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은 없다
"나 이런 데 처음 와 본다. 주인."
삼색이 자기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을 보며 연신 숨을 크게 내쉰다.
미호와 같이 다닐 때 말고는 통 변신하지 않아 인간 몸이 신기한가 보다.
"인간은 이렇게 입어야 춥지 않은가?"
"그렇지. 인간은 있는 미관 때문에 털도 미니까."
"신기하다."
삼색이 자신의 털 역할을 하는 머리의 숏 비니를 매만졌다.
눈썹 바로 위까지 내려온 비니와 패딩과 레이어드한 후드를 입은 삼색은 그야말로 20대 초반의 풋풋한 대학생 같다.
"근데 미호랑 채린은 왜 안 오냐? 맨날 늦는다."
삼색이 테마파크 입구 쪽으로 보며 투덜거렸다.
"아직 30분 남았어. 민재 데려다주느라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야."
발표회는 오늘 저녁. 민재는 준비를 해야 해서 먼저 데려다주고 그동안 우리는 테마파크에서 놀기로 했다.
"그래? 내가 착각했다. 근데 사람들이 왜 우리를 이렇게 보냐?"
"익숙해져라."
안 그래도 영물이라 예민한 삼색의 감각은 자신들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낸다.
왜 그런지 궁금해서 자신을 보는 젊은 인간 여자의 눈을 뚫어지게 보자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며 뒤를 돌아 도망갔다.
그 모습에 더 궁금해진 삼색이 귀를 쫑긋거리며 자신들을 보며 서로 속삭이는 대화들을 잡아낸다.
"저 사람들 뭐야? 무슨 배우야?"
"카메라가 없잖아."
"그냥 그림인데?"
"둘이 커플이야? 둘이 잘 어울리긴 하는데."
"너 그런 것 좀 그만 보랬지?"
마지막 두 사람의 대화가 궁금한 삼색이 카렌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미호에게 물어봐라."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는 조합이다. 카렌과 삼색은 서로 다른 매력을 뿜어내며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삼색이 장난기 가득한 웃는 상의 귀여운 청년이라면, 카렌은 목을 살짝 감싼 검은 목티에 갈색 롱코트를 입어 그야말로 드라마에 나오는 잘생긴 사업가의 이상이었다.
"저기 온다. 근데 저기가 더 심한데?"
삼색이 저 멀리 입구로 들어서고 있는 미호와 채린을 보며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쪽이 감탄하며 카렌의 분위기에 눌려 차마 말을 못 걸고 지나가는 정도였다면 저쪽, 특히 채린과 미호를 본 남자들의 발걸음이 멈추고 고개가 스르륵 돌아간다.
"저건 미호 때문이다. 매혹술을 안 써도 타고난 기질 때문에 어쩔 수 없다더라."
"저 능력을 가지고 나쁜 마음을 안 먹어서 다행이지."
미호가 카렌의 영지에 자주 오고 편하게 생각하는 이유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카렌 주위의 남자들은 미호에게 전혀 사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강이사는 카렌에 홀려 있었고, 영준과 친구는 자신의 일과 가정에, 민재는 연금술에만 빠져 있었다.
"우리 왔어!"
두 그룹이 합류하자 주위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온다.
"와··· 끼리끼리 논다더니."
"잘 어울리네."
선남선녀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두 커플이다. 삼색과 미호는 상쾌한 20대의 대학생 느낌이. 카렌과 채린은 성숙한 어른의 분위기가 뿜어져 나온다.
"둘이 너무 예뻐요!"
미호가 자신이 직접 사 온 옷을 입은 카렌과 채린을 보며 방긋 웃었다.
"이거 맞춘 거야?"
그러고 보니 카렌과 채린의 스타일이 똑같다. 다만 다른 점은 채린의 경우에는 갈색 목티에 검은색 코트였다.
"너무 똑같으면 식상할 것 같아서 조금 변주를 줘 봤어요."
그래도 누가 봐도 커플로 보인다. 그런데 카렌이 잠깐 채린과 자신의 옷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어느샌가 미호가 삼색의 팔짱을 끼며 멀어져 있었다.
"그럼 저희는 따로 가볼게요! 조금 있다 발표회장 앞에서 뵐게요!"
"그만 찔러라!"
삼색이 허리가 왜 움찔거리나 봤더니 미호의 긴 손톱이 삼색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허? 그래도 둘이 잘 어울리지 않아?"
?
카렌이 그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허탈하게 웃으며 채린에게 고개를 돌리다 순간 움찔했다.
채린의 시선은 서로를 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뒤돌아선 삼색과 미호에 고정되어 있었다.
"응? 어, 미안. 불렀어?"
채린이 살짝 늦게 반응하며 카렌을 마주 본다.
"부러워?"
채린은 자신이 더 이상 불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른다. 알려준다고 결심하다가도 왠지 모르게 앞에 서면 입이 열리지 않았다.
"뭐가?"
채린이 묻자 카렌이 대답 대신 손을 뻗는다.
카렌의 손이 채린의 손을 살포시 덮자 자신의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촉감에 채린의 눈이 커진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채린에게 따사로운 훈풍으로 바뀌며 얼굴에 홍조가 돈다.
"카렌?"
채린이 먼저 호감을 표시한 적은 많아도 카렌이 이런 적은 처음이다. 채린이 카렌을 올려다보자 특유의 무심한 표정이 보인다.
`어···.`
하지만 맨날 카렌의 얼굴을 주의 깊게 보던 채린의 눈은 살짝 움찔한 카렌의 볼살을 놓치지 않았다.
`카렌도 쑥스러워하는구나?`
채린은 짓궂게 카렌을 놀리지는 않았다. 그러면 카렌이 앞으로 더 안 해줄 것 같았으니까.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카렌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며 깍지를 꼈다.
"저기 가자. 나 맨날 가족들이랑만 와 봤거든."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다른 손으로 갈 곳을 가리키며 자신의 몸을 카렌 쪽으로 붙여 얼굴을 어깨에 살짝 비볐다.
기분 좋은 코트의 까칠한 감촉이 느껴진다.
테마파크 곳곳에서는 음식과 캐릭터 상품들을 파는 상점이 가득했고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들이 곳곳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이번 테마파크는 컨셉은 판타지랬어. 저거 봐. 너무 예쁘지 않아?"
채린이 가리킨 하늘 위로는 홀로그램으로 만든 아름다운 배경 사이로 요정들이 날아다닌다.
옛날에는 어설프게 흉내만 냈다면 요즘 테마파크는 정말 동화 속에 들어온 느낌을 준다.
채린은 아이처럼 좋아하며 웃으며 좋아하고 카렌의 얼굴에도 채린의 미소와 비슷한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니 시선이 불편하지 않네.`
정신없이 구경하고 다니다 보니 잊고 있었다. 오히려 아까보다 사람은 더 많아졌고 자신들을 향한 시선은 배로 늘었는데도 말이다.
"나 저거 사 올게!"
채린이 기념품 가게를 보고 신나서 달려가고 카렌은 물끄러미 채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밝네."
하늘에서 꽃가루가 살랑살랑 내려오며 홀로그램이 인공적으로 만든 구름 한 점 없는 밝은 햇살이 세상을 쨍하게 비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도 저기 채린을 이길 수가 없다. 인간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카렌의 눈을 사로잡았다.
"여기 얼마죠?"
채린이 긴 흰색 수염이 인상적인 기념품 가게의 노인에게 물었다.
"뒤에 남자친구인가?"
"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래! 원래는 2개에 12,000원인데 10,000원만 주게나!"
"고맙습니다! 많이 많이 파세요!"
채린이 노인에게 돈을 건네며 인사를 꾸벅 건넨다. 2,000원이라는 돈보다 카렌과 커플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저거··· 분명 낯이 익는데?"
그동안 카렌은 채린에게 물건을 파는 노인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채린이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리며 이쪽으로 오자 노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카렌 쪽으로 손을 흔들며 손가락을 위로 올렸다.
[곧 보자고. 찾아갈게.]
반짝이는 글자가 허공에 쓰이며 노인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저 녀석. 지구에 왔다더니 뭘 하는 거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의 예상치 못한 모습의 오래된 친구의 모습이다. 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녀석답다.
"카렌! 왜 그래?"
"아냐. 그냥 뭘 잘못 봤나 봐."
채린의 손에 든 물건이 심상치 않다. 카렌의 미간이 보이지 않게 찌푸려지며 채린에게 물었다.
"그건 뭐야?"
"나 이거 꼭 해보고 싶었어. 동생들은 이제 다 컸다고 안 해줘. 어릴 때는 되게 좋아했는데···."
채린은 정말 왜 그런지 모르는 걸까? 털이 복실복실한 토끼 귀였다. 그것도 빛이 번쩍번쩍 나오는 100m 밖에서 봐도 눈에 띄는 토끼 귀.
"그래서 내가 남자친구랑 오면 꼭 해보고 싶었지. 물론! 카렌은 남자친구가 아니지만, 같이 해주면 안 될까?"
채린이 자신의 머리 위에 어느새 머리띠를 쓰고는 카렌을 본다.
"···알았어."
시골에서 반기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귀여운 아기 강아지를 보는 듯하다.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카렌이 머리띠를 건네받았다.
"음···."
두 손으로 머리띠 양 끝을 잡았지만 올리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살짝 신음을 흘리다 마침내 카렌이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삐리링! 저는 여러분의 친구 토순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상큼한 소리가 머리 위에서 흘러나오자 카렌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귀엽지 않아? 이제 놀이기구 타러 가자!"
카렌은 자신을 잡아끄는 채린 몰래 워치를 켜서 시간을 봤다.
`민재가 발표하는 시간이 7시. 현재 시간 2시.`
시간이 좀 많이 남았다.
* * *
"어머? 아버님? 그거 너무 귀엽네요!"
발표회 입구에서 만난 미호가 카렌과 채린의 머리 위에서 환하게 빛을 밝히는 귀여운 머리띠를 보며 감탄했다.
"우리도 해야 했는데. 아쉽다."
"···."
여자들만이 통하는 뭔가가 있나? 삼색이 카렌을 보며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카렌이 알았다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표를 이 기계에 대주시기 바랍니다."
미호가 안내원이 들고 있는 기계에 워치를 갖다 대자 미리 예약해 둔 4개의 티켓이 전송되었다.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뒤에 두 분이 쓰고 계신 머리띠는? 뒷사람의 관람을 방해할 수 있기에 벗어주셔야 합니다."
"그러지."
카렌은 안내원에게 보석이라도 하나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의 머리띠를 빼고 채린의 머리띠와 함께 목걸이 아공간 저 깊숙한 곳에 넣어 버렸다.
"가지. 조금 늦었어."
갑자기 카렌의 팔이 아공간에 들어가면서 사라지자 깜짝 놀란 안내원을 뒤로하고 카렌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내부는 엄숙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공연을 보는 관객처럼 무대에 오른 사람이 시연하는 물품이나 강연에 환호성이나 박수가 후하게 쏟아졌다.
"오! 저것 봐라!"
입에서 불을 뿜고 화염병을 손으로 돌리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한 참가자는 기계를 끌고 나와 뭔가 보여주는가 싶더니 기계가 곧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폭발해버렸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그동안 신인 걸그룹의 공연이 있겠습니다!"
스텝들이 뒤에서 무대를 청소할 동안 잠시 사회자가 요령 좋게 주위를 돌린다.
"팝콘~ 콜라~ 있어요~"
그 짧은 시간 동안 등에 콜라 통을 메고 먹을거리를 파는 사람들까지 보인다.
"재미없다."
삼색의 말처럼 네 명 다 지루한 표정이 얼굴에 걸린다.
일반인들은 모두 좋아하고 있지만 신기한 사람들과 재주들을 질리도록 봐 온 넷이었다.
S등급 몬스터가 무대에서 춤을 출 정도는 돼야 흥미로울 텐데 말이다.
"이 다음이 민재가 나올 차례다."
"그래, 그것만 보고 가자."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흐름이 끊기고 가장 집중될 때 녀석의 차례가 왔다.
"23번 참가자. 연금술사 한민재!"
멀리서 봐도 덩치 덕에 확 눈에 띄는 민재. 그런데 녀석은 혼자 무대에 나오지 않았다.
또르르르
민재는 한 노인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뒤에서 밀면서 무대에 등장했다.
기다리던 익숙한 얼굴에 지루함으로 삼색의 반쯤 감겨있던 눈이 번쩍 떠진다.
"그런데 주인. 마지막에 추가된 포션은 뭐냐?"
"그건 나도 고생 좀 했지. 지구의 약에 대해서 공부 좀 해야 했거든. 지구의 약과 연금술을 합친거야."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데?"
"곧 나오니까 지켜 봐."
답답해서 가슴을 치는 삼색을 골리며 카렌이 팔짱을 끼며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제자의 첫 무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