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9/140)

  오랜 친구와의 대화는 항상 즐겁다

  대마법사 오즈로.

  벨리알 대륙에서는 기다란 흰 수염이 특징인 인자하고 연륜 있는 현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여어~곧 보자고 했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모두 녀석의 제자들이 조작한 얘기들이다.

  물론 녀석도 바깥에서는 조심한다고 하지만, 평소의 모습과 괴리가 너무 크다.

  "이 미친 영감탱이야! 올 거면 조용히 오든가!"

  오즈로가 파괴한 포대에서 나오는 매캐한 연기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반짝거리는 스파크와 함께 주변은 엉망이었다.

  "그러면 재미없지. 마법사는 모름지기 이렇게 등장을 해줘야 하는 거 몰라?"

  "벨리알에서 나오기 전에 노망난 대마법사에 관한 책을 쓰고 왔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지. 게다가 여기는 지구라 아주 편해. 잔소리하는 제자 놈들도 없고 말이야."

  저 경박한 말투 좀 봐라. 저걸 누가 대마법사라 생각하겠나.

  "하아··· 삼색, 가서 비어드 좀 불러와. 그리고 올 거면 낮에 오지 왜 또 밤에 왔어."

  이미 달이 중천에 떠오르기 직전이다. 방금 먹은 것도 저녁이 아닌가.?

  "그것 또한 나의 계산 안에 있지! 들어봐. 어두우면 내 마법이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줄··· 잠깐, 저 아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열변을 토하던 오즈로가 카렌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엘리를 보더니 순간 굳어버렸다.

  카렌이 벨리알에서 딸처럼 여기던 아이와 너무나도 닮았다.

  ?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얘기하자. 저기 건물 보이지? 저기 방 하나 줄게.

  "

  카렌은 오즈로의 표정이 엘리에게 보이지 않게 살짝 한 발짝 이동하고는 놀라서 다가온 영준에게 자연스럽게 안내를 맡겼다.

  "···그러지."

  그래도 저 녀석이 나이를 먹으면서 눈치는 빨라져서 좋다.

  재빨리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린 오즈로가 얌전히 영준을 따라 사라졌고, 다행히 엘리는 뭔가 이상한 점을 눈치 못 챘는지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카렌을 올려다보았다.

  "우와! 저분이 아저씨가 말하던 대마법사 맞아요? 아니면 다른 대마법사 분도 계시나요?"

  대마법사를 본 엘리는 드워프인 비어드를 처음 볼 때보다 몇배는 더 눈을 반짝인다.

  "저 녀석 맞아. 벨리알에서 몇 백 년 만에 `대마법사`란 칭호를 받은 놈이니까."

  성격이 경박하긴 해도 대마법사란 단순히 가장 강하고 아니 많은 마법사에게 주는 칭호가 아니다.

  모든 마법에 통달하고 실력, 실적, 인품. 그 모두를 충족한 자에게만 주어진다.

  기이잉!

  "삼촌! 오즈로님이 왔다면서요?"

  오즈로가 사라지고 집 근처의 땅이 뒤집히면서 지하에서 삼색과 비어드가 해맑게 뛰어온다.

  목에는 헤드폰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아 지하 깊숙한 곳에서 작업 중이어서 못 들었나 보다.

  "설명 좀 해봐라. 대체 이게 다 뭐야?"

  카렌이 주위를 가리키며 비어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비어드는 오히려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한다.

  "침략자에 대한 준비입니다! 삼색님께 삼촌이 대비를 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지구에 그런 얘기가 있더군요. `TV 화면과 무기는 크면 클수록 좋다` 그리고 아직 주포는 개발 중이라 못 나왔어요."

  이게 부포라고? 만약 오즈로 같은 강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흔적도 남지 않고 세상에서 증발했을 거다.

  `아냐, 그래도 이 녀석 얼굴이 많이 밝아지긴 했는데···.`

  방금까지 작업을 하다 왔는지 옷 곳곳에는 기름이 묻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지만 표정은 확실히 생기가 되살아났다.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침울해 있던 기분을 창작욕과 제작으로 확실하게 풀고 있는 모양이다.

  "제가 삼촌에게 받은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그···."

  뭔가 말하려던 카렌의 입술이 달싹이다 이내 멈췄다. 그리고 다시 열린 목소리에는 옅은 체념이 곁들어 있었다.

  "그래. 저건 복구해 놓고. 아무한테나 막 쏘고 그러는 건 아니지?"

  "그럼요! 일정 마력 이상을 가진 자들에게만 자동 방어 시스템이 가동합니다. 다른 분들은 등록이 되었으니 걱정마세요. 오즈로님은 갑자기 나타나서 그랬던 겁니다."

  비어드는 자기 작품들이 부서졌는데도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망치를 들고 달려갔다.

  "이렇게 실전 데이터를 얻다니··· 마석량이 좀 과했어. 오히려 줄이는 게···."

  오히려 장비를 더 보강할 생각에 신나서 뭔가 중얼거리며 지하로 다시 내려간다.

  "일단 좀 자자. 맞다. 엘리야 아까 얘기하려던 게 뭐였어?"

  카렌이 백호와 현무를 돌려보내곤 엘리의 손을 잡고 들어가면서 물었다.

  "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별거 아니에요."

  카렌의 얼굴에 오랜 친구를 만난 반가움과 동시에 피곤한 기색이 살짝 묻어나온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감각에 예민한 엘리는 알 수 있었다.

  초청회는 한 달 뒤니, 시간은 충분했다. 굳이 오늘 알릴 필요는 없었다.

  "일단 들어가자."

  엘리의 직감대로 카렌은 상당히 피곤했다. 오즈로의 등장부터 앞 마당에 지하기지까지···

  "하암··· 엘리는 밥 먹었으니 가서 이 닦고 씻고···삼색은 나랑 같이 주방 쪽 정리 좀 하자."

  하품을 하며 살짝 고인 눈물을 닦은 카렌이 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알았다."

  엘리가 2층으로 올락가고 카렌도 곧이어 TV를 끄고 삼색을 도와 정리를 끝낸 뒤 2층으로 향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처음 만난 이후로 2년이 지나 처음에 사 준 소매와 바지 밑단이 현저히 짧아진 곰돌이 잠옷을 입고 엘리가 언제나처럼 꾸벅 인사를 한다.

  `새로 사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니 원···`

  불편할 텐데도 꼭 저걸 입고 다닌다. 작은 잠옷 때문에 엘리의 드러난 팔목에는 자신이 준 은빛 팔찌가 조명을 받아 반짝인다.

  "난 먼저 잘테니 놀다 자고. 내일은 쉬는 날이지?"

  "네!"

  엘리가 오랜만의 휴일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하긴 가끔 너무 애답지 않아서 모두는 엘리가 13살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

  * * *

  "하암···."

  카렌이 기지개를 켜며 여느 때와 같이 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1층으로 터벅터벅 내려왔다.

  "음?"

  그런데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 이 시간이라면 삼색이 항상 TV를 보고 있어야 하는데 너무 조용했다.

  "삼색? 엘리? 카페에 갔나?"

  게다가 내려오는 길에 보니 엘리의 방문도 활짝 열려 있었다.

  둘의 이름을 불러보지만 되돌아오지 않는 대답. 카렌은 슬리퍼에 발을 꾸겨 넣고는 카페로 향했다.

  `역시 저깄네.`

  카페 창문을 보니 삼색과 엘리가 항상 자신이 앉는 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밤사이 잠깐 잊고 있던 녀석이 한 명 보인다. 오즈로.

  "너무 귀여워요!"

  "멋있다! 마법 최고다!"

  녀석은 카페 안에서 각종 마법으로 만든 화려한 생물들로 쇼를 벌이고 있었다.

  불 도마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주변을 밝혔고 화려한 비닐과 뿔을 자랑하는 용은 공중에서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딸랑!

  벨 울리는 소리에도 모두는 오즈로의 마법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카렌이 자리에 앉자 그제야 알아채고는 인사를 해온다.

  "주인?"

  "오셨어요?"

  "왔는가?"

  짝!

  "아···."

  오즈로가 박수를 치자 마법들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삼색과 엘리가 아쉬움에 탄식을 터뜨렸다.

  엘리야 그렇다치고 저 고양이는 몇백 년을 살았는데 어떻게 아이랑 반응이 똑같은지···.

  "잘 놀아주는 건 여전하네."

  "내가 또 이런 건 잘하지."

  모든 학문이 그렇듯 재능은 빨리 발견할수록 성장 가능성이 크니 보통 어렸을 때부터 제자를 받는다.

  수십의 직계제자를 둔 이 녀석이 결혼은 안 했어도 마법으로 얘들 놀아주는 일은 최고일 거다.

  오죽하면 마법은 장난감을 만들어내면서 가장 발전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니까.

  "근데 넌 지구에 어떻게 온 거야? 그리고 왜 오자마자 연락 안 했냐?"

  물어볼 게 산더미 같다. 지구로 넘어오는 데 온갖 자원을 쏟아 부었던 자신과는 다른 방법을 찾았는지, 아니면 사고로 넘어 온 다른 '이탈자'처럼 사고로 휘말렸는지 등등

  "그건 지금 얘기할 순 없어. 천천히 말해 줄게. 거래했거든."

  "거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에 카렌이 자신의 오랜 친구를 바라보았다.

  "너에게 절대 해가 되지는 않을거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카렌은 더 묻지 않았다. 둘 사이에 오랜 세월 쌓인 신뢰는 강철보다 굳건하니 말이다.

  "지금 얘기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 곧 있으면 나는 다시 벨리알로 떠날 거야."

  "벌써?"

  "그래. 그건 그렇고, 일단 오랜만에 자네 몸 좀 보자고. 지구로 넘어온 뒤로 몸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군."

  오즈로가 눈을 반짝이자 카렌이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준, 비어드, 눈앞의 오즈로까지 한 분야에 미쳐있는 놈들의 공통점이 있다. 눈앞에 닥친 궁금증을 참지 못한다는 거다.

  샤라락

  가랑비가 젖어들듯 오즈로의 손가락에서 나온 빛이 카렌의 몸에 따뜻한 온기로 변해 부드럽게 스며든다.

  카렌의 동의하에 몸속 구석구석을 검사하던 기운은 마지막으로 몸의 중심으로 향하더니 뭔가 찾으려는 듯 뱅글뱅글 심장을 돌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래? 뭔가 이상이라도 있어?"

  벨리알에서는 이렇게 오랫동안 자기 몸을 검사한 적이 없었던 탓에 카렌이 당황한 얼굴로 오즈로에게 물었다.

  "호오···."

  짧은 감탄으로 대답을 대신한 오즈로가 조금 더 카렌의 몸을 탐색하더니 이내 기운을 다시 거둬드렸다.

  그리고는 카렌을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그윽하게 보다가 입을 열었다.

  "너 더 이상 불사 아니지?"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저기 지금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삼색을 보다시피 엘리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다.

  "내가 너는 마법을 선천적으로 못 배운다고 그랬잖아. 실드도 아득바득 억지로 배웠으니까."

  "그랬지. 그 초급마법인 실드도 처음 배울 때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이제는 수족처럼 쓰는 실드지만, 처음에 배울 때는 입과 코에서 동시에 피를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게 다 자네가 얻은 불사 능력 때문이야."

  "···그게?"

  "그래. 인간의 생명의 원천은 여기야."

  오즈로가 자신의 심장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불사라는 능력이 자네 심장에 알 수 없는 영향을 끼쳤어. 문제는 마법사가 마법을 쓰는 힘의 원천도 심장이라 마법을 못 썼던 거야. 자세하게 밝혀내려면 해부를···."

  "꿈도 꾸지 마."

  "장난이야."

  그래도 자신이 마법적으로 몰랐던 몇 안 되는 의문이 풀리자 오즈로의 얼굴이 환해진다.

  "근데 네 말대로라면. 진짜 무식하게 실드를 익히긴 했네."

  "맞아. 원래 죽어야 했는데 천운이 따른 거지. 그런데 말이야···"

  "···그 징그러운 눈빛은 뭐야."

  이제는 자신을 향한 농염하기까지 한 오즈로의 시선에 카렌이 도망칠 수 있게 반사적으로 한 발을 의자 밖으로 빼냈다.

  "나를 뛰어넘는 마력량과 감응력을 지닌 자네가 마법을 배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예전부터 미치도록 궁금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꾸준하게 녀석이 안타까워했었다.

  "마법 배워 볼 생각 없나?"

  "싫어."

  대마법사의 제안을 날카롭게 베어낸 카렌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해진 오즈로.하지만 카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이 마법사라는 종자들은···

  "나 대마법사라나까? 친구! 제발 한 번만 배워보게나. 응? 후회하지 않을 거야."

  "아! 안 해!"

  "제발···."

  카렌이 재빨리 도망가려 하자 오즈로가 휘익 카렌의 다리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한 발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백발의 노인을 보며 카렌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도망칠 기회를 놓치면 이렇게 된다.

  "안 배운다니까? 내가 이 나이 먹고 대체 귀찮게 마법을 왜 배워?"

  "제발! 몸에 있는 마나가 아깝지도 않아?"

  "충분히 잘 쓰고 있거든? 이거 안 놔?"

  삼색과 엘리는 카렌의 발에 매달린 대마법사를 추한 모습을 보며 방금까지 가득 차 있던 마법사에 대한 환상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꾸잉, 주인 주변에는 왜 저런 인간들밖에 없냐?"

  "···그래도 두 분 사이는 정말 친해보여요."

  항상 긍정적인 엘리가 그래도 애써 좋은 점을 찾아냈다.

  "크아악!"

  결국 카페 바깥까지 뒤엉켜서 나간 끝에 발을 탈탈 털며 오즈로를 떨쳐내는데 성공한 카렌.

  쩌쩌쩍?

  "어?"

  그런데 거침없이 오즈로에게서 도망치던 카렌의 발이 갑자기 다리에 생겨난 얼음 때문에 멈춰버렸다.

  "너···.?"

  "마법···?배우지 않겠나···?너무 궁금해. 저런 마나량을 가진 사람은 역대 최초야. 그렇다면···?."

  바닥에 온 몸이 굴러 잔뜩 더러워진 옷에도 카렌을 보는 오즈로의 눈동자에는 짙은 열망이 서려 있었다.

  '눈 돌아갔군.'

  안 그래도 호기심 빼면 시체라는 마법사 중에서도 최고인 놈이다.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법.

  "몇 대 때리면 돌아오겠지. 이것도 오랜만이야."

  뚜둑

  카렌이 목을 돌리며 몸을 풀고는 자신의 오랜 친구에게 주먹을 쥐며 달려들었다.

  "···?참 사이가 좋아보인다. 그치?"

  나이 200살 넘게 먹고 바깥이 초토화될 정도로 치고박고 싸우는 둘을 보며 삼색이 중얼거렸다.

  ?

  "···?"

  이번에는 엘리도 뭐라 할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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