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화 (107/140)

  내부의 적이 가장 무섭다 [54...]

  주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

  "죽여! 죽여!"

  "꺄하하하하! 여기도 키가 없네? 그럼 다음 방으로!"

  위층에서 들리는 삼색의 광기 어린 웃음과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들의 소리.

  "제발...이리 와..."

  헌터와 각성자들은 이제는 반쯤 애원하면서 외발자전거를 탄 삼색을 쫓고 있었다.

  잡힐 듯, 잡힐 듯, 교묘하게 손아귀에서 쏙 쏙 빠져나간다.

  "끄어어어..."

  "그래! 엘프가 더 예쁘지! 어? 나는 흉터도 있고, 굳은살도 많고, 피부도 많이 탔지!"

  카렌의 바로 앞에서는 누군가를 겨냥한 채린의 한탄 섞인 주먹에 강화인간들이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화이트 구역에서 가장 화려한 카지노.

  실내장식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던 장식품들과 바, 공연장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이미 성한 부분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다.

  "으아아아아아!"

  삼색의 앞을 몸으로 가로막다 자전거에 치여서 날아간 재수 없는 한 헌터가 1층으로 단말마와 함께 추락한다.

  카렌과 불과 몇십 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 하지만 카렌은 미동도 없이 그의 눈동자만 책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30,29,29...]

  피와 괴성, 죽음이 오가는 전장 한복판에 서서 허리는 우뚝 편 채 고고하게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이질적이며 또한 무방비하다.

  ?

  "어딜 가려고!"

  이렇게 독서가 가능한 이유는 채린이 카렌이 뭔가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강화 인간을 한쪽으로 유인하기도 했지만...

  바로 옆에 마치 현대 미술의 전시품처럼 벽에 박혀버린 몇 명의 강화 인간과 카렌의 근처에서 애교를 부리듯 꿈틀거리는 은빛 물결 덕분이기도 하다.

  아까 겁모르고 달려들다 저 물결에 쓸려나간 동료를 본 뒤로 강화인간들은 카렌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어어..."

  강화 인간들은 단순하다. 약자부터 처리하는 건 당연한 순리. 여기서는 그나마 채린이 연약(?)해 보였다.

  "됐어."

  [20,19,18...]

  카렌이 마침내 책에서 눈을 뗐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각막에 빨간 실핏줄 몇 가닥이 드러나며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착.

  마법책을 덮은 카렌이 다시 목걸이 아공간에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두 손을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우우웅...

  카렌의 손과 아까 미리 박아둔 은색 구슬들이 공명하며 환한 빛을 내뿜는다.

  촤아악!

  구슬들의 위치는 정확하게 마법진 6개의 꼭짓점이다. 구슬에서 뻗어 나간 은빛의 선들이 빠르게 서로를 이으면서 별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와..."

  그동안 격하게 싸우면서 군데군데 부서진 조명 때문에 살짝 침침했던 실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채린의 감탄을 시작으로 망막을 찌르는 강렬한 빛에 카지노 안의 모두가 행동을 멈춘다.

  스스슥...

  카렌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자 마법진에 구불구불한 문양이 떠오른다. 마치 새하얀 종이가 검게 물들듯 구석부터 빼곡히 채워지는 마법진의 내부.

  [16,15,14...]

  이제 20초도 남지 않은 긴박한 시간 속에서도 카렌은 방금 머릿속에 말 그대로 찍어 넣은 마법진을 떠올린다.

  츠츠츠츠...

  손가락을 붓 삼아, 마력을 먹 삼아, 마법진이라는 도화지 안에 복잡한 도형과 문양들을 그려낸다.

  -저 미친놈.

  만약 비어드가 지금의 광경을 본다면 헛웃음 지으며 대뜸 쏟아낼 말.

  마법진은 보통 질 좋은 종이 위나 평평하게 다진 깔끔한 바닥 위에 마석 가루를 섞은 물감으로 그리는 게 보통이다.

  [10, 9, 8...]

  이렇게 시끄럽고 환경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마법진을 그리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고? 그렇게 한 사람은 다 죽었으니까.

  조금만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마법이 서로 충돌해서 폭발로 죽든, 갑자기 이상한 생물이 소환되어 잡아먹히든...어쨌든 죽는다.

  [7,6,5, ..]

  "후..."

  카렌의 한숨과 함께 마침내 마법진은 완성되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

  두근, 두근, 두근.

  카렌의 심장이 거세게 뛰면서 자기 주인의 의지에 따라 엄청난 마력을 방류한다.

  파아앗!

  얼마나 많은 양의 마력을 쏟아내는지 카렌의 몸 전체가 어둠 속의 반딧불이처럼 반짝인다.

  손을 타고 흘러간 마력을 마법진이 탐욕스럽게 꿀꺽꿀꺽 받아먹더니 방금보다 한층 더 밝은 빛을 발한다.

  "어? 작아진다."

  채린의 말처럼 1층, 2층, 천장 등 건물 전체를 종이삼아 그렸던 거대했던 마법진은 완성되자 오히려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코끼리 만한 크기로 줄어든 마법진은 로비위에 둥둥 뜨더니 은색 빛을 내뿜어 온 사방을 자신의 색으로 은은히 물들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 기둥, 벽, 마침내는 카지노 건물을 통째로 덮어버렸다.

  [3초 남았어요!]

  [크하....쿨럭!]

  [야! 너 웃지 말라니까?]

  이어폰에서는 오웬의 목소리와 옆에서 화이트 구역의 사장이 폭발을 예상하고 자포자기한 채 웃다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1]

  둥!

  마침내 초읽기가 끝나고 어떠한 시작을 알리는 듯 거대한 북을 치는 소리가 건물 전체에 울린다.

  첫 마석 폭탄이 폭발한 소리다.

  드드!

  하지만 마땅히 주변을 집어삼켜야 했던 충격은 이미 건물 전체에 묻어 있는 마법진의 기운에 흡수되더니 마법진에게 흘러들어온다.

  마법진은 충격을 게걸스럽게 삼키며 몸을 부르르 떤다. 그래도 워낙 폭탄의 위력이 강했던지 그 진동만으로도 건물이 낮게 비명을 지른다.

  ?

  둥! 둥! 둥!

  이어서 지하와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에 설치된 마석 폭탄들이 차례대로 폭발하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려온다.

  드드드드드드드드!

  꾸역 꾸역 먹보처럼 폭발을 흡수하는 마법진. 하지만 이번에는 폭탄들도 만만치 않았다.

  서로 줄다리기를 하듯 줄지어 터지는 마석 폭탄들과 지지 않겠다는 듯 매미의 날개처럼 파르르 진동하며 마법진은 모든 충격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저거...괜찮은 거냐?"

  어느새 옆에 내려온 삼색이 돌무더기가 후드득 떨어지는 주변을 보며 카렌에게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나도 처음 해 봐서 잘 모르겠네."

  하지만 돌아온 건 확신이 없는 카렌의 답변.

  "...주인?"

  "...카렌?"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이제는 카렌을 보는 모두의 눈에 간절함이 깃든다. 마치 구원자를 바라보는 눈빛.

  아니, 실제로 정확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모두 저 남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어어..."

  ?

  심지어 지능이 낮은 마석 인간마저 몸을 부르르 떤다. 자기 머리 위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정체불명의 뭔가가 날뛰는데 불안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겠는가.

  ?

  '그러고 보니 무슨 배출구 얘기가 있던 것 같은데...'

  만약 카렌의 지금 생각을 읽었다면 모두 절망하지 않았을까.

  ?

  그 잠깐 사이에 복잡한 전자제품의 설명서 같은 글을 어떻게 다 보나. 자신은 그냥 그림만 기억하기도 바빴다.

  "흠..."

  카렌이 팔짱을 끼며 마법진을 올려다 본다. 확실히 뭔가 잘못되긴 했다.

  분명 처음 만들 때는 은빛으로 반짝이며 서늘한 느낌마저 들었는데 지금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게 달아올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빠지직...

  폭발은 멈췄지만, 정작 그 모든 걸 흡수한 마법진이 더는 한계라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냥 대충 해보자."

  어차피 마법도 잘 모르고 임기응변으로 살아온 인생이다.

  배출구가 없으면 지금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일단 안전장치."

  카렌이 왼손으로 마력을 해일처럼 쏟아내 혹시나 폭발하지 않게 마법진을 빈틈없이 감쌌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는 바로 위에 날카로운 송곳을 만들어낸다.

  꽈아아앙!

  오른손을 훅 내리자 송곳이 마법진을 사정없이 내리찍는다.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마법진에 균열이 후드득 더해지며 힘이 새어 나왔지만 주위를 둘러싼 카렌의 마력 덕분에 답답한 듯 움찔거린다.

  꽝!

  다시 한번.

  "음..."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카렌의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진다.

  꽝!

  다시 또 한번.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한눈에 문제를 알 수 있었다.

  확실히 천장 쪽으로 향하는 곳에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미 약해진 다른 곳도 뚫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렌의 마법진을 억제하고 있는 왼손이 엄청난 힘에 부치는지 서서히 떨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 뿐.

  꽝! 꽝! 꽝!

  연속으로 송곳이 거침없이 내려찍는 광경에 모두 멍하니 마법진을 바라본다.

  "젠장..."

  카렌이 험한 말을 내뱉으며 다급하게 오른손을 마법진 쪽으로 돌렸다. 왼손이 한계에 봉착해 어쩔 수 없었다.

  ?

  한곳에 모인 농축된 마석 폭발은 둘째치고 저 마법진을 만드느라 아까 사정없이 쏟아부은 자신의 마력이 빠져나오려고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한 번만 더 치면 되는데..."

  막막하게 카렌이 마법진을 바라봤다. 참 아쉬웠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삼색! 나 좀 태워줘!"

  "응?"

  그때 들려오는 당찬 목소리. 채린이다.

  "저거 한 번 세게 치러가자."

  채린이 마법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제야 의도를 이해한 삼색의 눈빛이 홱 돌변하며 혀를 쏙 내민다.

  "그거 재밌겠다."

  우드드득

  삼색이 재빨리 몸을 호랑이 크기로 되돌리더니 채린을 등에 태웠다.

  "채린?"

  카렌이 다급하게 부르자 채린이 돌아보며 주먹을 들어 올린다.

  "내가 엘프처럼 예쁘진 않아도 딱 하나! 누구보다 잘하는 게 있지."

  카렌에게 마지막 남은 뒤끝마저 털어내고 채린을 태운 삼색이 노란 잔상만 남기고 휙 사라져버린다.

  "어...어?"

  그렇게 나타난 곳은 마법진의 바로 위.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람들의 눈이 놀라서 커다래진다.

  "삼색. 가만히 있어 줘."

  "알았다."

  삼색이 공중에서 그대로 몸을 굳히자 그 위에 올라선 채린이 자세를 잡는다.

  `처음에는...`

  비어드의 건틀릿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통!

  채린이 왼쪽 건틀릿의 보라색의 마석을 살짝 누르고는 사정없이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슈슈슈슈슈슉!

  얼마나 빠른지 채린의 팔이 흐릿하게 움직이며 단번에 수십 발의 푸른 주먹을 쏟아낸다. 하지만 아까와는 속도가 다르다.

  일반인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느릿하게 날아가는 주먹.

  통!

  그리고는 다시 똑같이 마석을 두드리고는 채린이 이번에는 온몸의 마력을 근육의 움직임과 일치시킨다.

  처음에는 오른발 뒤꿈치를 박차고 그다음은 허리, 어깨, 마지막으로 오른손에서 뻗어 나가는, 단순해 보이지만 다리, 허리, 체중, 주먹까지 정확한 힘과 회전을 줘야 한다.

  스트레이트(Straight)?

  인간이 주먹을 쥔 이래 길고 긴 싸움의 역사 속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직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기술.

  미리 던져 놓았던 주먹들의 뒤를 쏜살같이 날아든 스트레이트가 망치가 되어 강타한다.

  그렇게 추진력을 얻은 주먹은 카렌이 만들어낸 균열에 정확히 적중하고 마침내 탈출구를 찾은 힘들이 쏟아져 나온다.

  쏴아아아아아!

  카지노 천장을 향해 댐이 한가득 담고 있던 물을 방류하듯 쉼 없이 기운들이 하늘을 타고 올라간다.

  하지만 정작 이런 엄청난 일을 성공한 카렌의 신경은 다른 데로 가 있었다.

  ?

  "채린! 삼색!"

  다급하게 둘의 이름을 부른다. 방금까지 채린과 삼색이 있던 곳이...

  "나 불렀냐?"

  "여기 있어. 걱정했어?"

  어느새 카렌의 뒤에서 자신의 앞발을 핥고 있는 삼색과 마침내 모든 화가 풀렸는지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린.

  `얘가 저런 표정도 짓는구나.`

  곧바로 다시 특유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방금 자신들을 향한 카렌의 감정을 채린은 놓치지 않았다.

  "진짜 예쁘네."

  아직도 사정없이 자신의 힘을 뿜고 있는 마법진을 보는 모두의 눈빛이 아득함에 젖어든다.

  하지만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점점 약해지는 빛줄기. 이윽고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아..."

  방금까지 자신을 죽일뻔했던 건 까마득히 잊은 듯 모두가 동시에 아쉬움을 토해낸다. 하지만 여기서 유일하게 감상에 젖어 들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있었다.

  스겅!

  "으어...?"

  카렌이 마법진을 막았던 마력을 주물러 그대로 거대한 칼날로 빚어내 강화 인간들의 목을 베어낸다.

  쿵!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일제히 한 곳에 모여있던 강화 인간들의 몸이 기울더니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다.

  "이게 나을 거다."

  불쌍한 자들을 위한 카렌만의 조의.

  처음에 강화 인간을 볼 때부터 미치광이 박사의 키메라가 겹쳐 보였다.

  자신이 뭐에 죽었는지도 모르는 강화 인간들의 얼굴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빛줄기에 대한 감상이 서려 있었다.

  "어...항복하겠습니다."

  이어서 싸늘한 카렌의 눈이 향하자 헌터들과 각성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떨구면서 양손을 번쩍 하늘로 든다. 그리고 일제히 서로를 살벌하게 바라본다.

  `저 괴물들이랑 싸우자고 하면 내 손으로 죽인다.`

  "타락자는 없는 모양이군."

  다행히 남은 자들은 대부분 외부 인력이라 더 이상 소동이 벌어지지는 않았다.

  "너희."

  "넵!"

  카렌의 지목에 합을 맞춘 듯 긴장한 채 일제히 쏟아져 나오는 대답.

  "여기 이 고양이 따라서 건물에 있는 화이트 키 찾아와."

  "예!

  "

  드디어 엘프 대륙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다만...

  "일단 좀 쉬자."

  카렌이 채린이 건네준 생수를 꿀꺽꿀꺽 마시며 충혈된 눈을 살짝 문질렀다.

  "딸기라떼 먹으러 갈래?"

  채린이 다가와 천진하게 팔짱을 끼며 올려다보자 카렌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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