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3/140)

  친구의 진심

  "여기는 성전사들이 계시는 곳이에요!"

  행사가 끝난 뒤 카렌과 오즈로는 엘리의 손에 이끌려 여러 곳을 이끌려 다니기 시작했다.

  법복은 벗고 다시 평상복을 입은 엘리는 전에 없이 신나서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며 안내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아···빠라고 했어!`

  꿈에도 그리웠던 말이지만 속으로도 아직 아빠라는 호칭이 어색한 엘리였다.

  지나가던 성전사들과 사제들은 제 다소 경망스러운 엘리의 행동을 보고도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교단원 중에 엘리의 어두웠던 과거를 모르는 이들은 없었기에 모두 지금 엘리의 마음을 이해했다.

  벌컥

  "어···."

  행사가 끝나고 잠깐 쉬고 있던 성전사들은 갑자기 성녀와 이단심판관이 휴게실에 들이닥치자 모두 행동이 굳어버렸다.

  "성녀님? 이단심판관님? 일어나라!"

  가장 선임자의 외침에 따라 모두 순식간에 휴게실 중간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정렬한다.

  "···엘리야. 다른 데로 가자. 네 집무실은 어디야?"

  "저쪽이에요!"

  군대로 치면 사단장, 아니 대통령급의 존재가 둘이나 들이닥친 거나 마찬가지인 성전사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저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던 카렌이 재빨리 엘리의 시선을 돌렸다.

  긴장한 성전사들을 뒤로하고 집무실 앞에 일행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가 제가 일하는···절지아님? 한길님?"

  "오셨습니까?"

  "···오셨습니까."

  그런데 비어있어야 할 자리에 절지아가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카렌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셔도 됩니다."

  한길이 엘리를 보면서도 키보드를 쉬지 않고 두드리며 말했다. 거듭되는 야근과 추가 근무를 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레 습득한 스킬이다.

  "네? 하지만···."

  "여기 전권 대리인이 계시지 않습니까. 자격은 충분합니다."

  원래는 성녀가 부재시 교황이 교단을 맡지만, 교황이 없는 지금은 교단에서 투표를 통해 임시로 절지아를 만장일치로 대리인으로 지정했다.

  "절지아님이 대리인이셨어요?"

  엘리조차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데 전권대리인이라면 꽤 큰 사항인데 자신이 몰랐다는 게···

  "절지아님이 중간에서 저희에게 철저히 숨기고 계셨더군요. 하지만 이제는 도망 못 가십니다."

  한길이 성전사에 어울리지 않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서 엘리를 문 쪽으로 안내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럼요! 어차피 하루인데 괜찮습니다. 앞으로 저희 일도 많이 줄어들 겁니다."

  엘리가 나가자마자 한길이 재빨리 문을 닫았다.

  "너···진짜 이러기냐?"

  책상을 점령하고 있는 서류 더미를 보며 울상을 짓고 있는 절지아가 한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동안 성녀님과 제가 고생할 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하셨죠?"

  "아니···그건···."

  "게다가 성녀님이 요리를 하는 날은 귀신같이 사라지시더군요."

  "너···설마···."

  그제야 한길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알아버린 절지아가 손가락으로 한길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었다.

  "앞으로 요리도 같이 먹게 될 겁니다. 대.리.인.님. 성서에도 콩 한 쪽도 나누어 먹으라고 쓰여 있지 않습니까."

  "크아아아아아! 이 배은망덕한 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절지아가 지르는 절규를 뒤로하고 카렌 일행은 신전 밖을 나섰다.

  "원래 오늘 저녁에 예약해 놨는데 지금 가자."

  "어딘데요?"

  "쇼핑몰. 저번처럼 통째로 빌렸어. 게이트가 주위에 나타나는 바람에 오늘 마침 휴관 일이었거든."

  조수석에 엘리와 뒤로는 오즈로를 태우고 카렌은 차를 몰아 미리 내비게이션에 찍어 두 장소로 가기 시작했다.

  `근데 저 녀석은 왜 저래? 아까 마법이 뭐 잘못됐었나?`

  카렌은 뒷좌석에 앉은 오즈로의 얼굴을 거울로 보며 의아했다.

  아이처럼 신나 하던 오즈로의 표정이 자신의 장기자랑 이후로 쭉 어색했다.

  ?

  "어서 오십시오."

  직원의 안내를 받아 청소년 매장으로 향하는 길에 카렌이 이제는 자기 가슴 근처까지 온 엘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아···저씨?"

  "아니야. 그냥 많이 컸다 싶어서. 예전에 여기 왔을 때는 아동복 매장으로 갔잖아."

  엘리가 카렌을 올려다보자 카렌이 말했다. 그러자 엘리의 얼굴이 뿌듯함으로 물들면서 반대로 아쉬운 마음이 살짝 올라온다.

  `이번에도 아빠라고 부르기에 실패했어.`

  그렇게도 불러보고 싶었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쉽게 나오지 않았다.

  서두를 생각은 없었다. 이제 부녀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니까.

  "더 클 거예요. 한길 오빠보다 크진 못하더라도 채린 언니만큼은 커야죠."

  엘리가 과장되게 뒷발을 들어 올리며, 곧 거기까지 큰다는 의미로 손을 머리 위로 휘적였다.

  "그럼. 충분히 클 거야. 일단 옷부터 사자. 그 곰돌이 옷도 이제 힘들 거야."

  "네. 좋아요!"

  엘리는 이제는 곰돌이 잠옷에 대한 미련을 떨쳐냈다. 앞으로 카렌이 많이 사줄 테니까. 쌓인 추억보다 앞으로 쌓아 갈 추억이 더 많을 거다.

  "이건 어때요?"

  엘리가 한 잠옷을 자기 상체에 대보자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네. 그래도 한 번 입어볼까?"

  "네!"

  엘리가 환하게 웃으며 탈의실로 사라지고 카렌은 뒤로 돌아 오즈로를 불렀다.

  "어울리지도 않는 표정 짓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봐. 무슨 일이야?"

  둘이 나란히 대기석에 앉고 오즈로는 엘리가 사라진 걸 끝까지 확인하고서야 카렌에게 물었다.

  "정말 딸이냐?"

  "···무슨 소리야?"

  카렌이 오즈로의 뜬금없는 소리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를 정말 딸로 생각하냐는 거다. 혹시 벨리알에서의 그 아이가 떠올라서 착각하는 게 아니냐고."

  "뭐?"

  카렌이 순간 벌떡 일어나며 오즈로를 노려봤다. 하지만 자신을 흔들림 없는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는 오즈로를 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감정은 전혀 없어.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다른 아이야."

  여신에게 부탁해 과거를 보면서까지 극복했던 과거였다.

  만약 그런 감정으로 엘리를 딸로 받아들였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까.

  "그러냐···그럼 당연히 벨리알로 나랑 같이 돌아갈 생각은 없겠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저씨!"

  엘리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카렌과 오즈로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동시에 일어나 밝은 얼굴로 맞아 주었다.

  "끝나고 얘기하자."

  오즈로에게 작게 속삭이고 카렌은 앞서 나가 엘리에게 칭찬을 쏟아 내었다.

  "너무 예쁜데?"

  "정말요?"

  *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엘리는 뒷좌석에서 쇼핑몰에서 산 자기 몸만 한 인형에 고개를 묻고 곱게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벨리알로 돌아가자니 무슨 소리야?"

  "너. 솔라리 여신을 믿냐?"

  "뭐?"

  카렌이 오즈로의 말에 순간 움찔하며 거울로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성녀인 엘리가 듣기에는 민감한 얘기였다.

  "걱정마. 아이는 마법으로 재웠으니 푹 잘 거야. 어린 나이에 피로가 너무 많이 쌓여 있더라."

  아무리 성녀라도 대마법사의 마법에는 걸리는 걸까. 과연 엘리는 뒤척이는 기색조차 없다.

  "안 믿는다."

  존재는 당연히 믿는다. 벨리알에서도, 지구에서도 실제로 만나 봤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인 신뢰는 전혀 없다.

  여신의 전과가 한두 개가 아니다.

  지금보다 더 어렸던 엘리한테 실제 전쟁을 보여 준 일.

  인터넷으로 되지도 않게 세계 멸망을 퍼뜨린 일.

  "여신을 직접 만나봤는데 너무... "

  깜빡!

  그때 손바닥에서 이단심판관의 문양이 점등하며 카렌의 말을 끊어버린다.

  "자기 험담은 기가 막히게 들어."

  "그 문양은?"

  "이단심판관이야. 엘리 구해줄 때 잠깐 받았지. 이제 필요 없다 그랬는데 안 사라지네."

  카렌이 털어내기라도 하듯 문양이 새겨져 있는 왼손을 휙휙 흔들며 말했다.

  "그래서 갑자기 여신은 왜?"

  "내 거래 있잖아? 여신이랑 했다. 너를 지구로 보낼 때 너도 알다시피 벨리알의 귀중한 재료들을 몽땅 쏟아 부었잖아."

  "그렇지."

  이 녀석이 그때 뭐랬더라. 더 이상 이런 방법으로는 벨리알에서 지구로는 못 넘어간다 그랬지.

  "내가 다른 재료로 지구로 넘어갈 수 있을까 실험해 봤거든. 역시나 작은 구멍만 열리고 몸은 못 들어가더라."

  "그럼 지구로 넘어 올 수 있게 도와주는 조건으로 여신이랑 거래한 거야?"

  "그래. 첫 번째 조건은 어떤 일에 대한 지구에서의 조사. 두 번째는 침략자를 막기 위해 너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일."

  ?

  "허...?"

  단순히 녀석의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나? 그러기엔···.

  "물론 마법사로서의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었지."

  역시나. 그런 진심이 담긴 절실함은 연기로는 나올 수 없었다.

  하긴 이 녀석이 행성이나 침략자 얘기를 누구한테 들었겠나, 신밖에 없지.

  카렌이 이제야 풀리는 의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을 꺾어 고속도로에서 구리시로 빠지는 국도로 진입했다.

  ?

  [목적지까지 5분 남았습니다.]

  네비게이션의 말대로 저 앞에 울창한 숲이 보인다.

  "근데 계약은 왜 숨긴 거야?"

  "네 성격에 침략자 온다고 시킨 대로 배우겠냐? 더 싫어하겠지."

  "하긴···."

  역시 이 녀석이 연기는 못 해도 마법사답게 머리는 좋다.

  아니, 그냥 자신을 오래 봐 와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아직도 제일 궁금한 질문에 오즈로가 답변을 안 하고 있었다.

  "벨리알은 왜 돌아가자고 하는 건데?"

  깜빡, 깜빡!

  이단심판관의 문양이 다시금 불을 뿜는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긴급상황을 알리듯 굉장히 빠르다.

  "일단 얘부터 데려다주고 밖에서 다시 얘기해. 보여줄 것도 있고."

  "그래. 아...거 좀! 벨리알로 안 돌아가요! 그러다 그동안 회복한 힘 다 날아갑니다."

  쉬지않고 깜빡이는 징표를 보며 카렌이 왈칵 짜증을 내었다.

  이 여신이 요즘 교단이 잘 나간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이래??

  여신이 그제야 안심했는지 징표가 좀 잠잠해진다.

  끼이익

  집에 도착한 카렌은 차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뒷좌석에서 엘리를 안아 2층으로 올라갔다.

  `춥겠다.`

  엘리를 침대에 살포시 눕혀 주고 이불을 덮어 준 카렌은 잠시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집 밖에 나와보니 오즈로가 기다란 지팡이를 땅에 짚고 있었다. 그런데 목에 걸린 목걸이에서 하얀빛이 쏟아져 나온다.

  "성물이잖아?"

  익숙한 빛에 익숙한 기운. 솔라리 교단의 일을 처리하면서 지겹게 봤던 것들.

  ?

  "그래. 계약이 끝났음을 알리는 거야. 이제는 돌아가라는 거지. 이게 작동해야 벨리알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 수 있거든."

  "벌써?"

  카렌이 내심 드는 섭섭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이제 가면 이제는 영영 못 볼 거다. 사실 이렇게 본 것도 여신이 도와줘서 만난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웠으니.

  "하지만 혼자는 안 가."

  "뭐?"

  카렌이 뭐라 할 새도 없이 오즈로가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로 살짝 땅을 한 번 두드린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지팡이로부터 퍼져나간 빛이 땅을 타고 사방으로 뻗더니 한 문양을 만들어낸다.

  커다란 원형 안에 별 모양의 그림. 마법진이다.

  곧이어 마법진의 테두리를 따라 불투명한 원형 돔이 솟아나더니 순식간에 둘을 덮는다.

  "이 마법진... 이거 우리가 예전에 벨제베불 잡을 때 쓴 거 아니냐?"

  오즈로와 자신을 둘러싼 벽을 톡톡 두드리며 카렌이 말했다.

  벨리알을 떠나기 전의 허접한 마왕이 아닌 역대급으로 고생했던 마왕이다. 전 대륙의 힘을 집중해 간신히 해치웠던 강적.

  덜컹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오즈로가 지팡이를 찍자 이번에는 땅이 뒤집히며 커다란 기계장치가 올라온다.

  파지직!

  ?

  기계장치가 오즈로의 성물과 공명하며 스파크가 튄다. 그리고 곧이어 사람 한 명이 들어갈 만한 문을 만들어냈다.

  ???

  "너에게 나중에 도움 된다고 하니 비어드가 마법진 그릴 마석도 주고 이것도 금방 만들어주더라."

  언제 그랬대. 하긴 비어드라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든다고 좋다고 해줬겠다.

  "저 게이트로 들어가면 벨리알이야. 정말 들어갈 생각 없어?"

  "없다니까?"

  카렌이 단칼에 대답했다. 자신은 지구가 좋았다.

  불사도 사라졌고, 많은 인연을 만났다. 무엇보다...

  `많이 피곤해 보이던데.'

  인연하니 떠오르는 사람에 문득 카렌의 시선이 마법진의 뿌연 막에 가려져 형체만 간신히 보이는 2층으로 향한다.

  지금쯤 방에서 세상모르고 자고 있을 엘리가 눈에 그려진다.

  "역시 너 혼자..."

  "안 들어가면 넌 죽을거다."

  갑작스러운 말에 카렌이 오즈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장난기 가득한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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