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구만 반가워요~
4월. 봄의 시작을 알리는 달.
아직 서늘한 날씨에도 엘리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렇지!"
엘리의 주먹이 나름 매섭게 앞에 있는 상대를 향해 날아간다.
하지만 어떤 보호장구도 없이 맨손으로 받아내 주는 상대는 채린. 너무나도 쉽게 막아내면서 살짝 엘리의 복부에 무릎을 갖다 대었다.
"어?"
한창 주먹을 날리는 데만 열중하던 엘리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로 살짝 물러났다.
"내가 복싱을 베이스로 가르치지만, 실전에서는 그런 거 없다? 너무 상체에만 집중하지 마."
"네, 언니. 후우... 오늘도 아무것도 못 했네요."
엘리가 시무룩하게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몇 달을 실전같이 대련했지만 발전하는 느낌이 들지 않아 김이 좀 빠졌다.
"얘가...너 많이 좋아졌어. 그 재능 가지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그리고 나를 상대로 이 정도면 잘한 거지!"
"그런가요?"
채린이 반쯤 칭찬에 가깝게 타박하자 엘리의 표정이 조금 펴졌다.
"카렌만 보다 보니 네 기준이 너무 높은 거야. 그리고 넌 신성력도 있잖아."
"방금 쓴 건데..."
"음...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엘리의 말에 머쓱해진 채린이 어차피 시간도 됐겠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 엘리도 나란히 앉아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없이 주위를 잠시 둘러봤다.
제일 먼저 저 멀리 있는 숲과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초록과 파랑이 조화를 이루며 눈을 즐겁게 해주고 가깝게는 오영준이 농사짓는 밭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좋다..."
채린이 이제는 어깨까지 자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상쾌한 바람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언니, 옛날이랑 비교하면 요즘은 좀 어때요?"
엘리가 격렬한 움직임 때문에 잔머리가 삐죽 튀어나온 머리를 풀고 다시 묶으면서 채린에게 물었다.
"너무 좋지. 동생도 거의 다 회복됐고, 위험하게 현장 안 나가고, 그런데 그건 왜?"
채린이 말하다가 갑자기 의문이 들어 엘리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엘리의 표정이 보인다.
"언니 표정이 좋아 보이진 않아서요. 혹시 말씀하시기 싫으시면 괜찮아요!"
`역시 사람의 기분을 잘 읽네. 나름 숨긴다고 숨겼는데.`
채린은 귀엽게 엘리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삼색이랑 미호를 보니 좀 심란해지네."
채린의 처연해진 표정에 엘리가 잠깐 둘의 연관성을 생각했다. 이윽고 결론을 도출해 낸 엘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저씨...일이죠?"
카렌의 주변 사람들 모두가 채린이 카렌을 짝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냥 내가 성격이 급해서 그래. 카렌이 늙지 않는지 확인될 때까지 분명 기다린다고 했는데 말이야."
`어? 아저씨가 말을 안 했나?`
순간 엘리가 크게 당황했지만,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어루만져 평소의 표정으로 되돌렸다. 다행히 채린은 여전히 앞을 보느라 눈치를 못 챈 듯하다.
`여신님이 분명 아저씨가 지구로 돌아왔으니 불사가 아니라고 했는데?`
여신과 대화가 끊기기 전 마지막 잠깐 대화를 나눌 때 들었었다.
"..."
엘리가 뭐라 할 말이 없어 순간 말이 끊기자 괜히 어색해져 그런다고 오해한 채린이 엘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말 쓸데없는 소리라 대답도 못 하겠지? 괜찮아. 그냥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친구처럼 같이 있는 것도 재밌고."
채린이 고개를 돌려 카렌이 지금쯤 TV를 보고 있을 이층집을 바라보았다. 지낸 지 1년이 넘었어도 카렌의 얼굴만 생각해도 심장 박동이 조금 빨라진다.
`저번에도 너무 멋있었어.`
동생의 병이 자신이 준 천식약임을 알게 된 순간 위로해 준 카렌의 온기는 정말 따뜻했다. 채린의 볼이 살짝 붉어진다.
"언니."
"응?"
"...아니에요."
입술을 옴짝달싹하던 엘리가 끝내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건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나이는 아직 어려도 엘리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연애는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한다.
만약 아저씨가 얘기를 안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분명 있겠지.
"자! 그럼 카페 가서 뭐 좀 먹을까? 운동하니 출출하지 않아? 디저트 엄청 맛있더라."
"좋아요!"
채린이 상념을 벗어내려 강아지처럼 머리를 푸드덕 털더니 밝은 표정으로 엘리의 옆구리를 잡아 쑥 들어 올렸다.
"많이 컸네!"
살짝 무게를 가늠해 본 채린이 뿌듯하게 말했다. 엘리는 벌써 1.5cm가 자라고 체중도 좀 많이 늘었다.
"아저씨가 요리도 많이 해주셨어요."
"맞아. 요즘 내가 요리도 가르쳐 주고 있어. 그거 알아? 원래 너 오기 전에 카렌은 맨날 도시락이랑 냉동식품밖에 안 먹었다?"
"진짜요?"
엘리의 눈이 놀라서 동그래졌다. 하긴 평소에는 소파 위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 아저씨긴 했다.
"그래. 말은 귀찮은 거 싫다 해도 따뜻한 사람이야."
"알고 있죠. 덕분에 저희가 여기 있잖아요."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카페로 향하기 시작했다.
...깡!
그런데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듯해 엘리가 발걸음을 순간 멈췄다.
"언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요?"
"응? 카페 안에서 뭐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가?"
`분명 뒤에서 들린 것 같은데?`
하지만 이 뒤로는 숲이다. 숲 쪽으로는 백호의 허락 없이는 오지 못하니 엘리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깡! 깡!
이번엔 두 번이다. 맑고 둔탁한 소리.
"확실해요!"
엘리가 몸을 휙 돌리며 방금까지 자신들이 있었던 낮은 언덕을 올라갔다.
"엘리야?"
갑자기 달려나가는 엘리를 채린이 황급히 뒤따라갔다. 어느새 언덕 위에서 손으로 망원경을 만들어 주변을 둘러보는 엘리.
"저깄다!"
"어디?"
"저기요. 숲에서 뭔가 움직이잖아요."
"오? 진짜네? 근데 키가 작은데?"
점점 가까이 오면서 소리의 정체가 드러났다.
깡! 깡!
키가 작은 남자는 손에 들린 망치로 일정한 거리마다 돌을 두드리며 자기 귀를 땅바닥에 갖다 댔다.
"...미친 사람인가? 아 미안..."
순간 내뱉은 험한 말에 엘리를 의식한 채린이 자기 입을 막았다. 하지만 누가 저 모습을 보고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나.
"아뇨, 저도 저분에게 정말 죄송하지만 그렇게 생각했어요."
둘이 뭐라고 생각하던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 남자의 자세한 표정과 행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절도 있는 망치질,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마치 금을 주운 사람처럼 환해지는 남자의 얼굴. 어린아이가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다.
그 모습을 자신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보던 채린과 엘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즐거우면 된 게 아닐까?"
"맞아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두 여자에게 깨달음을 준 남자는 계속 땅과 교감하면서 점점 다가오더니 이내 둘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왔다.
"응?"
바닥만 보고 걸었던 탓에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두 쌍의 다리에 흠칫 놀란 남자.
처음으로 허리를 펴고 가로막은 누군가를 올려다보았다.
"오..? 안녕하신가? 나는 `망치와 함께 춤을` 부족의 비어드라네. 만나서 반갑네!"
"아...안녕하세요?"
비어드가 귀가 살짝 아플 정도의 호방한 목소리와 함께 내민 손. 작지만 든든해 보이는 손을 채린과 엘리가 자신도 모르게 번갈아 가며 잡았다.
"하하하! 이거 둘 다 보통이 아니야. 게다가 여기 이 인간 소녀! 신의 사랑을 받는군."
"네?"
"뭐?"
채린이 엘리를 부드럽게 왼손으로 제치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서며 언제든 싸울 자세를 갖췄다.
"어떻게 알았지? 엘리가 성녀라는 걸?"
엘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얼굴과 이름은 교단에서 극비로 지정되어 있었다.
"오... 여기 세계에도 성녀가 있나? 거기까진 몰랐다네."
`젠장. 멍청하게 이런 실수를 하다니.`
채린이 멍청하게 무심코 뱉어버린 자기 입을 탓했다.
"오! 여기도 역시 대단하구만! 짧은 세월 동안 얼마나 노력한 건가?"
하지만 비어드는 자신을 경계하든 말든 채린의 주먹에 배인 굳은살과 옷 속에 감춰진 탄탄한 근육들을 꿰뚫어 보며 감탄했다.
`역시 일반인은 아니야.`
채린이 더욱 몸에 긴장을 끌어올렸다. 아까 이 남자와 악수할 때 손바닥의 굳은살이 마치 돌덩이를 잡은 듯했다. 만약 무기를 잡았다면 엄청난 단련을 했을 터.
"이거 내가 실수를 했나? 그럼 미안하군. 내가 지구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말이야!"
하지만 비어드는 자신을 향한 채린의 기세에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저..."
아까부터 뭔가 비어드라는 남자에게 이질감이 느껴졌던 엘리가 채린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이세계라든가, 지구라든가... 보통 잘 쓰지 않는 단어들을 쓰는 사람들은 한 종류밖에 없다.
"혹시 `이탈자`신가요?"
"이탈자? 아! 여기서는 나를 그렇게 부르더군! 그럼 이거 이름이 아니라 종족부터 소개했어야 했어. 나는 드워프네!"
"어? 얼마 전에 뉴스에 나오신 분이군요!"
"그게 무슨 소리야?"
뉴스에 딱히 관심이 없던 채린에게 엘리가 설명을 해주었다. 한창 사회가 새로운 이탈자들의 출몰 때문에 시끄러웠는데 그중에 가장 화제가 되는 게 이 눈앞의 비어드였다.
"그리고 아저씨가 말해주셨는데, 드워프라는 종족은..."
카렌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드워프의 특징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정확하군. 근데 그 아저씨라는 사람은 누군데 우리 종족에 대해 그렇게 잘 아나?"
비어드가 궁금해서 묻자 멋대로 카렌에 관해 얘기를 할 수는 없었던 둘은 일제히 눈알을 굴렸다.
"어...아저씨는 좀 귀찮은 걸 싫어하셔서요. 죄송해요."
만약 전 연합에서 관심을 받는 비어드가 카렌에 대해 한마디만 해도 주목받게 될 거다.
"무슨 소리! 죄송할 게 있나? 그나저나 내가 아는 삼촌과 닮았구먼. 그분도 맨날 말은 귀찮다고 해도 어디론가 바쁘게 가시더군."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저 숲을 어떻게 통과해 오신 건가요?"
지금껏 계속 궁금했던 점을 엘리가 묻자 비어드가 망치로 돌을 깡깡 두드리며 말했다.
"그냥 지나왔는데? 그리고 여기 밑에 아주 대단한 게 있다네. 자네들은 엄청난 부자가 될 거야!"
"네?"
둘이 무슨 소리냐고 눈빛을 보내자 비어드가 이번에는 눈을 감고 땅에 귀를 대었다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이 밑에는 마나석 광산이 있다네. 그것도 엄청난 규모로 말이야. 축하하네!"
비어드가 껄껄 웃으며 말하자 채린과 엘리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응? 혹시 마나석이 뭔지 모르나? 여기서는 마석이라 부르던데? 혹시 자네들은 돈을 안 좋아하나?"
당연히 둘이 뛸 듯이 좋아할 줄 알았던 자신의 예상과 다르자 당황한 비어드였다.
"도망치세요. 아니, 광산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는 쓰고 가시죠. 저랑 같이 교단에 가요"
"어...어? 왜 그러나?"
"빨리 이리 와요!"
채린과 엘리의 눈에 이 남자는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으로 보였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일확천금을 꿈꾼다. 흔히 자기 집 앞마당에 유전이 터져 나왔으면 좋겠다고 우리는 장난삼아 말한다.
"이거 진짜 엄청난 거야! 자네들?"
안다. 교단의 장부를 보고 있는 엘리나 S급 헌터로서 양질의 정보를 알고 있는 채린은 유전보다 더한 마석 광산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마석은 크기에 비하면 엄청난 에너지 효율을 가졌고 화석연료처럼 유해물질도 나오지 않는다. 유일한 단점은 수요. 그 단점을 해결해 줄 광산이라면?
"아저씨가 보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며 뭘 할지 몰라요. 빨리 와요!"
하지만 마나석들을 길가에 돌멩이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사람이 땅 주인이라는 게 문제였다. 이 눈앞의 폭탄을 당장에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어? 저기서 무슨 놀이 하나 보다! 주인! 저기 재밌는 거 한다."
그때 눈치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바깥의 소란에 문을 열더니 고개를 집 안으로 돌리며 땅주인을 부른다.
"...망했다."
엘리와 채린이 허망한 표정으로 카렌이 삼색을 앞세워 주섬주섬 나오는 걸 바라보았다.
"어?"
"응?"
그런데 처음 본 카렌과 비어드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웬만해선 감정이 잘 드러내지 않는 카렌이 놀라움에 살짝 눈이 커졌고 비어드는 손에 쥐고 있던 망치를 집어 던지고는 카렌에게 달려갔다.
"삼촌?"
"비어드? 네가 왜 여깄어?"
둘은 반가움에 얼싸안고 서로 안부를 물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엘리와 채린은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그 귀찮아하는 삼촌이 아저씨였어?"
서로 같은 인물을 두고 지금껏 대화를 나눴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