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호 (94/140)

  나도 하고싶은 대로 할 거야

  "안 들어가면 넌 죽을 거다."

  "무슨 소리야? 내가 침략자에게 죽을 거라는 거야? 그런 거라면 너에게 마법도 배웠고···."

  "아니. 막은 후가 문제야."

  이제는 카렌이 미친놈처럼 오즈로를 바라보았다.

  `정말 노망이 났나.`

  아까부터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댄다. 막으면 끝 아닌가?

  "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다."

  "···내가?"

  이제는 저주로까지 들리는 오랜 친구의 말에 카렌이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끝을 올렸다.

  "균형."

  움찔

  오즈로의 말에 카렌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벨리알에서 지구까지 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이자 원흉.

  자신이 너무 강해서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세상은 `대적자`를 만들어내었다.

  -저희를 구원해주세요. 왕이시여.

  -주군께 충성을 바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가지마, 같이 있어줘.

  왕국의 백성, 기사, 그리고 엘리와 닮았던 소녀.

  모두의 절규가 머릿속을 파고들자 카렌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대적자`는 본인이 아무리 강해도 주위의 빈틈을 파고든다. 그?렇게 강한 카렌조차 전염병으로 모두를 잃었다.

  ?

  "균형은 지구로 오면서 원래대로 돌아왔어. 벨리알 신들이 그렇게 말했···."

  "그들이 지구로 가면 끝난다고 말했냐?"

  "···"

  오즈로의 말에 카렌의 말문이 순간 턱 막혀버렸다.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다만 벨리알에 있으면 계속 `대적자`가 나타난다고만 했지.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 다만 교묘하게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하지만 지금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어."

  세계적인 위협은 기껏해야 백호와 청룡? 그건 인간이 자초한 위험이다.

  "네가 160년을 벨리알에 있었지. 긴 세월 동안 이제는 완벽한 지구인도 아니고, 실드 하나라면 몰라도 지구에 없는 마법을 배웠으니 다시 균형이 무너질 거다."

  "그래서 균형 때문에 내가 목숨을 끊는다고?"

  "그럼 아니냐?"

  "···."

  카렌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신 때문에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엘리가 죽는다라···

  그런 광경을 두 번 다시 볼 용기는 카렌에게도 없었다.

  "역시나···."

  오즈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녀석도 강하지만 그래도 인간이다.

  이미 가슴에 흉터가 너무 많이 새겨진 인간.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네가 내 목숨을 살려준 적이 몇 번이지?"

  "셀 수도 없지."

  "이번 한 번만 내가 살려주게 해주라."

  오즈로의 지팡이가 빛나더니 카렌의 발밑에서 마력으로 만든 뿌리가 올라와 순식간에 발목, 무릎, 골반을 타고 어깨를 덮었다.

  "이 마법진은 너도 알다시피 내 마력을 증폭시키고 네 마력을 억제하지. 만만히 볼 수 없을 거다."

  인간한테도 작동하는 마법진이었냐. 어쩐지, 아까부터 몸에서 알 수 없는 허탈감이 느껴진다 했다.

  오즈로의 손짓에 나무줄기의 밑동이 잘리며 카렌의 몸이 그대로 게이트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벨리알로 끌려가기 직전.

  우지직

  나무뿌리가 순식간에 잘게 부서지며 카렌의 몸이 공중에 우뚝 섰다.

  "영역화라···진심이군."

  오즈로가 순간 카렌의 몸을 중심으로 점점 불어나는 은빛 물결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게 실드라니, 아무도 믿지 못할 거다. 게다가 억제된 게 저 정도···?`

  카렌의 손짓에 따라 꾸물거리며 점점 주변의 공간을 잠식해가는 실드.

  아니,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카렌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저건` 생명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우우우웅

  이에 지지 않겠다는 듯 오즈로의 심장이 거세게 뛰면서 몸에서 엄청난 마력이 쏟아져 나온다.

  마력은 공기에 스며들고 오즈로가 지팡이의 위 끝부분을 살짝 가져다 댄다.

  화르르르륵!

  엄청난 열기와 함께 주변에 타오르는 불길들.

  카렌의 저런 마나 운용은 벨리알에서도 드래곤로드급이 아니면 못 한다. 애초에 저런 마나를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어딨겠나.

  `하지만 흉내 내기는 가능하지.`

  오즈로는 공기와 자신의 마력을 섞고, 미리 준비해 둔 마법진으로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냈다.

  "닮았어."

  카렌이 마법진 안을 정확히 둘로 양분한 자신의 실드와 오즈로의 불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자신들의 성격을 대변한 마법들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유해졌지만 벨리알에 처음 떨어졌을 때 한없이 냉소적이었던 자신과 마법에 대한 열정과 수십의 제자들을 키워낸 오즈로.

  "네 딸 하나쯤은 데려갈 수 있어. 원한다면 네 기억도 지워주지. 균형 문제도 벨리알에서는 괜찮아. 내 제자들이 네 존재를 감춰줄 거다. 내가 두 번 정도 문을 열면서 방법을 찾았어."

  카렌은 절절한 친구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바로 앞에서는 살벌한 힘의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고맙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함께한 친구의 진심이 느껴진다.

  서로의 뒤를 맡기고, 목숨을 맡겨 온 사람.?

  서로 표현이 좀 서툴렀을 뿐. 가족이나 다름없다.

  "그럼···."

  "그래도 안 돼. 다른 사람도 있고 내 욕심 때문에 엘리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는 없어."

  카렌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인다.

  "육아책에 그렇게 쓰여 있더라.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내가 요즘 잔소리가 는 것 같아서 그쪽으로 공부하고 있거든. 너는 딸 없어서 모르지?"

  하지만 카렌의 말에도 오즈로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치며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게 다 여신의 계획이라고! 이 답답한 새끼야! 일단 침략자는 막아야 하니 마법을 배우게 하고, 엘리라는 아이를 이용해 세상에 균형을 일그러뜨리는 너도 처리하는 거지!"

  "이미 알고 있어."

  "근데 왜···."

  지저분한 암계를 수없이 겪어 본 카렌은 오즈로의 입에서 균형 얘기가 나올 때부터 짐작했다.

  "나쁠 건 없잖아? 나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내 차례인 거지. 특별한 건 없어."

  덤덤하게 내뱉는 진심.

  카렌은 오히려 기뻤다.

  자신을 보며 웃으며 하늘로 올라 간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목숨은 시한부가 되어 버렸지만, 마음은 홀가분하다.

  "제발, 가자고. 응?"

  카렌은 오즈로의 애원에도 여전히 말이 없다가 잠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뿌연 형체만 보이는 2층 방이었다.

  `지금쯤 자고 있겠어.`

  엘리가 있는 방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중에 꽤 시끄러웠는데도 안 깨는 걸 보니 일이 많아서 피곤했나 보다.

  "나는 못 가. 아빠가 되어 버려서."

  카렌이 오즈로를 다시 마주 보자 은빛 물결이 호응하며 살랑였다.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서로 한 맹세 기억나냐?"

  "그게 언제 한 맹세인데."

  말은 그렇게 해도 냄새, 풍경 모두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오즈로와 카렌 둘 다 젊은 시절이었다.

  바다 내음이 풍겨오는 항구 도시의 술집. 둘은 술에 잔뜩 취해 피 한 방울을 섞어 술잔을 나눴다.

  -서로 목숨을 걸고 지킨다!

  -크하하하!

  "너는 그 맹세를 수없이 지켰지."

  대마법사 오즈로도 누구나 그렇듯 풋내나는 마법사 시절이 있었다.

  멋모르고 소매치기당하고, 함정에 빠져 죽을 뻔하고. 그때마다 구해준 게 카렌이다.

  "그건 너라도 그렇게 했을 거다."

  "그러니까 나도 지금 이렇게 하는 거다.?"

  오즈로가 다시 한번 불꽃에 가져다 대자 불꽃이 옷을 갈아입듯 제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적색, 황색, 백색, 마침내 청색으로 변하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실드를 향해 혀를 날름거린다.

  "오랜만에 보네. 청색 마도사."

  불은 25,000도가 넘었을 때 마침내 사람을 홀리는 신비한 색을 드러낸다. 벨리알에서 오즈로의 상징이었던 청색 불꽃.

  이윽고 카렌은 손을 뻗고 오즈로의 지팡이가 휘둘러지면서 두 힘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 * *

  "너. 솔라리 여신을 믿냐?"

  졸려서 잠깐 인형을 껴안고 있던 엘리의 가슴이 순간 철렁였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려는 순간···

  "아이는 마법으로 재웠으니 푹 잘 거야. 어린 나이에 피로가 너무 많이 쌓여 있더라.?"

  뒤이어 오즈로의 말이 들려오며 엘리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알았다.

  여기서 깨어나면 안 된다고.

  이 이야기는 반드시 자신이 들어야겠다고.

  `아까 갑자기 졸린 이유가 마법 때문이었구나.`

  대마법사의 마법은 과연 강력해서 엘리의 신성력조차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하지만 순간 엘리의 왼쪽 손목에 있던 팔찌가 반짝였고 갑자기 드는 노곤함에 엘리는 인형에 자기 얼굴을 묻었던 것이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일부러 아저씨와 같이 산 인형에 얼굴을 더 파묻고 과장되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잠시 재워두고 나와 봐. 보여줄 게 있어."

  하지만 기다리던 핵심적인 이야기들이 나오지 않았다.

  끼이익

  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뒷좌석이 열린다. 그리고 무릎 뒤쪽과 허리에 손이 감기며 드는 부유감이 엘리가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실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아저씨의 심각한 얼굴이 보인다.

  콩

  인형을 통째로 안고 있는 엘리를 들어서 그런지 아저씨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난간에 부딪힌다.

  하지만 엘리는 애써 모르는 척하며 눈을 계속 감았다.

  스윽

  혹시나 자신이 깼을까 봐 한 번 확인하고는 조심스럽게 2층으로 올라가는 아저씨. 그리고 푹신한 침대의 감촉과 가슴까지 오는 이불이 느껴진다.

  스윽

  깨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살짝 문지른 아저씨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간다.

  삐리릭!

  문이 닫히며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나자 엘리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에 있는 창문을 빼꼼 내다 봤다.

  "어?"

  어느새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뿌연 돔 모양의 방어막.

  `왜 이렇게 불안하지?`

  아까부터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 같았다. 성녀로서의 본능일까.

  다다다닥

  엘리가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방어막 앞에 섰다.

  내부를 보려고 가까이서 봐도, 귀를 대어 봐도 아무 소리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신성력을···.`

  이렇게 쓸 줄은 몰랐지만 채린 언니와 대련을 하다가 눈부시게 늘어난 신성력의 응용법이다.

  `안 돼.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볼 수가 없어.`

  눈과 귀에 신성력을 집중해봤지만, 이 마법진은 신성력조차 막아낸다.

  중간 중간 희뿌연 형체와 알 수 없는 소음만이 아저씨와 오즈로 할아버지임을 짐작게 했다.

  `제발···`

  엘리가 습관적으로 간절하게 두 손을 모으며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자 엘리가 딱히 신을 향해 기도한 건 아니었다. 그저 바램.

  하지만 일반인이라면 단순한 하나의 몸짓으로 끝났을 행위가 성녀인 엘리에게는 달랐다.

  파앗!

  엘리의 몸에서 하얗게 빛나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막대한 신성력이 눈과 귀로 몰리면서 `알고싶다`라는 엘리의 바람을 정확히 이행하기 시작한다.

  "아···!"

  시야를 가로막았던 뿌연 안개를 통과해 뚜렷하게 보이는 신형에 엘리가 기쁨의 탄성을 내뱉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침략자에게 죽을 거라는 거야? 그런 거라면 너에게 마법도 배웠고···."

  "아니. 막은 후가 문제야.?

  눈뿐만 아니라 귀도 마침내 제 역할을 다하기 시작했다. 오즈로의 말이 또박또박 귀에 꽂힌다.

  "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다.?"

  하지만 들리는 말은 절망적이었다. 순간 차라리 듣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었지만 엘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게 다 여신의 계획이라고! 엘리라는 아이를 이용해 세상에 균형을 일그러뜨리는 너도 처리하는 거지!"

  오즈로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카렌의 말에 엘리의 볼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못 가. 아빠가 되어 버려서."

  엘리가 주먹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막을 힘껏 때렸다.

  "아저씨? 아저씨!"

  쾅, 쾅, 쾅!

  신성력이 실린 덕분에 작은 아이의 주먹이라기엔 무시할 수 없을 만한 위력. 하지만 지금 안에서 충돌하는 힘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아저씨는 원래 강한 걸 알고 있었지만 오즈로 할아버지도 예상을 뛰어넘었다. 친구를 위한 진심 때문일까. 그야말로 박빙의 싸움이다.

  "여신님."

  엘리가 둘 사이의 싸움을 보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오즈로의 얘기를 들었을 때 엘리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여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신답게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여신님의 사랑이 모든 인간에게 동등하지 않다는 걸 알아요."

  자신이 겪어 본 여신은 인간 본질을 관통하고 있었다.

  인간의 대표적인 본성 중 하나인 `편애`.

  자신같이 마음에 드는 인간은 진정으로 아껴주지만 반대로 인간에게 해가 되는 존재들에게는 한없이 냉정하다.

  "아저씨를 정말 이용할 생각이셨어요?"

  대답이 없다. 하늘은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다.

  찌지지직!

  카렌의 실드와 오즈로의 불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서로를 찢어발기는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안에서의 싸움이 격렬할수록 엘리의 감정도 격해진다.

  차라리 저들이 본인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싸우면 좋겠다. 하지만 슬프게도 자신들을 위한 싸움도 아니었다.

  "대답해 주세요."

  엘리가 눈물 자국이 길게 남은 얼굴로 다시 소리쳤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그럼 저도 떼 좀 쓸게요."

  엘리의 평소 모습을 보면 10대 소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만큼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으며 행동은 어른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아이답게 해 볼 생각이다.

  "성녀 안 할래요."

  ?

  자신도 아저씨, 아니 아빠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을 자신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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