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끼이익!
카렌은 미호를 내세운 뒤, 슬쩍 의자를 젖히고 발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본격적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삼색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왜 녀석이 팝콘을 항상 목걸이 아공간에 넣고 다니는지 알겠다.
`음...아냐. 그래도 똑같아질 수는 없지.`
카렌이 무심코 아공간을 열다가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해 재빨리 손을 거뒀다.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제일 먼저 미호의 미소에서 벗어난 빅마담이 허벅지를 꼬집으며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허억, 허억."
그제야 마치 첫사랑에 빠졌던 때처럼 거칠게 박동쳤던 심장이 달리기를 멈춘다
'각성자인가?'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능력은 지금껏 없다고 들었는데?
촤아악!
빅마담이 바로 옆에 있는 물컵을 들고는 자신의 머리 위에 붓고는 머리를 푸드득 털었다.
그제야 살짝 머리가 맑아진다. 뭔지는 모르지만 눈앞의 여자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하다.
?
"호오..."
미호와 카렌이 동시에 감탄했다.
과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뒤의 마담들에 비하면 대단한 인간이다. 오렌지 구역의 수장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는 능력과 기개.
"아버님. 제 정체를 드러내도 될까요?"
"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잘 안 풀리면..."
뒷말을 굳이 끝맺지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많이 봐줬으니까.
요즘 주변에서 유해졌다는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슬슬 귀찮아지려 하고 있었다.
미호는 한껏 여유롭게 턱을 괴고 있는 카렌의 모습에서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눈빛에는 서서히 지겨움을 넘어선 공허함이 깃들기 시작했고 온몸에서는 서늘한 냉기가 스멀스멀 퍼져 나온다.
평소와 분위기가 너무 다르다. 차이점이 뭘까.
`맞아. 여기는 아무도 없어.`
카렌의 측근들이 없다.
특히 삼색, 엘리, 채린.
스스로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렌의 분위기는 저 셋의 유무에 따라 극명하게 달라진다.
삼색의 유쾌함.
엘리의 귀여움.
채린의 천진함.
저 모두가 주위에 없는 지금.
카렌, 자신은 모르겠지만 과거의 모습이 슬며시 배어나온다.
왕국이 멸망한 후 상처입은 맹수처럼 정처없이 대륙을 떠돌던 그 때.
과거의 파편 중 일부가 카렌의 내면에서 수면위로 모습을 빼꼼 내밀었지만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으으...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일부 감각이 예민한 마담들은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떤다.
본능이 경고를 날린다.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고.
`이대론 안 돼.`
미호의 마음이 급해진다.
이제는 더 이상 카렌을 시험해서도, 시간을 끌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미호가 결심을 마치곤 완전히 로브를 벗어버린다. 그리고 등 뒤로 촤르륵 꽃처럼 피어난 순백의 꼬리들.
"...세상에."
눈을 단번에 사로잡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모두가 순간 넋을 잃어버린다.
구미호의 상징인 9개의 꼬리를 모두 꺼내고 머리에는 뾰족한 여우 귀가 솟아난 미호가 빅마담의 귀에 꿀 떨어지는 목소리와 대비되는 살벌한 경고를 던진다.
"저분에게 지금부터 어떤 말도 하지마. 아니, 눈길조차 주지마."
"대체 당신들은 누구죠?"
이제 빅마담의 마음에는 카렌을 향한 욕망은 사라지고 자신의 상식을 벗어난 알 수 없는 존재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들어찼다.
"나는 구미호이자 사신의 주작."
화르르륵!
미호의 소개와 함께 9개의 꼬리 끝에서 퍼져나간 불길이 사방에 퍼진다.
"으아아악!"
"호오..."
?
비명은 마담들로부터, 뒤의 나지막한 탄성은 카렌으로부터 나왔다.
마담들이 금방이라도 자기 몸을 불태울 것 같은 화염에 아연실색할 때 카렌은 흥미롭게 주위를 둘러봤다.
`주작의 힘을 잘 쓰네.`
아직도 가끔 격하게 뛰면 몸에서 정전기가 일어나는 어떤 고양이에 비하면 아주 훌륭하다.
"살려줘!"
"으아아아!"
불구덩이 속에서 사람들이 날뛰는 모습이 마치 지옥 같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정작 열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불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
미호는 패닉에 빠진 빅마담의 멱살을 잡고 서늘한 목소리로 정신을 깨우고는 물었다.
"잘 봐. 이게 무서워? 겨우 이딴 게 무서운데 내가 모시는 저분은 어떨 것 같아?"
안색이 파랗게 질려 그나마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던 빅마담의 입술이 푸르르 떨린다.
이 여자의 말대로 저 남자가 가장 두렵다.
자신이 준비한 모든 유혹을 아무 어려움 없이 이겨낸 사람.
이 광경을 만들어낸 눈앞의 능력자조차 부리는 인물.
?
게다가 지금 두 손을 깍지 낀 채 이런 상황 속에도 주변을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이질적이다.
마치 지옥에서 여유롭게 거닐고 있는 천사를 보는 듯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사르르륵...
마담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린 그때.?
미호의 탐스러운 9개의 꼬리가 연꽃의 봉우리가 닫히듯 빅마담을 부드럽게 감싼다.
?
"아..."
두근, 두근.
포근한 심장박동소리와 함께 빅마담의 눈이 나른해지며 불안감이 씻은듯 사라진다.
동시에 지금껏 오렌지 구역의 수장으로서 얼굴에 쓴 두터운 가면이 녹아내린다.
?
모든 소음과 시야가 차단되며 ?마담은 마치 엄마의 뱃속에 있는 것처럼 안정감을 느꼈다.
"우리는 암흑가를 지배할 거야."
미호의 눈이 도깨기불처럼 푸른 빛을 띄며 빅마담을 마주본다.
"네."
빅마담은 이유도, 방법도 묻지 않았다.
미호의 말은 이미 정해진 미래처럼 느껴졌다.
"너희는 어떻게 하고 싶어?"
"저희는..."
미호의 질문이 마담은 깊은 곳에 있던 본심을 내뱉는다.
"살고 싶어요. 사람답게 살고 싶어요. 이 세계에서 나가고 싶어요."
매끄럽지 않은 문장. 하지만 그래서 더욱 솔직하다.
"왜 나가고 싶어?"
"그건..."
순간 망설이는 빅마담의 머리와 목을 미호의 꼬리 하나가 부드럽게 쓸었다.
"아...아..."
입이 살짝 벌어지며 몸을 부르르 떠는 빅마담.
"왜 나가고 싶어?
미호가 재차 물었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요."
"아이들?"
"네. 저희가 낳은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
그러고보니 오렌지구역에서 카렌에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유혹해 왔지만 안내하는 여자아이 빼고는 일하는 미성년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왜?"
미호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며 표정은 미묘해진다.
이 암흑가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도덕을 지키는 이유가 뭘까?
"제가 그랬거든요."
단순하다. 하지만 그야말로 확실한 동기다.
"...그래."
미호가 아이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빅마담의 얼굴에서 과거를 떠올린다.
조선 시절. 삼색이 떠나간 뒤 미호는 어느 날 구걸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만났다. 삼색이 유독 좋아했던 인간의 아이들.
처음에는 지나쳤지만, 곧 버림받고 고아였던 수많은 아이를 거뒀으며 원하는 여자아이는 춤, 노래, 의약, 시 등에 능통한 예기(藝妓)로 길러내고 남자아이도 기술을 배우게 했다.
아무리 이들이 성인이라지만 미호의 눈에는 그 아이들과 똑같이 보인다.
"내 ?밑으로 들어와. 합법적인 사업을 하게 해줄게. 연합 의장과의 얘기도 끝났어."
미호의 눈이 부드러워지면서 동시에 방 안의 모든 화염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곧이어 몸을 따뜻하게 감싸는 훈풍이 방 안에 불더니 미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빅마담을 감싸 안았다.
"고생했어. 이제 나에게 맡겨."
마치 딸을 껴안는 엄마와도 같은 따뜻한 포옹.
"흑..."
그러자 빅마담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이윽고 미호가 빅마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자 기어코 꺼이꺼이 눈물샘이 터져버린다.
`암흑가에서 잔뼈가 굵은 빅마담을 마치 애처럼 다루네. 왜 삼색이 기를 못 펴는지 알겠어.`
카렌은 어떻게 구미호가 영물이자 사람을 홀리는 요물로 구전에 남았는지 눈앞에서 방금 목격했다.
죽일듯 살벌한 공포 뒤에 따뜻하게 품어주는 영리함.?
거기다 구미호 자체가 가진 매혹 능력이 더해지니 넘어가지 않을 인간이 거의 없을 거다.
`만약 미호가 삼색을 만나지 않았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저 능력을 가지고 만약 권력자들을 조종했다면?
둘 다 참 잘 만났다.
"그럼 얘기는 끝났군. 키는 어딨지?"
잠시 빅마담을 울게 놔둔 카렌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목을 뿌드득 풀었다.
빅마담이 아직도 카렌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지 순간 움찔하더니 옆 방에서 조심스럽게 뭔가를 손에 쥐고 온다.
"이게 맞나요?"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본 두 개의 키와 모양이 완벽하게 일치한데다 주황빛의 영롱함까지 확실하다.
빅마담이 순간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다 다시 다물고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두 손으로 공손히 키를 내밀었다.
"암흑가의 새로운 주인에게 충성을."
털썩.
빅마담의 뒤로 마담들이 줄지어 무릎을 꿇는다.
`역시 똑똑해.`
미호의 앞에서야 작아 보이지만, 확실히 상황 파악이 빠르다.
방금 빅마담은 자신에게 확신을 구하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역효과라 판단했겠지.
"마땅한 믿음을."
물끄러미 자신에게 무릎 꿇은 이들을 내려다보던 카렌이 선언했다. 그리고 미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암흑가를 넘겨주마. 화이트 구역의 키도 찾을 겸 싹 정리해주지."
"네, 아버님. 잘 운영하겠습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구미호다.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다.
"저..."
"너희도 일어나라."
빅마담이 눈치를 보면서 뭔가 말하려고 하자 카렌이 손짓으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빅마담이 방금보다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말을 꺼낸다.
"저에게 정보가 있어요. 블랙 구역과 화이트 구역의 놈들이 연합해서 마석 개조인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마석 개조인간? 아! 그 불량품."
다른 의미로 획기적인 작품. 무려 드워프가 공인한 비효율의 극치.?
"그리고 병력도 심상치 않게 모으고 있는데 곧 전력을 다할 계획인 것 같아요."
"전력이라..."
카렌이 씨익 웃었다. 그거 깔끔하고 잘 됐다.
"곧 그 쪽으로 간다 그래."
쓰레기를 한곳에 모아주면 정리하기 쉬워진다. 마무리는 자신이 해야겠지.
그리고 여기 오기 전 비어드가 만들고 있는 건틀릿을 봤는데...마침 채린이 그걸로 어떻게 싸울지 궁금하기도 했다.
* * *
"...놈들이 화이트 구역으로 오겠다고?"
화이트 구역의 사장들과 블랙구역의 보스들이 자신들이 뭔가 잘못 들었나 귀를 후볐다.
[우리는 실패했어. 그러니까 너희도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을거야.]
빅마담이 굳이 친절하게 이런말까지 해주는 이유는 단 하나다. 자신의 새로운 주인인 카렌이 원했으니까.
이왕 밑에 들어 간 이상 확실하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
[그럼 이만...]
마담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리자 보스들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미친...그럼 우리만 남은 거야?"
"아니죠. 정확히는 저희, 화이트구역만 남았습니다. 블랙 구역은 이미 장악당했으니까요."
한 사장의 말에 보스들이 순간 울컥했지만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 `학살의 마녀`가 블랙 구역의 주요 세력들을 모조리 깨부수자 웬 군인 놈들이 와서 거점을 세우더라. 덕분에 근거지에서 쫓겨나 화이트 구역에 얹혀사는 신세다.
"이 일이 끝나고 오렌지 구역도 정리가 필요하겠군요."
"오렌지 구역`도`?"
보스들이 일제히 사장을 노려봤지만, 사장은 오히려 뭘 꼬나보냐는 듯 마주 보며 비웃는다.
"집도 없으신 분들이 무슨 불만이라도?"
"..."
눈앞에서 당한 명백한 모욕. 하지만 보스들은 주먹만 불끈 쥘 뿐 고개를 떨궜다.
후욱...후욱...
자신들 뒤에서 거친 숨을 내뿜고 있는 마석 개조인간들.
제어권을 가지고 있는 사장들의 명령 한 마디면 단번에 자신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버릴 거다.
`그래도 외부인에게 암흑가가 넘어가는 것보단 낫지.`
보스들은 그나마 얼굴이라도 알고 있는 이놈들이 낫다는 계산이었다. 놈들의 수작을 파악하고 있으니 언제라도 기회가 있으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다.
"암흑가는 화이트 구역의 차지가 될 겁니다. 외지인 놈들과의 싸움을 도와주시면 작은 술집이라도 드리죠."
"크윽..."
사장들은 껄껄 웃고 보스들은 굴욕감에 이를 악문다.
"그리고 암흑가 전체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줘야 합니다."
"어떻게?"
"드론으로 놈들이 처참히 죽는 모습을 생중계하도록 합시다. 새로운 주인의 힘을 보여주면 장악이 쉬워질 뿐만 아니라 기어오르지 않겠죠."
돈으로 고용한 각성자 용병과 헌터, 블랙 구역의 잔당들, 마석 개조인간까지.
`우리가 질 요소는 어디에도 없다.`
화이트 구역의 사장들은 지금껏 푸근한 얼굴 뒤에 감춰왔던 야망을 마침내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