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1/140)

  잘못된 만남

  암흑가 블랙구역.

  "이 년이!"

  "어디서 이 년, 저 년이야. 뒤지려고."

  채린이 몸의 무게중심을 살짝 옮기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날아든 시퍼런 칼을 피한다.

  그리고 그 무게를 그대로 주먹에 담아 가슴팍을 때린다.

  퍼억!

  ?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건장한 남자.

  "후우...역시 운동이 최고지."

  채린이 습관적으로 줄넘기하듯 몸을 통통 튀기며 말했다.

  뒤로는 방금 그놈처럼 거품을 물고 기절한 사람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자신의 특기인 `절단`은 사용하지 않았다. 사방에 피가 튀면 지저분해지니까.

  "정말 심판관님 주변에는 평범한 사람이 없네요."

  뒤이어 따라온 뿌리의 국장이 질린 듯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반쯤은 요새화된 지하실을 순식간에 이렇게 만들다니...

  "이 보스놈이 뭔가를 들고 나르려고 했는데?"

  지금껏 부숴버린 다른 조직에 비해 유독 부하들이 광신적으로 달려들었다. 보나마나 그 종교에 심취한 놈들이겠지.

  채린이 한 손으로 남자의 멱살을 잡고 뒤집어서 탈탈 털자 뭔가가 굴러 떨어진다.

  고풍스러운 장식의 작은 상자.

  우드득!

  채린이 손가락에 마나를 집중시켜 단번에 잠금장치를 부숴버린다.

  "블랙키!"

  상자 안에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영롱한 검은색의 돌에 국장이 황급히 달려들어 분석기를 가져다 댄다.

  -삐 -삐...띠링!

  잠깐의 기계음과 함께 맑은소리가 울려 퍼진다. 결과는 일치.

  오웬이 처음 가져온 돌과 성분이 똑같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오렌지와 화이트 쪽 돌만 찾으면 엘프들의 대륙인 오로라로 갈 수 있겠군요."

  처음에는 막막했다. 암흑가는 미로처럼 복잡했으며 곳곳에 조직들의 본진은 요새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채린이 나서면서 순식간에 일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키는 당연히 조직의 보스들이 가지고 있겠죠. 그냥 다 때려잡다 보면 언젠가 나오지 않을까요?

  채린의 주먹 덕분에 적지 않은 인명피해가 예상되던 작전은 단 한 명도 죽지 않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니에요."

  국장이 한껏 신이 나 채린에게 칭찬을 퍼부었지만 정작 채린은 돌이 모일수록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애써 몸을 움직이느라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오즈로님이 내가 카렌에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뭘까.`

  살짝 마음에 무거운 돌이 얹힌 느낌. 그렇다고 대놓고 카렌에게 물어보기엔 관계가 참 애매하다.

  요즘 들어 카렌과의 관계가 눈에 띄게 발전한 건 맞다. 자신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친구로서 그런 건지 여자로서 그런 건지 알 수가 있나.

  `그리고...좋은 친구라고 하면 끝이잖아.`

  그러면 최소한의 희망마저 사라진다. 그럴 확신과 용기가 아직 없었다.

  자신은 카렌과의 사이에 조금의 어색함이 감도는 것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카렌의 시간이 다시 흐르르는지 자기 입으로 직접 기다리겠다고 하지 않았나.

  "으..."

  답이 없는 문제에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 채린을 보고 국장이 슬그머니 워치를 보는 척을 했다.

  지금 본능이 채린을 가만히 놔둬야 된다고 강하게 추천하고 있었다.

  타타타탕!

  때마침 국장을 구해주는 총소리가 밖에서 들려온다.

  "무슨 일이야?"

  돌발상황임에도 반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국장이 들어왔던 문을 벌컥 연다.

  쿠당탕!

  그런데 위에서 계단을 타고 굴러오는 뿌리의 부대원.

  "컥...컥..."

  가슴에 뭔가 둔탁한 충격을 받았는지 숨을 못 쉰다.

  위태롭게 오가는 호흡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이걸로 치료해주세요. 제가 나갈게요."

  채린은 카렌이 위급상황에 쓰라고 준 포션을 국장에게 건네주었다.

  "조심하세요. 이 친구가 이렇게 당할 놈이 아닌데..."

  육체 계열 각성자로 뿌리에서 나름 강한 친구인데 너무나 무력하게 당해버렸다.

  국장의 경고에 채린은 주먹을 맞부딪히며 터벅터벅 지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저는 헌터예요."

  지하에서 있다가 나와서 그런지 밝은 햇빛에 각막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채린은 실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기이이잉

  그때 들리는 소름 끼치는 차가운 금속음.

  두두두두두두!

  채린이 좌측에 있는 두터운 전봇대로 몸을 날리기 무섭게 쏟아지는 총탄.

  바로 옆, 주차된 차의 백미러로 보니 무식한 게틀링 건이 연신 불을 뿜고 있었다. 아무리 암흑가지만 저걸 도시에서 쓴다고?

  채린이 혀를 날름거리고는 자신이 기댄 전봇대에 마나를 담아 손날을 갖다 대었다.

  쩌저적!

  오랜만에 쓰는 능력이다. 전봇대가 반듯하게 절단되며 깔끔한 대각선 모양의 이음새가 생겨난다.

  끼이이익...

  "어...어?"

  채린이 슬쩍 전봇대의 윗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자 신나게 총을 쏴대고 있는 놈 쪽으로 빠르게 기운다.

  게틀링 건의 무게와 등에 멘 수십 킬로의 탄약 덕분에 놈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깔려버린다.

  "전기 끊겼어!"

  "으아아아아! 내 4시간 작업물!"

  전봇대가 망가지면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짜증을 음악 삼아 채린이 전봇대 밑에서 압박감에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놈의 뺨을 찰싹찰싹 때린다.

  "너 아니잖아. 누구야?"

  뿌리의 부대원을 단번에 날려버린 녀석이 아직 남았다.

  쉐에엑!

  역시나 바로 옆에서 날아오는 공격. 채린이 여유롭게 살짝 물러나며 고개를 돌렸다.

  "그거 뭐야?"

  채린이 눈을 반짝였다.

  놈은 커다란 강철 건틀렛을 끼고 있었다. 군데군데 녹슨 티가 나긴 하지만 일단 보기에는 위압감이 압도적이긴 하다.

  후우웅

  한 번 휘둘러 질 때마다 거세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살벌하다. 하지만...

  "뭔가 좀 많이 이상한데?"

  딱 봐도 한 짝에 몇십 킬로는 족히 넘어 보이는 강철을 팔에 매달고 주먹을 휘두른다고? 게다가 속도가 줄어들거나 지치는 기색도 없다.

  "그리고 아무리 크면 뭐하냐. 안 맞는데."

  물론 나름 봐줄 만한 속도다. 하지만 정상급 복싱선수의 맨주먹을 보고 피하는 채린에게? 어림없는 소리다.

  후우웅

  학습 능력도 없는지 정직하게 정면으로 다시 날아오는 주먹.

  취이익, 철컹!

  "어?"

  여유롭게 피하려던 채린이 순간 움찔한다.

  건틀렛의 뒷부분에서 갑자기 연기가 분사되더니 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다.

  콰아앙!

  그리고 갑자기 눈앞으로 훅 다가온 주먹에 채린이 황급하게 두 팔뚝을 일자로 세워 방어에 성공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주욱 밀려나는 채린의 몸.

  ?

  과연 폭발적인 속도와 무거운 질량에서 오는 파괴력은 대단했다. 채린은 팔뚝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에도 씨익 웃었다.

  "너 재밌다. 그래도 절단 능력은 안 쓸게. 그거 카렌에게 보여줘야 하거든. 아니다. 너도 통째로 끌고 가 줄게."

  채린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취이익.

  놈이 주먹을 뻗자 아까처럼 다시 건틀렛에서 연기가 뿜어진다.

  `지금.`

  철컹.

  작동원리는 채린이 알 리가 없지만 연기가 나오고, 기계가 맞물리는 소리. 그 다음에 공격이 날아오는 간격의 시간은 정확히 기억했다.

  운동도, 헌터도 멍청하면 할 수 없다.

  각성자는 운 좋으면 누구나 되지만 단순히 몸과 능력의 재능으로 S급 헌터가 될 수는 없다.

  츠읏!

  채린이 왼발로 살짝 스텝을 밟아 오른 팔뚝으로 놈의 건틀렛을 스치듯 흘린다.

  "아까부터 느꼈는데. 너무 정직해. 너 제대로 싸울 줄 모르지?"

  채린은 총구의 방향, 총의 방아쇠에 올라간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총알도 피한다.

  그런데 대놓고 자신을 향해 조준하고 있는 저 커다란 주먹을 못 읽을 리가 있나.

  "으..."

  놈이 뒤늦게 주먹을 휘둘러 보지만 채린의 주먹은 어느새 놈의 턱 밑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시야도 좁아."

  따닥!

  놈의 턱을 주먹이 가격하자 이빨이 부서질 듯 부딪힌다. 심지어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앞발과 함께 몸 전체가 들린다.

  `몸도 이렇게 튼튼해? 대체 정체가 뭐지?`

  뇌가 흔들려서 몸을 비틀거리긴 해도 일단 기절을 안 했다는 게 놀랍다.

  "빨리 안 쓰러지면 너만 손해지 뭐."

  채린은 가드가 훤히 열린 놈의 몸에 말 그대로 주먹으로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퍼퍼퍽!

  놈은 공격이 들어가는 대로 사정없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벽까지 몰린다.

  쾅!

  마지막으로 스트레이트를 꽂자 놈 등 뒤의 벽에 금이 쩌억 가며 눈이 뒤집힌다.

  "저...이미 아까 기절한 것 같은데요."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국장이 소심하게 말했다. 중간부터 이 불쌍한 녀석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던 것 같던데...

  "뭐 어때요! 그나저나 카렌이 이 녀석 보면 재밌어하겠지? 키도 찾았으니 좋아할 거야."

  채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국장은 잠시 놈을 살펴보다가 상의를 살짝 들쳤다.

  "허..."

  "우와!"

  둘 다 남자의 몸을 보고 눈이 동그래진다.

  척추 쪽에 빛나는 마석이 줄줄이 박혀있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확실히 재밌어하실 겁니다. 불법 마석 개조인간이라니..."

  * * *

  ?

  "제발...치료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저희는 마약 치료를 위한 기반 시설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 남자가 병원 접수대 앞에서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저앉는다.

  병원을 찾은 다른 사람들보다 복장은 말끔했지만, 슬쩍 소매가 걷힌 팔목 근처에는 무수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불쌍하군요."

  민재가 카렌과 같이 병원 로비에 앉아 있다가 남자를 보며 말했다.

  자기 눈으로 다양한 환자를 보고 싶어서 요즘 암흑가의 민들레 병원에 아예 상주하고 있는 녀석이다.

  "저분은 보아하니 나름대로 의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인 딴에는 가장 깔끔한 옷을 입은 것도 그렇고, 스스로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게."

  무릎 위에 앉은 삼색을 쓰다듬으며 카렌의 눈이 남자의 몸을 빠르게 훑었다.

  목까지 주사 자국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팔의 정맥이 손상되어 주사를 더 이상 못 꽂아 넣으니 저기까지 간 거다.

  "마약은 언제봐도 정말 무섭습니다."

  "저번에 말했지? 시험 삼아 만들어 보는 건 괜찮지만 마약을 하거나 팔면 바로 파문이다."

  "물론입니다."

  카렌이 일부러 필요 이상으로 단호하게 말하자 민재가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민재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자신이 어떻게 카렌의 제자가 되었는데...죽어도 안 한다.

  "마약에 대한 치료제는 없을까요? 연금술사 협회에도 은근 중독자분들이 많습니다."

  협회장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새 협회원들에게 정을 붙였는지 민재의 얼굴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카렌이 말해주긴 했지만, 연금술사라는 직종은 너무 마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협회장에 취임하기 전에 형편이 어렵기도 했기에 협회원들 상당수가 마약에 손을 대 버렸다.

  "단번에 마법처럼 낫는 치료제는 없다. 심지어 신성력으로도 그렇게 못 해."

  "신성력으로도요?"

  민재가 화들짝 놀랐다. 심지어 말기 암도 영구적으로 단번에 치료하는 신성력조차?

  "몸은 고쳐주지만, 습관과 기억을 고칠 방법은 없어."

  신체의 치료는 카렌도 가능하다. 하지만 정신은?

  마약으로부터 깊이 새겨진 쾌감의 기억과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마주치는 우울함을 단번에 지워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습관을 잊을 수는 없다.

  "그래도..."

  "치료 해보고 싶어?"

  "하지만 스승님께서 방금 치료제는 없다고 하셨잖아요."

  "서서히 치료하는 방법은 있지."

  "정말요?"

  민재의 머릿속에 마약에 고통받는 가까운 연금술사들이 떠오른다. 그들도 끊고 싶다고 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이 너무 힘들어한다고 말이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돼. 힘들 거다."

  "그래도 하고 싶습니다."

  카렌은 비장함이 맴도는 제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많이 성장했다.

  연금술사 협회장이라는 직함 덕분일까, 앳된 분위기는 사라지고 녀석은 진짜 연금술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첫 번째는 뇌에서 쾌락을 분비하는 도파민을 천천히 억제하는 마약."

  "마...약을요?"

  민재가 놀라서 카렌을 쳐다보았다.

  마약을 끊고 싶다는 사람들한테 마약을 준다고?

  "담배도 한 번에 끊으면 독한 놈이라고 하지?"

  "예."

  "마약은 더 심해. 절대 당장에 못 끊어. 그나마 천천히 줄이는 거다."

  카렌은 벨리알에서 자신의 왕국에서 마약을 퇴치할 때 지겹게 공부하고 사람들을 치료했다.

  게다가 저번에 탈모치료제 개발을 계기로 틈틈이 지구의 지식도 습득하니 설명도 편해졌다.?

  `이 녀석뿐만 아니라 나도 발전하네.`

  최소 제자가 던진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은 해줘야 스승 소리는 듣지 않겠나.

  "확실히 쉽게 되지는 않겠군요."

  민재가 연금술사로서 만들어야 할 포션들을 떠올린다.

  `중독자들에 대한 상태를 고려해서 분류하고, 또 그 안에서 약의 강도에 따라 처방해야 되겠어.`

  잠깐 생각한 것만으로도 할 게 산더미다. 하지만 민재는 좌절하지 않았다. 일단 할 수 있는 게 어딘가.

  그리고 이번 일은 무엇보다 같은 연금술사인 지인들을 위한 일이다.

  "그럼 두 번째는 뭡니까?"

  민재가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는 마음을 다지고 물었다. 첫 번째도 이 정도인데 두 번째는 얼마나 어려울까.

  "환자에 대한 관리."

  "관리요?"

  예상치 못한 답에 민재의 눈이 커진다. 이건 너무...

  "쉽게 들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카렌이 싱긋 웃었다.

  답답함은 아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사실 제일 좋은 치료제는 관심이야.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옆에서 응원해주고, 희망을 주면서 관리해줘야 해. 이게 제일 힘들 거다."

  "아..."

  그제야 민재가 감을 잡았는지 입을 헤 벌린다.

  "따로 전용 시설을 만들어주고 상담 인력도 지원해 줄게. 여기서 치료하도록 해."

  카렌은 자신의 제자를 기계처럼 물건만 찍어내는 연금술사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사람을 직접 대하는 이번 기회로 이 녀석은 또 한 번 크게 성장할 거다.

  "일어나시죠.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민재가 경비원의 부축을 받아 축 늘어진 어깨로 병원을 나서는 남자를 보고는 벌떡 일어선다.

  "저기요!"

  그리고는 크게 소리치면서 쫓아가서 뭔가 설명하기 시작하자 남자의 얼굴이 환해진다.

  저 사람에게는 민재가 절망 속에서 갑자기 내려온 동아줄로 보이겠지.

  "이제는 그린 구역도 지배하려고?"

  자는 줄 알았던 삼색이 쭈욱 기지개를 켜더니 카렌의 허벅지에 힘차게 꾹꾹이를 하면서 말했다.

  "응?"

  "부드럽게 민심을 얻어 점령하는 거 아니냐? 따뜻한 햇볕과 거센 바람을 적절히 활용해서 동화책에서 나온 것처럼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거지!"

  "그래...마음대로 생각해라."

  이제는 반쯤 포기한 채 받아들이는 카렌이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그럼 다른 구역은 어떤 방법으로 할 거냐?"

  "나도 몰라. 임마."

  띠링!

  카렌과 삼색이 투닥거리고 있을 때 병원 로비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순간 정적이 흐른다.

  또각 또각

  청아한 힐 소리의 주인이 모두의 시선을 잡아끈다.

  깊은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도발적인 상의에 치마는 허벅지 라인까지 갈라진 치마를 입은 여자가 카렌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온다.

  "오... 추워 보이는 여자다. 주인."

  "큭..."

  다만 인간의 미적 기준에 전혀 관심 없는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카렌이 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는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렌지 구역의 마담이에요."

  그동안 자연스럽게 카렌 맞은편 의자에 앉은 여자가 다리를 크게 한 번 꼬며 살짝 상체를 숙인다.

  천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드러낸 자신감과 유혹.

  "무슨 일이지?"

  하지만 카렌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오롯이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쉽지 않겠어. 하지만 이 말은 다를걸.`

  여자는 뇌쇄적인 눈빛을 카렌에게 보내며 입을 열었다.

  "신기한 돌을 찾고 있다죠?"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카렌은 어떠한 동요 없이 받아쳤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렌지 키. 저희가 갖고 있어요. 가지고 싶으시다면 저희 구역에 한 번 방문해주세요. 아니면 저희를 모두 때려눕히고 가져가실 건가요?"

  "...가지."

  "저희가 애들을 보낼 테니 따라오세요. 재밌는 추억을 남겨드리죠."

  여자가 일부러 카렌이 보라는 듯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일어서서 나가는 순간.

  풀썩!

  뒤에서 뭔가 떨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들린다.

  카렌이 고개를 돌려보니 채린이 피떡이 된 남자를 바닥에 놔두고는 날카롭게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재밌는 추억? 그거 궁금하네."

  "저희 아이들은 조금...종류가 다른 매력을 갖고 있거든요. 아주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여자가 곁눈질로 채린의 몸을 훑어보더니, 살짝 입꼬리를 비틀며 자신의 흉부를 살짝 내밀었다. 명백한 도발.

  "꾸잉..."

  삼색은 어느새 두 여자를 보며 카라멜 팝콘을 꺼내 아삭아삭 씹어 먹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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