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5/140)

  그런데 그게 네가 될 수도 있지

  오늘 암흑가의 판자촌 분위기는 유독 달랐다.

  언제나 불던 특유의 무력한 공기가 아닌 흥분이 가미된 미묘한 열기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이봐. 오늘인가?

  "

  "맞아. 암흑가의 주인이 정해지는 날이지."

  오랜 세월. 암흑가는 진정한 지배자가 없었다. 서로 견제하며 누가 올라가면 끌어내리는 얼핏 보면 거칠지만, 지금껏 무너지지 않았던 법칙.

  하지만 그린 구역에서 외부인이 일으킨 균열은 서서히 커지더니 이내 모든 법칙을 집어삼켜 버렸다.

  "누가 되든 우리에게 똑같잖아. 뭐 달라질 게 있다고."

  블랙 구역의 판자촌에 있는 유일한 전당포에 모인 사람들이 삶에 찌든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눈다. 모두 차림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무슨 소리야. 외지인이 훨씬 낫지!"

  그때 앳된 아이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를 파고든다. 어른들이 움찔하며 소리를 버럭 지른 아이를 쳐다본다.

  "아저씨. 죽어가는 딸 살려준 게 누군데? 저기 병원 가서 살아난 거 아니야?"

  "...그렇지."

  수십 쌍의 어른들의 눈초리를 받으면 어린 나이에 움츠러들 법도 하지만 아이는 오히려 가슴을 내밀며 한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줌마도 요즘 약 끊으려고 외지인들에게 가잖아. 요즘 아줌마 아들도 엄마가 뭐라도 좀 해본다고 좋아하더라?"

  "정말?"

  주름이 자글자글한 중년 여자의 얼굴이 환해진다.

  "그래. 아줌마 아들 기숙사에서 나랑 같은 방 써. 학교도 같이 다닌다고."

  "그렇지. 그렇지!"

  여자가 고개를 거세게 끄덕인다. 비록 약의 금단 증상 때문에 손가락 끝은 떨렸지만, 눈빛은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약을 끊기 위한 시작은 아들이 학교에 가면서부터였다.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니까 일 좀 나가라고. 외지인들이 일 준다잖아."

  "하지만..."

  외지인들은 건물에 대한 청소나 앞으로 지을 건물의 건축을 도와줄 인부를 모집하고 있었다.

  조건도 괜찮다. 아니, 자신들에게는 넘칠 정도의 돈과 복지지만...

  "그러다 보복당하면 어떡해? 저 화이트 구역 놈들이 이기면 우리는 다 죽을 거야."

  암흑가의 주민들은 어떤 면에서는 블랙 구역보다 화이트 구역 사장 놈들이 더 지독한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들의 심기에 거슬리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끔찍한 꼴을 당한다.

  "그래서 오늘 결과를 보자고. 외지인들이 이기면 우리 삶도 달라질 거야."

  "그런가?"

  "그렇지! 저놈들이 우리에게 지금까지 해준 게 뭐 있어? 비만 오면 물 새는 판자집? 저거 얼마 전에도 천장 무너져서 사람 한 명 죽었잖아."

  아이가 답답하다는 듯 사람들을 둘러봤다. 역시 지금껏 패배감과 무력감에 찌든 사람들에게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럴 수도..."

  하지만 누군가 지금 무심코 중얼거린 말처럼 작은 희망의 불씨가 이들은 가슴에 새겨졌다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저 TV나 다들 눈 크게 뜨고 보라고. 그 사람이 다 이길 거니까. 우리의 희망은 외지인밖에 없어."

  아이가 전당포 유리 속에 있는 대형 TV를 보며 확신에 차서 외쳤다. 그리고 기도했다.

  `제발 이겨.`

  은발의 카렌이라는 남자.

  자신의 엄마를 살려주고 자신을 구원해준 사람. 그리고 그 금발 여자아이까지.

  그들은 달랐다.

  책임진다는 말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그저 행동으로 보여줬을 뿐.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건 이런 일밖에 없다.

  아주 작지만, 사람들에게 외지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실어주는 것.

  "시작한다."

  회색 화면의 지지직거리던 TV가 화이트 구역의 입구를 비추기 시작했다.

  예고한 대로 화이트 구역에서 드론을 이용한 생중계. 외지인들을 철저히 쳐부수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꿀꺽.

  모두가 TV를 보며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암흑가와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될 시간이다.

  부르르릉!

  그때 TV에서 굵직한 엔진음이 들려온다.

  "차?"

  아직 카메라의 시야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자동차 소리다. 그리고 이내 흰색 연기를 몰고 오는 뭔가를 화면이 잡아낸다.

  저 멀리서 굉음을 내며 끼기긱 타이어를 바닥에 끌며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건...커다란 지프였다.

  그런데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급정거, 급출발에 레이싱에서나 볼 드리프트.

  심지어는 주변 건물이나 물건들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다.

  "...술 먹은 거야?"

  아니, 음주운전을 해도 저렇게는 못 하겠다.

  모두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누군가 허탈한 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게...우리의 희망?"

  이번에는 아이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

  멀리서 봐도 차의 움직임은 이상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비극이었다.

  "으아아아아! 미친 괭이 놈아!"

  "#*($*#"

  차 안에 탄 모두는 일제히 운전석에 앉은 삼색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주인! 걱정 마라! 면허도 땄고 실제 주행은 게임으로 다 익혔다!"

  하지만 인간으로 변해 핸들을 이리저리 꺾고 있던 삼색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액셀을 더 힘차게 밟았다.

  ?

  원래는 엔진소리도 거의 나지 않는 자동차지만 일부러 인위적인 소음까지 켜놓은 채로 차는 달린다.

  `그래, 저놈에게 운전을 맡긴 내 잘못이지.`

  ?

  카렌은 조수석 창문 위 손잡이를 꽉 잡고 10분 전의 자신을 욕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차로 적진으로 쳐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영감을 얻은 삼색을 말리지 않은 스스로의 잘못이다.

  빠직!

  차가 아슬아슬하게 벽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사이드미러의 목이 처참하게 꺾이자 모두는 자신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왠지 저 사이드미러가 자신의 미래가 될 것 같았기에.

  "야! 저기 입구에 세워!"

  "응? 아직 쳐들어가기로 했던 카지노까지는 한참..."

  "닥치고 빨리!"

  "치...

  끼이익!

  결국 험한 말이 카렌의 입에서 나오고 마침내 차가 멈췄다.

  범퍼와 건물 벽 사이에 손 한 뼘 들어갈 정도의 거리. 이렇게 세우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다.

  "너...다신 운전하지 마."

  모두가 차 문을 박차고 나와 힘껏 가슴을 부풀리며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잠깐 사이에 모두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기선 제압을..."

  "두 번 기선 제압하다 우리 먼저 죽겠어. 현실은 영화나 게임이 아니거든? 벽 부수고 돌진하면 에어백 먼저 터져."

  카렌의 말에 오웬과 채린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내가 신기술을 개발했는데..."

  "너 혼자 해."

  자신에게 향하는 세 쌍의 불신에 찬 눈빛에 이번에는 삼색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슈우욱...

  카렌이 타고 온 자동차를 목걸이 아공간에 집어넣고는 앞장서서 화이트 구역의 내부로 향했다.

  우우우웅!

  "저건 괜찮아? 처리할까?"

  삼색이 저 위에서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드론들이 영물의 예민한 청력에 거슬리는지 으르렁거렸다.

  "괜찮아. 어차피 암흑가 내부 방송으로 돌려서 외부에는 못 나가. 그리고 여기 방식대로 해야 네 여자친구가 편하지."

  암흑가는 연합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

  재판도, 경찰도 없다.

  오로지 힘.

  마약, 무력, 정보, 돈 등 형태는 상관없다. 살아남고, 남을 짓밟을 힘만 있으면 된다.

  "저놈들이 가장 자신 있게 준비한 걸로 부술 거다."

  저들은 무력을 선택했다.

  블랙 구역의 잔당과 용병을 고용하고 마석 개조인간을 준비했지.

  똑같은 방식대로 해줄 거다.

  "대륙의 망나니란 소문은 역시 헛소리였나 봐요?"

  "응?"

  오웬이 한 걸음을 크게 내딛어 카렌의 바로 옆으로 오더니 스윽 상체와 얼굴을 카렌에게 내밀었다.

  동시에 별처럼 반짝이는, 부담스럽기까지 한 눈빛을 카렌에게 보낸다.

  "당신 같은 인간은 처음 봤어요. 행동도 그렇고, 무엇보다 우리를 보는 인간들의 눈빛은 대부분...좋지 않은 기운을 담고 있거든요."

  요리조리 카렌을 뜯어보더니 오웬이 싱긋 웃는다.

  카렌은 오웬의 말을 깊이 이해했다. 벨리알에서도 지구에서도 인간은 엘프를 탐냈으니.

  엘프들 사이의 내전까지 일어난 원인이기도 하다.

  "당신은 확연히 달라요. 그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죠. 인간도, 영물도, 엘프도."

  오웬이 삼색과 채린, 마지막으로 자신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게다가 단번에 암흑가를 휘어잡고. 키를 모은 만큼 능력도 엄청나요. 대단하고, 신선해요. 그래서 그런데..."

  순간 채린이 날카롭게 오웬을 응시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감이 화악 온몸에 퍼진다.

  "나랑 사귈래요?"

  삼색과 채린이 순간 얼어붙으며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삼색의 눈이 지금껏 본 적 없이 커지며 곁눈질로 한 걸음 뒤처진 채린과 앞에서 걷고 있는 오웬과 카렌을 동시에 본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왜요? 아는 엘프 언니들이 요즘 인간들은 일단 연애 먼저 해서 사귄 다음에 서로 알아간다던데? 대신 결혼은 안 돼요. 엘프들 사회는 결혼에 예민하거든요."

  카렌은 눈 앞의 젊은 엘프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 '언니'들은 이 아이에게 무슨 얘기를 한 걸까.

  "그럼 키스부터 할까요? 키스한 다음에 사귀는 걸 좋아하나요?"

  그런 카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술 더 떠 볼이 발그레해지며 수줍게 웃는 오웬.

  "내가 알고 있는 엘프들은 이성에 관해서는 인간보다 보수적인데..."

  "알아요! 저와 제 주변사람들이 좀 특이한 편이죠. 걱정하지 마요. 당신에 대한 호감과 호기심이지 사랑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나중에 그렇게 발전할 수도 있겠죠?"

  오웬이 말할수록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가 카렌과 삼색의 피부를 바늘처럼 찌른다. 누구인지는 굳이 고개를 안 돌려봐도 알 것 같다.

  `팝콘...꺼내면 맞아 죽겠지?

  "

  이번에는 삼색마저 꼬리를 말았다. 그러면서 흘낏 채린의 양쪽 팔목을 본다.

  새끼손톱만 한 마석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아름다운 팔찌가 채워져 있는 팔목. 비어드가 심혈을 만든 작품이 햇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낸다.

  "그리고...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 정도면 예쁘지 않나요?"

  분위기를 파악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안 하는 건지 오웬의 입은 쉬지 않았다.

  카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오웬의 말을 일단 들어주었다. 그리고선 깨달았다.

  `진심이구나.`

  엘프의 수명은 기본적으로 300살이 넘는다. 아직 채 30살이 안 된 이 엘프는 어리다. 게다가 인간에 대해서는 주워들은 이상한 이야기 빼고는 아는 게 없었다.

  "예쁘지."

  카렌은 일단 객관적인 진실을 말해준다. 확실히 외형적인 면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빠직...

  뒤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삼색이 누군가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지는 것도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 설명해 줄 차례다. 인간과 엘프의 관습은 다르다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은...

  "저기 온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카렌의 말은 불청객에 의해 끊겨 버렸다.

  저 멀리 보이는 가득 들어찬 사람들. 앞을 보니 거대한 카지노가 보인다.

  입구 앞에는 무슨 거대 몬스터라도 상대하는지 거대한 철제 장애물들과 총구, 대전차포, 기관총까지 이쪽을 겨눈다.

  저벅, 저벅

  하지만 저따위 것들보다 지금 앞으로 뚜벅 뚜벅 걸어 나가는 여자가 더 무섭다.

  촤르르륵

  ?

  채린이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자 순식간에 박혀있던 마석들은 일렬로 손목부터 팔꿈치 바로 아래까지 별자리처럼 늘어진다.

  철컹, 철컹.

  그리고 서서히 반투명한 푸른 금속이 좌우로 퍼져나가며 건틀릿의 형태를 갖춘다.

  주먹을 내지르거나 가드할 때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한 비어드의 센스.

  지구의 기술, 벨리알의 기술, 드워프의 천재성이 결합된 건틀릿은 마치 마법같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우우웅!

  하지만 정작 주인인 채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건틀릿에 마나를 그야말로 욱여넣는다.

  그리고 자세를 잡고 앞으로 내지르는 스트레이트.

  으드득...으드득...

  채린의 마나를 게걸스레 먹어 치운 건틀릿이 마치 용트림을 하듯 앞으로 채린의 주먹을 똑 닮은 푸른 기운을 앞으로 내뿜는다.

  꽈와아아앙!?

  ???

  볼링공처럼 앞으로 나아간 주먹이 핀들을 강타한다.?

  전차도 막는 튼튼한 장애물은 산산조각나고 그보다 약한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채린을 모두가 움찔거리며 주시한다.

  "저..."

  "으아아아아아!"

  카렌이 어깨를 잡으려는 순간 채린은 괴성과 함께 박차고 나가 카지노 입구로 돌진했다.

  "살려줘! 괴물이다!"

  "지원! 지원!"

  "마녀가 온다!"

  이제는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는 암흑가에서 나름 한가닥 한다는 사람들.

  톡, 톡.

  "왜?"

  옆에서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는 따가운 감촉에 카렌이 옆을 바라본다. 삼색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보고 있었다.

  "주인이 저번에 그런 얘기 했잖냐."

  "무슨 얘기?"

  "내가 주인이 채린의 안전장치 날려버렸다고 했었잖아."

  "그랬지."

  자신이 채린이 건틀릿을 쓰면 멋있겠다고 의욕을 북돋아 준 그때였다.

  "그다음에 주인이 한 말 기억하냐?"

  "그것까진..."

  삼색이 누군가 들을세라 카렌의 귀에 대고 조용하지만, 또박또박 그대로 읊어주었다.

  "주인은 채린의 주먹에 맞을 일 없어서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삼색이 잠깐 신나게 날뛰고 있는 채린을 흘낏 보더니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곧 있으면 저 주먹에 주인이 맞을 수도 있겠다."

  삼색의 말을 듣고 문든 카렌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지금 때리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채린은 과연 누굴 보고 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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