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게이트 잘못 들어온 거 아니냐? 여기 지구 아냐?"
"지구 파편이군."
?
팟!
오즈로가 말하면서 두 손을 들어 올리자 손에서 나온 빛들이 수십 갈래로 뻗어져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구석구석을 훑고 돌아온 빛은 오즈로의 머리로 스며들어 지도를 뇌에 직접 심는다.
"파편? 아! 한 번 들었어. 그런데 지구에서도 파편이 생긴다고?"
예전 여신에게 직접 들었었다. 게이트는 침략자들의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이라고.
?
"궁금하지?"
게이트에 있는 위치 정보, 몬스터에 대한 파악을 마친 오즈로가 눈을 뜨더니 카렌을 보며 눈을 크게 뜬다.
"아니···그렇게 까지는···."
순간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에 카렌이 손사래를 치며 말하려 했지만 오즈로의 손에서 나온 빛이 이미 홀로그램처럼 자료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망했군.`
이래서 마법사란 족속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되면 못 말린다. 이쪽에서 물었으니 저번처럼 때릴 수도 없고.
차르르륵
허공에는 이미 오즈로가 마법으로 만들어 낸 영롱한 지구가 떠올랐고, 주변에는 작은 소행성들이 포위하듯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저 소행성들이 파편이고 저건···"
카렌이 가리키는 곳에는 지구의 몇 배는 되는 크기의 행성 하나가 금방이라도 쪼개질 듯 금이 쩌억 갈라진 채 위태롭게 떠 있다.
카렌의 원래 계획은 빨리 들어주고 끝내자라는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녀석의 자료가 흥미롭다.
이제는 자신이 신경쓰고 있는 사람들이 지구에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맞아. 침략자들의 행성은 내가 대충 넣었어. 지구 근처에 있는 파편들이 죽어가는 침략자의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거야. 지구는 신생행성이니 정말 가끔씩 파편이 나와."
"지구가 신생행성?"
모두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45억 년이?
오즈로는 모두의 반응을 즐기며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원래 파편은 행성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방어막 때문에 영향을 못 미쳐. 다만 지구의 방어막은 침략자들이 한 번 건너오려다 박살나고 그 여파로 너희가 말하는 대격변이 일어났지."
"호오···그러면 그 방어막을 다시 복구하면 되는 거 아니야?"
카렌이 눈을 반짝였다. 더 강력한 방어막을 만들면 게이트는 물론이고 침략자들도 막을 수 있어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만 다시 만들 수 있는데 지구의 신이 힘이 별로 없더라. 지구의 모습만 간신히 숨기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군. 하긴, 태어난 지 30년밖에 안 됐지."
카렌의 머릿속에 자신이 직접 만났던 아이의 모습으로 떼쓰던 여신이 떠올랐다.
"그럼 침략자가 지구로 오는 이유도?"
"만만하니까 그렇지 뭐. 벨리알은 행성도 크고 인구 많고, 다종족이니 신도 많잖아."
"호오···그러면 우리가 벨리알에서 지구로 넘어온 게이트는 어떻게 된 거야? 그리고 왜 침략자들의 행성에서 나온 파편들이 벨리알 생태계를 닮은거고?
"
카렌이 일부러 질문을 여러개 던져 오즈로의 설명욕을 자극했다. 그리고 은근슬쩍 `우리`라고 말하며 오즈로가 어떻게 지구로 왔는지 떠봤다.
"우리가 온 게이트는 성질이 달라. 그건 마법으로 살짝 비틀어서···크흠!"
걸렸다 이 놈. 자기 발로 왔구나. 마법사의 단점 중 하나다. 자기 말에 취해서 주체를 못 한다.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히 털어놔 봐. 방금 말해준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그리고 내가 넘어올 때 대륙의 자원을 모두 쏟아 간신히 넘어왔는데, 그건?"
의문점이 너무 많다.
누구에게 들은 말투에다가 아무리 대마법사라 해도 단기간에 이걸 알 순 없었다.
"···내가 또 쓸데없이 말이 너무 많았구먼! 우리 마법 익히러 여기 온 거 아니었어? 생각보다 게이트가 별로 안 넓어. 내가 딱 좋은 몬스터도 찾아 놨으니 따라와."
카렌이 재빨리 자리를 뜨는 오즈로를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래, 뭐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이내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오즈로의 뒤를 따랐다. 자신에게 잘못되는 일은 아니라니까, 100년 넘게 쌓인 우정을 믿었다.
"여기서 내가 유인을 해오지."
"그럼 난 피크닉 준비한다?"
마법으로 만든 초록색 나비가 팔랑이며 저 멀리 사라졌고 채린은 배낭을 내려놓고 자리를 펴기 시작했다.
"꾸잉, 나도 방해되지 않게 여기 있겠다."
"···너는 그냥 도시락 먹고 싶어서 그러는 거잖아."
채린이 꺼내는 도시락들을 보고 삼색이 군침을 삼킨다.
"온다."
저 멀리 오즈로의 나비를 따라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형체가 굉장히 낯이 익다.
"저거 인간 아냐?"
대검을 땅바닥에 질질 끌며 입을 헤 벌리고 걷는 모습이 멍청해 보이긴 해도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몬스터 맞아. 우리는 더미라고 불러."
채린이 도시락 뚜껑을 열려고 앞발을 가져다 댄 삼색의 발을 밀어내며 말했다.
"다른 게이트처럼 지구의 생명체를 복사한 거니까 걱정말게!"
"딱 좋네."
카렌이 오즈로의 말을 듣고 앞으로 뚜벅뚜벅 나서며 돌멩이를 휙 던졌다.
깡!
돌이 바닥에 뒹구는 빨간 우체통에 맞으면서 단번에 더미의 주의가 끌린다.
초점 없는 복제품의 눈동자가 카렌을 향한다.
"카렌! 보다시피 이성은 없어. 대신 헌터들처럼 칼에 마나를 실을 수 있으니 조심해!"
"그어어어!"
채린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더미의 입에서는 가래가 끓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오며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기 시작한다.
기기기기긱
놈이 끌고 있는 대검이 바닥과 부딪히며 듣기 싫은 소음과 스파크를 만들어낸다.
"후우···."
하지만 카렌은 주변의 소음과 놈의 적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감는다.
`처음에는 상상.`
머릿속에서 동그란 구의 화염을 그려낸다.
거기에 닿으면 폭발하는 이미지를 추가하고는 동시에 심장에서는 마나를 천천히 뽑아낸다.
오즈로의 가설이 맞는지, 마나가 밖과 달리 적어서 한결 수월하다.
심장에서 시작된 마나는 자신이 이끄는 길을 졸졸 따라와 어깨, 팔꿈치, 손목, 이윽고 손바닥 위에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화르륵
손바닥 위에서는 매끄러운 원형의 구가 열기를 뿜어내며 나타났다.
"성공했다!"
삼색의 말처럼 화염구는 전처럼 폭발하지도,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았다. 성공이다. 이 정도면 조금 연습하면 세밀한 조형도 문제없을 거다.
기기기긱
그동안 대검 끄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이제 더미와 카렌의 거리는 몇 미터도 되지 않았다.
"좋아. 이제 이 마법을···."
마법이 성공했다는 만족감에 웃고 있던 카렌이 순간 멈칫했다.
"야! 근데 이거 어떻게 던지냐?"
"어?`
순간 모두의 눈이 오즈로를 향했다.
"어···그러니까 좌표가 필요한데. 그걸 `마수학`을 이용해서 대입하면···."
"미친놈아! 그걸 지금 어떻게 해?"
벨리알에서 마법사가 기사에 비해 괜히 수가 적은 게 아니다.
마나와 감응력을 타고나 마법을 발동할 수 있는 선천적 재능.
마법을 생성하거나 이동할 곳을 계산하는 수학에 마법을 응용한 학문인 `마수학`을 할 수 있는 지능.
그 밖에도 노력, 운, 등 모든 능력이 알맞게 떨어져야 비로소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그···네가 단계를 너무 빨리 건너뛰었어!"
사실 오즈로는 카렌이 이렇게 단번에 성공할 줄은 몰랐다. 그냥 시도나 몇 번 할 줄 알았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으앗!"
부우웅
카렌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몸을 틀어 마나가 잔뜩 실린 더미의 대검을 피했다.
우지끈!
안 그래도 반쯤 박살 나 있던 옆의 전봇대가 대신 공격을 받아 완벽하게 부서졌고, 놈은 쉬지 않고 검을 계속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어?"
"저거 위험한 거 아니냐?"
계속 한 끗 차이로 공격을 피하는 삼색의 모습을 보며 삼색과 채린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저 녀석이 왜 굳이 게이트에 들어왔겠어."
하지만 오즈로는 카렌의 표정과 아직 손에 계속 남아있는 화염구를 보았다.
오랫동안 카렌과 같이 싸워 온 그는 친구의 지금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투 중에?"
"그래. 저 녀석이 몸으로 익힌다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어. 어떻게 보면 가장 큰 장점이지."
"어어어어!"
본능만 남은 주제에 자신의 공격이 적중하지 않아 화라도 났을까. 침까지 튀겨가며 한층 빨라진 더미의 공격.
`젠장. 이제와서 실드로 죽여? 하지만 그러면···.`
하지만 카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부웅
또다시 한 뼘 차이로 머리 위를 가로지르는 날카로운 칼날.
`아까운데···.`
해치울 방법이야 무궁무진하다. 날카롭게 목을 살짝 긋거나, 힘줄을 끊거나, 아니면 시가지니 반쯤 무너진 건물로 유인해서 깔아뭉갤 수도 있었다.
화르륵
섬뜩한 공격을 피하면서도 카렌의 눈은 계속 힐끔 오른손의 화염구를 봤다.
더미가 쏘아내는 살기와 피부를 찌릿하게 만드는 검의 예기는 각성제로 바뀌어 흘러들며 카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극한다.
`마법이 내 몸을 매개체로 발동은 한단 말이지.`
지금 이 화염구도 자기 손바닥 바로 위에 붙어 있지 않나. 다만 움직일 수 없을 뿐이지.
게으름과 나태로 잠들어 있던 카렌의 뇌가 깨어나면서 활발히 제 역할을 다하기 시작했다.
`매개체···매개체···그렇지!`
몸으로 익힌다. 카렌을 가장 많이 성장시키고 살려 준 능력이 마침내 답을 찾아냈다.
"실드도 마법인데 말이야."
퍼억
카렌이 탄성을 터뜨리면서 힘껏 공격하느라 자세가 살짝 무너진 놈의 가슴을 발로 걷어찬다.
더미와 거리가 살짝 벌어지고, 왼손과 오른손을 나란히 대칭되게 높이를 맞춘다.
쏘옥
그리고 왼손에는 실드로 콩알을 빚어낸다.
스르륵
콩알을 오른손의 화염구로 이동시키자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스며들며 자연스럽게 화염구의 중앙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 콩알.
퍼엉!
카렌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임과 동시에 달려들던 더미에게 화염구가 빛살처럼 쏘아지며 폭발한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기만 하면 되지. 실드를 매개체로 쓰면 되는 거였어."
더미는 옆 건물로 처박혀 버렸고 카렌은 옛날 고향의 속담을 떠올리며 손을 탁탁 털었다.
"와아! 카렌, 끝났으면 얼른 와. 피크닉 준비 다 됐어."
"멋있다. 주인!"
마법에 대해 아예 모르는 채린과 삼색은 해맑게 환호했지만 오즈로는 방금 벌어진 상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법 융합?`
비록 단순한 방식이긴 했지만, 마법을 다른 마법에 섞는 마법 융합이 맞았다. 고위 마법사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없었다.
마나란 녀석은 단순하지 않다. 저렇게 무식하게 시도하면 단번에 폭주하거나 터지기 마련인데···
"오! 이거 맛있는데? 야. 이거 먹어 봐. 진짜 맛있다. 내 요리도 다 채린에게 배운 거야."
카렌이 음식을 우물거리며 왠지 모르게 멍해있는 오즈로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그래. 원래 이런 놈이었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다 죽는다.
그런 일들을 이 녀석은 모두 해냈다.
아니, 그런 일들을 수없이 헤쳐나왔기에 지금껏 살아있을 수 있었겠지. 다만···?
"주인, 그럼 이제 연습만 하면 되겠다."
"그렇지. 장기자랑 때 쓸 모양들만 좀 가다듬으면 되겠어."
순간 오즈로의 신형이 휘청였다.
`그래···장기자랑을 위한 거였지.`
자신이 평생 연구하고 몸을 바쳐 온 마법에 대한 취급이 좀 보잘것없긴 하다.
"이거 맛있다!"
"야! 너 혼자 다 먹으면 어떡해? 이 돼지 고양이가!"
바로 옆에서 삼색과 투닥거리느라 바쁜 카렌을 보며 오즈로는 남몰래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서둘러야겠어.'
?
친구가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빨라도 문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