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1/140)

  연금술사

  "보여 봐라."

  "예?"

  한민재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습관적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점심때 일어난 민재는 그때서야 카렌이 남긴 메모를 발견하곤 씻을 새도 없이 달려 나왔다.

  그리고 들은 첫 마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카렌님은 뭘 보여 달라는 걸까?

  "연금술 발표회에 나간다며? 내가 봐주마."

  "어...어?"

  카렌의 말을 들은 민재의 몸은 탄산이라도 들이부은 듯 부르르 떨렸다.

  학회를 준비하느라 몇 달 간 쌓인 피로가 순식간에 날아가고 뇌가 단숨에 깨어났다.

  "저...정말이십니까? 카렌님이 봐주신다고요?"

  가끔 약초를 재배할 때 툭툭 던져주는 조언 빼고는 정식으로 가르침을 주시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렇게 봐주신다는 의미는...

  `아냐. 괜히 부담드리면 안 되지.`

  목덜미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키고 민재는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가져오겠습니다! 금방 올 테니 어디 가시면 안 됩니다? 한 개가 아닙니다. 조금 시간이..."

  "알았으니까 천천히 가져와. 어디 안 간다."

  쉴새 없이 이어지려는 녀석의 말을 카렌이 끊으며 손을 휘저었다. 피곤해도 말 많은 건 여전하다.

  민재가 사라지고 카렌이 잠시 평상에 손을 뒤로 대고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좋네."

  숲의 맑은 공기가 폐에 턱 하고 들이닥친다.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늘 위에 고고히 떠 있는 구름을 벗 삼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랜 세월 동안 맺어 본 적 없던 관계.

  제자와 스승이라는 이름의 실타래의 첫 코를 떠봤다. ?

  "주인! 어울리지 않게 왠 청승이냐?"

  "그래. 왜 안 나타나나 했다. 근데 거기서 대체 어떻게 나오는 거야?"

  카렌의 바로 발밑이 푹 패이더니 삼색의 머리가 쏙 튀어나온다. 무슨 두더지를 보는 줄 알았다.

  "요즘 비어드의 일을 도와주고 있다."

  삼색의 몸이 구멍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철컥.

  녀석의 꼬리가 마지막으로 나오자 딱딱한 기계음과 함께 개폐구 닫히는 소리가 난다.

  "대체 여기 밑에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카렌이 어이가 없어서 허리를 숙이며 삼색이 나온 구멍을 손으로 쓸었다. 차가운 금속 특유의 촉감이 손바닥에 전해온다.

  "나중에 다 끝마치면 보여주겠다. 이상한 건 아니다. 어차피 소음도 안 나고 지반도 튼튼해지는 거다."

  "그래. 어차피 비어드가 하는 일이니 괜찮겠지."

  비어드가 아직 어리긴 해도 실력 면에서는 이미 자신의 아버지인 족장을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니 믿고 맡길 만하다.

  "그런데 뭐 재밌는 거 하던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지하에서 시설 테스트 중에 우연히 들었다. 지상에 있는 소리를 듣는 감청 테스트 중이였거든."

  장난삼아 땅굴 같은 걸 만든 줄 알았는데 무슨 감청에, 시설 얘기까지 나온다.

  `물어보지 말자.`

  어차피 사고뭉치 둘이 하는 일이니 자신의 감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작업들이다.

  카렌은 그냥 눈을 돌리고 편해지기로 했다.

  살아보니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은근히 많다.

  "카렌님!"

  마침 저기서 수레를 한가득 채우고 오는 한민재가 보인다. 카렌이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여기다 올려 놔. 70% 포션부터 보자. 몇 급이야?"

  "예. C급입니다!"

  "호오...?"

  카렌이 한민재가 내민 포션을 받아들고 면밀히 관찰했다.

  꿀꺽

  그 모습을 보는 한민재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인다. 1초가 한 시간처럼 흘러간다. 온 신경이 카렌의 표정에 쏠린다.

  카렌이 얼굴을 살짝 찡그릴 때는 절망에 빠졌고 고개를 끄덕일 때는 환희를 느꼈다.

  "재료는?"

  "웨어울프의 피, 달맞이 꽃, 쑥, 정제수, 딸기맛 향료입니다."

  거침없이 한민재의 입에서 연금술사가 목숨같이 여기는 레시피가 흘러나온다.

  `카렌님 앞에서 숨길 필요 없지.`

  비록 카렌은 자신을 제자로 여기지 않지만 자신의 마음속에서 은인이자 스승은 단 한 명밖에 없다.

  만약 카렌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직도 엘리니아 길바닥에 있을 거다.

  "너의 연금술사로서의 방향성은 어느 쪽이냐."

  마침내 포션에서 눈을 뗀 카렌이 민재에게 물었다.

  "네? 방향성이요? 무슨 말인지 잘..."

  "밑을 보고 있냐, 위를 보고 있느냐를 묻는 거다.???"

  여전히 이해를 못한 한민재가 쩔쩔대며 자신의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카렌은 탓하는 기색 없이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구에서는 과학이 발전한 후 사기꾼 취급받아 왔던 학문이 연금술이다. 게이트가 나타나고 마나가 발견됐으니 새로 조명받는 지금의 연금술은 신생학문이지."

  카렌 한민재를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에 비해 벨리알에서는 기원조차 모를 오래된 학문이다. 나조차 모른다. 어디서 시작했는지, 누가 시초인지 말이다."

  "카렌님조차요? 아...죄송합니다."

  한민재가 화들짝 놀란다. 어찌나 리액션이 큰지 민재의 팔에 맞을 뻔한 삼색이 투덜거리며 카렌의 품에 파고든다.

  "하지만 먼저 연금술을 시작한 사람들은 안다. 약초꾼이지. 그들은 약초로 돈을 버는 법을 연구했다. 어떤 약초들을 섞으면 돈이 되고 더 비싸게 파는 법을 연구했지."

  "연금술은 돈을...위해 만들어진 겁니까?"

  민재의 얼굴에 살짝 실망이 스쳐 지나간다. 뭔가 연금술은 심오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시작된 줄 알았다.

  예를 들어 현자의 돌이나 엘릭서 같은 전설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돈이 나쁜 게 아니다. 인간은 욕망에 충실할 때 가장 발전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졌다. 과학이 발전하지 못한 곳이라 시작은 약사나 다름없었지."

  카렌이 어깨가 살짝 처진 민재를 귀엽게 바라보았다. 덩치만 컸지 이제 20대 중반을 바라보는 어린 나이라는 게 확 와 닿는다.

  "다른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소수의 귀족 연금술사들이 있지. 그들은 추구하는 목표가 달랐다.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고 싶어했고 명예를 원했지."

  "아! 아까..."

  아까 카렌이 물은 질문이 드디어 이해가 된다. 방향성.

  `밑`은 소위 말하는 잘 팔리는 대중성 있는 물건.

  `위`는 학자의 길에 가깝다.

  한민재가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빠졌다. 지금까지 자신이 연금술사로서 걸어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관조한다.

  "저는..."

  결정한 듯 민재의 눈이 확 밝아지며 카렌의 눈을 마주본다.

  "밑입니다."

  명예는 자신에게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한민재가 가장 보람을 느낄 때를 생각해보니 길은 쉽게 정해졌다.

  자신이 재배하고 만든 맨드레이크 포션으로 일어난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봤을 때가 연금술사로서 가장 큰 기쁨을 느낀 순간이었다.

  "좋다. 그러면 이 포션에 대해 평가해주지."

  민재의 가슴이 두근거린다. 몇 달 동안 이걸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나. 수천 번을 넘는 시도 끝에 어제 간신히 성공한 70%포션이다.

  "이건 쓰레기다."

  "아..."

  "오...?"

  카렌의 말투는 평소와 똑같다. 아니, 오히려 살짝의 부드러움이 가미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재의 가슴속을 비수가 되어 날카롭게 헤집었다.

  삼색도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카렌의 말에 감탄성을 뱉으며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카렌의 무릎 위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이 포션은 지금껏 실패하다 어제 갑자기 성공했을 거다."

  "어..어떻게 아셨습니까?"

  한민재가 귀신을 본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카렌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자신이 배합을 바꿔서 성공한 줄 알았는데?

  "달맞이꽃은 보름달이 뜰 때 효과가 달라진다."

  "아..."

  분명 어제 연구실로 보인 달은 둥그런 보름달이었다. 하지만 카렌의 말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네가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결과물을 발표회에 내겠다는 거냐? 포션은 다른 물건들과 다르다. 사람들의 상처와 입으로 들어가지."

  카렌이 민재가 가져온 물건들 중에 새하얀 꽃잎이 특징인 달맞이꽃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마력을 역방향으로 섞고 물을 이 정도 비율로 넣으면..."

  달맞이꽃의 잎이 서서히 검게 물든다.

  "치명적인 맹독이 된다. 이건 알았어?"

  "몰랐습니다."

  "70%라는 수치는 좋지만 달맞이꽃은 비싸고 보름달인 날만 제조할 수 있지. 그게 네가 원하는 길일까?"

  질책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사실만을 말하면서 의문을 제기할 뿐. 하지만 그럼에도 민재의 고개가 점점 힘을 잃고 아래로 처진다.

  "이 달맞이꽃을 대체할 수 있는 약초가 있다. 값도 싸고 다루기 쉽지. 비슷한 효능을 가진 약초가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어?"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턱으로 목을 가릴 정도로 숙여진 민재의 머리. 스스로 자책하는 암울한 기운이 온몸으로 뿜어져 나온다.

  `나는 왜 이럴까.`

  자신은 마음속으로나마 카렌을 스승으로 생각할 자격조차 없는 인간이었다.

  ?

  무엇보다 달맞이꽃이 간단한 작업만으로 독초가 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사람을 죽였을 것 아닌가.

  "죄송합니다."

  민재가 자신이 갖고 온 짐을 주섬주섬 끌어모아 수레에 담았다. 머리가 멍해서 그런지 몇 번이고 손에서 물건들이 미끄러져 나간다.

  "그래도 구상은 괜찮았다."

  순간 뇌리에 카렌의 말이 박혀 들어온다.

  "70% 포션은 운으로 되는 게 아니다. 쑥을 섞은 건 훌룡했다."

  "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그리고 내 눈에 드는 연금술사가 있을 것 같아?"

  한민재의 가슴속에서 응어리진 감정이 터져 나온다. 세계 최고의 연금술사의 칭찬은 무엇보다 값졌다.

  "흐어어엉!"

  허리를 말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곰처럼 울음소리를 터뜨리는 민재.

  "지금까지 혼자 잘해왔다. 발표회까지 같이 해보자."

  카렌이 넓은 민재의 등짝을 부드럽게 살짝 치자 한민재의 울음소리는 더욱 구슬프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꾸잉! 감동적이다!"

  눈치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앞발로 힘차게 박수를 치면서 분위기를 깨긴 했지만 말이다.

  `일단 재료에 대한 이해부터 시작해야겠군.`

  카렌이 아직도 흐느끼고 있는 민재를 보며 빠르게 하루하루 일정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발표회까지는 2주. 인간을 개조하기 충분한 시간이다.

  ?

  "주인. 근데 그 눈빛 좀 무섭다."

  "응?"

  카렌이 삼색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민재를 처음 만난 날 생각나냐? 그때 대화 나눴던 내용."

  "대화까지는 기억 안 나는데."

  장소는 기억난다. 엘리니아. 채린의 동생의 병을 치료하러 맨드레이크를 구하러 갔었지.

  "나는 그때 맛있는 간식 먹어서 기억난다. 그때 대학원생이랑 교수 얘기했다. 그런데 지금 주인이 그 교수 같다. 쟤는 대학원생 같고."

  삼색이 민재를 발톱으로 톡톡 찌르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민재는 훌쩍거리느라 제대로 못 들은듯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나저나 너는 언제까지 울 거야? 곧 발표회 아니야?"

  "예...예!"

  민재가 눈물을 쓱쓱 닦기 무섭게 카렌의 말이 속사포처럼 쏟아진다.

  "아까 말한 달맞이꽃을 대체할 약초를 알려주지. 다시 짜 와. 그리고 각 재료의 단가로 현재 시세표에 맞춰 만들어 오고."

  뭘 가르쳐주긴 해야 하는데 귀찮은 건 싫다. 그렇다면...

  "만들어 온 걸 까면 되겠군."

  그래도 기초는 있는 놈이니 처음부터 가르칠 필요는 없어서 다행이다.

  카렌을 지켜보며 삼색은 주인의 정체성을 다시 떠올렸다.

  세계 최고의 연금술사. 그것도 벨리알과 지구를 통틀어서 두 세계 최고다.

  `주인도 연금술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데.`

  한 분야를 160년을 넘게 공부한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삼색이 연구소로 뛰어가는 민재의 뒷모습을 향해 앞발을 모으며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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