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4/140)

  전기를 내뿜는 작은 생물, 그리고 익숙한 대사들

  "으으윽...여긴..."

  삼색의 정화(?)를 받아 눈빛이 맑아진 엘프들이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는다.

  "형제여. 괜찮은가?"

  한 엘프가 애정 섞인 목소리와 함께 타락자에서 동족으로 돌아온 자에게 손을 내민다.

  "아냐, 그건 내가...아니야."

  하지만 한때 타락자였던 엘프는 두통보다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기억들이 더 괴로웠다.

  눈이 붉어진 채 같은 엘프들을 공격하는 자기 모습.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이 엘프뿐만 아니라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든 엘프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쪽에서도 이랬어?"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에 카렌이 채린에게 물었다.

  "맞아. 그래서 좀 늦었어. 그대로 놔두면 좀 위험할 것 같아서 병력을 좀 나눠서 마을까지 다시 돌려보냈지."

  그러고 보니 같이 온 랩터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안 그래도 적은 정령사 숫자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으...차라리..."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카렌의 눈에 지금 위험한 생각을 가진 엘프들이 몇몇 눈에 띈다.

  "음..."

  품으로 손을 집어넣어 단검을 꺼내려는 엘프들. 하지만 그들을 막아 세운 건 따뜻한 포옹이었다.

  "그대의 탓이 아니야. 알고 있잖아?"

  "하지만..."

  "만약 목숨을 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슬퍼할지 알지? 살게나."

  "...알겠네."

  카렌은 저렇게 간단한 말로 설득하는 엘프들을 보고 내심 놀랐다.

  `종족의 차이가 크긴 커.`

  만약 인간이었으면 세뇌를 당했다 해도 서로 깊은 앙금이 남아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과거, 자신의 또 다른 모습에 대한 혐오감을 동족이 슬퍼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겨내 버렸다.

  "내전도 아니었네."

  옆에 있던 채린이 슬픈 눈으로 엘프들을 바라보다 카렌의 손을 잡았다.

  상황을 들었을 때는 인간에 대한 의견충돌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직접 보니 서로 무기를 겨눌 종족이 아니다.

  "애초부터 침략이었어."

  만약 타락자가 되지 않았다면 다투긴 해도 절대 분열되지는 않았을 엘프들이다. 그래서 벨리알에서도 그렇게 방대한 세력을 자랑했고 말이다.

  `처음에 정신이 돌아온 엘프는 아예 그런 생각조차 들 겨를이 없었나?`

  그때는 아직 삼색이 서툴러서 몇 번이고 전기에 감전되다 보니 충격요법으로 괜찮았나 보다.

  파지지지직!

  "꾸릉꾸릉!"

  "어허! 가만히 있으라니까?"

  저기서 지금 트라케라톱스에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괴로워도 다 널 위한 거야. 응?"

  삼색이 어디선가 많이 듣던 말을 트라케라톱스에게 하며 몸에 다시 전기를 두른다.

  "꾸릉..."

  "꾸잉, 지금 안 하면 더 아프다니까?"

  파지지지지직!

  "오...? 돌아왔나?"

  이번에는 꽤 강한 세기로 전기를 쏟아붓자 트라케라톱스의 각막 위에 붙어 있는 뭔가가 스르르 녹아 사라지며 순박한 초식공룡 특유의 순진한 눈빛이 드러난다.

  몸집에 비례해서 전기를 써야 하는 강도가 달라지는 것 같다.

  "꾸릉! 꾸릉!"

  "이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삼색이 사람처럼 앞발을 번쩍 하늘로 들고는 트라케라톱스와 신나서 춤을 춘다.

  쿵! 쿵!

  "으아아악!"

  문제는 몸무게만 몇 톤이 나가는 공룡이 날뛰니 주변이 남아날 리가 있나.

  옆에 있던 엘프가 간신히 피하고선 식겁해서 훌쩍 둘에게서 멀어진다.

  "괴로웠지."

  "꾸릉!"

  삼색이 슬쩍 다가가서 말하자 트라케라톱스가 자신의 커다란 머리를 위협적으로 휭휭 끄덕인다.

  "네가 너무 덩치가 커서 그런데 잠깐 올라가도 될까?"

  "꾸릉."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이다.

  트라케라톱스가 흔쾌히 승낙하자 삼색이 둥그런 목 바로 앞에 앉아서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화나지 않아? 평화롭게 풀 뜯어 먹는데 갑자기 와서 죽이고 막 그러는데?"

  "꾸릉! 꾸릉!"

  "그렇다면 우리랑 같이 혼내러 갈까?"

  "꾸릉!"

  "좋아! 내가 네 친구도 돌려놓으면 네가 설득해!"

  삼색이 그 말을 끝내자마자 재빨리 등에서 뛰어내려 정령사들에게 꽁꽁 묶여 있는 트라케라톱스들을 정화했다.

  "꾸르르릉!"

  "꾸릉!"

  이미 삼색의 꼬드김에 넘어간 트라케라톱스 한 마리가 친구들에게 가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너, 말 잘하더라? 랩터도 그렇게 데려왔어?"

  카렌이 기특한 눈초리로 삼색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다 주인이랑 미호에게 배운 거다."

  역시 좋은 친구 옆에 있으면 떡 하나라도 더 먹는다는 옛날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그르릉..."

  카렌이 잘했다고 품에 안고 목덜미를 긁어주자 삼색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낸다.

  "안 그래도 엘프들을 좀 돌려보내야 했는데 잘 됐어."

  카렌이 아직도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엘프들을 보며 말했다.

  세계수 본진에 있는 병력에 비하면 방금 상대한 추격대는 극히 일부다.

  자신이 3일 동안 준비한 계획을 실행하려면 주변에서 최소한의 시간을 끌어 줄 필요가 있었다.

  "오웬, 준비됐지? 엘프들에게 가서 트라케라톱스 등에도 타라 그래."

  "네. 그런데 정말 이 정도로 괜찮겠어요? 조금만 더 병력을 남기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냐. 딱 이 정도가 적당해."

  이제는 20명도 채 남지 않은 엘프들이다. 하지만 오히려 카렌은 흡족한 모습이다.

  "그럼 이제 세계수로 가자고."

  *

  "빠라~빠바밤~ 빠라 빠바밤~"

  세계수로 가는 길, 삼색이 랩터 위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저 노래는 나도 알아. 어디서 들었더라?"

  그 옆에 있던 채린이 어디선가 들어 본 음악에 눈썹 한쪽을 실룩거렸다.

  "고전 쥬라기파크 OST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이 음악과 함께 광활한 자연이 딱 보이고, 익룡이 하늘에, 공룡이 지상에 뛰노는 걸 봤을 때의 전율! 아직도 생생하다."

  "...그거 주인공 빼고 거의 다 죽지 않냐?"

  "그런가? 근데 그 동그란 흙덩어리는 어디 갔어?

  "

  "동글이? 자기는 뭐 타기 싫다고 밑으로 따라 오겠다는데?"

  "...그냥 죽기 싫어서 튄 거 아니냐?"

  카렌은 옆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잡담에도 트라케라톱스 위에서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

  카렌의 몸에서 뻗어 나가는 수십 개의 가느다란 은빛실이 하늘에 닿아있었다.

  정확히는 아샤갸 오로라에 설치한 결계 끝에 말이다.

  후우우웅...

  `왼쪽은 뜨겁고 오른쪽은 차갑게.`

  끝없이 속으로 되뇌면서 심장에서 마력을 뽑아내 실로 계속 보낸다. 그 종착지에는 지난 3일 동안 결계에 새긴 거대한 마법진 두 개.

  좌우로 정확히 대칭을 이루고 있는 이 마법진의 용도는 간단하다.

  `사막, 빙하.`

  지금 카렌이 상상력으로 쥐어 짜내고 있는 이미지.

  왼쪽은 건조하고 찌는듯한 사막의 열기를.

  오른쪽으로는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남극의 싸늘한 한기를.

  "꾸에에엑!"

  "랩터가 앞쪽에 적을 발견했다!"

  "좋아. 중심에 카렌을 두고 계획대로 간다."

  그때 날렵한 몸집 덕에 앞으로 나가서 정찰하던 랩터가 재빨리 돌아오고 채린과 삼색이 탄 트라케라톱스가 선두로 나선다.

  채린이 살짝 뒤로 돌아보니 카렌은 하늘을 쳐다보며 자신의 마나를 쉼 없이 마법진에 뽑아 올리고 있었다.

  자신들을 믿고 그저 마법진에 집중하는 모습에 의욕이 불끈 솟아난다.

  "세계수까지 단번에 간다!

  "가자!"

  두두두두두두두!

  채린과 삼색의 외침에 공룡들은 일제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적이다!"

  세계수 외곽을 지키고 있던 타락자들이 뒤늦게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적들을 발견하곤 비명에 가까운 경고를 날린다.

  하지만 날카로운 쐐기꼴의 진영을 이루어 돌진하는 공룡들의 기세와 땅을 울리는 공포스러운 소음에 차마 타락자들은 앞을 막아서지 못했다.

  "쏴! 마법과 활을 쏴라!"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나무 위나 저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원거리 공격을 하는 것뿐.

  그것조차? 충분히 위협적이다. 하나 같이 명사수들인 엘프들은 화살에 날카로운 마나를 담아 쏘았고, 마법들은 말할 것도 없다.

  "방어!"

  채린의 외침에 따라 일제히 마법사들은 속성으로 주변에 벽을 둘렀고 정령사들은 직접 타락자들의 발을 흙으로 묶거나 바람으로 날려 보냈다.

  살기에 가득 차 달려드는 타락자들에 비해 이쪽은 죽일 수 없는 불리한 상황.

  하지만 선두에 나선 카렌과 채린이 균형을 간신히 맞추고 있었다.

  "꾸에에에엑!"

  "익룡 온다!"

  "내가 할게."

  하늘에서 쏜살같이 날아드는 익룡들은 채린이 든든한 트리케라톱스의 등에 서서 주먹을 쏟아낸다.

  "꾸엑?!"

  갑자기 지상에서 날아드는 위력적인 푸른 주먹에 황급히 다시 익룡들은 날아오른다.

  "꾸르릉!"

  앞에서 이제는 익숙한 울음소리, 타락자들은 공룡들을 희생해 길을 막을 셈인지 세 개의 뿔을 앞세운 트라케라톱스가 정면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명령 때문에 억지로 돌진하는 녀석들의 눈 깊숙한 곳에는 곧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에 대한 공포가 들어 있었다.

  "이번엔 나!"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삼색이 아니다.

  한 줄기 섬광으로 변하더니 앞으로 뻗어나가 전기 사방에 뿜어 순간적으로 트라케라톱스들을 잠깐 멈춘다.

  "지금이야. 옆으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오웬의 인도에 따라 일행들은 살짝 옆으로 꺾어 우회한다.

  "후우..."

  간신히 외곽을 돌파한 채린과 삼색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린다.

  "음?"

  순간 얼굴에 와닿는 서늘한 그림자에 채린과 삼색이 하늘을 올려다 본다. 정신없이 싸우는 동안 몰랐지만, 하늘 위로 태양을 가리는 거대한 구름이 `생성`되고 있었다.

  "저거 봤었다."

  "나도."

  삼색과 채린이 과거를 떠올리며 오싹하게 몸을 떤다.

  "현무와 백호 화났을 때잖냐."

  정확하다. 그때 영감을 얻어 만든 마법진들은 어느새 하늘 위에 구름을 빽빽히 채워 놓았다.

  그럼에도 카렌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마력을 공급한다. 조금만 더 하면 계획이 완성된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본진이에요."

  아직 침략자들에 의해 세계수가 오염되지 않을 때, 세계수를 가 본 오웬이 말했다.

  출발할 때는 멀어 보였던 거대한 나무가 이제는 손을 뻗으면 잡힐 듯 보인다.

  가까이서 보니 세계수의 몸통은 마치 벽처럼 느껴진다.

  다만 원래는 청량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어야 할 가지들 위로는 검붉은색의 뭔가가 꿈틀거린다.

  "좋아. 이제 여기만 나가면 돼."

  저 앞, 마침내 울창한 수풀림의 끝이 보인다.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놈들의 본진.

  "좋아! 가자!"

  삼색이 기세 좋게 먼저 앞으로 뛰쳐나가고 마침내 일행은 그토록 기대하던 세계수를 눈앞에서 마주쳤다.

  "어..."

  다만 그 주위에 개미 떼처럼 몰려 있는 타락자들도 말이다.

  "꾸릉..."

  "꾸에에..."

  대충 봐도 1000은 거뜬히 넘어 보이는 엄청난 숫자에 엘프들이 타고 온 공룡들이 순간 움츠러든다.

  "여기다!"

  게다가 옆에서는 숲에서 나온 타락자들마저 합류해 빈틈없이 포위돼 버린 일행. 어느 곳을 둘러봐도 빈틈이 없다.

  "저거 티라노사우르스 아니냐?"

  눈을 반짝이는 고양이 한 마리 빼고는 모두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킨다.

  "공격 준비."

  타락자들의 활시위가 일제히 당겨지고 위력적인 물 마법들이 이쪽을 향한다.

  마법사들이 그동안 달려오느라 지친 채로 방어를 준비하지만, 저 숫자에 의미가 있을까. 그저 마지막 발악에 불과했다.

  "이제 됐어. 삼색, 이리 와."

  "카렌?"

  그때 들리는 나지막한 남자의 목소리.

  뭐가 됐다는 걸까.

  어느새 트라케라톱스 위에서 내려온 카렌은 삼색을 안고는 뚜벅뚜벅 일행 걸어 나가서 정면으로 천을 넘는 살벌한 시선을 흔들림 없이 마주한다.

  펄럭

  지금껏 쓰고 있던 후드를 거침없이 벗어버린 카렌.

  갑자기 오로라, 그것도 세계수 앞에 나타난 예상치 못한 인간의 등장에 타락자들이 놀란다.

  후드드득

  몸에 달려있던 은빛 실들이 일제히 끊기고 모두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카렌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툭!

  드디어 기다리던 신호가 온다.

  모두의 얼굴과 손바닥에 빗줄기 한 방울이 투박하게 톡, 떨어진다.

  투두둑...

  이내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하늘에서는 열대지방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가 쏟아져 내린다.

  "오로라에는 이런 비가 내리지 않는다지?"

  "맞아요."

  뒤에 있던 오웬이 말을 받았다.

  지금은 아샤가 결계로 대신하지만 세계수는 오로라에 한정해 날씨마저 조절한다. 카렌은 그걸 살짝 변형해 세계수 근처에 국지성 호우를 만들었다.

  쏴아아아아아!

  이쪽이고 저쪽이고 엘프들이 모두 처음 보는 기후현상에 당황하는 동안 비는 계속 쏟아진다.

  순식간에 땅은 촉촉이 젖어 들고, 모두의 몸도 축축해진다.

  ?

  "삼색, 준비됐지?"

  카렌은 손을 살짝 휘저어 뒤쪽의 채린과 엘프들에게 돔 형의 실드를 씌우고는 삼색에게 속삭였다.

  "무대는 준비했어. 가서 몽땅 `정화`하자."

  "아! 그거!

  "

  지금껏 힘들게 삼색의 존재를 숨긴 것.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다.

  이미 비에 흠뻑 젖어버린 타락자들과 공룡.?

  여기다 삼색의 번개를 첨가하면 단번에 물을 통해 수십의 적이 정화 될 거다.

  "힘들게 일일이 뛰지 말고 바닥에다 그냥 갈겨. 대신 평소보다 조금 세게."

  "그런데 티라노사우르스는 어떻게 하냐? 저건 실험이 좀 필요한데..."

  "일단 다른 것 부터 한 다음에 시간 줄게."

  "알았다. 근데 나 그거 해보고 싶다 주인."

  "뭔데?"

  "잠시 귀 좀 대봐라."

  소근소근

  "...꼭 해야겠어?"

  "그래야 힘이 날 것 같다. 나 솔직히 지금 억지로 참고 있는 거다. 물 엄청 싫어하는 거 알잖냐."

  "후...알았다."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한 카렌이 삼색을 오른손에 올렸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외친다.

  "가라 삼색!"

  이어서 삼색이 몸에 전기를 두르며 지지 않겠다는 듯 외친다.

  "티라노사우르스! 넌 내꺼야!"

  모두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때 유일하게 알아들은 채린의 얼굴이 대신 빨개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