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98/140)

  작별과 그가 남기고 간 것들

  "죽여도 돼요."

  이미 카렌에게 맞아 벌벌 떨고 있는 엘프를 향해 원독에 찬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온다.

  국장의 부축을 받고도 휘청이고 있는 엘프다.

  `여성 엘프였나?`

  일어서고 보니 한참을 못 먹었는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죽이면 죽였지 왜 저렇게 가둬놨을까.

  "죽여도 된다니?"

  "저 엘프는 세계수를 위협하는 적, `타락자`입니다. 대장로의 딸인 제가 보장합니다."

  "호오...네가?"

  카렌이 반색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느낌이다.

  대장로는 엘프 사회에서 3명밖에 되지 않는 지도자급. 하지만 시험이 필요하다.

  "네가 직접 해라. 이걸 마시면 잠깐 움직일 수는 있을 거야."

  카렌이 아공간을 열고 포션과 단검을 건네줬다.

  "듣던 것보단 냉철하군요. 벨리알에서 세계수를 불태울 뻔했던 대륙의 망나니..."

  "그건 하지 마라."

  "풉."

  자신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엘프보다 옆에서 일부러 웃음을 참는 척하는 친구 놈이 더 꼴 보기 싫다.

  꿀꺽, 꿀꺽

  거침없이 뚜껑을 따고 들이킨 뒤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남자 엘프에게 다가간 대장로의 딸.

  푸욱

  거침없이 단검으로 목을 그어버린다. 그리고 품을 뒤적이며 뭔가를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진짜군.`

  카렌은 팔짱을 끼고 지켜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엘프는 훌륭하게 증명해냈다. 보통 동족을 끔찍이 아끼는 엘프가 서로를 죽일 만큼 엘프들이 현재 혼란스럽다는 걸.

  "이만 돌아가지."

  큰 수확이다.

  만약 이 여자 엘프가 정말 대장로의 딸이라면 침식당하지 않은 쪽 엘프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거다.

  "이 탑은 어떻게 할까요?"

  국장의 말에 카렌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말했다.

  "불태워버려. 티도 안 나겠지만 그래도 쓰레기 하나는 줄어들겠지."

  "예."

  [띵!]

  국장을 놔두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가는 동안 엘프는 카렌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살인을 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게 반짝이는 눈빛이다.

  ?

  "뭔데?"

  애써 무시하다 카렌이 한 번 눈을 마주쳐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열리는 엘프의 입.

  "정말 듣던 대로 불태우는 걸 좋아하네요!"

  "크하하하!"

  결국 오즈로가 꺽꺽대며 웃었지만, 이 엘프는 오즈로가 왜 웃는지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대체 내 소문이 엘프들에게 어떻게 나 있는 거야?"

  "엄청 유명하죠. 이유까지는 모르지만 벨리알에서 엘프의 모든 병력이 뚫리고 세계수가 그렇게까지 위협받은 적은 그 때가 처음이랬어요. 그래서 대륙의 망..."

  "카렌이다. 그렇게 불러."

  "끅...끆..."

  아예 이름을 알려주는 게 낫겠다 싶다.

  그나저나 오즈로 이 녀석은 이러다 내일 벨리알로 돌아가기 전에 죽는 거 아니야?

  "아...미안. 사실 그게 좋았던 추억은 아닌데...푸흐흐흡!"

  아니,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제 이름은 오웬이에요. 구해줘서 고마워요."

  오웬이 발랄하게 내민 손을 카렌은 잠시 멈칫하고는 이내 마주 잡았다.

  "내 상식으로는 엘프가 이렇게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데."

  "저는 지구에서 태어났거든요. 드라마도 많이 봐요! 특히 옛날 한국이라는 나라의 드라마가 재밌던데요. 막 머리채 잡고 김치로 싸우는 아침드라마가 제 취향이에요."

  드라마를 보는 엘프라니, 정말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번에는 오즈로도 놀랐는지 입맛을 다시고 눈을 반짝인다.

  "친구야. 나 지구에서 연구 조금만 더 하다 가면..."

  "안 돼."

  카렌이 단칼에 거절했다.

  지구인인 자신이 마법을 배웠는데도 균형 얘기가 나오는데 이 녀석이 지구에 오래 머문다고?

  그리고 이 녀석은 제자들의 곁에서 노후를 맞아야 한다. 녀석의 평생을 함께한 가족이자 열매들이니.

  "안 가면 내일 억지로라도 게이트에 집어넣는다."

  "알았다고. 가면 될 것 아니야."

  "빨리 순간이동 마법이나 써. 아니다, 아예 암흑가랑 집이랑 왕복할 수 있게 마법진 좀 만들어라."

  "야...너...진짜 지독하네."

  오즈로의 항의에 찬 눈빛을 매몰차게 무시한 카렌이 오히려 빨리하라고 파리를 쫓듯 손을 까닥였다.

  "역시 망나니..."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오웬이 카렌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중얼거린다.

  * * *

  짹, 짹!

  맑은 새소리와 바람이 풀을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 상쾌한 소리.

  숲에서 오웬이 눈을 감고 잠시 이 순간을 즐긴다.

  -삐...삐....

  그때 손목의 워치에서 알람이 울린다. 벌써 숲에서 나갈 시간이다. 오늘 그 카렌이라는 남자와 제대로 된 얘기를 하기로 했지.

  카렌이 준 포션도 꾸준히 마시고 숲에서 3일을 쉰 덕분에 몸은 완벽히 회복되었다.

  '그 인간. 생각보다 망나니 같지는 않던데...'

  물론 더 봐야 알겠지만 무시무시한 소문과는 많이 괴리감이 있었다. 일단 얼굴부터 잘생겼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긴 오웬의 머리를 동글동글한 푸른색의 무언가가 부드럽게 쓸고 지나간다.

  "실프?"

  바람의 정령. 아직 자신의 실력이 많이 부족해서 숲에서 밖에 못 보지만 정말 그리웠다.

  실프와 함께 숲을 질주하기 시작한 오웬. 나무는 자기 가지를 구부려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고 모든 동물은 오웬을 향해 기분 좋은 축가를 불러준다.

  그야말로 숲의 아이라는 엘프에 걸맞는 광경이다.

  "저기야. 멋있지?"

  3일 밖에 안 있었지만, 이곳은 오웬의 마음에 쏙 들었다.

  지금껏 처음 보는 강력한 정령이 관리하는 아름다운 숲과 저기 보이는 아름다운 꽃과 약초가 어우러진 밭. 마지막으로 저기 보이는 카페까지.

  띠링!

  오웬이 카페로 들어가자 이미 자리를 잡은 카렌과 이미 저번에 소개받은 엘리, 채린이 보인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카미트리 잎으로 해주세요."

  처음 왔을 때는 버벅였지만 이제는 익숙하게 차를 주문한 오웬.

  이 카페에는 숲에서도 보기 힘든 각종 비싼 약초잎으로 우려낸 차들이 한가득이다.

  "왔어?"

  카렌은 앞에 와서 앉으라고 손짓했고 채린의 옆에 들어가려는 순간 오웬은 잠깐 멈칫하며 누군가를 불렀다.

  "저...들어가도 될까요?"

  채린이 복도 쪽 자리에 앉아서 꿈쩍 않고 있었다.

  "채린아?"

  "아! 미안해요."

  카렌이 재차 부르자 그제야 창가 쪽으로 엉덩이를 움직이는 채린. 살짝 얼이 빠져 있는 느낌이다.

  "몸도 좀 좋아졌으니 얘기해 봐. 대체 왜 거기 잡혔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타락자들의 인질이었어요. 엘프 대륙, 오로라에서 연합으로의 진입을 막는 인질."

  영준이 갖다준 차로 살짝 입술을 축인 오웬이 다시 말을 이었다.

  "타락자들은 인간들을 지배하거나 최소한 혼란스럽게 만드려고 하고 있어요. 그러려면 우리의 방해가 없어야 했죠. 연합을 오고갈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밖에 없어서 효과적이었고요."

  "마법?"

  "아뇨. 마법으로는 못 해요. 대장로 중의 한 분이 땅에 결계를 두르셨거든요."

  하긴 오즈로도 당장 못 뚫고 들어갔는데 말이다. 그럼 대체 뭘까.

  "해저터널이에요."

  "해저터널?"

  "인간들이 옛날에 만들어 놓은 바닷속에 파손된 터널이 있었어요. 그걸 저희가 조금 손 봐서 물리적으로 오갈 수 있죠."

  과연. 생각도 못 한 이동 방법이다.

  "그러면 우리를 좀 데려다줘.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벨리알에서 엘프는 자존심은 세도 입은 은혜는 잊지 않았다. 지구의 엘프는 과연 어떨까.

  "그럼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순간 카렌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였다.

  `귀찮은 거만 아니면 된다.`

  오즈로도 어제 떠난 지금 이제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한다.

  긴장하며 오웬의 입을 바라본다.

  "해저터널을 여는 네 개의 키가 필요해요. 암흑가의 구역을 맡은 타락자들의 간부들이 하나씩 가지고 있죠."

  오웬이 자신의 품에서 초록색의 돌을 꺼냈다.

  "저번에 그거군."

  자신을 감금한 타락자를 죽이자마자 뭔가를 꺼내나 했더니 저거였구나.

  "?그런데 걔네가 간부였어?"

  ?

  그러기엔 너무 약했는데?

  "그쪽이 너무 강한거죠..."

  오웬이 카렌을 어이없이 쳐다봤다. 자신도 어디 가서 꿇리는 실력은 아니었지만, 이 사람은 대체 뭘까.

  질투조차 일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한 하늘을 어떻게 시샘할까.

  "그럼 그 키만 있으면 되는 건가?"

  "네. 암흑가 지하수로에 해저터널을 여는 문이 있어요. 제가 듣기로는 애초에 암흑가의 색에 맞게 키의 색깔도 나눈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린은 여기 있고. 남은 건 블랙, 오렌지, 화이트네요."

  "그건 어렵지 않지."

  한시름 놓으면서 카렌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변한다.

  놈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한지, 개인의 무력이 어떤지 조금의 고려사항도 되지 못한다. 수정구슬도 있으니 금방 찾겠지.

  "그럼 가자. 마침 국장도 암흑가에서 대기하고 있어."

  카렌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마력으로만 작동하는 암흑가로 향하는 순간이동진은 집 마당에 바로 있었다.

  `적적했는데 잘 됐어.`

  오랜 친구를 보내고 허한 마음은 몸을 움직이면서 푸는 게 최고다.

  "나도 갈래!"

  "저도요!"

  "응?"

  그런데 카렌을 붙잡는 두 쌍의 손. 엘리와 카렌이다.

  "그건..."

  "저도 암흑가란 곳을 가보고 싶어요."

  "큼..."

  카렌은 가고 싶다고 방방 뛰는 엘리를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교육에 좋을까?`

  엘리의 육아는 요즘 카렌에게 최대 고민이다. 나름 공부를 하고 있지만 엘리는 보통 아이와 너무 달랐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보긴 했지만 성녀로서 가장 낮은 곳을 봐둬야 해요."

  이게 문제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그들이 엘리를, 성녀를 딸로 키워 본 건 아니지 않은가.

  "아빠. 암흑가에 솔라리교단은 전혀 전파되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신흥종교는 급속도로 퍼지고 있죠. 그 차이점을 알아야 해요."

  엘리가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아빠라는 호칭과 함께 자연스럽게 카렌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카렌이 보기에도 굉장히 이성적이고 이치에 맞다. 차마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알았다."

  "고마워요! 교단에서는 호위 문제로 반대했거든요. 아빠랑 가면 문제 없을 거예요."

  이제 보니 요 녀석이 나를 이용했구나. 하지만 이미 말해버린 이상 돌이킬 수는 없다.

  "꺄아아!"

  가볍게 엘리의 옆구리를 훌쩍 하늘로 들었다 내린 걸로 응징한 카렌이 이번에는 채린을 바라봤다.

  "나...나는..."

  논리적으로 카렌을 설득한 엘리에 반해서 누가 봐도 채린은 눈을 굴리며 지금 즉석으로 이유를 만들어내는 중인 것 같다.

  "그냥 카렌 따라갈래!"

  "..."

  원래 엉뚱한 면이 있었지만 오늘 유독 좀 심하다. 카렌이 왜 그런지 물어보려는 순간...

  절레

  옆에서 엘리가 작게 고개를 흔들자 멈칫했다.

  `뭔가 이유가 있구나.`

  카렌은 묻지 않고 그저 채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같이 가자."

  그러고 보니 어제 오즈로가 떠난 이후로 채린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긴 하다.

  *

  하루 전.

  "빨리 꺼져, 골칫덩어리야."

  카렌이 벨리알을 떠나올 때 자신의 오랜 친구가 배웅하면서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준다.

  -빨리 꺼져, 늙지도 않는 대륙의 골칫덩어리야.

  이 녀석이 분명 이렇게 말했었지.

  "...저거, 저거 봐! 쟤 뒤끝 엄청나다니까? 둘 다 조심해."

  오즈로가 배웅 나온 채린과 엘리를 향해 툴툴거렸다. 물론 카렌과 오즈로 모두 알고 있었다.

  이게 둘만의 작별방식이라는 걸.

  이제는 둘의 관계를 아는 엘리와 채린은 그저 웃을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투덜대던 오즈로가 씩씩 거리며 엘리와 채린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이대로 가면 아쉬우니까. 가기 전에 네놈 흉 좀 보고 가야겠어."

  "뭐?"

  오즈로가 정말로 슬그머니 둘에게 다가가 슬쩍 고개를 숙이자 채린과 엘리도 덩달아 수그리며 머리를 마주 모은다.

  "허..."

  자신의 앞에서 대놓고 등을 돌린 셋에 카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못 말리는 놈이다.

  "사실 그건 핑계고. 둘에게 저 놈 몰래 해줄 게 있어서 그래. 일단 엘리부터 잠시 팔찌를 보여주련."

  오즈로가 씨익 웃으면서 하는 말에 엘리가 망설임 없이 왼쪽 손목을 내밀었다.

  비록 오해가 있었다지만 아빠의 가장 절친한 친구다. 못 믿을 이유가 없다.

  파앗!

  오즈로가 팔찌에 손을 얹자 손바닥에서 나온 빛이 팔찌에 흡수되어 사라진다.

  "뭘 하신 건가요?"

  엘리가 팔찌를 매만지며 물었다.

  뭔가를 한 건 분명한데 팔찌는 어떤 반응도, 달라진 것도 없이 똑같다.

  "이게 도움이 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란다만...그래도 내 마지막 선물이란다. 내 친구와 딸에게 말이다."

  "고맙습니다."

  오즈로는 그저 설명 대신 허허 웃으며 엘리와 눈을 마주쳤다. 그 푸근한 눈빛에 엘리는 더 묻지 않고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채린양. 저 녀석과 오로라를 같이 간다고요?"

  "네."

  "흠..."

  순간 오즈로의 미간에 주름이 새겨진다. 오즈로가 엘프 대륙을 찾으면서 아직 카렌에게 얘기를 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그 결계는 순수했을 뿐만 아니라 익숙했지.`

  "가면 안 되나요?"

  오즈로의 얼굴을 보며 불안해진 채린이 물었다.

  "아뇨. 다만 한 가지만 기억해요. 내가 지금껏 본 사람 중에 녀석과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채린양이에요."

  오즈로는 그 말을 남기고 마지막까지 카렌과 투닥이다 떠나갔고 채린은 카렌이 데려온 엘프가 있는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언제나 맑은 공기와 푸른 색채로 안정감을 줬던 숲에서 음습한 한기마저 느껴진다.

  심장이 두근대며 채린의 직감이, 여자의 직감이 경고하고 있었다.

  오로라는 반드시 따라가야 한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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