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을 해보자
"후우···"
연합 의장이 잠시 소파에 앉아 숨을 돌렸다.
연합의 정점인 이 자리는 겉보기에는 달콤해 보이지만 정작 앉아보니 너무나 바빴다.
셔츠 가장 윗단추를 풀고 넥타이를 살짝 헤집었다. 압박감이 조금 가시고 숨이 트이는 느낌이다.
띠리링!
"응? 이 알림음은···."
직통 전화다. 자신이 직접 번호를 알려 준 사람들이 걸 때 울리는 소리.
"헉!"
수신자를 확인한 의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보지. 시간 되면 답장 보내도록.]
의장이 한 손으로는 가상 키보드를 재빨리 두드려 메시지를 보내고 창가 쪽으로 다가가 창문을 연다.
휘이이잉!
곧바로 솔솔 들어오는 바람과 함께 어느새 집무실에 나타난 은발의 남자와 백호.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카렌님."
"크흠···창문도 열고 예의가 바른 인간이구먼?"
어차피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씨가 예쁘지 않은가. 백호가 의장을 칭찬하며 자연스럽게 소파로 뛰어 올라가서 몸을 말았다.
"연합에 무슨 중대한 위협이라도??? 아직 제 능력이 부족해서 침략자에 대한 대비가 안 됐습니다."
"음? 일단 앉지."
카렌은 일단 소파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사이에 의장이 한 말을 곱씹는다.
`아···현무의 기억이 흘러 들어갔나?`
아니, 어쩌면 현무가 일부러 보여줬을 수도 있겠다.
의장이 맞은 편에 앉으며 시원한 물을 카렌에게 한 컵 내민다.
"여기는 전과 다르게 따로 탕비실이 없어서요. 그렇다고 사람을 부르기엔 카렌님이 싫어하시겠죠."
"어···그렇지. 잘했어."
의장이 맞은편에 앉아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카렌은 애써 난감한 기색을 숨겼다.
`여기서 자동차 얘기하기엔 좀···`
저쪽은 숭고하게 인류를 걱정하고 있는데 왜 자신의 자동차를 안 줬냐고 물을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는 않았다.
요즘 들어 느낀 건데 이렇게 순수한 호의에 점점 마음이 약해진다. 차라리 적의를 온몸으로 내뿜고 있는 적이면 더 편할 정도로 말이다.
"한 1년 정도면 무기 개발이 궤도에 오르고 시민들에게 침략자에 대해서 공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라리 교단에서도 여론 형성을 잘 해주고 있고요. 모두 카렌님이 의도 대롭니다."
"···잘하고 있네."
?
일단 이렇게 얘기하긴 했는데 카렌의 마음속은 복잡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아니, 물론 나쁘진 않다.
아니, 오히려 너무 좋을 정도다.
`강이사의 향기가 난다.`
의장이 뭔가를 굉장히 착각하고 있었다. 의장이 후보였던 시절 라이벌을 제거해 준 이유는 철저히 자신을 위해서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오늘 오신 이유가 혹시 엘프들 때문입니까?"
"음? 엘프?"
이건 또 뭐지?
"그때 폭풍으로 `이탈자`들이 많이 지구로 오지 않았습니까? 대부분이 엘프였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카렌님의 친구이신 비어드님이셨고요."
"그런데 그게 왜?"
카렌이 그것 때문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자 의장이 표정이 한시름 덜었다는 듯 편해진다.
"엘프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혹시나 비어드님처럼 카렌님이 데려가셨을까 봐 상세히 조사하지는 않았습니다."
"아···."
의장은 혹시나 카렌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연락도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세계를 구하시느라 바쁜데 이런 하찮은(?) 일로 귀찮게 해드릴 순 없었다.
"난 아니야."
"그럼 다행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긴 하다. 갑자기 지구로 뚝 떨어져서 정신없는데 한 명도 아니고 단체로 사라진다라···.
아무리 엘프가 정령과 마법을 쓴다지만 연합의 앞마당에서는 불가능할 텐데 말이다.
"연금술사협회에 관한 일로 왔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더라고."
"아··· 안 그래도 협회 관련 공무원들 감사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설립 때부터 이상한 점이 있다는 의심이 들어서요."
공무원 비리는 카렌과 연관된 만큼 의장이 직접 보고받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많아도 너무 많다. 만약 그대로 놔뒀으면 연합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부터 썩어갔을 거다.
`이 분이 아니었다면···.`
의장이 카렌을 바라보는 눈에 존경심이 더해진다.
"그거 좀 앞당기자. 내 제자가···"
카렌이 곧 있을 인증회에 관련해 얘기를 해주자 의장이 반색한다.
"아! 그 젊은 청년이 카렌님 제자였습니까? 그런 젊은 연금술사는 연합의 엄청난 자산입니다. 당연히 처리하겠습니다."
당장 화제가 되는 뼈살살 포션도 그렇지만 뭘 개발할지 모를 앞으로 미래가 무궁무진한 인재다. 게다가 스승이 카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머리도 좀 위험해.`
의장이 자기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쓸었다.
풍성했던 머리 곳곳이 스트레스로 조금 휑해져 있었다. 연합에 대한 투자기도 했지만 조금 개인적으로 욕심이 난다.
"아! 그리고 프로토타입 자동차도 곧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오···"
드디어 여기 온 목적이 이루어졌다. 강이사도 그렇고 의장이 눈치가 빠르다.
* * *
"후우···"
민재가 심호흡을 하고 문 앞에 섰다.
이 문을 나가면 무대로 바로 통한다. 두꺼운 문 뒤로 사람들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 손을 애써 바짓단에 닦는다.
카렌님의 말처럼 감상회에 이렇게 긴장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무려 최고의 연금술사가 검증해줬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어제까지의 일이었다.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많이 늘었더구나, 제자야.]
어제 연금술사협회에서 걸려 온 전화에서 들려 온 첫 마디였다.
가증스러운 단어 선택과 가끔 악몽으로도 나오는 그때의 기억.
자신을 스승이라고 부르라는 자는 밤에도, 주말에도, 일을 시켰고 그 일들은 연금술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당신은 제 스승이 아닙니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통화종료 버튼에 간 손가락을 애써 내리며 이를 악물며 말했다.
[어허···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는 얘기도 못 들어 봤느냐? 너는 몰랐어도 다 너 잘 되라고 시킨 일이었다. 그 덕분에 성공한 거야.]
민재는 남자의 뻔뻔한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본인 자녀의 어린이집 등원이?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었던 폭언이?
자신은 덩치가 있어서 그래도 맞진 않았지만, 옆의 형은 폭력에도 시달렸다.
[제 스승은 한 분뿐입니다.]
[허허허···두 명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그게 무슨···]
[검증회에 통과할 수 있겠느냐? 내가 검증 심사위원 중의 한 명이다. 게다가 심사위원 대부분 내 쪽의 사람들이지.]
검증회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5명 중 과반수인 3명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 인간을 제외하고도 2명만 반대해도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남자의 말이 순간적으로 작아진다. 그리고 다가오는 유혹.
[날 스승으로 공표해라. 아니면 공동 연구자에 이름을 올리면 더 좋겠구나. 곧 협회장 선거가 있으니 말이다. 내가 협회장이 되면 너를 안 밀어줄 것 같으냐?]
분명 사람의 말인데도 민재의 귀에는 뱀의 두갈래 혀가 파찰음을 내면서 팔랑이는 듯 느껴졌다.
[제 실력으로 극복하겠습니다.]
사실 이런 허울뿐인 검증회 따위를 거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 연금술사의 인증이 붙었다.
그리고 지금.
-뒤 걱정은 같이 해줄 테니 걱정 마라.
카렌님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래. 할 수 있다.
자신이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저런 쓰레기가 아니다.
끼이익
민재가 두 손을 내밀어 문을 천천히 연다. 문밖에서 맴돌던 사람들의 말소리가 순식간에 귀에 파고든다.
[한민재 연금술사 입장합니다.]
사회자의 말에 시장통 같던 소음들은 뚝 그친다.
`차라리 시끄러운 게 낫네.`
적막이 흐르고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에 간신히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속도를 높인다. 하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무대를 본다.
뚜벅. 뚜벅.
민재가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긴다. 4계단 정도 되는 높이. 제대로 뛰면 단 한 번의 도약에도 거뜬히 올라갈 높이지만 왜 이렇게 높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힘겹게 무대에 오르고 연단 앞에 선다. 심사위원 5인이 맨 앞에 앉아 있고 계단식으로 앉아 있는 협회의 연금술사들이 자리에 꽉 들어앉았다.
어제 전화했던 남자는 심사위원석에서 자신을 향해 묘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이번 검증회는 많은 이목이 쏠린 만큼 특별히 연금술사가 참여한 공개 검증회로 개최되었습니다. 다만 녹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럼 한민재 연금술사께서는 시작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미소도 그렇고, 저 남자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공개해 버리면 어제 자신의 요구대로 할 수 없을 텐데 말이다.
`생각은 나중에, 일단 집중하자.`
저자가 뭘 꾸미던 자신의 실력으로 증명하면 될 일이다. 민재는 뒤의 프레젠테이션용 스크린과 연결된 리모콘과 마이크를 꾹 움켜쥐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설명은 어렵지 않았다. 수없이 실험해 봤고 지금껏 쌓인 지식은 충분했으니. 그렇게 대략적인 설명이 끝나고 심사위원들의 질문 시간이 찾아왔다.
"저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죠?"
"알레르기 반응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쩔쩔맬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민재는 오히려 지금이 아까보다 더 편안했다.
`카렌님에 비하면야···.`
크게 느껴졌던 심사위원들이 이제는 난쟁이처럼 보인다.
저들 이전에 카렌님이 있었다. 던지는 모든 질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롭고, 자신이 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지적했던 그 분이.
"그건···."
질문들이 모두 끝났다. 관객들은 일반인이 아닌 연금술사들이었기에 대강 알아들을 수 있었고 모두가 민재를 향해 감탄한다.
심지어는 심사위원들 중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주 좋았습니다. "
대표로 말하는 자는 그 남자다. 그런데 어제와는 다르게 자신을 향해 허허 ??웃으며 칭찬하고 있었다.
"저희는 만장일치로 뼈살살 포션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어?"
이렇게 쉽게? 민재의 의문은 관객들의 박수에 묻혀 버렸다.
민재가 어리둥절하고 박수가 사그라들 때쯤 교묘하게 그사이를 파고든 남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들어왔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민재 연금술사. 지금 나이가 몇 살이죠?"
"예? 나이요? 25살입니다."
"참 젊은 나이군요. 그렇죠?"
??
관객들이 -오오 하고 놀라서 탄성을 터뜨린다. 민재의 첫인상은 누가봐도 30대니까.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이런 포션 개발을 하기 쉽지 않을텐데요. 한민재 연금술사의 레시피 중에 제가 개발하고 있는 포션과 많은 유사점이 있더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민재가 어이가 없어서 고함을 질러도 남자는 태연하게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한민재 연금술사. 제 밑에서 잠깐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있었습니까? 안 있었습니까?"
"있긴 있었는···"
"제가! 한 번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대우를 말하려는 찰나 남자가 절묘하게 중간에 말을 끊으며 심사위원 석에서 나와 관객 앞에 섰다.
"저기 있는 한민재 연금술사의 제보 때문이었죠. 물론 나중에 억울함이 풀려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요."
민재의 얼굴이 타오르는 불처럼 새빨개졌다. 저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지?
설마 어제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한민재 연금술사는 스승이 있습니까?"
남자가 빙글 몸을 돌려 관객을 등지고 한 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저는···"
민재의 말문이 턱 막혀 버린다.
카렌님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다. 요즘 자신의 연구를 봐주시긴 하지만 그걸로 카렌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공적으로 말할 순 없다.
"···없습니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민재가 고개를 떨군다.
"그렇군요."
남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몸을 돌려 관중을 바라본다.
"25살의 어린 나이에 갑자기 뼈살살 포션을 개발했군요. 넉넉한 돈도 없었고, 제대로 된 실험도 못 했고, 게다가 스승도 없이 말입니다."
실내가 연금술사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찬다. 모두 민재를 향해 쑥덕거리고 있었다.
민재를 향한 의심의 시선이 예리한 촉이 달린 화살이 되어 쏘아진다.
"저는 이 자리를 빌어 공식적으로 뼈살살 포션에 대한 표절 의혹을 제기합니다."
`순진했고 멍청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관객들의 적의가 민재의 머리를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남자는 계속 뭐라 하지만 민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우우우우
머리속에서 이제는 자신을 향한 야유마저 들려오고 있었다. 머리가 띵하고 몸이 식은땀으로 푹 젖는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하는 감옥에 갇힌 기분이다.
콰아앙!
그때 갑자기 민재가 들어왔던 무대 옆의 문이 굉음을 내며 열렸다. 얼마나 세게 젖혀졌는지 경첩이 덜렁댄다.
모두 깜짝 놀라 행동을 멈추고 문을 바라본다.
은발의 남자가 좌중을 날카롭게 훑어본다. 방금까지 신나서 떠들던 남자를 포함한 모두는 왠지 모르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치 뱀 앞의 개구리가 된 느낌.
그저 할 수 있는 건 침을 꿀꺽 삼키는 것뿐.
[여기는 관계자 외···]
사회자의 말은 은발의 남자에게서 순간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끊겨 버렸다.
-찌이잉
사회자가 얼어버리며 순간 놓친 마이크가 듣기 싫은 소음을 낸다.
"카···렌님?"
민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카렌의 등장에 놀라서 말을 더듬었다. 그런데 카렌님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아···미호 누님이구나.`
카렌의 뒤에 서 있는 아름다운 여자를 보자 민재는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미호누님의 술법이다. 알려지는 걸 싫어하시는 카렌님의 성격답게 자연스럽게 얼굴을 인식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뚜벅, 뚜벅,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적 속에서도, 모든 눈이 자신을 향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카렌은 당당하게 시선을 즐기듯 무대 위로 나아간다.
카렌의 옷차림은 그저 평범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편안한 복장.
`뭐지? 평소와는 너무 다르신데···.`
삼색님과 투닥대는 평소의 카렌이 아니었다.
카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좌중을 압도했다.
모든 이들을 오시하는 제왕의 위엄이 모두를 옭맨다.
`강이사님까지? 그리고 저 사람들은 뭐야?`
그리고 뒤이어 카렌의 뒤를 따르는 행렬.
카렌의 뒤로 미호, 민들레 뱃지를 단 강이사를 필두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박스를 들고 따른다.
모두 공무원을 상징하는 명찰을 목에 달고 있었다.
"잘했다."
민재가 그렇게 오르기 힘들었던 무대 위를 성큼성큼 올라온 카렌은 민재를 향해 그저 담담하게 치하했다. 그리고는 방금까지 민재가 서 있던 연단에 선다.
그리고는 민재를 잠깐 흘깃 쳐다보고는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남자를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아이의 스승이다. 이 쓰레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