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은 독일까 약일까?
"내가 이 아이의 스승이다. 이 쓰레기야."
뿜어져 나오는 품위와는 정반대의 거친 언동. 하지만 아무도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다.
말에 권위가 실리니 오히려 심사위원석에 앉은 남자가 마땅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카렌님? 방금 스승이라고···."
꿈에 그리던 카렌님의 제자로 인정받은 순간.?
민재의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듯 출렁거렸다.
`참 덩치에 안 어울리는 감성을 가진 녀석이야.`
민재를 보는 카렌의 눈빛은 방금 쓰레기라 부른 남자를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따스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누가 보면 여전한 무심한 얼굴이라고, 뭔 차이냐고 하겠지만 카렌을 오래 봐온 민재는 알 수 있었다.
-주인은 좀 표현을 할 필요가 있다. 관계도 좀 명확히 하고.
카렌은 마침내 삼색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여기 이렇게 직접 올라오지 않아도 된다.
아니, 그냥 강이사에게 맡겨도 충분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기분은···.
`나쁘지 않군.`
제자의 선망과 감동에 찬 모습을 본 소감이다.
물론 이 녀석이 더 클 때까지만이다.
이 이상은 좀 많이 귀찮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 이후로 많이 클 거다.
"이··· 무슨 무례한···? 여기 협회 연금술사 외 출입 금지요!"
그때 밑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렌에게 쓰레기라 불린 남자.
모두가 꼼짝 못할 때 남자의 몸은 떨리면서도 입을 힘겹게 움직이며 항의한다.
"역시 인간은 대단하다니까."
카렌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남자의 음침한 욕망과 원망은 살벌하게 내뿜는 기세를 이겨내고 있었다.
?
`저 젊은 사기꾼 새끼가 방해만 안 했어도!`
미호의 매혹술은 카렌의 얼굴을 교묘하게 바꿨지만, 여전히 젊은 목소리와 얼굴로 보여준다.
그 때문에 남자는 당연히 카렌을 멍청한 한민재를 꼬득인 사기꾼이라 생각했다.
"협회 연금술사 외 출입 금지라 했나?"
카렌이 기세를 거둬드리며 남자에게 물었다.
"그렇소. 당장 나가시오."
자신이 말하는 말에 명분이 실린 덕인지 이제는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디서 연금술사도 아닌 떨거지가······.
"협회는 오늘부로 해체다. 그럼 됐지?"
"그···무슨 말도 안 되는···."
??? ?
카렌의 폭탄 선언에 순간적으로 실내가 웅성거린다.
"강이사."
카렌의 손짓에 강이사가 품 안에서 네모난 상자를 무대에 내려놓고 위에 돌출된 버튼을 꾸욱 눌렀다.
파앗!
그러자 상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글씨와 그림들을 허공에 그려 낸다.
새로 개발 된 마석 프레젠테이션 박스. 비어드가 심심해서 만들어 본 발명품이다.
"여기 리모콘 있습니다."
"고마워."
강이사가 한 손에 딱 들어갈 조그마한 리모콘을 건네고 뒤로 물러선다.
"너희 협회가 왜 해산됐는지 이유를 알려주마."
카렌이 리모콘을 누르자 곧바로 한 인물의 화면이 떠오른다.
"협회장님?"
오늘 이 자리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여기 모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그 얼굴.
"협회에 돈이 없다 그랬지? 이놈이랑 저기 앉아 있는 놈."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카렌이 공언한 쓰레기.
"별 짓 다했군.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갑질, 성추행, 횡령, 법인카드 사적 사용, 계약 몰아주기. 또 너에게 당한 사람들의 증인은 확보했다."
"이··· 모함이다! 증거···."
"증거는 있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넘어간 화면. 친절하게 연합에서 받은 금액과 실제로 지급된 차액이 떠올랐다. 그리고 각종 유흥업소에서 불법적으로 결제한 내역들.
"저··· 저렇게 빼돌렸다고?"
엄청난 금액의 차이에 모두 입을 벌린다. 반 이상의 지원금이 중간에 새고 있었다.
"방금 협회 본사에 대한 압수수색을 마쳤다.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되긴 했나 보군. 저기 있는 서류들이 증거다."
카렌의 ㅁ라에 공무원들이 들고 있는 상자를 `쿵`하고 바닥에 내려논다.
"상자에 있는 서류들은 복사본이니 언제든지 확인해 봐도 좋다. 아! 그리고 내가 아는 녀석이 뭘 써주더라고. 강이사?"
"예."
강이사가 서류 한 장을 꺼내며 카렌에게 마이크를 넘겨받고는 그대로 읽기 시작했다.
"연금술사 협회는 각종 범죄의 온상이 된바.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보다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고 판단. 이에 해체한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쉽게 협회를 해체 할 수는 없다!"
"연합 의장은 할 수 있습니다."
강이사가 친절하게 연합 의장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를 남자에게 보여 주었다.
"가···"
"가짜 아닙니다. 공무원 문서 위조, 그것도 의장서명을 어떤 간 큰 사람이 위조합니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게다가 저 뒤에 공무원들까지··· 남자는 그저 현실을 부정하려 아무 말이나 지껄여 본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면 끝이다.
이번에는 남자가 뒤의 연금술사들을 가리키며 마지막 발악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어떤 짓을 한 지 알아? 이 뒤의 연금술사들은 게이트에서 약초를 캐면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너희는 협회를 없애면 연합의 모든 연금술사를 죽는 거다."
"호오···"
카렌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남자 뒤로 연금술사들을 바라보았다. 행색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앞자리에 앉은 소수.
나머지는 딱 봐도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여전하군.`
다수의 생계를 앞세워 자신의 죄를 희석하고 합리화 한다. 뻔하지만 언제나 효과적인 수단이다.
"어설프군. 네가 똑똑하다 생각하나?"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을 거다. 카렌이 파리를 쫓듯 손을 휘저었다.
"일단 치워."
"예."
대기하고 있던 공무원 중에 건장한 인물들이 심사위원 모두에게 달려든다.
"선생님은 현 시간부로 체포되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연금술사들에게는 하늘 같던 협회의 수뇌부가 모조리 끌려가자 남은 자들은 허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뭐야···."
"망했군. 협회 인증 갱신 없으면 게이트도 못 들어가는데."
장중의 분위기는 점점 나락으로 빠진다. 협회의 비리에는 분노했지만 이제 냉혹한 현실이 다가왔다.
"자. 이제 네 차례다. 이거 읽어."
카렌이 종이 하나를 영준에게 내밀고 단상 쪽으로 슬쩍 밀었다.
"이게 뭡니까?"
"지구에서 연금술사의 인식이 많이 안 좋더라. 네가 좀 바꿔봐."
"예?"
-퉁, 퉁!
강이사가 일부러 마이크를 손으로 톡톡 치며 모두의 이목을 다시 무대로 집중시킨다.
"빨리 읽어라 제자야. 집에 가게."
영문을 모르던 민재가 제자라는 단어에 다시 감동해 무작정 카렌이 시킨 대로 종이를 읽기 시작했다.
"협회의 부재에 대한 혼란이 야기되니 새로운 연금술사 협회를 설립한다. 어?"
그런데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다.
민재가 놀라서 카렌을 바라보자 카렌이 고개를 끄덕인다.
"계속해."
"에··· 기존의 시스템은 일단 유지하되 모든 지원 인원은 단기간 연합에서 지원한다. 추가 지원금과 세금 감면 혜택을 2년 동안 제공한다. 연합에서 공식적으로 선정한 협회장을 추대한다."
마지막 문장을 읽여러던 민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정말 이게 맞냐는 듯 카렌과 강이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맞아. 내가 준 자격이다. 충분해."
카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금술에 대한 실력, 열정, 성격까지 모두 적합하다. 아무리 제자였어도 카렌의 눈에 차지 않았다면 주지 않았을 자격.
"과거에 왜 굳이 연금술사 협회를 들이받았어? 바꾸고 싶었기 때문이잖냐."
민재가 만약 그 남자 밑에서 조용히 나왔으면 그래도 순탄하게 생활은 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굳이 공론화시켜서 결국 남자를 잠깐이나마 협회에서 퇴출시켰다.
??
잠시 숨을 고르던 민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초대 협회장. 한민재."
순간 정적이 감돈다.
민재가 눈을 질끈 감는다. 이제 항의가 빗발칠 거다. 어떻게 자신이···
"나쁘지 않은데? 지원금에 세금혜택에···좀 먹고 살 만해지는 거 아냐?"
"맞아. 어차피 협회에서 하는 건 돈 내면 인증이나 해주고, 수수료나 떼갔지 하는 게 없었잖아."
"나 쟤 알아. 저번에 연금술사 협회랑 싸웠다가 불이익받았어. 우리 사정도 잘 알걸?"
"나이가 좀 어리긴 한데···뼈살살 포션도 만들었으니 실력은 의심할 바 없고."
"쟤 이름값이면 우리도 좀 고개 들고 다닐 수 있지 않을까? 나 아직도 친척들한테 내가 연금술사라고 말 못했어."
그런데 자신이 예상한 반응이 아니다. 오히려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자 민재는 얼떨떨한 마음에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얼마나 세게 꼬집었는지 느껴지는 통증에 눈물이 찔끔 올라온다.
"자···?초대협회장님. 강이사 남겨두고 갈 테니까 잘 해보라고."
"고생하셨습니다."
강이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장내가 혼란스럽든 말든 카렌은 성큼성큼 무대를 내려간다.
자신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젊은이에게 맡겨야지.
"민재야."
"예···?예?"
강이사가 팔꿈치로 아직까지 멍해있던 민재를 일깨우며 어느새 밖으로 나가는 문 바로 앞에 있는 카렌을 향해 눈짓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허리가 바닥에 닿을 듯 내려간다. 순간 연금술사들의 시선이 민재에게 쏠렸지만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제 자신의 뒤에는 스승님이 있으니까.
카렌은 손을 그저 한 번 들어 올려주고는 그대로 문을 나섰다.
* * *
협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카렌은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우우웅
날렵한 스포츠카 외관에 마석엔진을 장착한 의장이 준 프로토타입 마석 자동차다.
속도는 당연히 슈퍼카 이상, 엔진에서 나는 소음조차 거의 없다.
"좋네."
헌터전용 도로다 보니 한적하다. 게다가 속도 제한 없음. 하지만 자동차가 주는 스릴감과 만족감보다 더한 기묘한 충족감이 카렌의 마음을 채웠다.
제자와 스승이라는 관계가 제대로 이어졌다.
"몰랐군."
정말 자신 혼자 민재를 제자로 여기고 있었다. 실타래가 이제서야 제대로 이어진 느낌이다.
[곧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대로 국도로 빠지자 드넓은 숲이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카렌의 차가 다가가자 땅이 뒤집히며 집까지 연결된 매끈한 도로가 나타난다.
우웅
다시 액셀을 부드럽게 밟아 집 앞까지 도착했다. 살짝 피곤한 얼굴로 내리자 집 앞에서 채린과 엘리가 손을 흔들며 반기고 있었다.
"카렌!"
"아저씨!"
"어떻게 지금 도착하는지 알았어?"
"강이사가 알려줬어. 엘리가 요즘 제빵을 배우는데 네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해서 말이야. 오늘 딱 좋은 날이기도 하고."
"엘리가?"
카렌은 구겨지려는 표정을 초인적으로 다시 되돌렸다.
우리 엘리가 마음은 참 착하고 기특하다. 그런데 다 잘할 것 같은 엘리가 단 하나 끔찍하게 못 하는 게 있었다. 요리. 신은 공평하게도 이건 아무리 배워도 못 하더라.
`어때?`
엘리의 손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엘리 몰래 카렌이 채린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혹시나 제빵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채린을 보는 카렌의 심장은 덜컥 내려 앉았다.
"아저씨! 이거 제가 직접 만들었는데 드셔보세요."
탁자 위에 커다란 하얀 생크림 케이크가 떡 하니 올려져 있다.
보기에는 그럴 듯하다.
조금 어설프긴 해도 눈처럼 하얀 크림이 듬뿍 빵 위에 올라갔고 크림 사이사이 쏙 박힌 탐스러운 빨간 딸기가 입맛을 자극한다.
스윽
카렌이 케이크를 칼로 살짝 잘라 덜어내고는 접시에 덜었다. 그리고는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간다.
`그래. 케이크가 맛없기도 힘들어.`
?
생크림, 설탕, 달걀, 버터가 들어갔는데 맛있을 수밖에······.
"음···."
가능했다. 아까도 느꼈지만 인간은 정말 대단한 생물이다. 순간적으로 삼색의 말과 오늘 얻은 깨달음이 다시 떠오른다.
- 인간은 말 안 하면 잘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맞는 말이 아닐까.
"어때요? 제가 재료들이랑 전부 직접 사 와서 만들었어요!"
"엘리야···"
그래, 아무도 말 못 했던 진실을 말해주자. 네가 만든 음식은 맛이 없다고.
엘리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흔들리면 안 된다. 그런데 입을 열려는 카렌의 눈에 엘리의 벌겋게 달아오른 팔이 보인다.
?
"팔은 왜 그래? 다쳤니?"
"아! 별 거 아니에요. 오븐에서 꺼내다 살짝 데였는데 약은 발랐어요."
"음···?"
카렌이 해맑게 웃는 엘리를 보며 순간 약해질 뻔 했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래도 말은 해야지.
"사실···?"
"그럼 이제 우리 생일축하노래 부를까?"
"응?"
"네! 제가 주방에서 초랑 폭죽 가져올게요."
엘리가 주방으로 신나서 뛰어가고 거실에서는 카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린에게 속삭였다.
"···?생일이라니?"
"엘리의 생일이 오늘이야. 너 요즘 바쁘다고 말하지 말래. 자기가 케익도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이야. 괜찮아, 안 그래도 나 말고 아무도 몰라."
카렌의 시선이 자신이 잘라 한 쪽이 비어있는 케익을 향했다. 그리고 접시위에 남아 있는 부스러기.
본인의 생일임에도 자신이 피곤해 보이자 먼저 케익을 준 엘리의 마음이 와닿는다.
저쪽에서 폭죽과 초를 품에 안고 오는 엘리를 보는 카렌의 마음이 미안함으로 욱씬거린다.
"케익이 정말 맛있는데?"
"그래요?"
엘리의 얼굴이 지금 케익에 꽂혀있는 초의 불처럼 환하게 빛난다.
'그래 항상 말할 필요는 없지.'
그까짓 진실이 뭐가 중요하냐. 때로는 모르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