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타래가 어느새 커졌다
[오늘 3대 연합 의장 취임식이 열리고 있는 현장입니다.]
단상 위에 오른 남자의 움직임 하나라도 놓칠세라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고 역사적인 순간을 기자들이 손을 바쁘게 놀려 기록한다.
`압도적인 표 차이였어.`
후보.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다른 호칭으로 불릴 남자가 밝은 얼굴로 웃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든다.
"배지 수여하겠습니다."
연합에서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이 달 수 있는 의장을 상징하는 배지가 가슴에 달린다.
마침내 그토록 원하던 연합 의장이 된 순간. 하지만 남자의 미소 짓는 얼굴과는 다르게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그날 갑자기 찾아온 카렌이라는 은발의 남자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성서에 손을 얹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취임식 마지막 절차는 이제 연합의 국교로 지정된 솔라리 교단에서 주도한다.
"예."
솔라리 교단의 대주교가 연합 의장을 향해 미소 짓는다. 성직자의 모범과도 같은 미소지만 의장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솔라리 교단조차 그 남자의 발아래에 있다.`
그날, 거북이가 보여준 그 기억 속에 성녀로 보이는 금발의 여자아이도 있었다.
솔라리 교단에서는 자신들의 힘으로 폭풍을 막아냈다고 공표했다.
`대체 어디까지 그 사람의 손아귀에 있을까.`?
안 그래도 구호 활동과 봉사활동을 펼치면서 좋아진 솔라리 교단을 향한 민심은 그 이후로 최고 주가를 달리며 연합의 국교까지 되었다.
의장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경계, 질투, 시기, 경쟁심 따위의 저급한 감정은 샘솟지 않는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경외심.
거북이가 보여 준 기억중에는 지구를 곧 침략할 자들에 대한 정보도 들어 있었다.
자신이 한낱 연합의 지도자인 의장이 되려 발버둥칠 때 고고히 뒤에서 인류를 지키는 남자에 대한 경외심이다.
"의장님?"
복잡했던 의장의 머릿속이 맑아짐과 동시에 대주교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
"아...죄송합니다."
의장이 대주교의 안내에 따라 성서에 손을 얻는다. 번뇌가 사라진 의장의 얼굴이 밝아진다.
"솔라라 여신님의 가호가 새로운 연합 의장님과 함께하길!"
대주교의 축복을 끝으로 마침내 모든 취임식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와아아아아!"
몰려든 시민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의장은 그에 화답해 그들과 카메라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댄다.
연합 의장의 첫 발언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먼저 이 자리를 들어 저를 지지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선의의 경쟁을 펼친 상대편 후보의 지지자 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첫 발언은 의례적인 인사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본론을 말할 차례.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먼저 부패를 척결할 것을 천명합니다. 몸이 아플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먼저 깨끗하게 몸을 씻지 않습니까? 공무원들은 여러분들의 손과 발입니다! 연합을 기초부터 새롭게 씻겠습니다!"
연합 의장의 시원한 선포에 시민들이 호응하며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연합 의장이 연이어서 두 손을 번쩍 들고 계획들을 읊어댄다.
`그 분이 하는 일은 연합을, 더 나아가서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다. 그 침략자들을 막을 준비를 해야 한다.`
부패 척결은 당연하고 마석을 이용한 무기개발도 해야한다.
`무엇보다 마석 엔진을 지원해서 자동차부터 만들어야겠어.`
자신의 시야를 넓혀준 그 분의 작은 취미생활을 작게나마 도와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다.
* * *
"잘 해결 되었습니다. 료쿠 쪽은 기억 속에 있던 비리들을 터뜨려 몰락했고, 공무원들이 부당으로 이득을 취한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수정된 법으로 법정에 설 겁니다."
바깥에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보며 카렌이 강이사의 보고를 들었다.
"수정된 법?"
"예. 연합에 해를 끼친 공직자에 한해서 중복 처벌이 가능해집니다. 아마 오래오래 감옥에서 살 겁니다."
"그래. 비어드에게 말해줘야겠네. 근데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그러고 보니 광산 개발을 허가해주자마자 비어드를 요즘 본 적이 없다.
"영지에 뭔가 잔뜩 만들고 계십니다. 비어드님이 요청하신 재료들이 엄청난데 따로 말씀드릴까요?"
"아냐. 돈이야 남아도니까. 그렇게라도 좀 쓰는 게 나아."
마석 개발이 진행될수록 연합 쪽에서도 엄청난 양의 돈이 들어올 거다.
의장과의 협상 내용을 알려주자 강이사의 얼굴에 떠오른 함박웃음이 기억난다.
"저는 다시 한번 카렌님의 큰 그림에 감탄했습니다."
"응? 무슨 소리야?"
갑자기 뜬금없는 강이사의 칭송에 카렌이 뭔가하고 강이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부 따위 단 한 줌도 들어가 있지 않은 순수한 감탄과 존경이 얼굴에 보인다.
"꾸잉? 강이사. 왜 그러냐?"
삼색마저 강이사를 걱정하며 다가가서 앞발로 강이사의 옷을 잡았다.
"곧 지구로 다가오는 침략자를 대비해서 의장을 발아래 두신 거 아닙니까?"
"응?"
"처음은 솔라리 교단을 정상화하시고 그 다음은 대한 그룹을 몰락시켜 독점 시장을 깨뜨리셨습니다."
"어..."
"그리고 이제는 정계까지! 게다가 마석을 제공해 마석 공학 기술을 급속도로 발전시키는 큰 그림까지 그리시다니!"
카렌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엄청난 속도로 강이사가 말을 쏟아 내었다.
"카렌님의 신하로서 정말 자랑스럽니다!"
"강이사? 뭔가 오해가..."
아까 '영지'도 그렇고 '신하'도 그렇고, 이런 단어들이 현대인인 강이사의 입에서 나오니 이질감이 느껴진다.
자신처럼 벨리알에 있다가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평소에도 자신을 보는 눈이 심상치 않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 몰랐다.
"꾸잉! 역시 강이사. 잘하고 있다. 내가 말한 대로 주인은 다 계획이 있었다."
"역시!"
그래, 다 저 고양이 요물 때문이다. 요즘 강이사의 귓가에 이상한 말을 속삭이는 것 같더니 결국 오염시켜 버렸구나.
강이사는 연이어 감탄을 터뜨리더니 더 나아가 카렌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어차피 카렌님이 아니었다면 죽었을 목숨.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야. 만약 자신이 없었어도 강이사는 기껏해야 조선제약에서 사퇴하는 걸로 끝났을 거다. 그 후에는 어디를 가도 환영받을 인재고.
"나는..."
`그냥 우연이고 귀찮았다`라고 말하면서 강이사를 일으키려던 카렌은 강이사의 눈을 보고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저 눈.
?
벨리알에서 자신을 바라보았던 기사들의 눈빛이랑 똑같다.
`지구에서도 볼 줄 몰랐는데.`
순간 옛 향수가 밀려오며 그리운 감각에 살짝 마음이 젖어든다.
"...너무 열심히는 하지 말고."
저런 눈을 꺾을 만큼의 용기는 카렌에게도 없었다. 그저 강이사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일으켜 세웠다.
벨리알에서 왕족과 귀족들이 배우는 제왕학(帝王學)의 대표적인 문구가 떠오른다.
- 신뢰와 충성만큼의 믿음과 길을 주어라.
강이사가 인사와 함께 나가고 카렌은 한 고양이를 지긋이 바라봤다.
"왜? 왜? 주인은 기쁘지 않냐? 저런 사람 얻기 쉽지 않다."
장난치고 싶은 마음 반. 삼색 딴에는 주인인 자신을 위한답시고 한 마음 반이었을 거다.
`이 녀석은 그저 불을 붙였을 뿐이야.`
강이사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감정에 살짝 불씨를 던졌을 뿐이다.
카렌이 삼색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질끈
삼색이 평소처럼 카렌의 거친 손놀림을 예상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주인의 손은 자신의 털을 부드럽게 쓸었다.
"네 생각만큼 난 강하지 않다."
"무슨 말이냐? 주인은 최강이다! 내가...으..."
카렌은 대답하는 대신 흥분한 고양이의 턱 부근을 살살 긁었다.
골골골
그러자 삼색의 몸이 축 늘어지고 눈이 스르륵 감기며 몸에서 골골송이 울려 퍼진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카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까 강이사를 보며 느꼈던 감정. 자신을 향한 신뢰와 믿음에 대한 기쁨도 물론 있었지만 두려움이 첫 번째로 다가왔다.
`두려움이라... `
그리울 마치 생소한 감정이다.
몇십 년이 지났어도 자신이 잃어버린 사람들은 불시간에 악몽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마음속 싶은 곳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새롭게 시작할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강이사를 기점으로 마주보지 못했던.
아니, 귀찮다는 말 뒤로 숨겨 놓았던.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연(緣)의 실이 순간 심장에 얽혀 들어온다.
지구에 도착해 삼색을 만나고부터 시작된 인연의 실타래들은 점점 얽히고 굵어졌다.
그리고 요즘 자신의 마음속에 가장 크게 담긴 인물들이 보인다. 엘리와 채린.
"너 때문에 좀 복잡해졌다."
카렌은 오랜만의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두통에 신선한 느낌마저 받으며 삼색의 머리부터 꼬리 시작 부분까지 부드럽게 쓸었다.
삼색은 카렌의 기분 좋은 손길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다 뭔가 허전한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갸웃대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다 주인. 요즘 뭔가 바깥 풍경이 달라진 것 같지 않냐?"
"뭐가?"
카렌이 삼색의 말에 카페 밖을 내다보자 가장 먼저 밭이 보인다. 그런데 항상 있던 뭔가 빠진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알았다! 농부가 없잖냐. 식량은 영지의 중요한 자원이다!"
"한민재? 걔 무슨 연구한다고 그랬잖아. 저번에도 그래서 못 나왔고."
"그래도 너무 오래 연구실에만 있다. 혹시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냐?"
그러고 보니 가끔 약초들이 죽지 않을 정도로 관리만 하고 통 나오질 않는다.
"주인은 가신 관리를 좀 할 필요가 있다."
"...알았다. 알았어. 한 번 가볼게."
"잘해라! 나는 미호랑 데이트 갈 거다."
삼색의 성화에 카렌이 평소 한민재가 좋아하는 벌꿀라떼를 들고 연구소로 향했다.
"민재야?"
연구소 문은 열려 있었다. 크게 불러 봐도 대답이 없자. 문득 삼색이 방금 한 말이 떠오른다.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냐.]
"쯧..."
하여튼 도움이 안 되는 고양이다. 괜히 걱정된 카렌이 다시 한번 민재의 이름을 부르고는 문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내부에는 집주인의 취향이 담긴 화분들이 가득했다. 몇몇 바닥은 그을려 있었는데 아마 실험의 흔적 때문인 것 같다.
"여기인가?"
처음 연구소를 열 때 한 번 왔던 기억을 더듬어 카렌이 메인 실험실 문 앞에 도착했다.
노크를 하려 손을 내밀었지만, 정문처럼 역시나 열려 있는 문.
"민재야? 여기 있냐?"
카렌이 일부러 인기척을 내며 천천히 들어갔다.
"카렌님?"
그제야 대답이 들려온다. 그런데 목소리가 시원치 않다. 항상 크고 우렁찼던 목소리는 어디가고 힘이 없다.
"너 괜찮냐?"
몸도 만만치 않았다. 민재의 통통했던 볼살은 쪽 빠져 있었고 잠은 며칠을 못 잤는지 안색이 검게 변해 있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제가 드디어 완성했습니다."
"뭘?"
민재가 포션 하나를 들어 올렸다.
"70% 마나 포션입니다. 이걸로 연금술 발표회에 나갈 수 있어요. 제가 이걸 위해 얼마나아..."
오랜만에 듣는 녀석의 수다는 녀석이 비틀대더니 책상에 철퍼덕 얼굴이 처박히는 순간 멈춰버렸다.
"크으으..."
이윽고 들려오는 코골이 소리.
"대체 얼마나 밤을 샌 거야?"
카렌은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곯아떨어진 민재의 몸을 실드로 부드럽게 연구실 한편에 비치된 라꾸라꾸 침대로 옮겼다.
녀석을 눕히고 주위를 둘러보니 노력들이 보인다.
곳곳에 에너지 음료들과 실험 수치들이 가득 쌓인 종이들이 널브러져 있다.
구경하던 와중에 녀석이 실험대 책상 위에 붙여 놓은 메모지에 카렌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스승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자]
카렌이 물끄러미 이제는 코까지 골며 자는 한민재를 봤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민재도 자신이 스승이라는 단어를 부담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안다.
이 말 많은 녀석이 단 한 번도 앞에서 꺼내지 않은 호칭. 나름의 배려다.
여기 자신이 신경 쓰지 못했던 또 다른 실이 있었다.
"발표회는 다음 주고."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날이 보인다. 카렌이 민재가 보여 준 포션의 뚜껑을 열어서 이리저리 살폈다.
"이따위 걸로 나가겠다고?"
이건 자신에 대한 모독이다.
카렌은 메모지를 하나 녀석의 머리맡에 놔두고 연구소를 나갔다.
[내일 점심에 찾아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