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꼰대의 애매함
"여긴 어떻게 왔어? 너도 나처럼 휘말렸냐?"
"예. 광산에서 갑자기 이상한 문이 생겨서 열었는데 여기였습니다. 돌아갈 문은 닫혀버렸고요."
"일단 카페 가서 얘기하자고. 너희도 따라와."
둘은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카페로 향했다.
키 차이가 심하게 나긴 해도 비어드의 목소리가 워낙 큰 덕분에 말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오···."
비어드가 바 선반에 가득한 고급스러운 술들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저..카렌님. 이분은 누구시죠?"
비어드의 눈빛이 살짝 부담스러웠던 오영준이 비어드의 시야에서 살짝 벗어나며 카렌에게 물었다.
"내가 아는 친구의 조카야. 벨리알에서의 인연이지. 이름은 비어드야."
"그런데 술을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어느새 짧은 다리로 버둥거리며 바의 의자에 올라서서 술을 감상하는 비어드였다.
"드워프라는 종족이 다 그래. 우리 얘기하고 있을 테니까 아무 술이나 좀 갖다 줘."
"알겠습니다."
"너 그렇게 바라보면 부담스러우니까 이리 와."
카렌이 비어드를 끌고 맨날 자신이 앉는 지정석으로 데려갔다. 엘리와 채린도 와서 같이 앉았다.
"조카 분이라면···. 그 드워프 왕님의 동생?"
엘리가 조심스럽게 비어드에게 말하자 비어드가 놀란 눈으로 엘리를 바라보았다.
"그것까지 삼촌이 말했나?"
"그래. 네가 술 마시고 난동 부린 거랑, 첫사랑을 잊지 못해 가출···."
"으어어어! 대체 그런 건 왜 말합니까?"
"나야 널 다시 볼 일 없을 줄 알았지. 이렇게 만날 줄 알았냐."
카렌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진 비어드가 때맞춰 나온 술을 꿀꺽꿀꺽 마시고는 책상에 탁! 하고 내려놨다.
"···그거 엄청 센 술인데···."
오영준이 황당해하면서 단숨에 비어 버린 잔과 비어드를 번갈아 보았다. 저렇게 마시고도 얼굴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역시 들은 대로예요! 드워프란 종족은 벨리알에서 최고로 술을 잘 마신다고 들었어요!"
동화책의 인물이 자신의 눈앞에 있으면 어떨까. 엘리가 초롱초롱한 눈빛이 비어드의 움직임 하나, 하나를 관찰한다.
"크으! 여기 술도 나쁘지 않구먼. 그리고 꼬마 아가씨! 뭘 좀 알아! 내가 그 드워프 중에서도 제일 잘 마신다네!"
"그런 놈이 저번에···."
"으아악! 삼촌!"
반쯤 경기를 일으키는 비어드를 보고 피식 웃은 카렌이 영준을 향해 손을 흔들며 주문했다.
"여기 술 하나···. 아니 몇 병 좀 더 갖다줘."
"근데 삼촌, 이렇게 먹어도 되나? 내가 여기 돈은 아직 없어서···."
"내 가게야. 마음껏 먹어."
"오··· 역시 삼촌이야. 이 나라의 왕인 거요?"
비어드가 다시 목울대를 크게 꿀렁이며 술을 꼴깍꼴깍 마신다.
"왕···. 그건 다신 안 할 거다."
순간 카렌의 얼굴에 씁쓸함이 잠깐 떠올랐다. 카렌의 슬픈 과거를 알고 있던 엘리가 재빨리 다른 얘기로 넘기려는 순간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
"주인은 왕이 아니라 영주다!"
역시나 나서기 좋아하는 고양이었다. 삼색은 어디선가 구해왔는지 회사 사원증처럼 생긴 목걸이를 영준과 친구에게 걸어주었다.
"여기는 상점 NPC. 근데 B급 각성자라 싸우기도 한다!"
이름표에는 직책과 이름, 그리고 얼굴까지 들어가 있었다. 정말 장난 하나는 지극정성으로 치는 녀석답다.
"채린은 기사. 엘리는 치료사 겸 성직자. 그리고 주인은···."
책상 위로 훌쩍 뛰어와서 각자 목에 걸어주더니 마지막으로 카렌을 보며 씨익 웃는다.
그리고 녀석의 손에 들려진 휘황찬란한 목걸이. 금빛의 줄에 이름까지 금박으로 쓰여져 있었다.
?
호칭은 당연히 '영주'
"···그거 어디서 만들었냐?"
"미호 회사에 놀러 가 보니 모두 이런 걸 차고 있더라. 우리도 질 수 없지. 주인, 안 그래?"
"그런 건 제발 좀 져라. 응?"
그래도 만들어 온 성의가 있어서 카렌이 못 이기는 척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창가 쪽 자리라 목걸이의 금이 창문을 통해 들어 온 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난다.
"그리고 여기 이거!"
"어? 비어드 것도 있어? 어떻게?"
청룡의 능력 중에 예지능력이 있었나? 그런 건 못 들었는데.
모두가 깜짝 놀라 삼색을 바라보았다.
"여기 봐라."
"여기 말인가?"
삼색이 자신의 털을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미니 즉석카메라를 꺼내 비어드의 얼굴을 정면으로 찍었다.
지이잉
바로 카메라 밖으로 출력된 사진 용지.
찹, 찹
삼색이 아직 채 인화도 안 된 용지 뒷면을 혀로 핥고는 준비해 온 이름표 사진란에 대충 붙여 비어드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뭐라고 쓴 거야?"
[대장장이 겸 건축가]
"이제 영지는 완벽하다! 내가 혹시 몰라서 준비해 뒀지!"
카렌은 숲속에서 삼색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보고 무슨 인재 수집하냐며 영지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지.
"너는 왜 이런 것만 이렇게 제대로 하냐? 그리고 얘는 곧 돌아갈···. 잠깐. 너 벨리알로 못 돌아가지?"
카렌이 문득 깨달은 사실에 안쓰럽게 비어드를 바라보았다. 이 녀석이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지금 알아차렸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새로운 광물과 새로운 술! 그리고 인간들도 잘해 주던데요?"
원래 드워프가 그런 종족이긴 하지만 이 녀석은 그중에서도 워낙 낙천적인 녀석답다.
?
"그리고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응?"
카렌은 오늘 이 녀석 때문에 여러 번 놀란다. 자신도 벨리알에 갈 때는 사고로 갔지만 돌아올 때는 그야말로 온 대륙의 힘을 모아서 왔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여기 왔을 때 오즈로님을 잠깐 만났습니다. 조용히 지구를 여행하고 싶다고 바로 떠나시긴 했지만요."
"그 녀석이?"
벨리알에서 자신의 제일 친한 친구이자 제국의 하나밖에 없는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가진 녀석. 자신을 지구로 돌려보내는 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우연인가?"
백호와 현무가 일으킨 이상 현상 때문에 비어드 같은 방출자들이 많이 넘어오긴 했지만, 그 녀석이라면 넘어오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녀석도 아니고 나이도 자신과 비슷하지 않은가.
"근데 넌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찾았냐?"
"맞다. 여기가 삼촌의 영지랬죠? 대박 난 겁니다."
이제는 비어드의 입에서도 영지라는 말이 나온다. 카렌이 살짝 삼색을 노려보았지만, 삼색은 얄밉게도 눈치 빠르게 엘리의 품에 안겨 있었다.
"여기 밑에 엄청난 마나석 광산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여기서··· 뭐라던가? 그 몬스터 나오는 이상한 거 있지 않습니까."
"게이트?"
"그렇지! 게이트! 마나석들이 있으니 그것도 안 열립니다."
어쩐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모두 이해된다.
삼색이 마나가 풍부하다며 상처를 치료한다고 지하에 잠들어 있던 것도 그놈의 마나석 광산 때문이었다.
"귀찮다.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마."
비어드는 이제서야 아까 자신을 걱정하던 엘리와 채린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그래도 드워프 종족의 본능상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삼촌도 아시다시피 저희는 광맥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 그런거였구나."
?
엘리와 채린이 그제서야 왜 비어드가 땅에 귀를 대는지 알 수 있었다.
"매장량과 순도가 미쳤어요. 지금 지구인들 보면 몬스터 죽이고 찔끔 나오는 마석으로 쩔쩔 매잖아요? 그거랑은 비교도 안 됩니다."
"그렇게 규모가 크면 더 귀찮아지겠네."
"삼촌. 진짜 세계가 바뀐다니까요? "
"하암...세계는 많이 바꿨어. 질린다."
하품을 하면서 하는 카렌의 말에 비어드가 순간 할말을 잃었다. 벨리알에서 드워프 왕국도 카렌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망했을테니까.
`귀찮음증이 더 심해지셨네.`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야 다른 재밌는 것도 많으니까요! 지구에는 합금이나 새로운 금속이 많으니 충분합니다."
"그래."
카렌도 이 녀석이라면 믿을 수 있다. 드워프가 똥고집이 좀 있긴 하지만 한 번 마음 먹은 건 웬만해선 다 지킨다.
띠링!
"여기 있었구먼."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종이 울리며 백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바로 카페 내부에 나타날 수도 있지만, 갑자기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일부러 저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슨 일이야?"
카렌이 묻자 백호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꼬리를 양옆으로 탁탁 흔들며 말했다.
"지금 숲 안에 인간들이 들어와 있는데 어떡하면 좋겠나?"
"아! 그거 저를 쫓아온 겁니다."
"응?"
"무슨 공무원이라는 자들이 잘 해주긴 하는데 좀 귀찮더라고요. 그래서 따돌리고 왔습니다."
해맑게 웃는 비어드의 표정을 보며 카렌이 무심코 삼색을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냐?"
"사고뭉치가 둘···."
비어드가 카렌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눈치 빠르게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 술친구들이니 죽이진 말아주십쇼."
자신이야 괜찮겠지만 공무원들은 삼촌이 입만 열면 간다. 드워프의 명예가 있지, 자신 때문에 죽일 순 없다.
"근데 비어드야."
"네?"
카페 밖으로 나가려는 비어드를 불렀다. 목소리에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약간의 건조함이 섞여 있다.
"그 공무원들이 너에게 잘해준다고 했지. 왜 잘해주는 거 같냐?"
"하하! 걱정마십쇼 삼촌. 저도 말은 가려하고 있습니다. 몇 달 지켜보니까 괜찮은 인간들 같던데요?"
"그래. 너도 이제 100살은 넘었으니 성인이지."
드워프의 수명은 보통 500살. 아기때부터 본 녀석이 벌써 인간으로 치면 20살 쯤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데?'?
비어드의 해맑은 웃음을 본 카렌이 뭔가 더 말하려다 다시 삼켰다. 어차피 저 나이때는 안 들린다. 대신 의지할 곳이 있음을 알려준다.
"언제든 놀러 오고. 대신 꼬리는 달고 오지 마라."
"예! 삼촌도 건강하게 지내십쇼!"
"백호야. 쟤 좀 데려다줘. 그 인간들도 숲을 헤매다 우연히 만난 걸로 잘 처리해주고."
"알겠네."
비어드가 바람과 함께 떠나고 영준이 바퀴 달린 트레이를 가져와 빈 술병을 담으며 말했다. 그 짧은 사이에 많이도 마셨다.
"정말 술이 세시군요."
"원래 저런 녀석들이야. 야! 뭐해?"
"마···맛만 보자!"
비어드가 책상 위에 살짝 흘린 술을 향해 혀를 내밀고 있는 삼색의 머리를 카렌이 손으로 막았다.
"넌 아직 안 돼!"
"으···너무 맛있어 보인다."
원래 드워프란 종족이 술을 좀 맛있게 먹긴 한다. 카렌의 압박을 뚫고 나가려는 삼색의 시도는 막히고 머리 털은 추하게 엉클어졌다.
'이 녀석 술 먹으면 무슨 짓을 할 지 몰라. 진짜 감당 안 된다.'
단순히 물건을 쓰러뜨리는 옛날과 다르게 이제는 번개까지 뿜어내는 고양이가 되어 버렸다.
?
"아하하!"
"으음···."
그 모습을 보며 채린은 웃고 엘리는 혹시나 삼색이 민망해할까 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 * *
"제가 혼자 다니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오늘 낮에 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신 겁니까?"
투덜거리는 공무원의 어깨에 손을 휘감은 비어드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비--밀이야! 하하! 오늘 기분 좋은 일도 있으니 나가서 마시자고!"
"저는 일처리가 밀려서 못 나갑니다. 보고서 작성해야 하거든요."
"그래? 그럼 다음에 마시자고! 마실 사람?"
"오늘도 가십니까? 그럼 저도 갑니다!"
비어드가 외치자 다른 공무원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든다.
호탕한 성격의 비어드와 함께하는 자리는 언제나 즐거운 데다 고급술을 공짜로 즐길 수 있다. 비어드의 협력을 얻기 위해 연합에서 제공한 혜택 중 하나다.
"수고하라고!"
"그래. 내일 봐."
퇴근 시간, 건물이 차례차례 소등되고 비어드 담당 공무원의 자리에만 빛이 남아 있었다.
"에휴···일하자 일."
공무원이 컴퓨터와 연결된 무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지지직···
"응? 이거 왜 이래?"
한 녹음파일을 재생하자 잡음이 들려 온다. 이 파일 안에는 비어드의 몸에 붙어 있는 도청기가 수음한 내용이 들어 있다.
"아씨··· 안 그래도 오늘 비어드님 놓쳤다고 위에서 깨졌는데 너까지 왜 그러냐."
공무원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최대한 집중해서 뭐라도 건져보려고 재생속도를 늦추고 다시 재생했다.
"제발···.뭐라도 걸려라."
보고서가 백지인 것과 그래도 성의라도 보이는 건 달랐으니까. 그래도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었는지 몇 가지 핵심적인 단어를 잡아낼 수 있었다.
[--마나석 광산--대박---지하---매장량--]
`대체 무슨 소리야? 잠깐만···.`
비어드가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 건 분명했다. 잠시 의자를 뒤로 젖히고 머리를 굴리던 공무원의 뇌에 순간 벼락이 친듯 번뜩였다.
"잠깐···.이 말을 하는 게···."
드워프다. 땅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종족.
'오늘 간 곳에 마나석 광산이 있구나.
"
흩어졌던 조각들이 마침내 그림을 완성한다.
공무원의 몸이 흥분으로 벌벌 떨리며 위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런데 순간 또 다른 생각이 공무원을 잠식한다.
'근데···.이거 보고해봤자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지?'
어차피 승진은 제한이 걸려서 1급수 더 올라가고 잘했다고 칭찬이나 좀 받겠지.
공무원이 살짝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어둠만이 가득하다.
?
딸깍, 딸깍
다시 자리에 앉아 공무원이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하자 애써 썼던 보고서의 창이 닫히고 다른 제목의 새 창이 열린다.
[기계적 결함으로 인한 도청기의···.]
보고서의 작성을 끝낸 공무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전화를 바삐 걸었다.
"지점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다름 아니라 좋은 정보가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