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히 주무세요
"성녀 안 할래요."
마치 반찬 투정하는 아이처럼 엘리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하지만 발언의 여파는 가볍지 않았다.
콰콰쾅!
구름 한 점 없던 마른하늘에 갑자기 벼락이 세차게 쳤으며 어디선가 나타난 구름이 태양을 가리자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진 하늘.
"그렇게 겁 주셔도 소용없거든요? 그만둘 거예요. 침략자 막아도 저한테는 의미 없고 아저씨 아니면 어차피 저는 옛날에 죽었어요."
쏴아아아!
이제는 먹구름에서 굵은 장대비까지 쏟아져 내리면서 엘리의 몸이 흠뻑 젖고 머리카락은 미역처럼 얼굴에 달라붙었지만 엘리는 뚱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이거 보라는 듯 워치를 찬 왼손을 들어 올려 빙빙 돌렸다.
"지금 성녀 그만하겠다고 전화할 거예요. 저 곧 사춘기거든요? 진짜 할 수 있어요."
엘리가 실제로 전화하려 오른손을 워치에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찍!
그때 옆에서 날카롭게 귀를 파고 들어오는 쥐 소리.
`뭐지? 쥐가 있을 리가···.`
-찍, 찍!
엘리가 무시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쥐소리가 연속해서 두 번 들려온다.
환청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자 정말 흰색 쥐가 보인다.
"토리?"
신수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털이 방수인지 오랜만에 보는 토리는 복슬복슬한 털을 따라 물줄기가 흘러내려 조금도 젖지 않았다.
-찌···찍!
순간이동을 급하게 했는지 숨을 헐떡이며 헥헥 거리고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쥐.
"토리? 너도 신수니까 당연히 여신님 편들 거잖아. 소용없어."
평소라면 반갑게 맞아 줬을 테지만 엘리는 홱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토리를 외면했다.
신수는 그야말로 신의 분신. 당연히 신을 대변할 게 뻔했다.
찍! 찍!
"모두 오해라고? 그걸 어떻게 믿어요? 오즈로 아저씨 말은 성녀인 제가 들어도 설득력 있어요."
누가 보면 쥐와 대화를 나누는 미친 사람처럼 생각하겠지만 엘리는 토리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든 토리가 뭔가를 설명하며 엘리를 설득하려 했지만 엘리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는 여전했다.
-찍!!!
"흥! 안 믿어요!"
고 작은 몸에서 어쩜 저런 큰 소리가 날까 싶을 정도로 비명에 가까운 토리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찌···아오! 진짜 오해라니까? 엘리야. 나 못 믿니?]
이번에는 쥐 소리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성인 여성의 목소리 함께 토리의 눈에서 눈부신 광채가 뿜어져 나온다.
"여신님?"
[그래! 겨우 힘 좀 다시 모았나 싶더니···다시 언제 모으냐.]
엘리보다 아이 같은 말투로 투정 부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여신이 확실하다.
엘리의 놀란 얼굴을 뒤로하고 흰색 쥐가 짧은 다리로 도도도 달려가 방어막에 앞발을 얹었다.
그러자 철옹성 같던 방어막이 녹듯이 허물어지며 사라지고 안에 있던 둘의 싸움도 잠시 멈춘다.
"음? 내 방어막이 어떻게?"
"엘리? 잠···잠깐만!"
엘리가 자신에게 울면서 달려들자 카렌이 기겁하며 모든 힘을 재빨리 주변으로 흩어 버렸다.
곧바로 엘리가 충돌하며 몸에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과 눈물에 젖어 들어가는 카렌의 가슴.
"이게 무슨···."
오즈로는 마법사답게 자신의 방어막이 사라진 걸 분석하느라 한창이었다. 그리고 흰색 쥐를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
"이 기운은···여신님이군요."
부담이 적게 신수에 강림한 모양이다.
[그래! 야! 내가 언제 그렇게 얘기했어? 네가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아!]
오즈로의 흥미에 찬 눈빛과 다르게 여신은 오즈로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마법사 놈이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안 그래도 지구의 인간이 아니라 마음속도 못 읽어서 찜찜했는데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이야. 이럴 거면 전부 얘기해 줄 걸 그랬다.
"그럼 아니었습니까?"
오즈로의 말에 모두가 하얀 쥐를 쳐다보았다.
콩, 콩.
[아니라니까? 나는 다 계획이 있었어.]
토리의 몸으로 여신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친다.
"흠···여신님의 계획이라···."
하지만 카렌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신.
물론 나이가 능력을 대변하진 않는다.
다만 카렌은 어디까지나 여신이 지금껏 제대로 일을 처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았다.
"음···."
심지어는 카렌의 품에 안긴 엘리조차 같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여신은 잠시 움츠러들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사실 내 계획은 아니고···]
"아니고?"
[옆에서 성자가 알려준 계획이 있다니까?]
"아! 그렇다면야 뭐."
"믿을만하겠네요."
엘리와 카렌이 동시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비록 하늘로 가기 전에 잠깐 봤지만 성자가 곁에 있다면 안심이다.
죽기 전 마지막에 보인 희생이나 아무 기반도 없던 교단을 여기까지 키운 장본인이니까.
어쩐지 교황을 축출한 이후로 여신이 사고를 안 친다 했더니 이런 뒷 이야기가 있었다.
[나를 그렇게 못 믿어?]?
"예."
카렌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고 엘리도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즈로는 그래도 신인데 저렇게 해도 되나 싶었지만, 잘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솔직히 믿음직하진 않죠. 그런데 성자의 능력이라면 이 정도는 예상했을 텐데요."
[그게···이번 일은 내가 한 번 처리해 보고 싶었어. 성자가 요즘 잔소리가 너무 심해서···]
여신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리자 카렌이 이마를 `탁` 짚었다.
역시 육아가 쉽지 않다. 그 대상이 신이라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래도 급하게 내려왔어. 늦진 않았지?]
"뭐···저야 괜찮은데."
카렌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과 오즈로야 오랜만에 몸을 풀었다 치면 되니 괜찮은데.
"이씨···여신님!"
처음으로 여신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엘리. 머리는 산발에다가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아직도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미안!]
"원래 저렇잖아. 그나마 수습하려고 한 게 어디야."
카렌이 엘리를 꽉 껴안아 주며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날리자 상처받은 얼굴을 짓는 여신.
귀여운 토리의 모습으로 저러니 더 가련해 보였지만 카렌은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한 번 뭐라 해줘야 다시는 혼자 뭘 안 하지.
[너희 신한테 너무한다··· 잠깐 뭐 좀 확인할게.?]
순간 작은 쥐의 몸에서 주변이 대낮처럼 밝아질 정도의 짙은 농도의 신성력이 쏟아져 나온다.
역시 보기에는 저래도 신은 신이다.
[예상대로 당분간은 괜찮아. 대적자가 생기려면 멀었어.]
살포시 신성력으로 카렌을 감싼 여신이 고개를 주억인다.
[원래는 신탁으로 엘리에게 내려서 멋있게 하려고 했는데···.]
"확실히 그게 더 괜찮았네. 많이 발전하셨네요."
카렌의 여신을 보는 눈이 조금 달라지고 엘리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린다.
이미 최고긴 했지만 교단에서 엘리의 위세도 높이고 신도들의 믿음도 더 강화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지구에 새로운 신이 곧 탄생할 거야. 그 신이랑 내 힘이랑 합치면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
"지구에 새로운 신?"
지구에 인간들 말고 신이 생길만한 종족이 있나?
[저 인간이 알려줄 거야. 그걸 조사하는 일이 계약 중의 하나였거든.]
"아! 그게 그거였나?"
오즈로가 이 상황에서도 궁금했던 일이 밝혀지자 환한 얼굴로 변한다.
역시 마법사들이란···
카렌이 그 모습을 보며 혀를 한 번 차는 동안 여신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오즈로를 째려보며 게이트로 다가갔다.
참 얄미운 인간이다. 물론 자신의 친구를 위했다지만 이렇게 자신까지 내려오게 하고 말이다.
[너···]
자신만 이렇게 당할 순 없지.
?
여신이 게이트를 잠시 살펴보더니 오즈로와 카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며 입을 연다.
[역시 게이트는 바뀐 게 없어. 내 힘으로는 한 명 밖에 벨리알로 다시 못 돌려보내는 거 알아?]
"예? 아까는 이 녀석이 엘리까지 보낼 수 있다고 하던데요?"
"맞아요."
아까 정신없는 와중이었지만 카렌과 엘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강림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둘을 보내. 애초에 무리야. 그러면 어떻게 가려고 했을까?]
"아니···"
"이 녀석은 무시하고 계속해봐요."
오즈로가 여신을 막아서려 했지만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다는 얼굴로 카렌이 재촉했다.
[자기 마나와 생명력을 몽땅 써서 너와 엘리를 보내려고 한 거야. 그렇게 너보고 살라고 하더니 정작 본인은···]
으드득
여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렌이 오즈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갈고 여신은 황급히 말을 끝낸다.
[그럼 나는 간다! 며칠 후에 게이트는 닫히니까 알아서 하고!]
-찍!
"토리야. 이리 와."
엘리가 여신이 빠져나가고 눈에서 광채가 사라진 토리를 부르자 훌쩍 다가와 엘리에게 안기는 토실한 하얀 쥐.
강림의 부작용인지 엘리의 품에서 축 늘어진다.
"너 이 새끼. 그렇게 내가 살아나면 좋아할 줄 알았냐? 어쩐지, 아까 벨리알에서 제자들이 내 존재를 감춰 줄 거라더니. 너는 그때면 이미 뒤졌다는 의미였냐?"
평화로운 이쪽과는 달리 카렌이 있는 쪽은 살기가 넘실거린다.
`진짜 화나셨네.`
엘리는 저렇게 진심으로 화난 아저씨는 처음 봤다. 심지어 아까 오즈로 할아버지에게 난데없이 공격받아도 별말 없던 사람인데 말이다.
"아니···그게···나는 어차피 마나의 품으로 돌아갈 날도 얼마 안 남았고···."
오즈로도 카렌의 진심을 느꼈는지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네 명줄 다 돼서 가는 거랑, 나 때문에 가는 거랑 같다고 생각해?"
"그···"
"내가 방금 싸우다가 뭘 또 하나 익혔거든? 참 좋은 스승을 뒀지. 안 그래?"
흩어놨던 카렌의 실드가 어느새 다시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색이 좀 다르다.
"어···얼음? 그새 실드에 얼음속성을 넣었어?"
은청색의 물결을 본 오즈로의 입이 경악해서 쩍 벌어진다.
안 그래도 흉악했던 실드에서 이제는 주변을 얼려버리는 차가운 냉기마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너 이리와. 죽기 직전까지만 좀 맞자. 아니 그냥 내 손에 죽어!"
"으아아아!"
-찍?
토리가 말려야 되지 않냐고 엘리를 올려다보았지만 엘리는 싱긋 웃으며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즈로 할아버지는 조금 당해도 돼. 오래된 친구끼리 다툼이야. 저러면서 친해진대. 배고프지? 삼색님이 먹던 간식 줄게."
"억! 억!"
뒤에서 노인의 애처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엘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닫아 버렸다.
* * *
카렌은 오늘 놀란 엘리를 달려주려 하루종일 같이 있었고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
"···그렇게 오즈로와 같이 마을을 통째로 휩쓸 뻔했던 홍수를 막았단다."
탁!
카렌이 이야기 하나를 끝마치고 책을 덮었다.
엘리가 모험 이야기를 좋아하다 보니 아예 틈틈이 줄거리를 요약해 놓았다. 덕분에 한결 이야기가 쉽다.
"아저씨."
"응?"
엘리는 계속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얼굴을 쳐다봤다. 마치 잠시라도 시선을 떼면 사라질 걸 겁내듯이 말이다.
"왜? 할 말 있니?"
"만약 제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 모르고 있었겠죠? 아저씨가 침략자들을 막아낸 뒤···그렇게 될 거라는 걸? 숨겼을 거잖아요."
엘리의 말은 조곤조곤했지만 카렌은 당황해 순간 숨을 멈췄다.
"어···."
차마 자신을 똘망하게 바라보는 엘리의 눈동자를 상대로 아니라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 행사에서 가족 초청 같은 일이 생기면 꼭 말해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렇죠?"
"그랬었지."
"그러면 우리 약속해요. 아저씨도 꼭 저한테 힘든 일 있으면 참지 말고 저한테 말씀해주세요. 안 그러면 저도 안 참을 거예요?"
엘리가 마지막에는 투정에 가깝게 한 쪽 볼을 부풀리자 카렌의 가슴이 살짝 간질거렸다.
"안 참으면?"
"그럼 저도 막 그런 거 할 거예요. 문 쾅 닫고 들어가고, 짜증도 내고, 소리도 질러요?"
"그거 무섭겠네."
엘리의 애교를 본 카렌의 입꼬리가 하늘로 치솟고 손은 어느새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데 오즈로가 말해준 거 있지? 새로운 신."
"아! 그거요. 마침 교단이 조사하고 있는 새로운 종교랑 관련이 있더라고요. 아저씨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내가 먼저 알아볼게. 원래 그 종족은 상대하기 좀 힘든 데다가 저번에 연합 의장이 말한 것도 좀 걸려서. 아마 인간에 대한 적개심이 굉장할 거야."
"그래요? 이미지는 엄청나게 차분하고 그럴 것 같은데?"
"아냐. 보기에는 그렇지만 타종족에게는 엄청 꽉 막힌 종족이거든, 그렇다고 무력이 약한 것도 아니고."
과거의 기억이 스치고 지나가자 카렌의 가슴이 욱신대면서 자신도 모르게 몸이 살짝 떨린다.
"아! 그리고 모두에게 오늘 있던 일에 대해 말했어요."
"모두에게?"
"네. 모두 내일 당장 카페로 오겠다는데요? 아저씨와 오즈로님 보러 온대요."
순간 카렌의 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혹시···그것도 말했니? 내가···."
"혼자 희생할 계획이었다는 것도 말했어요. 채린 언니가 말이 없어지던데요? 기다리고 있으래요."
아직 엘리의 벌은 끝나지 않았다.?
카렌은 엘리의 저 생글생글 짓고 있는 미소가 너무 무서웠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자자."
"네!"
순간 어지러워진 카렌이 휘청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딸깍
익숙하게 탁자등을 켜고 방의 불을 끄자 창문으로는 은은한 달빛과 함께 잠자기 딱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내일 보자."
카렌이 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엘리도 마주 손을 흔든다.?
"안녕히...주무세요...음..."
"응?"
그런데 엘리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
방금까지 멀쩡하던 아이가 얼굴이 살짝 상기된 상태로? 손가락을 꼼질대며 발가락으로는 이불을 꼬집고 있었다.
'혹시 아프나?'
낮에 충격이 좀 컸으니 증상이 늦게 나타날 수도 있다.
카렌이 엘리의 상태를 살펴보려 황급히 발을 떼려는 순간.
"...아빠."
"어?"
엘리가 말을 끝내자마자 이불을 푹 뒤집어 쓴다.
생전 처음 듣는 호칭에 순간 카렌의 머리에 망치가 맞은 듯 멍해진다.
끼이익
잠시 그대로 서있던 카렌이 문을 닫으며 숨을 고르고 입을 연다.
"너도 잘자렴."
그리고 덧붙이는 한 마디.
"딸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