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8/140)

  남자의 로망은 항상 똑같다

  "괜찮아?"

  채린이 자기 허벅지 위에 있는 카렌의 얼굴을 고개를 살짝 숙여 내려다보며 말했다.

  스윽

  손가락을 내밀어 눈썹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올린다.

  과연 하얀 이마가 살짝 드러나며 한결 시원한 느낌이 든다.

  둘이 있는 곳은 암흑가 중앙 지역.

  카렌과 삼색이 민들레 기숙사와 병원을 처음 지을 때 내려다봤던 곳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보니 암흑가 전체가 한눈에 보이는 명당이다.

  "푹 자니까 한결 낫네. 고마워."

  카렌이 민들레 카페에서 사 온 딸기라떼를 빨대로 한 모금 마셨다.

  화이트 구역의 카지노를 무너뜨린 지 하루가 지났다.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낮.

  어제는 결국 집에 가서 기절하듯 잤고 결국 오늘이 되어야 조금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는 중이다.

  "거기 자재 조심해! 발 나간다!"

  "그쪽 오늘 작업할 거니까 체크하고."

  암흑가의 전 구역에 활기가 가득 찼다. 이상한 일이다. 암흑가의 밤은 낮보다 밝다는 우스갯소리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대체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근데 카렌. 공사할 게 저렇게 많아? 내가 좀 많이 부쉈나?"

  채린이 블랙 구역과 어제 갔던 화이트 구역 쪽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가서 도와줘야 하나...`

  대부분 자신이 부쉈으니 죄책감이 들며 괜히 미안했다.

  "그런 거 아니야. 비어드가 암흑가 전체에 뭘 하고 싶다는데? 내가 잠깐 빌려준 오즈로의 마법책에서 영감을 얻은 모양이야."

  카렌이 자기 머리를 연신 쓰다듬고 있는 채린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 바로 위에 올렸다.

  주인이 다른 두 개의 손이 서로 포개지자 기분 좋은 만족감이 몰려온다.

  "그럼 그냥 주민들에게 일을 주는 거네?"

  "맞아."

  사실 비어드 혼자서 하는 게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어차피 민들레 재단에 쌓인 돈도 좀 쓰고 주민들에게 일거리도 제공하고 있다.

  "잘됐다."

  채린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자 안도하며 밝게 웃었다.

  "암흑가도 완벽하게 미호 손에 들어갔대. 어제 그 빛줄기를 본 사람들이 알아서 무릎을 꿇었다는데?"

  그럴 수밖에.

  모든 암흑가의 주민은 어제 화이트 구역에 출몰한 엄청난 빛줄기를 목격했다. 그것도 드론을 통한 생중계와 하늘 전체를 밝히는 압도적인 힘을 말이다.

  그걸 보고 반항하겠다는 멍청이는 세상에 없을 거다.

  "고생했어."

  "너도."

  채린과 카렌의 몸을 잠시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카렌."

  "응?"

  채린이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문다.

  채린의 허벅지 근육이 긴장으로 딱딱해지자 카렌의 머리가 살짝 움찔거렸다. 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

  "왜?"

  카렌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채린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어제 말이야..."

  채린이 입이 타는 듯 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쉬었다 말을 잇는다.

  "오웬이 한 고백 있잖아..."

  "아, 그거?"

  채린이 무슨 얘기를 하나 기다리고 있던 카렌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살짝 얄밉네.`

  그 모습을 본 채린의 마음이 살짝 꿍해진다. 자신은 나름 큰 용기를 내며 말했는데 이 남자는 마치 장난을 치는 것 같다.

  꾸욱...

  괜히 카렌의 위에 있던 손에 한 번 힘을 쥐어 본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자 다른 손으로는 살짝 카렌의 볼을 잡아당긴다.

  말캉

  마시멜로처럼 탄력 있게 늘어나는 볼살.

  "아야..."

  카렌이 살짝 신음을 내자 카렌이 황급히 손가락에 힘을 푼다. 그러자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는 볼. 살짝 빨개져 있다.

  "오웬에게는 오늘 아침에 잘 설명했어."

  "어떻게?"

  채린이 황급히 되묻는다. 뭘 어떻게 했다는 걸까. 시원하게 한 번에 말해주지 않자 원체 답답함을 싫어하는 성격답게 가슴이 살짝 조인다.

  "나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라고. 삼색의 언어로 얘기하면 살짝 유교적이랄까?"

  "뭐?"

  ?

  전혀 예상치 못한 장난스러운 단어에 채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정말 많이 바뀌었다.

  그때는 얼굴에 있는 근육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보기 힘들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유교적인 사람이 이렇게 있어?"

  장난스럽게 채린이 되받아친다. 그러고 보니 엘리니아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해준다.

  "너한테만 그러는 거야."

  화아아악!

  갑자기 심장에 훌쩍 들어온 카렌의 말에 채린의 가슴이 간질거리며 눈망울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전투에도 일정하게 뛰던 심장이 눈치 없이 미친 듯 단거리 달리기를 뛰고 있었다.

  "정말인데?"

  눈을 감고 있던 카렌은 아직 빨개진 채린의 얼굴을 못 보고는 재차 말했다.

  "...알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아버님은 정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시던데요? 괜찮은 사람들도 많았어요.

  오렌지 구역에 갔다 온 미호가 전해준 말이다.

  미호의 눈에 괜찮을 정도면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은 수준의 미모를 가진 사람들이다.

  "나도 알아."

  채린이 재차 말했다. 이번에는 손으로 카렌의 손을 한번 가볍게 쥐어 신뢰감을 더한다.

  이 남자는 자기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럼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채린이 순간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키려 이빨로 입술을 꽉 씹었다. 그리고는 눈을 감은 카렌을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본다.

  투명할 만치 하얀 피부 얼굴에는 오목조목한 눈코입이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다. 그대로 목을 타고 내려가 보니 살짝 드러난 쇄골 밑으로 탄탄한 몸이 보인다.

  `이런 사람이...`

  채린의 마음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과 어울릴까? 무턱대고 겁 없이 표현할 때는 몰랐지만 지금 보니 괜히 겁이 난다.

  채린이 슬쩍 카렌의 손에서 자기 손을 거둔다.

  "채린아?"

  그때 바로 밑에서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 카렌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너라서 이렇게 하는 거야."

  카렌은 뭔가 오해하고 있었다. 믿어달라는 듯 뚫어지게 자기 눈을 응시하며 멀어지려는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잡는다.

  자신과는 정반대의 한 치의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동자에 채린은 용기를 내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오웬의 고백은 왜 거절한 거야?"

  하지만 마음과 달리 입에서 나온 말은 뭔가 이상했다. 채린의 뜬금없는 질문에 카렌이 살짝 눈매를 좁힌다.

  한껏 채린에게 집중하자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보인다.

  채린의 이상하리만치 달아오른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쿵, 쿵, 쿵.

  ?

  지금 움켜쥔 채린의 손목에서 뛰는 거센 맥박.

  그제야 카렌은 채린의 질문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내 마음속에는 이미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

  "..."

  채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자신이냐는 물음도, 흔히 대화할 때 하는 간단한 추임새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네가 기다린다고 했잖아."

  "...그랬지."

  간신히 목구멍에서 나온 한 마디.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그리고 고백할 게 있어."

  순간 고백이라는 단어에 온몸이 간질거린다. 하지만 다음의 카렌의 말에 순간 석상처럼 굳는다.

  ?

  "나 더 이상 불사가 아니야."

  "...그럼..."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줄래? 침략자들을 막아낼 때까지만."

  안도감과 아쉬움이 섞인 복잡한 감정이 채린에게 밀려들어 온다. 그리고 왠지 모를 서운함도 뒤늦게 찾아왔다.

  "왜? 내가 너한테 부족..."

  "침략자들을 못 막을 수도 있으니까."

  누구보다 상실의 아픔을 잘 아는 카렌이기에 주위 사람들에게 똑같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줄 수는 없었다.

  "엘리는...그때는 내가 몰랐어."

  만약 오즈로가 하루만 빨리 침략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으면 결코 아빠가 되지 않았을 것 같다.

  그전에는 최악의 상황이 되어도 자신이 나서면 무조건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균형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자신에게 마법을 배우게 한 인간의 여신을 보면서 확신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알았어! 걱정 마. 나는 기다릴 수 있어."

  채린이 일부러 배에 힘을 주며 보란 듯이 밝게 대답했다.

  "고마워."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카렌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제야 채린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냉철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얼굴만 보여주던 카렌의 방금 표정은 너무...

  `어색해.`

  하지만 자신에게 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남자를 보며 기쁘기도 했다.

  복싱과 헌터 업계에 있으면서 남자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던 채린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오로라에 따라오게? 꽤 고생할 텐데?"

  "따라갈 거야. 가면 안 돼?"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한 대답이 돌아온다.

  "어...뭐 상관없긴 한데..."

  "그럼 따라갈래."

  오웬과의 일이 잘 해결되긴 했어도 채린의 엘프들에 대한 불안감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해요. 내가 지금껏 본 사람 중에 녀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채린양이에요.

  오즈로가 남기고 간 말. 그건 분명 오웬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오로라에 카렌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그리고 아까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는데...너는 절대 부족하지 않아."

  아까 괜한 자격지심에 채린이 하려던 말을 카렌이 기억하고 꺼낸다.

  "내가 보는 건...좀 달라."

  스윽

  카렌이 누운 채로 팔을 뻗어 길고 눈처럼 흰 손가락 끝을 채린의 얼굴에 있는 흉터에 부드럽게 갖다댄다.

  "거긴..."

  채린이 손을 들어 카렌의 손가락을 떼어내려 했다. 처음 게이트에 들어갔을 때 바보처럼 얼굴에 허용한 공격.

  "괜찮아. 예뻐."

  순간 채린의 팔이 멈칫한다.

  카렌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치열하게 살아온 나날들을 채린이 보여주고 있었다. 이 흉터도 그렇고 방금까지 잡은 채린의 손에서 느껴지는 돌처럼 딱딱한 굳은살까지...

  채린은 자신의 얼굴과 손을 간질이는 카렌의 체온을 느끼며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에라, 모르겠다.`

  이내 본능에 몸을 맡기고 카렌의 손을 살짝 옆으로 치우며 머리를 숙였다.

  쪽

  아까 자신이 머리카락을 치워 놓은 카렌의 이마 위로 채린의 촉촉한 입술이 닿는다.

  "아..."

  둘의 입에서 동시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성이 나온다. 채린은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카렌은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주인!"

  그때 밑에서 깨발랄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여기야!"

  "삼색?"

  "...왜 그렇게 날 반기냐?"

  평소와는 전혀 다른 환영에 삼색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둘을 쳐다본다.

  "나 빼고 맛있는 거 먹었냐?"

  하지만 역시나 삼색다운 대답에 카렌과 채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뭘 그렇게 많이 가져왔어?"

  삼색은 인간 형태로 자기의 몸보다 몇 배는 짐을 지고 있었다. 종류도 다양하다.

  텐트에 관련된 기둥, 천막, 취사도구, 도끼, 램프, 등등

  "오웬한테 물어봤는데 오로라는 거의 자연만 있다고 했다. 이런 게 필요하지! 집 앞에 더 배달시켰다."

  "...놀러 가냐?"

  "가서 불편하게 지내는 것보단 낫지. 이거 목걸이 아공간에 넣어줘라 주인. 그리고 내가 엄청난 정보를 알아 왔다."

  "뭔데?"

  삼색이 눈을 번뜩이며 한껏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 공룡, 익룡도 있다."

  "...오?"

  남자의 로망이 나오자 카렌의 눈도 삼색과 같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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