삼색이 다시 즐겁게 구슬 사이를 뛰어 다니며 조소했다.
일일이 주인의 마력이 녹아 있는 구슬들이다. 저 정도로 부숴질 리가 없지.
`나도 발전했어.`
카렌은 그 광경을 보며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취감에 살짝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가장 빨리 배우는 길은 실전이라 했던가.
게이트에 들어가 손톱만한 구슬에 속성을 부여하는 연습을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대형 마법진을 그리다 보니 이런 응용 쯤은 이제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파지지직!
타락자들이 애써 쳐 놓은 물의 벽들은 구슬들이 움직이며 손쉽게 무너져버렸고, 삼색은 그야말로 즐기면서 엘프들과 공룡들을 정화하기 시작했다.
?
천에 달하는 병력들이 단 한 명의 인간과 한 마리 고양이에 의해 픽픽 쓰러져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렇게 가면 금방 끝나겠어.`
카렌이 낙관적으로 단 한 마리의 고양이를 위한 놀이기구를 운영하고 있을 때.
우우우웅!
"음?"
어디선가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카렌의 심기를 자극한다.
"저거..."
세계수 바로 옆에 달라붙어 오염시키며 장악하고 있는 주범. 거대한 크기의 게이트에서 불길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세계수와 연결된 굵직한 관이 마치 애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마치 세계수에서 영양분을 뺏어오는 듯한 모습.
푸르르...
세계수의 가지가 고통스럽게 살짝 떨린다.
`이거...오랜만이야.`
하지만 카렌에게 가장 거슬리는 건 지금 보고 있는 징그러운 것들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느낌이다.
암흑가에서 마석 폭탄을 감지한 능력이 다시 고개를 치켜든다. 하지만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진 위협의 크기.
오즈로는 마법으로도 증명해내지 못한 자신의 이 감각을 장난삼아 이름을 붙였다.
전조(前兆?)?
평생 자신을 속이지 않고 수없이 목숨을 살려 준 자신의 친구를 카렌은 믿었다.
"삼색! 저기 게이트에서 세계수에 연결된 고리부터 끊는다!"
정체는 몰라도 저게 뭔가를 하게 놔둘 때까지 기다려준다? 그건 자신의 멋에 취한 영화에 나오는 미친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카렌은 그렇게 놔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알았다!"
삼색이 카렌의 바뀐 분위기를 감지해내고선 별 말 없이 꿈틀거리는 연결고리를 향해 뒷발에 힘을 준다.
파앗!
삼색이 도약과 동시에 몸에 청룡의 힘을 두르고 당장에 달려들었다.
"지킨다."
"지킨다."
?
하지만 딱딱한 타락자들의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앞에 나타난 수십겹의 물의 벽.
"뭐야?"
삼색이 벽과 갑자기 변한 타락자들의 분위기에 섬찟 놀라며 몸을 멈춰 세운다.
당혹, 두려움, 적의.
엘프에서 타락자들로 변했어도 기본적으로 갖고 있던 생물의 감정이 모두 사라진 채 이들은 몽롱한 눈과 함께 기계적으로 자기 몸을 움직인다.
"좀비같다."
하지만 바뀐 건 엘프 타락자 뿐이 아니었다.
"꾸어어어억!"
"으앗?"
삼색이 황급히 몸을 피하자마자 방금까지 서 있던 곳에 처박히는 트라케라톱스의 뿔과 티라노의 머리.
이들의 입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지고 눈 전체가 빨갛게 물들었다.
"게이트의 기운이 아까보다 짙어졌어."
카렌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지금까지로 보아 타락자들과 공룡들이 필사적으로 이러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저 세계수와 연결된 고리를 지키는 것.
"뚫자."
"알았다."
카렌의 주문에 삼색의 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성장하며 마침내 트라케라톱스 정도 되는 크기로 변한다.
`몸이 갈수록 커지네.`
자신과 처음 만날 때 삼색은 분명 소형차 크기였다.
그런데 청룡의 힘을 받고, 자기 나름대로 성장을 하는지 본체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냥 살이 찐 건가?"
딱!
괜히 한 마디 중얼거려보며 카렌이 손가락을 튕긴다.
은빛 구슬들이 카렌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뭉쳐서 하나의 무기를 만들어낸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찌르기에 특화된 무기.
창.
물론 크기와 위력은 일반적인 무기와 비할 바가 아니다.
"...꾸잉, 진짜 이상하다."
삼색이 고리를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는 적들을 보며 고개를 흔든다.
허공에 떠 있는 주인의 거대한 창날이 자신들을 겨누고 있음에도 저렇게 흔들림 없이 대적하다니 말이다.
"지킨다."
"지킨다."
"지킨다."
지금도 계속 고저없는 목소리로 한 단어만 반복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 저것 때문이다."
?
삼색이 목표를 노려보며 전기를 모은다.
지지지지직...
이제 장난칠 시간은 끝났다는 듯 지금껏 본 적 없던 엄청난 양의 스파크가 몸을 맴돈다.
"간다!"
삼색이 비구름 때문에 어둑어둑했던 세상 전체를 잠시 밝힐 정도의 전기를 쏟아내었다.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을 내며 날아드는 번개 줄기와 그 뒤를 기다렸다는 듯이 따르는 은창.
"미친..."
하지만 적들의 행동은 둘의 예상을 초월해버렸다.
공룡들은 망설임 없이 먼저 도달한 번개에 자신들의 몸을 내주며 막아 버렸다.
"내 공룡..."
삼색이 땅에 쓰러진 채 몸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공룡들을 보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록 마지막에 번개의 방향을 살짝 틀기는 했지만 결국 처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말았다.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군."
카렌이 연결고리를 흘겨본다.
아까보다 더 격하게 박동하는 고리, 그리고 그에 맞춰 반응하듯 최고조로 치닫는 불안감.
'그래도 아직 늦진 않았어.'
지금 뒤이어 도달한 자신의 공격이면 성공적으로 게이트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고리를 부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엘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자신들이 시전해 놓은 방어막을 향해 안간힘을 쓰는 기색이더니 이내 갑자기 쓰러져 버린다.
"하..."
"주인? 왜 그러냐?"
카렌의 입에서 평소에 듣기 힘든 격한 반응이 터져나오자 삼색이 깜짝 놀라 올려다 본다.
"저 놈들이 수명을 썼다."
?미리 수를 줄여놨어도 최소 600은 넘게 남았던 타락자들의 수.
?
이들은 자신의 모든 마나를 쏟아붓는 것도 모자라 생명력까지 일부 바쳤다.
합쳐서 만년에 달하는 수명을 머금은 방어막은 결국 ?카렌의 창으로부터 연결고리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부술까?"
이제는 지키는 이 하나 없이 휑하게 뚫린 고리였지만 카렌은 게이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미 늦었어."
비가 그치고 서서히 구름 사이로 해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덕분에 뚜렷하게 게이트에서 나오고 있는 하늘빛의 투명한 무언가를 카렌은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어떤 소개를 하지 않았어도 아까부터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분명 일부임에도 나오자마자 세상을 덮는 흉악한 기운을 느끼며 카렌은 확신했다.
"네가 침략자구나?"
이렇게 된 이상 오히려 좋다. 얼굴이나 좀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