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감각과 인연이 찾아왔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달리는 헌터 도로에는 기다란 리무진을 중간에 둔 호위 행렬이 이어진다.
리무진의 보닛 앞쪽에는 하얀 바탕에 빨간 태양이 들어간 작은 깃발이 펄럭이고 번호판의 숫자도 붉다.
[0]
면책특권을 가진 솔라리 교단 고위급에게 지급되는 자동차 번호는 낮을수록 높다. 교단에서 비공식 직위인 이단 심판관을 제외하고 교황보다 높은 단 한 사람.
"성녀님. 생일파티는 어떻게 됐습니까?"
조수석에서 한길이 뒤에서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금발의 소녀에게 물었다.
"아저씨가 맛있대요! 다 한길님과 많은 분이 도와주신 덕분이에요."
엘리가 숙였던 고개를 들자 순간 실내가 환해진다.
머리 색도 그렇지만 여전한 귀여움과 이제는 서서히 드러나고 있는 아름다움 덕분이었다.
예전과 달리 카렌의 보살핌 아래 잘 먹은 덕분에 키도 좀 크고 이제는 서서히 제 나이를 찾아가는 중이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음식은 더 배우실 생각이십니까?"
"네? 이제는 한식도 배워 볼 거예요! 아저씨의 고향 음식이라고 들었어요. 제 입맛에도 잘 맞구요."
"?···그러시군요."
끼이익!
엘리의 말에 순간 차가 살짝 비틀렸지만 운전사도 역시나 베테랑 성전사. 차는 순식간에 안정적으로 차선 중앙으로 다시 복귀했다.
-치이익
[차가 갑자기 흔들렸는데? 무슨 일이야?]
혹시나 성녀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순간 한길의 이어폰에서 다급한 무전이 들려온다.
"아니야. 성녀님이 음식을 계속 만들어 주신다고 해서 기뻐서 그랬나 봐."
[?···그래.]
성녀 경호에는 한치의 방심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모두는 운전사를 깊이 이해하고는 조금의 질책도 하지 않았다.
`음?···성녀님은 솔라리님이 내려주신 축복이시지만 요리실력은 좀?···.`
성녀라는 직책을 빼고 봐도 엘리는 어른보다 월등히 뛰어난 인품, 신앙, 업무능력까지 완벽하다. 하지만 요리는 정말 잠깐 지옥을 체험할 정도의 맛이다.
"저?··· 그러면 이번에도 점심마다 만드실 계획이십니까?"
지금까지 카렌님에게 줄 케익을 연습한다고 점심마다 디저트로 만드셨다.
그걸 누가 먹겠나? 너무 착하시게도 다 호위한다고 고생하는 성전사들을 주셨다.
"네! 물론이죠. 점심때 간식으로 잠깐 먹는 떡국이나 이런 것부터 시작하려고요."
"저?···그래도 팔도 데이셨는데 조금 천천히 시작하시는 게?···."
"아니에요! 빨리 만들어서 아저씨께 해드리고 싶어요."
열정 넘치는 엘리의 말에 차 안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침울해졌다. 하지만 엘리는 눈치채지 못 하고 다시 수학 숙제를 끝마치려 문제집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대로 리무진은 계속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덜컥
한길이 열어 준 문을 통해서 나온 엘리는 기다리고 있던 성전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집무실로 향했다.
"한길아. 엘리님의 요리 연습은 끝난 거 아니야? 저기 요리사분들이 무슨 성녀님이 배우신다고 재료 준비하던데?"
엘리를 집무실에 들여보내고 잠깐 서류를 가지러 밖으로 나온 한길에게 선배 성전사들이 팔꿈치로 툭툭 찌르며 귀에 속삭였다.
"선배님들. 이번에는 한식입니다. 그래도 선배들은 교대근무 하면 매일 안 먹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너는 항상 성녀님과 같이 있으니?··· 그래, 솔라리님의 축복이라 생각해."
"네?"
"너 신성력 요즘 많이 올랐더라. 절지아님도 감탄하시던데? 그럼 수고해라. 태양이 함께하길."
"?···태양이 함께하길."
선배들은 격려의 의미로 가볍게 한길의 어깨를 두드렸고 한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류를 갖고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신성력이 급격히 올라가긴 했는데?···.`
근데 그렇게 치면 선배들의 신성력도 조금은 올라야 하는데 선배들은 똑같다.
"어? 절지아님?"
오는 길에 저 끝에서 흰 백발의 늙은 성전사가 보였다.
한길이 반가움에 힘껏 불렀지만 절지아는 껄껄 웃으며 손을 흔들며 멀어진다.
"허허! 갑자기 출장이 잡혀버렸구먼! 저녁에 다시 오지!"
분명 방금 선배들이 귓속말하는 걸 봤다. 성녀님이 만들어 준 음식 먹기 싫어서 저러는 거다.
"절지아님까지?···."
엘리님의 앞에서는 마치 손녀 앞에 선 한 없이 웃음 많은 할아버지가 되어버리는 절지아님마저 도망가버렸다.
모든 걸 포기한 한길이 집무실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간다.
"성녀님. 여기 오늘 결재하실 서류 갖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뿌리에서 따로 올라온 보고섭니다."
"뿌리에서요?"
엘리가 곧바로 제일 먼저 한길이 건네준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음?···이건 좀 더 지켜봐야겠어요. 새로운 신흥 종교가 음지에서 세를 넓혀가고 있다네요."
"네? 신흥 종교요?"
서류를 받아 읽던 한길의 미간이 깊이 찌푸려진다.
"종교 이름은 `신세계`라?··· 게이트는 신이 오시는 전조이고 곧 다른 세계에서 올 구원의 날을 기다린다. 이 말을 사람들이 믿을까요?"
한길은 새로운 종교에 회의적이었다. 종말론은 언제나 자극적이고, 일부 사람들을 전도할 수는 있어도 다수에게는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너무 타이밍이 잘 맞았어요. 저희 교단에서 서서히 `그 일`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아?··· 그렇군요."
교단은 여신이 경고해 준 침략자에 대한 대비를 위해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예전에 여신이 인터넷에 올린 것처럼 갑자기 멸망한다 하면? 거부감을 느낄 게 뻔하니 가랑비 젖듯이 천천히 말이다.
"게다가 아저씨 휘하에 들어간 연합 의장도 갑자기 무기개발과 병력을 늘리면서 불안 여론도 있고요. 덕분에 이들의 주장에 힘이 실렸어요."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시기가 너무 절묘하군요. 자세히 보니 여신님이 말씀해 주신 얘기와 비슷합니다."
"우연인지, 아니면 뭔가 알고 하는 건지 알아야 해요."
솔라리 교단은 기본적으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하지만 만약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뿌리도 그래서 이렇게 보고서를 올렸을 테고.
"지금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오기 직전이라고 하더군요. 무엇보다 그 세상이 오면 게이트가 모두 합쳐져 대격변 때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주장이 결정적이에요."
"그건?···"
옛날이라면 씨도 먹이지 않을 소리지만 요즘 세상에는 솔깃할 수도 있다. 마석으로 만든 물품이 대중화되기 시작하고 마법과 과학이 헷갈리는 시대.
게다가 대부분 대격변 때 가까운 자들을 잃은 자들이다. 믿고 싶은 자들이 많겠지.
"이건 일단 지켜보기로 하죠. 특히 이런 종교는 지방부터 시작하니 그쪽 신전들과 잘 연계해서 정보를 수집하세요."
"예."
톡, 톡
엘리가 서류에 도장을 찍어 최종결제를 할 동안 한길은 바로 옆자리에서 엘리의 지시대로 지부에 공문을 만들어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엘리님. 교황은 언제 뽑습니까?"
이제는 일을 처리하면서 대화까지 할 정도로 익숙해졌다. 그래도 하루 처리하는 서류량이 너무 많다.
원래 이런 일들은 교황 선에서 거의 걸러지는데 말이다.
"글쎄요?···너무 전대 교황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이 커서, 당분간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죠."
한길은 원래 경호만 담당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엘리의 일을 하나씩 도와주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되어 있다.
"당분간만?···어?"
그런데 기계처럼 도장을 찍던 엘리의 손이 순간 멈춘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길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엘리가 보고 있는 서류를 살펴본다.
[신도 가족 모임]
"아?···."
청소, 시설관리, 건축, 보수관리 등 몇십 년 동안 교단에서 일하신 직원분들의 가족들을 모시는 초청행사다.
"이 행사를 기점으로 예정대로 간간이 성녀님에 대한 사진을 풀기로 했습니다."
"그랬죠."
아무래도 다가오는 침략자에 대한 대비를 공론화하려면 결국 성녀가 나서야 한다.
민재가 엘리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엘리에게 흉터로 남았으니까.
"카렌님에게 잠깐 와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요?"
"아저씨를요? 귀찮아하실 것 같은데···."
"아뇨. 절대 그러지 않으실 겁니다."
분명 엘리님이 만드신 케이크를 웃으면서 맛있게 모두 드셨다고 했지.
`그건 사랑이다.`
한 조각도 이나고 그 케익을 전부 먹을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이 확실하다.
"그래도?···."
"한번 말이라도 해보세요. 카렌님 성격에 정말 싫다면 억지로 오시진 않을 겁니다."
"그럴까요?"
한길의 말을 들은 엘리가 이번에는 승인란에 `쾅`하고 힘차게 도장을 찍었다.
* * *
"주인, 실력이 갈수록 느는데?"
"그래?"
서서히 노을이 지는 저녁.
삼색이 카렌이 요리한 구운 고등어를 한 입 먹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앞발을 치켜세웠다.
살짝 노르스름하게 식욕을 자극하는 굽기.
겉은 살짝 바삭하게 붉은빛을 띠고 안으로는 촉촉한 하얀 속살이 입에 사르르 녹는다.
보글보글
거기다 하얀 두부에 팽이버섯, 애호박이 송송 들어가 있는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삼색의 코를 씰룩인다.
"생선이랑 된장국이랑 잘 어울리더라고."
"그렇지! 옛날부터 그랬다."
요리는 카렌이 지구로 와서 생긴 첫 번째 취미가 되었다. 처음에는 엘리 음식을 차려주다 보니 점점 재미를 붙였다.
-띠리리링
조선에서 온 고양이의 인증마크를 받은 음식들이 식탁에 올라가고 때맞춰 문 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 왔어요!"
어김없이 밝은 목소리와 함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엘리가 입장했다.
"어서 와라, 손 씻고 내려와."
"네! 음식 냄새 너무 좋아요!"
엘리가 신나서 도도도 올라갔다 순식간에 내려왔다. 얼마나 급하게 갔다 왔는지 손에는 아직도 촉촉한 물기가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냄새뿐만 아니라 맛도 엘리의 입맛에 정말 잘 맞았다.
`언젠가는 나도 이렇게 만들어서 아저씨에게 해줘야지.`
엘리가 된장찌개의 감칠맛과 고등어의 짭짤함을 맛보며 다시 한번 결심을 다졌다.
"음?···"
"응? 왜 그러냐 주인?"
식탁 의자에서 캔을 따서 먹던 삼색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떠는 카렌을 보며 놀라서 물었다.
"별거 아냐. 갑자기 오한이 들어서."
"그래? 몸이 허해서 그런가? 주인도 영양제 먹을래? 요즘 그런 게 유행인지 방송에 영양제 광고 제안이 많이 들어오던데."
이런 느낌을 어디서 받았더라?··· 잠시 고민하던 카렌은 마침내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려냈다.
`누가 날 독살하려고 할 때의 느낌이랑 똑같은데.`
이런 느낌이 들 때면 어김없이 술이나 음식에 독이 들어있었다.
"유통기한을 잘 봐야겠어. 삼색, 재료 시킬 때 잘 확인해."
"응? 갑자기? 알았다."
음식은 자신이 하니 주의해서 볼 건 식자재 밖에 없었다. 식중독도 독 중의 하나가 아닌가.
삼색이 이상한 눈으로 카렌을 쳐다보다 다시 캔에 얼굴을 묻고 먹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 혹시 다음 달에 바쁘세요?"
"다음 달?"
"주인을 맨날 보면서 아직도 모르냐? 주인 백수다! 맨날 소파에만 있는데."
"?··· 안 바쁘지."
이번만큼은 저 고양이의 말에 반박할 거리가 없다. 경기도 밖을 나간 마지막이 몇 달 전에 있던 민재의 검증회니 말이다.
"저?···그러면?···."
엘리의 손가락이 꼼지락대며 연신 말을 멈춘다.
`뭔가 부탁하려는 건가?`
엘리는 특별하다.
일반 아이랑은 다르게 웬만한 건 스스로 할 수 있는 능력과 위치에 있는 엘리가 부탁할 일이라?···
`마왕이라도 나타났나?`
요즘 편하게 지내긴 했다. 삼색이 저렇게 백수라 놀릴 정도니 말이다.
게다가 저번에 생일 일의 미안함도 그렇고 뭐 마왕 한 명쯤은 기꺼이 잡아 줄 생각이다.
"혹시 제?···"
마침내 엘리가 본론을 말하려는 찰나.
기이이이잉
갑자기 들려오는 시끄러운 기계소리가 엘리의 말을 삼켜 버렸다.
[위협인자 감지. 위협 레벨 최상위. 방어시설 전 가동]
그리고 딱딱한 방송 후에 이어지는 폭음.
콰콰콰쾅!
"어?···어? 이게 왜 지금 가동되냐?"
카렌은 엘리 곁에 방어막을 두르고는 당황하고 있는 삼색을 한 손으로 잡아채 집 밖으로 나섰다.
"대체 지하에서 뭔 짓을 한 거야."
"아니?···그게?···."
두두두두두두두
콰콰콰콰콰콰쾅
"?···"
밖으로 나오자 카렌의 말문이 순간 막혀버렸다.
처음에는 무슨 전쟁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
땅에서 불쑥 솟아 나온 커다란 포구들이 하늘을 향해 불을 뿜고 있었다.
게다가 보통 기술도 아닌 대포 자체가 LED조명처럼 빛나고 있다. 마석을 응용한 무기들이다.
"대체 뭘 쏘고 있는?···."
포구가 향하는 곳을 보니 한 인간이 요리조리 하늘에서 이동하며 두터운 막으로 포탄들을 막아내며 반격하는 모습이 보인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카렌의 눈이 가늘어지며 살피다 황급히 삼색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린다.
"야! 저거 빨리 멈춰! 내 친구다."
"친구?"
놀이동산에서 곧 보자고 했던 친구가 드디어 나타났다.
좀 많이 화려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