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2/140)

  가자, 적에게로

  "어디보자..."

  다음날. 카렌은 저쪽에서 뒹굴고 있는 삼색과 땅에 털썩 주저 앉아 정령과 놀고 있는 채린을 보았다.

  "뭉! 뭉!"

  흙으로 이루어진 마치 축구공 같은 동그란 몸.

  머리위에는 씨앗 하나가 볼록 솟아 있는 땅의 정령이 채린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다.

  "여기 쓰다듬어 주는 게 좋아?"

  "뭉!"

  머리로 채린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며 살짝 몸을 튀기는 땅의 정령.

  그 옆으로는 반투명한 몸의 바람의 정령, 부끄러운 듯 두 발자국 떨어져서 구경하고 있는 불의 정령이 보인다.

  "둘 다 대단하네요. 원래 정령이 저렇게 먼저 다가가는 건 흔치 않은데... 지금껏 지켜보다가 둘 다 괜찮다고 느꼈나 봐요."

  아샤가 뒤에 엘프들을 이끌고 오며 말했다.

  "삼색은 거의 반정령이고 채린은 정령사의 재능이 있다며?"

  "맞아요. 원래 소질이 가장 중요하지만 외부요인도 중요하거든요. 혹시 저 삼색이라는 분 말고도 주변에 누가 있어요?"

  카렌은 채린의 말을 듣고 머리속에 엘리가 떠올랐다. 신수인 백호와 청룡이 좋은 냄새가 난다고 하는 엘리와 함께 놀다보니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내 딸이랑 어울리다 보니 그런가 봐."

  이제는 자연스러워진 호칭.

  아사갸 놀라서 카렌을 쳐다 봤지만 이내 미련을 털어내려는 듯 머리를 살짝 흔들고는 데려 온 엘프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왼쪽이 정령사고, 오른쪽이 마법사예요."

  "수가 적네."

  카렌의 말처럼 두 그룹을 나눠진 엘프들의 수는 적었다. 정령사가 5명쯤, 마법사는 60명가량 되어 보인다.

  물론 인간으로 따지자면 엄청난 전력이지만 이 거대한 마을의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다.

  "대부분 나이가 어린 엘프들이라 제대로 능력을 못 써요. 오웬같이 어린데도 저렇게 마법을 능숙하게 쓰는 아이는 흔치 않죠."

  "꾸잉, 오웬이?"

  평소에 허당같은 오웬의 이미지를 생각한 삼색은 귀를 쫑긋이며 놀랐지만 당연한 얘기다.

  대마법사급은 안 되지만 요웬의 아빠인 드웬의 마법도 충분히 수준급이다. 그 혈통이 어디 가겠나.

  저렇게 사고를 치고 다녀도 수습이 되는 건 그만큼 잠재력과 재능이 있어서 그렇다.

  "딸아. 좋아하지 마라. 싸울 엘프가 없어서 이번에만 특별히 넘어가는 거니까."

  "네..."

  아샤의 말에 오웬의 어깨가 순간 으쓱했지만, 아빠인 드웬이 단번에 기를 죽여버린다.

  "하여튼...언제 철이 들런지...쯧!"

  드웬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카렌은 모인 엘프들을 보며 아쉬워했다.

  "지금 계획에는 정령사가 많이 필요한데..."

  삼색 덕분에 타락자들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게 된 건 좋았지만, 문제는 방법이다.

  "조금 해보면 감을 잡을 것 같긴 한데, 연습이 필요하다."

  "꿍! 꿍!"

  지금 정령을 향해 자신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삼색의 말에 ?따르면 생각보다 예민한 전압의 조절이 필요하단다.

  "정령의 힘은 마법으로 확실히 감지를 못 하지?"

  "맞아요. 엘프가 타락자가 되면 정령의 힘을 빌릴 수 없으니 저희가 유일하게 앞서는 점이죠. 보여드릴게요."

  아샤가 손짓하자 한 엘프가 자신의 앞에 있는 탱글탱글한 푸른빛의 정령을 소환해 부탁한다.

  "나를 숨겨줄래?"

  정령이 엘프의 몸에 물을 끼얹자 삼색이 코를 킁킁대면서 다가가 냄새를 맡으며 감탄했다.

  "냄새부터, 기척까지 하나도 안 느껴진다. 역시 사기 종족..."

  "그러면 내가 마법사들과 시선을 끌고, ?정령사들과 삼색, 채린은 함정을 파서 타락자들을 생포하는 걸로 하지. 준비는 언제까지 되겠어?

  "

  "함정을 만드는데 최대한 빨리 하면 3일, 아니 2일? 이미 사기는 최고예요."

  아샤는 흐뭇하게 엘프들을 바라보며 말을 번복했다. 이미 저들은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욕이 하늘을 찌를듯 하다.

  "다 카렌이 와준 덕분이에요. 고맙고..."

  아샤가 한껏 상기된 얼굴로 말하며 슬쩍 뒤꿈치를 들어 카렌의 귀에 슬며시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미안했어요."

  아무도 들리지 않게 속삭이는 한 마디. 이미 헤어질 때 수없이 말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마음이었다.

  `저...저!`

  삼색과 놀면서 은근슬쩍 흘겨보고 있었던 채린이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아드득 간다.

  `완전 여우잖아?`

  귀족적인 겉모습과 달리 채린은 저 엘프의 행동 하나, 하나가 너무 얄미웠다.

  "같이 링 한번 올라가고 싶네."

  채린이 껌을 씹듯 격하게 중얼거리자 갑자기 끼고 있던 팔찌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철컹!

  "우왁!"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채린의 끓어오르는 마나에 반응한 건틀릿이 갑자기 활성화돼버렸고 품에 있던 삼색과 땅의 정령이 펄쩍 뛴다.

  "뭉?"

  "왜 그러냐?"

  "미안! 다시 돌릴게."

  순식간에 다시 팔찌로 돌아간 건틀릿을 감싼 채린이 삼색을 품에 안아 들었다.

  "대체 무슨 일...아! 저 엘프?"

  무심코 중얼거린 채린의 말에 삼색이 물끄러미 주인과 아샤를 쳐다봤다.

  ?

  과연, 채린이 오해할 만한 장면이다. 아름다운 엘프가 주인의 몸에 바짝 붙어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것도 전 약혼자가 말이다.

  "괜찮아. 이미 지나간 일이야."

  하지만 채린과 삼색이 보는 것과는 달리 둘의 대화는 잔잔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죠."

  아샤갸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카렌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채린양과 당신, 굉장히 잘 어울려요. 정령이 저렇게 따르는데 나쁜 인간일리도 없죠."

  카렌은 아샤의 말에 자신에게 채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봤다. 가만히 있어도 어색함이 없고 자신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감싸주는 사람.

  "맞아."

  "그렇군요..."

  아샤는 눈을 살포시 감았다. ?

  "그래도 마음은 후련하네요."

  지금껏 마음 한구석 무거운 돌이 치워진 느낌이다.

  "고마웠어요. 사실 '미안해'보다는 이 말을 더 하고 싶었어요."

  "나도 고마웠어."

  둘은 마주보며 옛날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미소를 서로를 향해 보냈다.

  촤르르르륵!

  "응?"

  "어?"

  그런데 갑자기 몸을 밀어내는 압박감과 순식간에 멀어지는 둘의 사이.

  카렌과 오웬의 몸에는 흙으로 빚어진 손가락들이 휘감겨 있었다.

  "아야..."

  그런데 왠지 아샤의 괴로운 표정을 보니 저쪽에 좀 더 압박이 강하게 들어간 것 같다.

  이윽고 둘을 떼어놓는다는 목적을 달성한 흙들은 다시 형태를 잃고 땅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뭉! 뭉!"

  그때 밑에서 들려오는 앙증맞은 목소리에 둘의 눈이 동시에 아래로 향했다.

  "땅의 정령?"

  방금까지 채린과 놀고 있던 정령이었다. 아샤가 정령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엘프들에게 보통 호의적인 정령들은 이렇게 하면...

  찰싹!

  "어?"

  그런데 이 정령은 어느새 흙으로 손을 만들어 아샤의 손바닥을 꽤 강하게 때려버리는 게 아닌가.

  "어째서...?"

  평생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아샤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비록 기초적인 정령밖에 불러낼 수 없는 마법사 계열이라지만 엘프로써 정령에게 이렇게 미움을 받아 본 적은 처음이다.

  "뭉!"

  땅의 정령이 채린 쪽을 가리킨다. 그리고 오웬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며 외친다.

  "뭉!"

  모두가 마침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차렸다.

  "친구가 제가 카렌과 있는 걸 싫어한다는 얘긴가요?"

  엘프가 정령에게 혼나는 평생 듣도보도 못 한 광경에 훈련을 하던 모든 엘프의 시선이 땅의 정령과 채린에게 향한다.

  "뭉! 뭉!"

  하지만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정령은 토실한 몸을 통, 통 튀기며 채린에게 휙 뛰어간다.

  칭찬해달라며 듯 몸을 채린의 다리에 비비는 땅의 정령.

  "대단하네요. 저렇게 정령이 좋아하는 인간은 처음 봤어요."

  ?

  아샤가 순수하게 채린을 보며 감탄했다. 그리고 괜히 한 번 짖궃은 심술을 부려본다.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네요. 제가 졌어요 채린양."

  "아니...그런 게 아니라..."

  채린은 결코 땅의 정령에게 그런 의뢰(?)를 하지 않았다. 그냥 이 아이가 제멋대로 벌인 일이었다.

  "뭉?"

  채린은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순진한 땅의 정령은 아무것도 모르고 앞에서 괜찮냐고 채린을 걱정하고 있고 말이다.

  카렌은 앉아서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린과 앞에서 몸을 통통 튀기고 있는 정령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채린과 좀 얘기를 해야겠다.

  안 그래도 엘프들이 훈련을 마칠동안 정찰과 준비를 하러 아샤와 같이 다닐 예정이니 말이다.

  ?

  * * *

  3일 뒤.

  울창한 숲. 카렌은 마법사들과 잠시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삭.

  윤기가 반짝반짝 도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자 상큼하면서도 당도 높은 아삭함이 온몸에 퍼진다.

  역시 괜히 엘프들의 특산물 중 하나인 과일답다. 인간이 아무리 잘 키워봤자 이 맛은 못 따라간다.

  `집으로 돌아가도 식물이랑 과일 좀 주기적으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어.`

  민들레 카페의 맛이 한층 업그레이드될 생각을 하니 의욕이 한층 살아난다.

  "지금 공격할까요?"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층 공손해진 엘프들. 그도 그럴 것이 벨리알에서의 과거를 듣고 지난 며칠 동안 카렌의 힘을 보니 자연스럽게 예의를 갖추게 되었다.

  "내 신호에 맞춰 세계수에게 마법을 날린다."

  "네?"

  카렌이 다 먹은 사과의 씨앗을 골고루 숲에 뿌리며 말했다.

  "저기 곰팡이처럼 달라붙은 것들 보이지? 저 게이트에서 나온 거 말이야.

  "

  세계수의 몸체에는 근처의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커다란 게이트와 연결된 얼룩덜룩한 검붉은색의 뭔가가 묻어 있었다.

  "아샤 말로는 저게 세계수를 잠식하고 있어서 문제라는군."

  "그래서 저걸 없애는 겁니까?"

  "아니, 그건 나중에. 지금은 그냥 시선 끌 거야."

  카렌이 먼저 손바닥을 보이게 하늘로 펴 조그만 야구공 크기의 실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점점 마력을 불어넣자 열기구 크기까지 커져서 위로 불룩 솟아올랐다.

  `이미지...`

  카렌이 자신이 만든 실드를 올려다보면서 입김이 솔솔 나오는 겨울의 고드름을 상상하면서 마력을 움직여 넣었다.

  쩌쩡!

  그러자 단순히 둥글둥글했던 실드는 겉면이 얼어붙으며 한기를 잔뜩 내뿜는 얼음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이걸 날리면 거기 뒤에다 바람 마법을 써."

  "세계수를 공격해도 되는 겁니까?"

  "내가 벨리알에서 해봐서 알아. 이 정도는 끄떡없어. 저거 크기만 큰 나무가 아니라니까? 시선은 확실히 끌어야지."

  믿음직한 망나니, 아니 경험자의 말에 엘프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얼음마법을 준비하신 거죠?"

  불이랑 전기는 숲 때문에 못 쓰는 건 알겠는데 굳이 왜 얼음을? 마법사들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카렌에게 물었다.

  "얼음 속성이 풀 타입에 좋다는데? 공격력이 2배래."

  "네?"

  "몰라. 삼색이 그렇게 말하더라."

  카렌은 그 말을 끝으로 손목을 휙 앞으로 꺾어 거대한 얼음을 냅다 세계수를 향해 던져 버렸다.

  "지금!"

  안 그래도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얼음에 엘프들의 바람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혜성이 따로 없다.

  "이 정도면 시선은 충분히 끌겠지?"

  "끄는 정도가 아니라..."

  꽈아아아아앙!

  분명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엄청난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비산하는 파편들. 마치 우박이 떨어지듯 두꺼운 고드름들이 주변을 철통같이 지키던 엘프들에게 날아든다.

  "굉장히 화나겠죠."

  세계수 근처에서 비명과 고성을 지르고 있는 성난 자신의 동족들과 공룡들을 보면서 엘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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