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3/140)

  타고난 천재가 노력을 하면...

  "이쪽으로 오세요."

  귀여운 옷을 입은 한 아이가 앞장서서 카렌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카렌의 뒤로는 로브로 온몸을 가린 한 사람이 뒤따랐는데 여리여리한 실루엣만이 여자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는 오렌지 구역의 입구예요. 빅마담은 구역의 끝에 계세요."

  "마담?"

  카렌도 그냥 온 건 아니다. 여기 오기 전에 오렌지 구역에 대해 조사할 때 그런 호칭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미 만나셨어요. 직접 찾아가셨다던데요?"

  "아..."

  그 병원에 찾아온 여자. 범상치 않아 보인다고 했더니만 과연 이유가 있었다.

  "그럼 안내를 시작할게요."

  아이가 아직 어려 보폭이 짧았다. 덕분에 카렌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볼 수 있었다.

  "잠시 놀다 가!"

  "어머? 이게 얼마 만이야."

  ?

  사람들의 떠들썩한 목소리와 함께 붉은빛과 오렌지색이 8:2로 섞인 조명이 온 거리와 가게를 채우고 있었다.

  오렌지보다는 피의 색에 가까웠지만 어감이 좋지 않으니 오렌지로 구역 이름을 정했을까.

  가장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색.

  식욕과 성욕을 돋우는 원초적인 색.

  이 빛 아래에서 사람들의 본성이 드러난다.

  ?

  "크하하하! 한번 놀아보자고!"

  "오빠? 우리 오늘 좋은 술 들어왔어."

  "누님. 그동안 왜 이렇게 안 왔어요? 보고 싶었잖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크게는 남자, 여자.

  반쯤은 헐벗은 사람과 깔끔한 오피스룩과 딱딱하게까지 보이는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까지.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키는 그들을 본 손님들은 불을 본 나방처럼 무언가에 홀린 듯 파트너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사라진다.

  "흠..."

  카렌은 그저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길 가다 돌멩이를 본 듯한 반응. 심지어는 살짝 지루하다는 기색마저 내비친다.

  ?

  "한번 체험해보실래요?"

  안내하느라 카렌의 얼굴을 아직 보지 못한 아이가 뒤를 빙글 돌더니 물었다. 마치 과자를 권하는 듯 해맑다.

  "아니, 지겹구나."

  카렌에게 이런 계략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렬한 육체적 쾌락을 줄 수 있는 마계의 서큐버스의 유혹도 이겨낸 자신이다.

  "의외네요."

  "뭐가?"

  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렌이 물었다.

  "오빠처럼 나이가 어린 사람은 이 곳을 처음 오면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그럴 만도 하다. 혈기 넘치는 젊은이가 여기 오면 피가 끓을 테니.

  "나는 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단다. 그리고 어린 건 여기서 네가 제일 어리지."

  짓궂게 아이를 한 방 먹여주는 카렌.

  `일부러 아이를 보냈겠지. 과연 오렌지 구역의 정보력이 대단하긴 해.`

  깡패들에게 맞고 있던 소년을 도와준 정보를 입수하고는 어린 아이를 보냈으리라.

  "...빨리 지나가죠."

  하지만 아무리 어른스럽게 행동해도 아이는 아이다. 카렌의 놀림에 입이 살짝 나온 채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걷는다.

  "여기는 오렌지 구역의 중간지점이에요."

  아이가 다음으로 안내한 곳은 커다란 분수대가 있는 광장이었다.

  구역의 입구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길거리 공연을 하는 밴드들과 가수들은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고 곳곳에는 마술, 저글링 등 다채로운 공연들이 열리고 있었다.

  "마치 축제 같네."

  "저희 오렌지 구역에는 손님들이 원하시는 모든 유흥이 있답니다."

  아이가 주변을 손으로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카렌의 눈은 광장 곳곳을 훑었다.

  다양한 취향의 바부터, 영화관, 네일아트 가게, 카페, 심지어는 작은 박물관까지 있었다.

  "영리하군."

  단숨에 이곳의 의도를 알아챈 카렌이 눈을 빛낸다.

  입구 쪽이 시각을 이용해 노골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면 여기는 교묘했다.

  광장 곳곳에는 오렌지 구역의 종사자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자연스럽게 손님들을 끌어당긴다.

  마치 평범한 연인들처럼 팔짱을 끼고 우연히 만난 것처럼 대화를 나눈다.

  데이트하면서 손님들의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유대감을 형성한다.

  "과연...좋은 추억이라는 게 이런 거군."

  이들은 사람과의 따듯함이 오간 교감과 오늘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그렇게 빠져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곳을 다시 찾겠지.

  "여긴 마음에 드시나요?"

  ?

  아까와는 사뭇 다른 카렌의 반응에 아이가 기대감에 차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괜찮긴 하구나."

  "그럼..."

  "좋은 구경은 했으니 계속 가자."

  저런 건 모르고 있을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하지만 이미 모든 시스템을 한눈에 파악해 버린 카렌의 흥미를 더 끌 수는 없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아이는 카렌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외모는 누가 봐도 20대인데 행동이나 말하는 건 전혀 달랐다.

  ?

  아이는 모든 계획이 실패하자 마침내 오렌지 구역의 마지막으로 안내를 시작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시면 돼요. 길 끝의 저택에서 빅마담이 기다리고 계세요."

  "고맙다."

  카렌과 로브를 쓴 여자는 아이와 작별하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자 또다시 확 바뀐 거리의 분위기. 일단 바닥부터 달라졌다.

  영롱한 대리석에 반짝이는 보석이 곳곳에 수놓아진 도로.

  ?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웅장한 곡들이 귀를 자극했으며 좌우로 쭉 늘어진 사람들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허! 정말 똑똑하긴 해."

  카렌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단번에 빅마담의 의도를 깨달았다.

  권력욕.

  누구나 가진 인간의 본능.

  남들의 위에 군림할 때, ?대접받을 때 쾌감을 느끼는 가장 강력한 욕구 중의 하나다.

  "차라리 중간지역이 더 흥미로웠어."

  하지만 카렌에게는 역효과다.

  이들이 왕좌에 앉아 왕관을 머리에 써봤을까?

  일반인은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느끼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예를 받아봤을까?

  이처럼 인위적인 존경이 아닌 진심 어린 환호를 백성들에게서 받아봤을까?

  카렌은 권태감을 눈에 가득 담은 채 주변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올곧게 걸어 길의 끝에 도착했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아이의 말대로 저택 앞에는 빅마담이 기다리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빅마담은 오늘 저번과 달리 노출이 심한 옷이 아닌 달리 우아한 느낌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대체 이 남자는...`

  겉으로는 미소를 띠고 카렌을 맞이했지만 빅마담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다.

  이 은발의 남자는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다. 이렇게 흔들리지 않는 목석같은 남자는 처음 봤다.

  "올라가시죠. 자리를 마련해놨습니다."

  빅마담이 안내하는 저택의 내부는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천장에는 순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샹들리에, 곳곳에는 예술가들이 혼을 담아 만든 진품 작품들이 보인다.

  지금까지가 육체적인 유혹이었다면 이번에는 한차원 더 나아간 정신을 사로잡으려는 것일까.

  ?

  "마치 귀족의 저택 같군."

  카렌이 시큰둥한 한줄평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벨리알에서 공작급 정도 되겠다. 하지만 제국의 왕궁에 비할 바는 아니다.

  "여기로 들어가시죠.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빅마담이 카렌을 커다란 방문 앞으로 데려갔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면서 방안의 정경이 드러났다.

  중앙에는 연회장처럼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으며 그 주위로는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카렌을 맞이했다.

  "오렌지 구역의 마담들이에요."

  "남자도?

  "

  "네. 손님은 다양하니까요."

  마담이라는 어찌 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단어에 어울리지 않게 모두 각자만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

  외모는 기본이고 이들은 수준 자체가 달랐다. 길거리에서 지나가다 스쳐도 종일 기억에 남을 만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들.

  "나는 여기에 앉지."

  하지만 카렌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강렬한 눈빛들에도 피식 웃으며 모두의 허를 찌르는 행동을 했다.

  ?거침없이 테이블의 중앙에 다가가 앉아 버린 것이다.

  빅마담이 순간 당황하며 재빨리 카렌에게 어서 다가와 속삭였다.

  "여기는..."

  "이 자리가 경치가 좋군."

  카렌의 말대로 이 자리가 명당은 맞다.

  맞은 편으로는 유리조차 없는 야외.

  오리들이 수영하고 있는 연못과 아름다운 꽃이 심어진 정원이 보인다.

  다만 카렌이 앉은 자리가 빅마담이 앉아야 할 주최자의 자리라는 게 문제였다.

  `이게 무슨...`

  모두의 황당한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카렌은 손짓으로 따라온 여자를 왼쪽. 빅마담을 오른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모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치켜들고 말했다.

  "앉지."

  ?

  그러자 일제히 착석하는 사람들.

  "어?"

  너무나 자연스러운 카렌의 주도에 자신도 모르게 앉아 버린 마담들이 순간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일제히 빅마담을 쳐다봤다.

  `뭐지?`

  하지만 빅마담 자신도 이미 앉아버렸는데 이들에게 뭐라 하겠나.

  이 남자에게서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온 위엄과 아우라가 몸을 움직였다.

  "저..."

  "일단 식사부터 하자고."

  다시 대화를 시도해 주도권을 가져오려고 하는 빅마담의 말을 차단해버린 카렌은 ?자신의 집마냥 자연스럽게 직원들에게 손짓했다.

  카렌이 앞에 놓인 냅킨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리기 무섭게 코스에 따라 나오기 시작하는 음식들.

  `뭐지?`

  빅마담은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무례했던 남자와 지금의 남자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처음의 냅킨으로 시작한 테이블 매너부터 지금 카렌이 하는 행동은 너무나...

  "우아해."

  누군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리고 거기에 더 덧붙이자면 고고했다.

  이런 수식어들이 모두 어울리는 과거의 부류가 모두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올랐다.

  귀족.

  카렌의 기다란 뽀얀 손가락은 나이프와 포크를 아름답고 간결하게 활용했고 조금의 불필요한 동작도 없었다.

  마치 예술 같았다.

  `오랜만에 써먹네. 벨리알과 지구의 매너가 조금 다르긴 하겠지만 무슨 상관이야.`

  다만 저들이 틀린 점이 있었다.

  카렌은 귀족 따위가 아니라 왕이었으니까.

  물론 성에서는 자유롭게 지냈지만 외교 사절이 오거나 할 때는 왕으로서 예의를 차렸다.

  모두는 먹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카렌을 바라봤다.

  원래 계획이었던 카렌을 유혹한다는 생각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식사 코스에 따라 카렌의 앞에 놓인 포크와 나이프는 바뀌었으며, 그 방향 또한 철저히 정석적이다.

  그렇게 마지막 요리를 끝마친 카렌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들었다.

  "음? 안 먹나?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냅킨으로 부드럽게 입가를 닦은 카렌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

  그제야 현실로 돌아와 일제히 탄성을 내뱉는 마담들.

  빅마담은 이를 악물었다. 주최자인 자신이 그야말로 들러리가 되어 버렸다.

  지금껏 행동으로 보아 이 사람은 예의를 모르는 게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했다.

  마치 젊은이가 아닌 백살 먹은 구렁이를 상대하는 느낌마저 든다.

  "너희가 원하는 관광도 했고, 밥도 먹었으니... 이만 키를 주는 게 어때?"

  "그러면 저희에게 뭘 줄 거죠?"

  빅마담이 물었다.

  지금껏 자신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은 이 남자는 어떤 대답을 할까.

  "그건 내가 할 대답이 아니군. 내 원래 계획은 키가 어딨는지 확인만 되면 일단 가져가는 거였거든."

  과연 빅마담의 예상과 한참 동떨어진 답변이 돌아온다.

  "그러면..."

  빅마담이 입을 열려는 순간, 카렌의 눈을 보자 입술이 실로 꿰인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단숨에 싸늘하게 바뀐 카렌의 눈빛.

  정면으로 마주보는 빅마담의 등에 식은땀 한 줄기가 주르륵 흐른다.

  "착각하는 게 있는데...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네가 말한대로 너희를 때려눕히기 부담스러워서가 아니야.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귀찮아질까봐 온 거다."

  죽지는 않았지만 블랙구역을 제압하다 가슴이 뭉게진 뿌리의 부대원을 본 엘리가 슬퍼했다. 그리고 채린에게 같은 일을 또 맡길 순 없지.

  "처음엔 어줍잖게 네가 키를 숨기면 심문할 예정으로 데려온 아이긴 한데...옛날 생각이 나서 너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싶다는군."

  카렌이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로브를 쓴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여자를 주시했다. 후드 밑으로 유일하게 노출되어 있는 턱선은 날카로웠고 피부는 눈처럼 하얗다.

  "양지로 나가게 해주지."

  여자의 입이 열리며 여자에게서 나온 귀를 간질이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모두가 잠시 멍해진다.

  "양지라니?"

  한 발 늦게 경악한 마담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오렌지 구역의 소원을 여자가 정확히 짚었다.

  이들은 주민등록 자체가 없고 여기서 태어나 평생을 자라온 사람들이 다수다.

  그야말로 구역이라는 이름의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버린 자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가 그걸 시도 안 해봤는 줄 알아? 그리고 당신들이 뭘 알아?"

  일단 암흑가 자체를 벗어나는 일부터가 문제다. 다른 구역이 오렌지 구역의 이탈을 놔둘 리가 없으니까.

  "끝까지 잘 듣는 게 좋을거야. 아까 말했듯이 마지막 기회야."

  카렌이 나지막히 경고했다.?

  근육이나 힘을 과시한 허세따위가 아니다.

  오만하지도 않다.

  그저 담담히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경고한다.

  "으..."

  모두가 순간 내뱉으려던 말을 침과 함께 꿀꺽 삼킨다.?

  "이 아이가 회사 일에 질려서 암흑가를 운영해보고 싶어 해. 그리고 너희 말이 맞다. 나는 너희 사정을 모르지. 너희 일을 해본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잘 알아."

  펄럭

  여자가 마침내 로브를 벗었다.

  "어..."

  아까 사람들이 식사하는 카렌을 보면서 기품에 젖어 들었다면 지금 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결이 다른 선천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존재 자체로 모두를 끌어당기는 타고난 힘.

  "소개하지. 미호야."

  한, 중, 일.

  삼국 전체의 모든 설화에 등장한 영물.

  한때 조선 제일의 기녀로 활동했던 구미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꼬마들?"

  구미호의 미소에 모두의 얼굴이 단번에 몽롱하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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