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10/140)

  과거는 항상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고개를 든다

  카렌은 대책없이 칼날을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면 절묘하게 불이 퍼지는 방향에 있는 나무들만을 베어내 만들어낸 방화선.

  지금 불이 퍼져나가는 속도로 보아 속성 섞을 시간 따위 없어 임시방편으로 진행했다.

  "저 정도면 되겠어."

  카렌의 의도대로 자신의 몸을 날름거리며 먹잇감을 찾던 불길이 순간 주춤한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카렌은 나무를 잘랐던 칼날을 그대로 땅속으로 집어넣었다.

  우수수수수!

  그리고 그대로 흙을 들어 올려 불 쪽으로 쏟아 붓는다.

  이에 불길들은 거세게 분노하며 흙무더기에서 빠져나오려고 땅을 들썩이며 연기를 뿜어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잘했다 주인!"

  이제는 익숙하게 삼색의 사고를 수습한 카렌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엘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의 지도자를 만나고 싶다."

  "인간?"

  이제야 카렌과 채린의 얼굴을 제대로 봤는지 순찰대 엘프들의 눈이 휘둥그진다.

  "어떻게 인간이 오로라에 들어왔지?"

  "제가 데려왔어요."

  "오웬?"

  과연 대장로의 딸이라 그런지 둘을 볼 때보다 더 놀라는 엘프들.

  "오웬!"

  그런데 뭔가 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 보통 동료가 인질로 잡혀갔다 돌아오면 기뻐하지 않나?

  "대장로님이 너 들어 오면 당장 지하 토굴에 가둬 두신다고 길길이 날뛰셨다. 가출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인질로 잡혀? 게다가 인간들을 오로라로 데려오고?"

  "오..."

  어쩐지 출입에 대한 정보도 군데군데 빠져 있고, 아까부터 뭔가 불안해 하던 표정을 짓더니만 가출한 거였냐.

  아삭

  옆에서 들려오는 바삭한 소리. 삼색이 어느새 카렌의 목걸이 아공간에서 꺼낸 나초를 앞발로 집어 먹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무리 대장로님의 딸이라도 그냥 못 넘어갈 거다."

  "저는 잘못했지만, 그래도 저 인간들은 달라요."

  오웬이 카렌을 바라보며 말하자 엘프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인간들 때문에 내전이 벌어진 걸 잊었어?"

  "다 똑같은 인간들이 아니잖아요. 타락자들에게서 저를 살려줬다고요!"

  순간 멈칫하는 엘프들.

  `역시 엘프들에겐 목숨을 구해주는 게 최고야.`

  괜히 힘들게 떨어지는 엘프를 받아내고 익룡들을 몰아낸 게 아니다.

  "그리고 당신들 목숨도 구해줬지. 내가 아는 엘프들은 은혜를 아는 종족인데...틀렸나?"

  "하지만, 당신이 숲을 불태웠으니..."

  "내가 아닌데?"

  "응? 그게 무슨..."

  카렌이 특유의 무심한, 아니 이번에는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이제는 살사소스까지 꺼내어 나초를 찍어 먹고 있는 한 고양이를 향해 턱짓했다.

  "얘가 했지. 나는 오히려 불을 꺼줬잖아."

  "냐옹!"

  삼색이 맞다는 듯 재빨리 나초를 자신의 뒤로 슬그머니 숨기며 힘껏 고양이 울음소리를 흉내 냈다.

  "하지만..."

  "설마 고양이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인가? 너희 법은 동물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텐데."

  카렌이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는 엘프 법의 허점을 날카롭게 찔렀다.

  하긴 인간의 법으로도 고양이가 그랬다는데 뭐 어쩔 건가. 검사와 변호사와 함께 법정에라도 세울까?

  "끄응..."

  말이 턱 막히며 고개를 떨구는 엘프 순찰대.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알았다. 하지만 데려다줄 수는 있어도 출입은 장담 못 해. 그건 대장로님들의 권한이다."

  "일단 데려다줘."

  순찰대들이 앞장서고 카렌 일행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삼색 녀석은 앞발에 묻은 과자 기름기를 엘프 몰래 풀숲에 슬쩍슬쩍 닦고 있었다.

  "그런데 저 인간 남자는 어떻게 그렇게 엘프에 대해 잘 알지? 네가 가르쳐줬어?"

  엘프들이 자신들의 본진으로 가는 길에 힐끔힐끔 뒤쪽을 보면서 오웬에게 물었다.

  "아뇨. 저분이 그 벨리알의 망나니예요."

  "뭐? 그 세계수를 불태울 뻔했던 망나니? 그럼 위험한 거..."

  "그런 거 아니다. 이제 불태울 생각 없어."

  카렌이 숲을 지나면서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나무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과거를 지울 수는 없다지만 그게 지구까지 따라올 줄을 몰랐다.?

  "근데 왜 세계수를 불태울 뻔했던 거예요?"

  "그냥 오해가 있었어."

  카렌이 뭉뚱그려 얘기하자 오웬은 재차 입을 열려 했지만, 뭔가를 깨달았는지 손뼉을 짝 친다.

  "아! 이럴 땐 물어보면 안 되는군요?"

  그걸 또 말하는 오웬의 모습에 모두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엘프들도 오웬은 포기했군.`

  인간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라 원체 성격이 저런가 보다. 그래도 한 번 생각도 할 정도면 많이 발전하긴 했다.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앞장서던 엘프들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일행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한 발자국 앞선 엘프가 뭔가를 중얼거리자 앞의 시야가 일그러지면서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찌지직!

  그리고 갑자기 앞에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나무 성벽. 그 위에서는 수많은 엘프가 활시위와 마법을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잠시 갔다 오지."

  오웬과 엘프들이 사라지고 카렌은 경계도 할 겸 눈앞의 거대한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인간들의 건축물처럼 인위적이지 않다. 나무들이 스스로 엉켜 들어 자라 자연스레 만들어진 성벽. 게다가 표면이 반짝이는 것이 따로 마법처리가 된 게 분명했다.

  "이러다 갑자기 공격하는 거 아니냐?"

  느긋하게 구경하고 있는 카렌과 달리 삼색과 채린은 아까부터 불안한 표정으로 성벽 위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적의,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 때문에 삼색의 꼬리는 부풀어 오른 채 바짝 하늘로 향해 있었다.

  "괜찮을 거다. 엘프들은 보통 보수적이고 관습에 충실하지만 그게 나쁜 쪽으로만 치우친 건 아니야. 쟤들은 명분 없이 공격 못 해. 출입은...만약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대장로가 권한을 가지고 있다 했지만...카렌의 머릿속에는 엘프들이 좀 싫어할 수도 있는 다양한 방법이 떠올랐다.

  밤에 찾아가서 설득(?)을 한다거나, 잠깐 무력시위를 한다거나...

  "열어라!"

  "오?"

  스르륵

  그런데 예상외로 허락이 신속하게 내려졌다.

  성벽이 몸을 움직여 자연스레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출입구를 만들어 준다.

  "말이 통하는 대장로인가봐?"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이렇게 쉽게 진행될 줄 몰랐던 카렌도 살짝 놀라며 선두에 서서 모두를 이끌고 길을 따라 들어갔다.

  "우리를 따라오도록."

  딱딱한 표정의 엘프 수비대의 호위 겸 감시에 따라 길을 걷다 보니 하늘 위에서 쏟아지는 관심들.

  "인간?"

  "진짜 인간이야?"

  엘프들의 집은 보통 나무 위에 있는 까닭에 정수리로 따가운 시선들이 쏟아진다.

  ?

  "인간이야!"

  "와! 정말 귀가 작고 피부가 하얗지 않네?"

  "고양이 진짜 귀엽다!"

  어린아이들은 인간이랑 똑같은지 편견 없이 마냥 신기한 얼굴로 엘프 꼬마들이 졸래졸래 따라온다.

  그런데 유독 꼬마들이 삼색의 푸짐한 꼬리와 엉덩이를 홀린 듯하다.

  "역시 내 인기란..."

  시선을 즐기며 일부러 땅을 힘껏 턱, 턱 차면서 걷는 삼색을 카렌이 들어 올렸다. 그냥 왠지 꼴 보기 싫었다.

  "조심하세요. 인간들에게 반감을 품은 엘프들도 많아요."

  오웬의 말대로 이쪽을 향하는 시선들에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강렬한 증오의 눈들이 몇 개 보인다.

  아마 인간들에게 잡혀있다 넘어온 엘프들이거나 그들과 친분이 있겠지.

  "괜히 미안하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니잖아. 괜찮아."

  채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자 카렌이 들고 있던 삼색을 품에 안겨 주었다.

  "꾸잉, 맞는 말이다. 그런 거 신경 쓰다가 일찍 죽는다."

  "우린 주변만 보고 살아도 바빠. 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마."

  "둘이 그렇다면 그렇겠지."

  채린의 표정이 삼색의 턱을 긁어주면서 한결 나아진다.

  둘 다 몇백 년을 살아온 인간과 영물이기에 경험에서 오는 신뢰감이 넘친다.

  "엘프들 상태가 좀 안 좋다."

  삼색이 특유의 날카로운 기감으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지금 뒤에 붙은 아이들 빼고는 엘프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한때 형제 자매였던 엘프들과 싸우고 세계수가 점령당했는데 그럴 만하지."

  게다가 방금 전에 타락자들에게 순찰대가 당하는 걸 보니 전세도 유리한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을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다.

  "여기가 대장로님이 사시는 곳이다. 들어가라."

  수비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나무집 앞. 딱히 다른 엘프들과 다른 점도 없다. 역시나 크게 물욕이 없는 엘프들답다.

  "그럼 저는 이만..."

  "너! 어딜 가려고!"

  "응?

  "

  수비대의 시야에서 벗어난 순간 잽싸게 도망치려던 오웬은 문을 박차고 나온 남성 엘프에 의해 뒷덜미를 잡혀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내가 못 산다. 진짜!"

  "아! 아빠, 아파!"

  "아프라고 때리는 거거든? 언제 정신 차릴래?"

  오웬과 같은 나이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찰지게 등짝을 때리는 모습을 보니 뭔가 좀 보기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저래 보여도 대장로니 최소 100살은 넘은 엘프겠지.

  "꾸잉, 좀 약하다."

  슬그머니 아공간에 손을 넣으려다 빼는 삼색.

  나름 엄격한 기준에 따르는 건지 본격적으로 뭔가를 먹으며 감상하기엔 좀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아! 그만 때려! 여기 손님들도 있잖아."

  "크흠..."

  이제야 카렌들이 보이는지 민망한 기침을 연신 내뿜는 대장로.

  "여기는 내 목숨을 구해 준 카렌님이야."

  "반갑습니다. 제..."

  "진짜 멋있지 않아?"

  찌릿!

  순간 대장로의 눈빛에 섬뜩한 빛이 감돈다.

  "...딸이 참 좋아하시는 분이군요."

  저런 얘기를 굳이 지금 하는 오웬을 보며 카렌이 순간 움찔했다. ?딸을 생각하는 아빠의 넘실거리는 살기가 피부를 날카롭게 찌른다.

  "안녕하세요. 저는 채린이라고 해요."

  그때 카렌의 옆에 훌쩍 다가와 팔짱을 다정하게 끼며 인사를 건네는 채린.

  카렌과 오로라에 오기 전에 대화를 나눠서인지 한결 여유로운 표정이다.

  그 모습을 본 대장로의 눈이 순식간에 다시 온화해지며 자신의 딸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방으로 들어가 있어! 도대체 언제 철이 들런지... 좀 있으면 장로회도 소집할 거니까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해. 이번에는 크게 혼날 줄 알아!"

  "네..."

  어디나 부모는 똑같은지 익숙한 대화들이 오가고 오웬이 어깨가 축 늘어진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거 제가 손님들 앞에서 실례했네요. 자리에 앉으시죠. 저는 엘프의 대장로인 드웬이라 합니다."

  "꾸잉, 그렇게 무게 잡기엔 이미 늦은 것 같다."

  "크흠..."

  ?

  카렌 쪽으로 몸을 빙글 돌린 대장로가 애써 진중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한 고양이에 의해 침몰해버린다.

  "삼색아. 실례야. 저렇게 노력하시잖아."

  "...괜찮습니다. 차를 내어오죠."

  채린이 어설픈 위로로 추가타를 대장로에게 적중시켰고 대장로는 이내 빨개진 얼굴도 숨길 겸 주방으로 향했다.

  딸깍!

  이윽고 대장로가 내놓은 찻잔에서 청량한 향기를 머금은 향이 솔솔 올라온다.

  "저희 애를 구해주셨다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뭐든지 듣던 것과 다른 모양입니다."

  "주인이 좀 망나니긴 했지."

  이 고양이 녀석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겠다.

  "엘프 신을 만나고 싶은데. 언제 탄생하는지 알 수 있나? 세계수가 저 정도 크기면 곧 나타날 텐데 말이야. 아니면 타락자 때문에 문제가 있나?"

  "정말...엘프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시군요."

  "안 물어봐도 떠들어대는 대마법사 친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엘프에 대해 굉장히 잘 아는 다른 친구도 있으셨잖습니까."

  카렌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드웬을 날카롭게 쳐다본다. 보기와는 다르게 역시 그냥 대장로라는 직함을 단 건 아니라는 걸까.

  "다른 엘프들은 몰라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왜 카렌님이 세계수를 불태울 뻔했는지요."

  "굳이 그 얘기가 지금 필요한가?"

  "필요합니다. 참고로 제 능력으로는 이 마을에 결계를 치는 정도밖에 못 합니다. 그럼 오로라의 결계는 누가 쳤을까요? 카렌님의 마을 출입도 저와 같은 대장로인 그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설마..."

  카렌이 얼굴을 찌푸려지면서 입술을 살짝 깨문다.

  끼이익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야. 카렌."

  채린은 카렌과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엘프 여성의 표정을 보면서 오즈로가 했던 말을 드디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가지만 기억해요. 녀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채린 양이에요.

  그리고 왜 자신의 직감이 그렇게 경고를 울렸는지 말이다.

  한눈에 둘이 서로를 향한 복잡하고 아련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전 여자친구네.`

  아삭?

  옆에는 어느새 삼색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콜라와 팝콘을 꺼내 손에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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