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마주잡은 손은 따뜻했다
"오오오오!"
오즈로와 삼색이 동시에 감탄을 터뜨렸다.
이제 교단의 행사까지 단 하루. 마침내 카렌이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왔다.
출렁, 출렁
하늘을 통통한 귀여운 물범이 발을 휘적이며 바다마냥 헤엄친다. 코는 신기하게도 은빛을 띠고 있는데 매개체로 사용되는 실드 때문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토끼가 마찬가지로 짜리몽땅한 은빛 꼬리와 귀를 씰룩이며 뛰어다닌다.
"이걸 이렇게 단기간에 할 줄이야···"
"실드로 다 해 본 것들이라 그래."
카렌이 겸손하게 얘기했지만 오즈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녀석을 알고 있는 자신이니 이해가 되지 다른 마법사가 봤으면 당장 기절했을 거다.
"이 정도면 되겠지?"
"엘리가 완전 좋아할 거다. 마지막에는 마법으로 폭죽도 만들어낸다며?"
삼색이 허공의 동물들을 잡으려 껑충껑충 뛰면서 말했다.
"야, 그거 잡으면 다친다? 마법인 거 알면서 왜 그래?"
카렌이 더 위로 마법의 위치를 올리며 삼색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건 본능이다. 주인이 배고프면 밥 먹는 거랑 똑같다."
"···그래."
삼색이 되려 어쩔 수 없다는 듯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자 카렌은 그냥 고양이와 인간이라는 종족의 차이를 인정하기로 했다.
"어? 저기 엘리 차 소리다."
삼색이 귀를 쫑긋거렸고 카렌이 재빨리 마법들을 흩었다.
과연 고양이다운 청각답게 곧이어 리무진이 도착하고 엘리가 차에서 내렸다.
"모두 바깥에 계시네요? 그런데 저 멀리서 무슨 빛이 보였는데 혹시 여러분도 보셨어요?"
"꾸잉? 무슨 빛? 맞다! 간식으로 우리가 마카롱 사 왔다. 볼래?"
"마카롱? 너무 좋아요!"
삼색이 엘리가 좋아하는 간식으로 능숙하게 집 안으로 유인했다.
"내일 가면 되는 거지?
"
카렌이 다시 출발 준비를 하던 한길에게 말했다.
"예. 교단에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응?"
한길이 떠나고 카렌은 한길의 말을 곱씹으며 머리를 기우뚱거렸다.
"가족 모임에 왜 심혈을 기울여?"
* * *
"곧 있으면 시작이네요?"
엘리가 심호흡을 한 번 하면서 한길에게 말했다. 살짝 주먹을 쥐자 손이 축축하게 젖어든다.
"성녀님이 공식적으로 공개되는 첫 행사라지만 사진 몇 장만 나갈 겁니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온종일 붙어 있는 덕에 이제는 엘리의 얼굴만 봐도 대략적인 상태를 알 수 있게 된 한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모르는 사람들보다 아는 사람들 앞에 설 때가 더 긴장돼요."
오늘 초대한 사람들은 신전에 십수 년을 봉사해 온 작업자들이자 신도들. 이름까지는 몰라도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습관적으로 두 손을 모아 왼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를 매만졌다. 아저씨가 준 첫 선물.
`후우우···.`
따뜻한 감촉이 느껴지며 마법같이 마음이 진정되며 심호흡을 한다.
`참 신기한 팔찌야.`
아저씨가 준 물건답게 참 특이하다.
보기에는 매끄럽고 금속답게 차가울 것 같지만 마치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하다.
"그런데 저 의자들은 뭐죠?"
긴장이 풀리며 시야가 넓어진 엘리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한길에게 물었다.
자신이 앉을 자리 옆에 의자가 하나도 아니고 양옆으로 둘이나 있었다.
"아···오실 분이 있어서요. 혼자 앉으시면 아무래도 모양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네? 누가···."
[곧 행사가 시작됩니다. 참석하신 귀빈들께서는 자리에 미리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빈자리에 대해 제대로 묻기도 전에 사회자의 마이크가 켜지며 알리고 대기하고 있던 신도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길님? 누가···."
"성녀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오랜만이에요. 태양이 함께하시길."
그렇게 인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본인 자리로 떠밀리듯 가서 앉은 엘리.
뒤로는 사람들이 빽빽이 자리를 메웠지만 양옆이 휑한 게 뭔가 허전하게 느껴진다.
`절지아님이 오나? 그래도 한 자리가 비는데···.`
아저씨에겐 결국 말하지 못했다. 오즈로 할아버지가 벨리알로 곧 돌아가면 평생 만나지 못할 두 사람이다.
겨우 자신 때문에 조금의 시간이라도 뺏는 게 너무 미안했다.
[5분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큰 곳에서 할 필요는 없는 행사다.
처음 기획안과 엘리의 생각은 그냥 작은 강당에서 과자나 좀 먹는 방식의 다과회였는데···
[성전사, 사제 입장]
척, 척, 척
"우와! 엄마 저거 봐요!"
뒤에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온다. 순백의 코트를 휘날리며 성전사들이 발을 맞추어 왼쪽에, 빨간 모자를 쓴 사제들이 오른쪽에 일렬로 서 내부를 호위하듯 입장한다.
`저건 뭐야?`
엘리가 당황해 순간 고개를 빠르게 돌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자신이 못 본 사이에 가족 모임 행사가 열리는 작은 강당은 대형 경기장으로 바뀌었고 저런 의식도 없었다.
`절지아님? 대주교님들까지?`
절지아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성기사들의 선두에 섰고, 사제들 중간에는 빨간 모자를 쓴 대주교들까지 있었다.
"너무 멋있다. 그치?"
"와! 성전사님!"
가족 모임답게 아이들도 많이 참석해 뒤에서 끊임없이 조잘조잘 떠들었고 경기장 안은 단번에 시장통처럼 시끄럽게 변했다.
"저 성전사 언니 진짜 멋있다. 엄마, 나도 나중에 성전사가 될 수 있을까?"
"그럼! 솔라리님께서는 굳건한 믿음만 있으면 자격을 내려주신단다."
바로 뒤에 앉은 모녀의 이야기가 엘리를 미소 짓게 한다.
"맞아요."
엘리가 몸을 살짝 돌려 여자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여준다.
"와···"
순간 엄마와 아이의 눈이 엘리의 얼굴을 보며 멍해진다.
공식적인 행사인 만큼 엘리는 편한 옷 대신 법복을 입었다.
무릎까지 내려온 하얀 법복에 머리 위에는 초록색의 월계관. 이 모든 장치는 엘리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금발과 금안은 하얀 피부와 조화되어 경기장 위로 뚫린 햇살을 받아 귀금속처럼 빛났고, 볼에 살짝 오른 볼살과 오뚝한 코, 날렵한 턱선은 각각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그래도 딸보다 먼저 퍼뜩 정신을 차린 엄마가 딸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자 딸이 그제서야 엘리에게 인사를 건넨다.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해요. 나중에 성전사가 되면 또 볼 수 있겠네요."
"네!
"
아이는 엘리의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엘리는 오히려 엄마와 같이 있는 자기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부러웠다.
`무거워.`
다시 무대 쪽을 바라본 엘리는 갑자기 입고 있는 법복과 머리 위의 월계관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분명 연합에서 최고의 원단과 장인이 만든 옷과 장식이다. 하지만 엘리에게는 맨날 입어 이제는 색이 바랜 곰돌이 잠옷이 훨씬 편했다.
`아저씨 보고 싶다.`
살짝 침울해져 괜히 팔찌를 소매로 닦은 엘리가 발을 살짝 굴렀다 바로 멈췄다. 성녀는 신도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오늘 옷이 잘 어울리네?"
애써 미소를 지은 엘리 옆으로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엘리가 머리를 살짝 털었다.
`아저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이제는 환청이 들리는 건가?`
"엘리야?"
다시 한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엘리가 서서히 고개를 위로 들었다.
"아저씨?"
비비적
눈을 손으로 비볐다가 봐도 아저씨는 그대로 있었다.
"나도 왔지."
"···이 녀석은 무시해도 좋아. 일단 앉지."
방금까지 허전했던 엘리의 양옆이 오즈로와 카렌으로 꽉 채워진다.
"어떻게 오셨어요?"
"다 아는 방법이 있지. 이런 일 있으면 다음부터는 꼭 얘기해야 한다?"
"아···네!"
엘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다. 방금까지 불편했던 옷이 카렌의 한 마디에 매끄러운 비단처럼 느껴진다.
[축하 공연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행사가 좋지. 내가 참석한 행사들은 사람들이 너무 격식을 차린단 말이야."
오즈로가 앞에서 떠들썩한 무대에 맞춰 호응하는 관객들의 분위기를 즐기며 말했다.
"너는 진짜 왜 왔냐?"
"그래도 내 제자의 첫 무대는···아차차."
"마법이요?"
"아하하! 저 아이들의 젊음이 마법 같다는 이야기였어."
카렌이 입 싼 마법사를 째려보자 오즈로가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말을 돌린다.
`하여튼 여전히 입이 그냥! 그리고 내가 왜 네 제자야?`
`아, 미안하다고! 그리고 마법 배웠으면 제자지!`
둘은 엘리를 사이에 두고 입 모양으로 계속 투닥거렸고 엘리는 이것마저도 즐거웠다.
`왜 호위가 곁에 없었는지 알겠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평소에 철통같은 경호를 자랑하는 성전사들이 오늘은 바로 뒤에 관객이 있는데도 엘리의 곁에 없었다.
이제야 알았다.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엘리가 곁눈질로 오즈로와 카렌을 살짝 바라보았다.
`대마법사와 이단심판관.`
벨리알과 지구 행성의 최강자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 호위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왜 성전사들과 대주교들이 왔는지도 알겠다.
이단심판관과 성녀가 한 자리에 모였는데 보고 싶고, 마땅히 예를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걸 증명하듯 저기서 이 모든 걸 준비한 두 성전사가 나란히 서서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성녀님의 표정이 좋아 보이는군요."
"그래. 카렌님 옆에 있을 때 가장 편해 보이시는구나."
"그래서 말입니다. 오늘 절지아님께 드릴 말씀이···."
한길과 절지아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편해 보인다는 절지아의 말을 증명하듯 어느새 엘리의 손은 카렌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 순서인 장기자랑을 시작하겠습니다. 참가번호 1번. 전기기사인 리지님의 따님이 성악을 준비하셨다는군요.]
엘리에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행사의 마지막 차례가 다가왔다.
참가자들의 장기는 말 그대로 소소했다.
노래나, 간단한 춤 정도? 하지만 관객들과 성전사, 사제들의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 덕분에 마치 1류 공연장에 온 느낌마저 든다.
[이제 거의 마지막 순서군요. 오! 각성자님이 나와주셨군요. 시설보수 쪽에서 일하시는 김고운님의 아들이십니다.]
사회자의 안내를 받아 올라온 각성자는 염동계열 능력자였다.
"우와아아!!"
가벼운 종이컵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아령까지 들어 올리는 장기는 지금까지의 관객 반응 중 최고였다.
"흥! 그래도 마법이 최고지."
"제발 나잇값 좀 해. 충분히 잘하는구만. 하여튼···."
오즈로가 괜히 심통이 나서 투덜거리자 카렌이 재빨리 막아섰다.
엘리는 사실 무대에서 뭘 하든 좋았다. 그냥 아저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으니까.
[마지막 순서입니다.]
사회자가 진행표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감히 불러도 될까 하는 인물들이 종이에 떡하니 적혀 있다.
잠깐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사회자가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댄다.
[엘리님과 함께 참석해주신 카렌님이십니다.]
"엘리님이면···성녀님 아니야?"
경기장 내부가 순식간에 시끄러워지며 모두의 시선이 엘리가 앉은 자리 쪽을 향한다.
"어? 아저씨?"
"갔다 오마."
엘리의 머리가 홱 하고 돌아갔지만 카렌은 부드럽게 엘리의 손을 놓고는 무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맞네. 맞어."
"성녀님의 머리색은 엄마 쪽을 닮으셨나 보구만."
엘리 옆에 있는 젊은 남성이 올라가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은발, 성녀님은 금발이었지만 얼굴을 성녀님이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면 말이 된다.
둘 다 멀리서 봐도 한 눈에 알아볼 정도로 아름다웠으니.
"저···심판관님. 그런데 소개를 어떻게 할까요?"
사회자가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고 속삭였다.
지금껏 참가자를 소개할 때 가족 모임인 만큼 가족과 호칭을 같이 불렀으니 말이다.
"음···"
카렌이 무대 밑에서 입을 살짝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를 잠시 바라봤다.
`호칭이라···.`
아저씨.
하지만 더 이상 자신과 엘리는 그 호칭에 만족하지 못할 것 같다.
`처음은 신이 맺어 준 인연이었지.`
원래 여신과 카렌의 거래는 교단의 정상화까지였다.
처음에는 벨리알에서 떠나보낸 아이가 겹쳐보였다. 하지만 어느새부턴인가 엘리라는 존재 자체가 또렷하게 자신의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
-요리를 배워볼까 하는데.?
자신이 먹는 냉동식품이나 도시락이 아닌 따듯한 밥을 먹여 주고 싶었다.
귀찮음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저 맛있게 먹어주면 좋았으니까.
-가서 이 닦고 자야지. 일찍 자야 키 큰다?
아이에게 하는 잔소리가 조금 늘었다. 가끔 귀엽게 볼이 부풀어 오르긴 하지만 그래도 잘 따라준다.
`지구에 와서 새로운 걸 많이 해 보네.`
영물과의 인연, 제자와의 인연, 그리고···
"카렌님?"
사회자가 재차 묻자 카렌은 엘리를 바라보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빠라고 해라."
부녀간의 인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