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집안일을 처리하면 시원한 술이 아른거린다
"하암...."
일주일에 걸친 호텔에서의 휴가는 모두 끝났다. 카렌은 오랜만에 2층에서 내려와 소파에 몸을 날리고는 기지개를 쭉 폈다.
"컥!"
그런데 갑자기 배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순간 몸이 새우처럼 살짝 꺽였다.
"너 살이 다시 쪘는데?"
자신의 배에 올라탄 삼색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카렌이 말했다.
"...조금 많이 먹긴 했다."
삼색이 자신의 배를 주물럭거리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열심히 뛰어다녀서 조금 살이 빠지나 했더니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와 버렸다.
"어차피 앞으로 일주일 동안 간식 금지니까 이 기회에 좀 빼."
"꾸잉? 그거 끝난 거 아니었냐?"
"무슨 소리야. 원래 이주일이잖아. 일주일 하다가 호텔에 가면서 특별히 연기한 거지. 어딜 넘어가려고."
"하지만..."
"어허!"
엄한 목소리로 삼색의 말을 자른 카렌이 소파 쿠션의 틈새를 주섬주섬 손가락을 훑더니 이내 리모컨을 건져 올렸다.
"뭐 볼까?"
"잠깐 뉴스나 보자. 요즘은 그게 더 재밌더라. 대한 그룹 일이 거의 마무리 되지 않았나?"
[속보입니다. 구속 직전의 대한 그룹의 회장이 잠적했다는 소식입니다. 그 일가까지 사라진 상황으로 보아...]
?
"저게 무슨 말이야?"
"진짜 영화보다 재밌네. 근데 최악의 수를 뒀어."
카렌이 혀를 쯧쯧 찼다.
"차라리 그냥 감옥에서 평생 썩는 게 편했을 텐데."
"그게 무슨 말이냐?"
"강이사가 그렇게 일을 허술하게 처리할 필요가 없잖아. 지금쯤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띠링!
역시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 알림음이 울린다.
?
[카렌님. 잠깐 나와보시겠습니까.]
"그러지."
강이사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활기차다. 카렌은 예상되는 바가 있어서 이유를 묻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갔다.
"회장 일가입니다."
아이처럼 신난 강이사의 목소리와 함께 햇살이 카렌을 내리쬔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카렌은 아름다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집 앞의 불청객들을 둘러보았다.
선두로 회장부터 시작해서 친척까지 수십 명이 전부 얼굴에 시퍼런 멍 하나씩 들어서는 입에 재갈이 묶이고 손이 뒤로 꽁꽁 묶인 채 무릎 꿇려 있었다.
"회장은 풀어줘."
"예."
재갈이 풀어지자마자 안 그래도 버둥대던 회장은 카렌을 향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몸을 움찔거리며 열을 낸다.
"너!"
"가만히 있어!"
하지만 이내 흑복에 온갖 첨단 군용장비를 입은 사람들이 거칠게 회장의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회장이 굴욕적인 자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얘들은 뭐야?"
카렌이 회장보다는 끌고 온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생겨 강이사에게 물었다.
"교단의 `뿌리`와 협력해서 만든 특수부대원들입니다. 교육이 끝나자마자 작전에 투입되느라 소개가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들의 소속을 나타나는 왼팔에는 강압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앙증맞은 민들레 꽃문양의 패치가 붙어 있었다.
"아냐. 재단 일은 전적으로 맡긴다고 했잖아. 잘했어. 보고해봐."
"회장이 숨겨둔 자산과 함께 비밀 은신처로 도피하려 해서 잡아 왔습니다."
"그래? 그 꼴은 못 놔두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잡아 왔어?"
아무리 그룹이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다지만 그래도 비상금만 해도 5대는 족히 사치스럽게 살고 탈출방법도 수십 개를 준비해놨을 터.
"우리가 도왔네."
옆에서 말 그대로 바람같이 나타나는 백호와 현무의 모습에 카렌은 단번에 이해했다.
"그래, 둘이라면 상대를 잘못 만났네."
세상에 바람과 물이 없는 곳이 있을까. 게다가 아무리 강한 경호원들이 호위해도 저 둘이 뭉치면 답이 없었겠지.
"이제 와서 복수냐?"
회장이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서 이를 부드득 갈며 카렌을 노려본다. 대한 그룹의 얼굴에 똥칠을 한 저 얼굴을 어찌 잊을까.
저놈의 수작에 당하고 대한 제약의 사장이었던 자신의 아들은 결국 얼마 전에 죽었다.
"이게..."
?
다시 부대원들이 회장을 제압하려 했지만 카렌이 손을 들어 말렸다.
"그런 거 아냐. 그냥 내 주변 사람을 건드려서 좀 거슬렸어."
"뭐? 그게 무슨 말이냐?"
회장 일가는 이해를 못 했지만 카렌은 진심이었다. 정말 별생각이 없었다. 아니, 이전까지는 그냥 잊고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귀찮아서 미뤄둔 대청소를 했다고 생각해. 생각보다 더 더럽더라."
카렌의 말에 회장의 입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린다. 이토록 굴욕적인 말이 있을까.?
"이...이...!"
자신은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아니, 최소한 이렇게 하찮게 끝나서는 안 되는 인생이었다.
"너도 그런 적 많지 않아? 그래도 나름 사회에서 엄청 높은 위치잖아."
"그게 무슨..."
뜬금 없는 말에 회장이 순간 말을 잃자 카렌은 강이사를 향해 손짓했다. 눈치 빠르게 카렌의 의도를 알아챈 강이사가 입을 열었다.
"대한 그룹에서 주도한 일들입니다. 하도급 단가를 인상 요청한 중소업체 부도. 내부 고발자 재취업 불가..."
"그까짓게 뭐 어쨌다..."
빠악!
"오...눈치 빠르네?"
카렌이 들고 있던 삼단봉 손잡이 부분으로 회장의 머리를 가격한 부대원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회장의 입은 단번에 다물어졌고 강이사는 통쾌한 듯 회장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말을 이어갔다.
"...신기술 개발한 중소기업 인재 빼돌리기 및 기술 탈취해 유사 특허 등록. 위의 사례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살하거나 사회적으로 죽었습니다. 아, 이분들 사망진단서도 위조하셨더군요. 굵직한 것만 여기까지입니다."
이것 말고도 더 있었지만 죄다 말하려면 날이 샐 거다.
"봐. 너에게 저 일들은 별것 아니지? 네가 나한테 그래."
회장이 그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고개를 카렌의 눈을 마주 봤다. 그리고 절망에 빠졌다.
이 젊은 남자의 눈동자에는 복수에 대한 쾌감도, 자신이 정의를 행하고 있다는 신념도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됐어. 너의 쓰잘데기 없는 철학 따위는 듣고 싶지도 않다. 이미 너 같은 건 지겹게 봤어."
카렌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검지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며 옆으로 그었다.
"읍...읍!"
부대원이 재갈을 다시 물리고 군화로 회장의 목을 내리눌렀다.
"이거 다시 경찰에 반품 안 되나? 삼색 그거 만지지 마라. 지지다."
카렌은 귀찮음이 배어나오는 목소리로 회장 일가를 내려다보며 강이사에게 물었다.
그 와중에 삼색이 앞발을 회장의 머리 위에 올려다 놓고 승리포즈를 취하자 재빨리 녀석을 잡아서 품에 안았다.
"한, 두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니 저희 얘기를 안 할 거란 보장이 없습니다. 좀 귀찮아 질 겁니다."
"그건 싫고...아! 저번에 북쪽 그곳은 어때?"
엘리를 괴롭히던 양부모가 지금쯤 열심히 고생하고 있을 탄광이 떠올랐다.
"후기가 아주 좋습니다."
"그러면 거기로 데려가."
거친 먼지와 딱딱한 빵. 힘든 육체노동을 버틸 수 있을까. 최상류층으로 살아 온 이들에게는 어찌 보면 죽음보다 더한 형벌일 수도 있겠다.
"탄광에서 혹시라도 알아볼 수 있으니 성형시키고 언론에는 적당하게 자살로 처리하겠습니다. 은신처에서 자신의 처지에 비관해서 불을 질렀다고 하면 되겠군요."
"그래."
역시 척하면 척이다. 강이사가 카렌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회장 일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미뤄놨던 집안일을 처리한 느낌에 마음이 개운해진다.
"술이 좀 당기는데?"
카렌이 삼색을 안은채로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 주인 나 잠깐만 밖에 있을게. 백호가 부른다."
갑자기 삼색의 귀가 살짝 쫑긋하더니 카렌의 품에서 뛰어 살포시 땅에 착지한다. 바람으로 메시지를 전한 모양이다.
"그래라. 난 카페 들어가 있을게."
"알았다. 금방 간다."
?
카렌은 들어가기 전에 카페를 둘러봤다. 카페는 오영준의 요청으로 휴가 때 증축을 해 이제는 처음보다 3배 정도는 더 커졌다.
딸랑!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와 함께 카운터에서 영준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해온다.
"오늘은 술로 하지. 아무거나 줘. 준비돼?"
"그럼요. 어울리는 디저트도 준비하겠습니다."
단순히 크기만을 위해 카페가 커진 게 아니다. 바에 맞는 시설과 음식과 제빵을 위한 요리 공간 때문에 커졌다.
영준이 앞치마를 갈아입고는 옆의 바로 넘어가더니 능숙하게 칵테일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영준의 친구가 리코다 치즈가 올라간 샐러드와 간단한 과일을 내왔다.
"고마워."
"아닙니다. 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쇼."
언제 만들었는지 메뉴판도 함께 건넨다. 간단한 빵부터 팬케이크, 마카롱 등 각종 음식이 보인다.
`점점 규모가 커지는데?`
그냥 개인 카페가 필요해서 만든 건데 이제는 아침에는 커피 점심에는 빵, 저녁에는 술로 코스를 즐겨도 될 정도다.
"아직 식사 전이시라 식욕을 돋우기 위해 약한 마티니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잔을 냉동고에 보관해서 좀 차갑습니다."
물처럼 투명한 액체 위에 올리브가 동동 떠 있는 잔이 카렌의 앞에 나왔다.
한 모금 마셔보니 특유의 씁쓸하고 상큼한 향과 함께 위장으로 직행한다.
"음...좋네."
카렌이 살짝 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면서 창밖을 내다 봤다. 삼색과 현무, 백호가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보인다.
`뭐지? 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은?`
현무와 백호는 그렇다 치고 저 고양이는 왜 저래?
궁금해진 카렌이 유리를 톡톡 치자 청력이 좋은 세 영물은 사이좋게 카렌 쪽을 돌아본다.
카렌이 들어오라고 손짓하자 뭔가 난감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들어오는 녀석들.
"영준?"
"예."
"손님 받을 준비 해."
딸랑!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현무와 백호는 카렌의 예상대로 들어오자마자 거침없이 주문을 시작했다.
"가장 독한 술로 가져다주면 고맙겠군."
"꾸잉! 나도!"
"쟤는 우유로 줘."
은근슬쩍 둘에게 껴서 주문하는 삼색을 카렌이 재빨리 차단했다.
"어? 왜?"
"현무와 백호는 어른이잖아."
"그게 무슨 소리냐? 나도 몇백 년..."
"쟤네처럼 1000년 넘게 살고 와서 말해라."
"...."
삼색은 카렌의 곁에 와서 앉고 백호와 현무는 건너편에 앉았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다.
"무슨 일이야?"
"음...우리가 연합 전역에 토네이도를 일으켰지 않나."
"그랬지. 그런데 뭐 딱히 큰일은 없었잖아?"
도시지역에 토네이도가 도달하기 전에 모두 사라졌으니 대한 그룹 연구소가 박살 난 것 빼고는 규모에 비해 희생자는 거의 없었다.
"그때 대기에 뭔가 이상이 생겼는지 최근에 이상징후가 감지되네."
"무슨 이상징후?"
"공기가 한 지점에 과도하게 모이면서 마나가 뭉쳤어. 그 때문에 게이트가 잠시 활발하게 발생할 것 같네."
"계속되는 건 아니지?"
"물론 일시적이네."
들어보니 카렌 기준으로 딱히 큰일은 아니다.
"놔둬."
"그렇게 해도 되나? 나는 인간들이 피해를 받으면 자네가 화낼줄 알았네."
"상관없어. 나는 삼색 때문에 너희를 막은 거야. 알아서 하라 그래. 어차피 너희가 대격변도 중간에 막았다며? 그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알겠네."
그 사이 오영준이 술을 가져왔고 삼색의 앞에는 새하얀 우유가 놓여졌다.
"꾸잉, 진짜 우유를 가져왔냐···."
"고양이 전용 우유입니다. 드시기 쉽게 따뜻하게 데웠습니다."
영준의 세심한 배려까지 더해지자 카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삼색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주인! 웃음 참는 거 다 보인다!"
"오해야. 자 한 잔 들이키자고."
"좋구만. 그러지."
뚱한 표정의 삼색만 빼고 모두 술을 들이켰다.
백호는 바람으로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고 현무는 술 자체를 조종해 직접 입으로 방울 방울 넣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여기 죄다 200살이 넘네."
"근데 왜 나는 우유.."
"마시자고!"
삼색의 꿍얼거림을 재빨리 차단해버린 카렌이 또 잔을 들었다.
"여기 정말 좋구만! 나 한잔 더 주게나!"
"영준! 나도 이거 더주라."
백호와 현무가 껄껄 웃으며 술을 들이켰고 삼색은 투덜거려도 맛있었는지 영준에게 빈 우유잔을 내밀었다.
* * *
?
[우우웅! 게이트 출몰! 게이트 출몰!]
"으아아악! 차라리 날 죽여!"
게이트 비상대책팀에 소속 요원이 또다시 시작된 경보음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차라리 큰 게이트 하나도 가자. 벌써 자잘한 게이트가 하루에도 몇 번째야아아아···."
요원이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습관적으로 출동 차량에 탑승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음 주가 월급날이니 다행이다.
"야, 그래도 사무 쪽 공무원들도 죽으려고 하더라."
"하긴, 걔들도 힘들긴 하겠지. `방출자`들이 계속 나오잖아."
앞에 마주 보고 앉은 동료의 말에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게이트는 신기하게 몬스터도 그렇지만 이세계에서 넘어온 주민을 뜻하는 방출자들을 많이 뱉어내었다.
"근데 종족도 많고 너무 까다롭단 말이지. 특히 엘프들있잖아."
"맞아. 잡음이 너무 많아. 너무 아름다우니까 자꾸 여러 군데서 찔러본단 말이지."
갑자기 다른 세계로 끌려왔으니 예민할 법도 한데 처음 보는 누군가가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접근하니 짜증이 날 법도 하다.
덕분에 이리저리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뭘까···. 차라리 몬스터가 나오게 해주세요."
[전 인원 위치로!]
요원은 속으로 기도하면서 차에서 내렸고 과연 신은 그 소원을 들어 주었다.
엘프의 생김새와는 정 반대의 종족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짜리몽땅한 키에 울퉁불퉁한 근육, 판타지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그 종족.
"여기가 삼촌이 그렇게 말했던 세계구먼! 아하하하! 새로운 광물과 술맛은 어떠려나?"
새로운 환경에 떨어져서 겁먹기는커녕 주위를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둘러보던 방출자가 호탕한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지구의 방출자 목록에 드워프라는 새로운 종족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