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9/140)

  운명은 모르는 사이에 움직인다

  "정말 괜찮겠어?"

  카렌이 후드를 뒤집어쓴 엘리에게 물었다.

  "네. 저도 거리에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암흑가는 처음이라 꼭 한 번 보고 싶었어요."

  엘리가 한 손에는 길거리에서 파는 꼬치를 한 손에 들고는 한 입 베어 물며 말했다.

  [현재 가는 길목으로 쭉 가시면 스콜피온 구역입니다.]

  카렌의 귀에 낀 이어폰으로 국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 그래도 힐끔힐끔 여기를 보는 시선이 느껴지는데 다섯이서 몰려다니기엔 너무 눈에 띄어서 오웬과 국장은 뿌리가 따로 마련한 상황실에 있다.

  "그런데 여긴 듣던 것보단 괜찮은데? 사람들도 좀 착해 보여."

  "그래?"

  채린은 주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솔직히 난 그런 거 기대했거든. 막 길 가다가 패싸움하고 화끈하게 치고 박고 그런 줄 알았어."

  그래도 일반인은 보기만 해도 움츠러드는 흉터와 문신이 가득한 사람들이 즐비한데 오히려 실망한 듯한 채린.

  하긴 얘한테는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겠지.

  아무리 암흑가에서 주먹 좀 쓴다고 해도 상대도 안 될 거다. 심지어 마나가 없는 조건에서도 맨손으로 모두 때려눕히는 사람이 채린이다.

  ?

  "근데 카렌. 엘프들은 왜 스스로 그 `타락자`라는 게 된 거야?"

  채린이 자기 딴에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카렌에게 물었다.

  속으로는 당장에 엘프들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다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

  저번에 물어보니까 엘리도 엘프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엘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해주시지 않았네요.

  드워프, 용, 오크 등 흔히 말하는 판타지라면 으레 등장하는 모든 종족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엘프만 없었다. 마치 카렌이 의도적으로 피하듯 말이다.

  `끄응...`

  채린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렌의 대답을 기다리며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이런 답답함은 자신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대놓고 물어봤겠지만... 카렌 앞에서는 이상하게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원인이지."

  하지만 카렌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채린이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웬에게 여기 오기 전에 따로 들은 비사.

  "왜? 대격변 때 다수가 넘어와서 아예 다른 대륙에 산다며?"

  "인간의 생활이 궁금해서 연합에 남은 엘프들과 벨리알에서 떨어진 이탈자들. 정말 극소수의 엘프가 문제였어. 고맙다."

  카렌은 엘리가 입에 물려주는 꼬치를 먹고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미모가 뛰어나잖아."

  "맞아."

  채린은 순간 오웬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매는 말할 것도 없고 피부도 맑고, 예뻤지.`

  가라앉혀 놓았던 불안감을 다시 누르려 채린이 카렌에게 팔짱을 꼈다.

  "그들의 존재가 인간의 더러운 욕망을 자극해버린 거야. 외모부터, 종족의 희소성까지."

  채린과 엘리는 상상만 해도 역겨워서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엘프들은 결국 구출되었지만 그들의 상처는 돌이킬 수 없었어. 엘프는 인간에게 복수하자는 쪽과 그래도 평화를 유지하자는 쪽으로 나뉘었어."

  "아..."

  "복수를 원하는 쪽은 비교적 열세였고, 결국 판을 뒤집으려 손대서 안 될 힘에 손을 댄 거야."

  "동족의 복수를 위해 동족을 죽이는 건..."

  "처음에는 안 그랬지. 침략자들에게 침식된 뒤에는 늦어. 이미 본래의 목적은 사라진 거야."

  침략자들의 게이트는 영리했다. 게이트에 들어간 엘프들에게 처음에는 친숙하게 숲을 보여주며 유혹한다.

  지구의 게이트들이 대부분 벨리알에 있는 숲의 환경을 하고 있는 이유다.

  이들은 교활하게 순수한 숲의 숨결을 내뿜어 엘프들을 유혹했다.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한 번 기운을 받아들이면 노예가 되어 버린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침략자들을 섬기는 종.

  "안됐네."

  채린은 엘프의 미모가 일으킨 나비효과가 안타까웠다. 아니,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처음 엘프를 탐낸 소수의 인간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놈이 잘못이지.

  "이 새끼가! 집세를 내란 말이야!"

  그런데 거리를 걷던 일행 앞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 험상궂은 패거리가 자기 몸의 반도 안 되는 남자아이에게 침을 튀기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분명 이번 달 치는 줬잖아. 놔!"

  남자아이가 잔뜩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의한다.

  "저 아이는..."

  "아는 얘야?"

  "아무 사이도 아니야. 잠깐 지나가다 봤어."

  가까이 갈수록 상황은 더 심해진다.

  "갑자기 집세를 두 배로 올리면 어떻게 내라고? 컥!"

  일행이 바로 옆을 지나갈 때 절정에 이르러 이윽고 남자아이가 거칠게 땅에 패대기쳐진다.

  그 모습을 본 엘리의 몸이 살짝 떨렸지만, 카렌이 손을 잡아주면서 무사히 이들의 앞을 지나갔다.

  "지금이라도 돌아갈래? 앞으로 더 심해질 텐데?"

  카렌이 엘리를 걱정하며 물었다.

  그나마 암흑가에서 가장 엘리에게 보여 줄 만한 곳이 화이트와 블랙밖에 없다.

  마약이 오가는 그린이나 반쯤 발가벗고 다니는 오렌지는 아무래도 보여주기 좀 그러니까.

  "괜찮아요. 더한 것도 많이 봤는걸요. 역시 실제로 보는 건 많이 차이가 있네요. 저는 그냥 길거리에서 구걸만 했거든요."

  엘리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숨을 깊게 내쉬며 말했다.

  "도와주고 싶지 않았어?"

  카렌은 육아책에서 본대로 충실이 이행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감정을 물어볼 것.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빠 하시는 일에 방해되기도 하고 저 아이를 확실하게 책임질 자신이 없어요."

  역시 어른보다 생각이 깊다. 카렌은 기특함을 담아 엘리를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빠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어설픈 동정이 독이 될 수도 있어요. 저도 그랬어요."

  옛날 길거리에서 엘리를 본 어른들은 경찰에 신고해 집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도와주려 했을 거다.

  하지만 엘리는 그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엘리가 뒤로 고개를 돌려 아직도 소란스러운 현장을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앞으로 같이 생각해보자."

  카렌은 어설프게 모두를 구할 수 있다는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았다.

  "아빠도 못 하나요?"

  "내가 모든 사람을 전부 책임질 자신은 없구나."

  카렌의 묘하게 슬픈 눈빛을 보며 엘리는 카렌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살짝 엿봤다.

  꼬옥

  그리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카렌에게 해줬다.

  자신의 작은 두 손으로 카렌의 손을 잡아주는 것.

  채린도 팔짱을 낀 팔에 힘을 더했고 카렌은 양옆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참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쾅!

  "뒤지려고!"

  순간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잠깐 돌아볼 정도의 큰소리가 길거리에 울려 퍼진다.

  "네 엄마를 살린 이 약이 어디서 났냐고!"

  이어서 순간 들려오는 이야기에 카렌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리고 끼이익 돌아가는 고개.

  "너희... 갑자기 집세 올린 게 그것 때문이었냐? 말했잖아. 길 가다가 주웠어."

  "이걸?"

  아이의 앞에서 남자가 비열한 얼굴을 한 채 하늘로 띄웠다 받는 병은 분명 카렌이 준 것이었다.

  `그런데 병이 나았다고? 아냐, 애초에 병이 아니었겠지.`

  아마 못 먹고 몸이 쇠약해져 나타난 영양실조 증상일 거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무서운 병명.

  단백질이 부족해지면서 심해지면 배가 개구리처럼 부풀어 오르며 이빨과 머리카락이 빠진다.

  당연히 의사에게 보일 여유는 없으니 그저 병이려니 했겠지.

  "소매치기했다는 거 다 알고 있어. 그 놈 인상착의만 대충 알려줘. 그럼 다음 달 집세까지 넘어가 주지."

  제삼자인 카렌이 듣기에도 달콤한 제안이다.

  그저 정보만 알려주면 당장 위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카렌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몰라. 복잡할 때 훔친 거라 기억이 잘 안 나."

  "거짓말하지 마. 이 쥐새끼야!"

  "커억!"

  남자가 아이의 배를 발로 공을 차듯 뻥 차버렸다.

  아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배를 부여잡으며 허리를 새우처럼 구부렸지만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억지로 아이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네가 사냥감을 치밀하게 고를 만큼 영리하다는 건 여태껏 손목이 안 잘린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그런 놈이 이런 걸 훔친 놈 인상착의도 기억 못 한다고?"

  남자의 숨결이 뜨겁게 아이에게 닿았고 흉터가 가득한 험악한 얼굴이 위협을 가한다.

  "입...냄새 나. 치워."

  "이런 미친 새끼가!"

  마침내 뚜껑이 열려버린 남자가 사정없이 아이를 짓밟기 시작한다. 여린 몸이 주변에 있던 쓰레기더미와 엉켜 더렵혀진다.

  아이가 할 수 있는 반항은 몸을 웅크리는 것밖에 없다.

  "잠깐 가봐야겠다. 나 때문에 생긴 일이야."

  "응?"

  카렌이 부드럽게 둘의 손을 놓고는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독종새끼!"

  쉬지 않고 아이를 때리던 남자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이 어린 새끼는 이렇게 맞으면서도 살려달라는 소리는커녕 신음조차 내지 않는다.

  "어이."

  "윽..."

  아이를 때리던 남자가 순간 눈을 자극하는 눈부신 빛에 움찔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인위적인 조명 따위가 아니다. 태양을 받은 청년의 은발에 반사 된 빛과 잘생긴 얼굴에 순간 뒷골목이 환해진다.

  "어디서 기생오라비같은..."

  쾅!

  남자의 말은 채 이어지지 않았다. 방금 자신이 찬 아이보다 몇 배는 속도로 두꺼운 벽에 부딪히며 단번에 입에 거품을 문다.

  쾅, 쾅, 쾅, 쾅...

  정확히 한 대씩. 지저분해지지 않게 깔끔하게 나가떨어지는 놈들.

  주르륵?

  카렌이 아공간에서 포션을 꺼내 아이의 몸에 골고루 부었다.

  아이의 몸에 뿌려진 포션은 산뜻하게 피부로 스며들더니 멍과 상처들을 말끔하게 지워버린다.

  "으..."

  잠깐 정신을 잃었던 아이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과 함께 눈꺼풀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몸이 너무 가뿐했다. 왜지?

  "어...어..."

  마침내 힘겹게 눈을 뜬 아이는 순간 자신의 눈앞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쭈그려 앉은 여자아이를 보고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리고 왜 자신의 몸이 이렇게 가벼운지 알아버렸다.

  "처...천사?"

  죽었구나. 죽어서 천국에 왔구나. 하지만 동시에 남아 버린 동생과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엄습한다.

  "천사? 무슨 말이야?"

  엘리가 자신을 향해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카렌과 채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

  "당신!"

  아이가 둘의 웃음 소리에 그제서야 자신의 앞에 선 카렌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떻게 잊겠나. 애초에 생김새부터 암흑가에 어울리지 않는 데다가 이 사람이 준 신기한 약 덕분에 자신의 엄마가 살아났다.

  "먹어라. 외상은 치료됐지만, 장기도 좀 상했을 거다."

  아이가 카렌이 내미는 포션을 받아들고 잠시 뚜껑을 열고 코를 킁킁댄다.

  "...보면 아냐? 그냥 먹어."

  카렌이 재촉하자 그제서야 포션을 혀에 한 방울 떨어뜨리는 아이. 별 이상이 없자 꿀꺽꿀꺽 삼킨다.

  참 의심 많은 아이다. 아니, 살아남으려 몸에 밴 습관이겠지.

  "우와...당신 정체가 뭐야?"

  속에서 잠깐 화끈함이 느껴지더니 배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청량감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아이가 순간 신기함에 짓는 천진한 표정에서 처음으로 잠깐 제 나이를 드러냈다.

  "아니다. 당신, 빨리 암흑가에서 튀어. 저놈들 스콜피온 조직원들이야. 저 팔뚝을 봐."

  과연 아이의 말대로 전갈 모양의 문신이 놈들의 신체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정말 고마워. 당신이 준 그 약 덕분에 엄마가 살아난 것도 고맙고, 저 새끼들을 패준 것도 고마워. 하지만 더는 됐어."

  다시 특유의 독기 찬 얼굴로 돌아간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자신을 때리던 남자가 떨어뜨린 약병을 줍더니 카렌에게 내밀었다.

  "빨리 여기를 떠나. 나도 가족이랑 튈 거야.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

  카렌이 잠시 물끄러미 아이를 바라보다 약병을 건네 받았다.

  "안 가져가?"

  "어차피 갖고 있어봤자 오늘 같은 일만 일어나. 나는 이만 간다."

  아이는 마음이 급했다. 곧 이놈들이 속해있는 스콜피온 조직에서 자신과 가족들을 찾아올 거다.

  "도움, 안 필요해?"

  카렌이 떠나려는 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동정하지 마. 너희가 도와줄 일은 없어. 빨리 꺼져."

  홱 돌아선 아이의 얼굴에는 어느새 표독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어설픈 애정과 동정에 받은 상처들이 그대로 묻어나온다.

  "왜 약을 내가 줬다고 말하지 않았지??"

  카렌은 아이의 날 선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아이는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맞으면서 자신의 엄마를 살려준 약의 출처를 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난 저놈들 같은 짐승이 아니야. 엄마를 살려 준 사람을 팔아넘기지 않아."

  카렌은 계속 맞으면서도 꺾이지 않던 아이의 자존감의 원천을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왜 그 남자가 이 꼬마에게 그렇게 열 받았는지.

  저 남자는 열등감을 느꼈던 거다.

  아이가 아직 자신보다 고결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열등감.

  "호의에는 호의로. 도와주마."

  카렌은 자신의 오랜 신념을 입에 담았다.

  만약 아이가 자신을 입에 담았다면 이렇게까지 도와주지 않았을거다.

  이 소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바꿨다.

  "아빠?"

  방금 모두를 구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엘리가 놀란 눈으로 카렌을 쳐다봤다.

  "꺼져. 네 놈 같은 놈들 많았어. 종교인, 정치인, 시민단체. 다 입에 발린 소리만 하다가 도망갔지. 그러니까..."

  "나도 널 끝까지 책임질 자신도, 생각도 없어. 너는 그대로 있어라. 환경을 바꿔주마."

  키를 찾고 동시에 암흑가가 본거지인 신세계의 세력도 줄이면서 엘리의 어깨의 짐을 덜어주고 시야를 넓혀줄 좋은 교육 기회다. 그야말로 일석 사조.

  "뭐?"

  카렌은 자신을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오연히 선언했다.

  "남들과 똑같은 곳에서 설 수 있는 최소한의 출발선을 그어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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