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을 얻었다
"와아아!"
츄릅
삼색이 천장 위로 열심히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출발하기 전에 배부르게 먹고 왔어도 눈앞에서 물고기 꼬리가 살랑이자 본능을 이길 수 없나 보다.
부르르릉!
카렌은 실용성 문제로 위가 뚫린 자동차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번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저터널에서는 시야가 탁 트인 오픈카가 최고다.
어두컴컴한 바닷속에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물고기들의 비닐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환상적이다.
"우와..."
뒷좌석에 앉아 연신 감동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린과 오웬이 그 증인이다.
사실 해저터널 중간까지는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바깥을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손을 댄 후반부쯤에 이르자 마법 처리된 투명한 천장으로 경치가 확 달라졌다.
`그 엘프 마법사가 했나?`
셋은 순수하게 주변을 구경하기 바빴지만 카렌은 오즈로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오즈로마저 단기간에 뚫지 못할 결계를 엘프들이 사는 오로라 전체에 두른 마법사.
`그러고 보니 그녀도 마법사였지.`
무심코 떠오른 옛날의 추억에 카렌이 피식 웃고는 계속 차를 몰았다.
마치 컴컴한 우주 속을 차로 달리는 듯한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감상에 살짝 빠져들었나보다.
"꾸잉, 저기다!"
삼색이 뭔가 발견한 듯 소리친다.
"뭐가 보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한참이 지나서야 저 멀리 거대한 문양이 가득 찬 문이 보인다. 차를 문 앞에 세운 카렌이 신기한 눈초리로 삼색을 바라봤다.
"고양이 근시 아니야? 어떻게 그리 멀리 봤어?"
"고양이...아니, 고양이는 맞지. 어쨌든 이 정도는 쉽다. 어둠 속에서는 더 잘 보고! 나 이제 영물에서 진화한 신수라니까?"
이제는 완전히 과거를 받아들인 삼색이 꼬리로 바닥을 탁탁 치며 문 앞을 어슬렁거렸다.
"딱 봐도 저기다 넣는 거네."
카렌이 지금 아공간에서 꺼내든 4개의 돌과 딱 맞을듯한 홈이 있었다.
"저거...맞을 거예요."
"어째 대답이 좀 이상하다?"
모두가 왠지 자신없는 표정의 오웬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저도 들어가 본 적은 처음이라...근데 저기밖에 없잖아요!"
왠지 어색한 오웬을 보며 모두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 카렌은 차례차례 홈에 색색의 키들을 넣기 시작했다.
딸깍!
확실하다.
청량한 효과음과 함께 홈에 키들이 정확히 맞아들어가는 소리에 만족감이 차오른다.
카렌이 그린, 블랙, 오렌지, 화이트키를 입수한 순서대로 꽂자 문에 은은한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뭔가 열려야 되는 거 아닌가?"
삼색이 예리한 눈으로 계속 빛을 내는 문을 앞발로 치면서 손잡이나 작은 홈이라도 있나 살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네. 좀 이상하긴...으앗!"
여는 곳을 같이 찾던 채린이 갑자기 문에서 확 새어 나오는 밝은 빛에 황급히 눈을 감았다.
"아, 맞다! 저번에 들은 건데 이거 정해진 암호 없이 꽂으면 오로라 내부의 무작위 장소 ..."
파앗!?
오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일행은 빛에 휩싸여 버렸다.
?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잠시 후 질끈 감았던 눈을 떠보니 빛에 고통받던 각막을 단숨에 진정시켜주는 녹음이 주변에 우거져 있었다.
"...로 이동해요."
오웬이 간신히 말을 끝냈지만 모두 주위를 살펴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저 멀리 우뚝 솟은 뭔가가 모두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저거 나무야?"
"세계수예요. 오로라의 어느곳에서나 볼 수 있죠."
채린과 삼색이 눈을 비비며 하늘 끝에 닿은 거대한 나무를 본다. 멀리서 봐도 압도적인 크기에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근데 기운이 좀 이상한데?"
하지만 이미 벨리알의 세계수를 본 카렌의 눈에는 뭔가 달랐다. 세계수가 발산하고 있는 기운이 벨리알에서만큼 청량하지 않았다.
"현재 세계수는 타락자가 점령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꾸아아아악!
그때 오웬의 말을 끊어버리는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왔다. 위를 올려다 본 삼색과 카렌의 눈이 번뜩 뜨인다.
"익룡!"
정확한 이름은 몰라도 확실했다. 거의 자신의 몸만 한 부리가 앞으로 튀어나왔고, 커다란 머리 뒤로 그와 비슷한 크기의 뼈가 볼록 솟아있는 새는 처음 봤으니까.
익룡의 한 종류로 보이는 거대한 생물이 하늘 위를 시원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냥 하늘을 나는 공룡 아니야?"
채린이 시큰둥하게 한 마디 던지자 삼색이 갑자기 발끈하며 말한다.
"익룡과 공룡은 다른 거다! 공룡은 땅 위를 걸어 다니고 뼈 특징도 다르다. 무엇보다 익룡은 하늘을 난다!"
"...그게 중요해?"
"그럼!"
카렌마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채린과 오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 오기 전에 주인이랑 같이 쥬라기 파크 영화들을 모두 봐서 안다."
"그래..."
참 열정이 대단하다. 카렌마저 저러는 게 좀 신선하긴 했지만, 남자의 로망이라는 데 뭐라 할 수 있나.
꾸아아악!
그런데 로망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 금방 날아갈 줄 알았던 익룡이 괴성을 지르며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여기 안 보이지?"
"숲이 하늘을 가려서 안 보일걸. 쟤들이 뭐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는 않을 거 아니야."
"저...그게..."
오웬이 손가락을 비비 꼬며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모두를 불렀다.
"쟤들은 없는데 등을 보시면 타락자 엘프가 있어요."
오웬의 말에 삼색이 카렌의 머리 위로 껑충 뛰어 올라가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익룡 위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오! 진짜다! 저거 탈 수 있는 거냐?"
과하게 흥분한 삼색의 눈이 익룡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로망에 또 하나의 로망이 더해졌다.
누구나 한번 날개 달린 생물을 타고 창공을 나는 상상을 하지 않는가.
"아뇨. 길들여지는 생물들이 아니라 저희는 못 타요. 타락자들이 강제로 저들의 정신을 지배해서 억지로 타고 있어요."
꾸아아악!
"...그 말이 맞다."
"네가 어떻게 알아?"
삼색이 귀를 팔락거리며 인상을 찌푸리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익룡과 삼색을 번갈아가며 쳐다본다.
"자세히 들어 보니 익룡들의 비명이 들린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싫다.' '아프다'."
"...너 그런 능력도 있었냐?"
"신수 된 뒤로 동물들 말도 조금씩 들리더라. 나 영물에서 진화했다니까?"
보면 볼 수록 뭔가 나오는 양파같은 고양이다. 사고만 조금 덜쳐도 참 예쁠텐데.
"그럼 어쨌든 익룡은 못 타겠네."
"꾸잉, 싫어하는 걸 억지로 탈 수는 없다. 쟤들이 나쁜거다. 그래도 아쉽다."
허탈함에 땅에 축 늘어진 삼색을 카렌이 부드럽게 안아 들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지금 저 엘프들이 우리를 발견한건가?"
일단 적으로 확인되자 카렌과 채린의 분위기가 전투를 대비하려 순식간에 차갑게 바뀐다.
"...익룡...못 타..."
고양이 한 마리는 여전히 실망감에 카렌의 팔을 붙잡고 반쯤 녹은 마시멜로처럼 축 늘어져 있었지만 말이다.
"마법으로 탐색 중인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해요."
오웬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마법으로 이쪽을 발견했으면 경계하고 있는 자신이 눈치챘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근처에 뭐가 더 있나 제가 찾아 볼게요."
오웬이 눈을 감고 탐색 마법을 펼치는 동안 하늘은 더 번잡해지고 있었다.
꾸아아악!
"더 오는군. 동료를 불렀어."
멀리서도 귀에 또렷이 들리는 울음소리와 함께 멀리서 날개를 쫙 편 익룡 무리가 날아온다.
쉐에에엑!
"엄청 빠르네."
거대한 날개를 쭉 편 채 시속 100k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속도로 순식간에 합류한 익룡들.
통, 통!?
채린이 평소의 습관처럼 전투를 대비하려 줄넘기하듯 몸을 살짝살짝 띄운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복싱을 하기 전 워밍업과 단련을 위해 줄넘기라면 질리도록 했다.
그런데 평소보다 시야가 높다.
항상 일정한 속도와 높이로 뛰던 채린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종아리 근육에 오는 자극도 거의 없고 몸은 너무 가벼웠다.
?
"잠..."
쉐에에에엑!
"온다!"
채린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수십의 익룡들이 일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삼색이 카렌의 품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몸을 낮추고는 털을 곤두세운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그래도 뭔가 의욕적으로 하려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보는 카렌은 뿌듯했다. 이제야 밥값을...
"꾸잉, 내가 못 타면 저 놈들도 못 타! 다 떨어트려야 한다!"
역시나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져 버린 녀석의 열정. 마치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표독한 악역처럼 익룡에 탄 엘프를 시기심과 질투에 차서 바라본다.
"..."
카렌은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다시 익룡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익룡은 크기만으로도 위협적이다.
거대한 머리를 선두로 그 뒤로는 양옆에 늘어진 10m는 되는 거대한 날개는 일반인이라면 단숨에 등을 돌리고 도망갈 만큼 압도적이다.
하지만 여기 일반인은 없었다. 채린은 아직도 뭔가 이상한 듯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건틀릿을 전투모드로 변환시켰다.
"저거...내꺼다."
삼색은 전에 없이 분노에 휩싸였고 카렌은 느긋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주위에 은빛 구슬들 몇 개를 동동 띄어 놓았다.
"꾸잉? 저거 어디 가냐?"
그런데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던 일행을 얼마 안 남겨두고 갑자기 방향을 트는 익룡들.
"저희 옆에 또 다른 엘프들이 있어요!"
탐색을 끝낸 오웬이 오른쪽을 가리키며 외친다.
과연, 익룡들이 거대한 입을 쫙 벌리고 오웬의 손가락 방향으로 일제히 달려든다.
"끄아아악!"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는 한 익룡의 입에는 추욱 늘어진 엘프 하나가 물려 있었다.
퉷!
맛 없는 음식을 뱉듯 엘프를 그대로 놓아 버리는 익룡. 이미 정신을 잃은 걸 보니 그대로 떨어지면 무조건 죽는다.
"순찰대!"
오웬이 엘프의 복장을 보고는 다급하게 달려나간다.
쉐에에엑!
다시 익룡들은 지상으로 달려들고 카렌은 발밑에 실드로 원반을 만들어 몸을 띄웠다.
"삼색이랑 채린은 저쪽으로 가보고, 나는 저거 구하러 간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려나가는 채린과 삼색, 역시 할 때는 하는 둘이다.
카렌이 쭉 하늘로 날아올라 먼저 달려나갔던 오웬을 단번에 추월한다.
"카렌님?"
오웬이 자신의 곁을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카렌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지만 카렌의 눈은 몇 초 뒤면 땅에 추락하는 엘프를 보고 있었다.
까닥
카렌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날아가기 시작하는 주위의 구슬들.
지이잉...
구슬들이 누에처럼 실을 짜내며 서로를 연결한다. 저번에 화이트 구역에서 마법진을 보고 영감을 얻은 방법.
촤악!
그렇게 은빛 그물은 아슬아슬하게 엘프를 덮쳤고 간신히 추락 직전 구해낼 수 있었다.
"후우...오웬, 가서 엘프 챙겨."
잠깐 숨을 돌린 후 카렌은 곧바로 삼색과 채린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처음 보는 적이다 보니 둘이 고전을 할 수도...
"나쁜 놈들! 다 내려! 아무도 못 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냥 좀 난장판일 뿐.
삼색은 기다란 나무들을 타고 도약하면서 기가막히게 엘프들만 속속 떨어뜨렸고 탑승자를 잃은 익룡들은 혼란스러워서 도망가고 있었다.
"와! 몸이 진짜 가벼운데?"
그리고 또 한 명. 채린은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야!"
그런데 자기 몸이 주체가 안 되는지 방금처럼 나뭇가지에 이마를 박기도 한다.
`공기 중에 산소가 많아져서 그런가?`
어제 삼색과 같이 본 공룡 영화에서 공룡들이 살았던 시대에는 산소농도가 높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기분이 과도하리만치 좋고 몸이 가볍다. 자신이야 채린처럼 예민하게 근육을 쓰지 않아 이제야 알았다.
팔락
지금 눈앞에 날아다니는 화려한 날개를 가진 커다란 나비도, 주변에 울창하게 자라난 숲도 모두 상식을 벗어난 크기. 모두 산소가 높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파지직!
그때 들려오는 소리에 순간 카렌의 몸이 움찔거린다.
?
"내 공룡! 으아아아!"
삼색이 공룡을 옮겨타면서 눈이 반쯤 뒤집힌 채 날카롭게 발톱을 휘두르고 있다. 거기까진 괜찮다. 문제는...
파지지지지직!
이제는 더 선명하게 들리는 불길한 소리와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파크들.
"야! 그거..."
파지지지지지지직!
"전광석화!"
카렌이 황급히 손을 내밀어 말리려 했지만 이미 삼색은 자신의 속도와 흥분을 주체못하고 그대로 우다다를 해버렸다.
보통 고양이라면 아무리 신나게 날뛰어봤자 그릇 하나 깨는 걸로 끝나지만 만약 그 고양이가 청룡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쿠쿠쿠궁! 우지끈!
그대로 숲을 고속도로처럼 쭉 가로질러 버린 번개.
화르르르르륵!
삼색이 지나간 길을 따라 순식간에 불이 피어오르더니 융단이 펼쳐지듯 숲으로 빠르게 퍼져나간다.
"산소가 많으면 불도 잘 붙는단 말이다."
이미 한참 늦어버린 말이지만 그래도 한 번 내뱉어 본다.
"숲이! 숲이!"
자신의 몸에서 익룡들에게 물어 뜯겨 피가 철철 흐름에도 불타는 숲을 보며 절망하는 순찰대 엘프들.
"어..."
삼색은 그 모습을 보면서 슬그머니 카렌의 뒤로 숨는다.
"에휴..."
카렌은 한숨을 푹 쉬면서 손을 들어 날카로운 은빛 칼날들을 만들어낸다.
"카렌? 그걸로 뭘 하려고?"
불 끄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구들을 보며 채린이 물었다.
"이렇게."
솨아아아악!
카렌의 손에서 뻗어나간 칼날이 나무들을 사정없이 베어버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안 그래도 절망에 빠져 있던 엘프들이 이제는 후두둑 잘려나가는 나무들에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지만 카렌은 냉철하게 숲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오...역시 주인이다. 아예 불이 붙을 나무를 없애 버리면 불이 날 일이..."
"그런거 아니거든. 일단 봐라, 사고뭉치야."
카렌은 옆의 고양이를 보며 한 TV 프로그램에서 나온 유명한 말을 떠올렸다.
『고양이는 잘못이 없다.』
?
과연 없을까? 그 사람들은 삼색을 키워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않을까?
"너의 주인이 왜 왕 밖에 없는지 알겠다."
"그거야 내 수준이..."
"네가 사고를 치는 걸 수습해 줄 사람이 왕 정도 밖에 없어서 그래."
"꾸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