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1/140)

  때론 가장 쉬워보이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이거 봐라!"

  "잘하네. 역시 금방 배워."

  인간으로 변한 삼색이 손가락 부분에 반지처럼 동그란 교정대가 있는 어린이용 젓가락으로 접시로 콩을 옮기면서 자랑스럽게 소리쳤다.

  옆에서 차근차근 가르쳐 주던 미호가 물개박수를 치며 자기 일처럼 좋아한다.

  삼색과 미호 둘 다 웃을 때 눈이 사라지면서 반달로 휘어지는 모습이 참 닮았다.

  "내가 인간이 되면 젓가락질을 꼭 해보고 싶었다."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젓가락을 들고 웃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인다.

  소박한 꿈을 이룬 건 보기 좋은데 일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저러고 온종일 있으니 왠지 좀 심술이 난다.

  "근데 넌 왜 고양이에서 영물이 됐는데 얼굴이 강아지상이냐?"

  괜히 삐딱해진 카렌이 아직도 머리 위에 고양이 귀가 뾰족 솟아 있는 삼색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코는 오똑하지만 끝이 둥글고 살짝 눈꼬리가 처진 무쌍에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동자. 거기다 웃을 때 드러나는 새하얀 이빨과 빙구미까지... 살짝 리트리버 느낌이 난다.

  "나는 보기 좋아. 미호가 고양이상이고 삼색이 강아지상이잖아. 균형이 잘 맞아."

  삼색의 옆에 미호가 있다면 카렌의 옆에는 채린이 있었다. 채린의 말에 미호의 표정이 환해지며 반색했다.

  "어머, 언니! 고마워요. 언니도 아버님과 정말 잘 어울려요."

  "고맙다 얘. 그래도 너희를 따라갈 수는 없지. 세상에, 무려 시대를 뛰어넘은 사랑이라니···. 얼마나 아름다워?"

  "아니에요. 언니야 말로.."

  그 뒤로도 숨 쉴 틈 없이 서로 이어지는 칭찬 세례. 그런데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카렌이 중간에 끼어들어 의문을 제기했다.

  "...채린이가 언니야?"

  미호가 20대 초반으로 보이긴 해도 방금 얘기한 것처럼 족히 몇백 년은 살았는데?

  "그냥 그렇게 하기로 했어."

  "네. 저도 그게 좋아요."

  두 여자는 서로 눈을 맞추고 윙크를 서로 날렸다.

  처음에는 채린이 미호를 보자마자 으르렁거렸지만, 갑자기 사라져서 카페와 쇼핑을 갔다 오더니 순식간에 저렇게 되었다.

  `하긴 뭐 친해지면 좋지.??`

  좋은 게 좋은 거로 생각한 카렌은 다시 목걸이 아공간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는 통조림 하나를 꺼내 실드를 이용해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많아?"

  채린의 말대로 많긴 많다. 일단 툭하면 집어넣었더니 쌓여서 한가득이다.

  물약들부터 건전지, TV 리모콘, 에프킬라, 무엇보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통조림들과 건조식품들.

  "너 이제 저런 거 안 먹잖아?"

  옛날에야 아무거나 전자렌지나 에어프라이기에 돌려서 막 먹었다. 하지만 엘리가 들어오고 카렌이 어설프게나마 요리를 해서 챙겨 먹고 있었다.

  "저거 다 삼색이 넣은 거야. 저번에 목걸이 잠깐 빌려 가더니 마트에 가서 통째로 쓸어 오더라."

  "그때 동물 음식 특별 기획전이었다. 덕분에 방송에서 동물 음식 리뷰도 했다."

  "오? 그냥 먹고 싶어서 먹은 게 아니었어?"

  저건 좀 의외다.

  "주인! 나를 뭐로 보고! 내가 정리한 표가 요즘 엄청 유명하다. 성분이랑 맛에 관해 설명이랑 별점을 매겨 종에 따라 선호하는 음식을 분류했는데 엄청 정확하다고 사람들이 놀란다."

  "...그러겠지. 진짜 동물의 미각으로 먹었으니."

  저렇게 말 그대로 자기밖에 못 하는 컨텐츠를 찾는 걸 보면 가끔 똑똑해지는 게 맞단 말이지.

  "우아아! 이건 너무 어렵다. 이놈의 콩! 콩!"

  일반 젓가락으로 레벨업해서 콩을 옮기면서 정체불명의 소리를 내뱉으며 시무룩해지는 걸 보면 또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앞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에 심심하지는 않다. 카렌은 다시 아공간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는 아무거나 빼냈다.

  "응?"

  그런데 이번에는 감촉이 좀 다르다.

  "서류잖아?"

  아공간 밖으로 나온 카렌의 손에는 두터운 종이 뭉치가 들려 있었다.

  "오?"

  온 힘을 다해 콩에 집중하고 있는 삼색을 뒤로하고 미호와 채린의 시선도 서류에 집중되었다.

  수백 개의 물품이 나왔지만 처음 보는 종류의 물건이다.

  파라라락, 카렌이 빠르게 서류를 손가락으로 넘기며 훑어보고는 정체를 알아챘다.

  "이거 그거네. 그 갑자기 나한테 까불었던 이상한 박사... 이름이 뭐였더라?"

  "왕춘이다."

  삼색이 콩을 원수처럼 노려보다가 반쯤 해탈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면서 말했다.

  "맞아. 왕춘! 그때 네가 코를 킁킁거리며 무슨 금고 찾았잖아. 근데 지금 봐도 여전히 모르겠다."

  종이 위에는 뭔가 육각형의 그림과 화학식으로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이다.

  "왕춘? 그 왕춘이요? 빌런이지만 천재 과학자? 그거 제가 잠시 봐도 될까요?"

  "그래. 어차피 버리려고 했어."

  왕춘의 이름이 나오자 미호가 쑥 앞으로 몸을 내밀고는 서류를 급하게 받아 들었다.

  카렌과 다르게 종이 하나하나 신중하게 보던 미호의 눈빛이 시간이 가면서 심각해진다.

  "왜 그래? 뭐 문제 있냐?"

  삼색이 순식간에 달라진 미호의 분위기에 자신도 옆에서 서류를 슬쩍 봤지만 어지러운 수식과 도형에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더니 바로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거...대한그룹의 계열사인 대한제약이 왕춘이랑 거래했다는 문서예요."

  "뭐?"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모두가 놀라 미호를 바라 봤다.

  "그건 어떻게 알아?"

  채린이 묻자 미호가 워치로 자신의 과거 이력을 띄웠다.

  아름다운 여성이 유명한 과학 저널의 메인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과거의 사진.

  "미호?"

  옛날 유행하는 머리스타일과 옷차림 때문에 다르긴 했지만 분명 얼굴은 미호가 확실했다.

  "제가 과거부터 여러 직업을 가졌거든요. 다 수박 겉핥기 식이긴 하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어요. 이건 확실해요. 어쩐지...대한제약이 갑자기 신약들을 개발하며 클 수 있던 이유가 이거였어요."

  제대로 된 신약 하나만 해도 제약회사의 운명을 바꾸는데, 대한제약이 나오면서 개발한 신약들은 제약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었다.

  "맞아. 그건 나도 기억해. 그 약 중에 천식약이 기억나. 내 동생도 약한 천식 기운이 있어서 먹였었거든."

  채린이 기억을 되짚었다. 동생과 쓰러지기 전 추억은 모두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채린의 말을 들은 미호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뭔가 말하려는 듯 살짝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카렌에게 물었다.

  "아버님이 보시기에 왕춘은 어땠나요?"

  `뭐지?`

  카렌이 흔들리는 미호의 동공과 표정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하지만 생각이 있겠지 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 녀석은 확실히 제정신은 아니었지."

  현대보다 마법에 의한 인체실험에 관대한 벨리엘에서 조차 단번에 공적이 되어버리는 키메라를 만든 미친놈이었으니까.

  "그럼 그 박사가 도움을 준 약이 정상일까요?"

  "설마..."

  이제서야 미호의 의도를 알아챈 카렌도 살작 머리를 쓸어 올렸다. 처음부터 그냥 말할 수 있었지만 한 사람을 위해 예방주사를 놓은 거다.

  "처음에는 대한도 몰랐어요. 내로라하는 연구진들도 왕춘의 악의를 찾아낼 수 없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함을 느꼈고 그 부작용은..."

  안 그래도 점점 표정이 굳던 채린이 경악한 표정으로 책상을 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미호에게 물었다.

  "동생이 식물인간이 된 게 그 약 때문이야?"

  "신약들의 뛰어난 효과는 모두 사람들의 몸에 있는 마나를 이용했기 때문이에요. 기존 과학의 형태를 벗어났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실을 찾아내지 못했구요. 부작용이 나타난 사람들은 마나에 대해 예민해서 그래요."

  채린은 허탈한 표정으로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

  미호가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했지만 이내 들려오는 카렌의 목소리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그럼 대한의 잘못이군. 애초에 왕춘이 빌런인 걸 알면서도 신약을 출시했고...잠깐. 임상실험은? 굉장히 까다로울 텐데?"

  "연합이 생겨난 직후라 혼란스러웠고 대한 그룹의 힘으로 법도 느슨하게 바꿨어요."

  "쓰레기 짓을 했군."

  단번에 카렌이 일축했다. 더더욱 명확해진다.

  "언니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가 약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요? 얼마 후에 그 신약들은 정체불명의 이유로 모두 사라졌어요."

  미호의 열심히 위로를 해주지만 채린의 머리가 푹 숙여진다.

  "..."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이 납득하지 못 한다.

  그때 카렌의 손이 채린을 잡아주며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는 채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손으로 쓰다듬으며 자신의 어깨 쪽으로 당기며 기댈 곳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 서류로 뭘 할 수 있지?

  "

  ??

  벌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줘야 한다.

  "제가 말해봤자 어림없어요."

  헌터 장비 업계에서 잘나가는 회사의 사장이라 봤자 대한에 비하면 초라하다. 하지만...

  "아버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시지 않을까요?"

  미호의 말에 잠시 카렌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을 정리했다.

  솔직히 대한 그룹이랑 별 감정이 없었다. 초기에 포션때문에 좀 부딪히긴 했어도 그냥 카렌에게는 잠깐 귀찮았던 일? 그 정도 무게였다.

  `하지만 이건 좀 다르지.`

  백호와 현무의 일에 연관된 데다 채린까지...우연이든 뭐든 자신의 주변인을 건드렸다.

  마침내 카렌의 입이 열렸다.

  "거슬리는군. 치워야겠어."

  놈들의 결말은 정해졌다. 이제 방식의 문제인데... 최대한 자신이 귀찮지 않은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그럼 다른 피해자들도 좀 불러볼까?"

  카렌이 카운터에서 대기하고 있던 오영재를 보며 말했다.

  "벨 좀 울려줘."

  띠링!

  백호의 선물 중 하나. 혹시나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라고 만들어 준 종이다.

  "무슨 일인가?"

  산들거리는 바람이 모두의 뺨을 가볍게 스치는가 하더니 어느샌가 모두의 눈앞에 나타난 백호.

  카페 안이라 몸집을 줄인 백호는 작은 강아지만 한 크기로 테이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들을 얘기가 좀 있어. 현무도 불러와 줘."

  백호가 바람을 보내 불러온 현무도 백호와 비슷한 앙증맞은 크기로 나란히 옆에 와 앉았다.

  "말하기 귀찮으니 기억 읽어 봐."

  갖고 싶지는 않은 능력이지만 이럴 때는 참 편하다.

  딸랑!

  둘이 기억을 다 읽자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울리면서 타이밍 좋게 오늘 차 수업을 마친 엘리와 강이사가 들어온다.

  "저 왔어요! 어? 다 모여 계시네요? 오늘 뭐 해요? "

  "쟤들도 좀 해주라."

  "이리로 오게나."

  `이거 중독될 것 같은데...`

  사신을 좀 사소한 일로 부려 먹는 것 같긴 하지만...뭐 좋은 능력 놀리는 것보단 낫지 않나.

  "세상에..."

  "나쁜 사람들이네요."

  모든 기억을 들은 강이사와 엘리가 주먹을 불끈 쥐며 분개하고 대한에 대한 적의를 드러냈다.

  "자...모두 상황은 파악했고. 회의를 시작하자고. 강이사?"

  "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강이사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바퀴가 달린 하얀 화이트보드를 드르륵 끌고 와서는 신나서 쓱쓱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거 저희 회원님들이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회원님?"

  "맨드레이크로 치료받으신 분들을 회원제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모두 대한의 신약들에 의해 피해를 받으신 분들이죠."

  "그런데 강이사,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데?"

  ?

  모두가 저렇게 밝게 웃는 강이사는 지금껏 처음 봤다.

  "방금 수학 문제 틀렸다고 혼내던 선생님 어디 갔지..."

  엘리가 불과 10분 전과 달리 180도로 변한 강이사를 보며 볼을 부풀렸다.

  "저는 조선제약에 다닐 때부터 대한제약이 너무 싫었습니다. 옆에서 얼마나 짜증나게 하던지...툭하면 방해하고, 기술 빼가고, 사람 빼가고."

  얼굴에 웃음을 띄운 채 강이사는 거침없이 핵심이 되는 단어들을 써 내려간다.

  언론. 재단. 교단. 사신.

  그리고는 탁탁 화이트보드를 치면서 씨익 웃었다.

  "자 저희가 가진 패들로 어떻게 해볼까요?"

  "우리가 전면에 나서진 말자고. 그냥 진실이 묻히지 않게만 하면 충분하잖아?"

  "맞습니다. 하지만 제일 어려운 일이기도 하죠. 그럼 제가 카렌님이 귀찮으시지 않게 최대한 계획을 짜겠습니다."

  "좋아."

  역시나 우리 강이사가 눈치 빠르게 일을 잘한다. 카렌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일 중요한 건 언론이 되겠군요. 나머지는 부수적인 요소로 지원하는 형태로 가겠습니다. 모두 동의하십니까?"

  강이사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박수를 쳤다. 마치 공연을 끝낸 사람처럼 손을 가슴에 얹고 모두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강이사.

  `원래 저런 이미지가 아닌데...`

  좀 많이 신나긴 하나 보다. 거기다 강이사가 또 하나의 제안을 해 온다.

  "혹시 대한 그룹 본사 근처에 휴가 가실 생각 없으십니까?"

  "응?"

  갑자기 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모두가 놀라서 강이사를 쳐다 본다.

  "아! 이건 원래 드리려고 한 말입니다. 5성급 호텔 하나를 통째로 쓸 기회가 와서요. 겸사겸사 대한 제약의 몰락을 일등석에서 볼 수 있죠."

  강이사의 눈동자에 얼핏 광기가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괜찮은데?`

  호텔이라...그러고 보니 지금 모여 있는 사람들이랑 다 같이 뭘 해본 적이 없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 알겠다. 대답 안 해도 돼."

  카렌이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대답해주었다. 게다가 엘리와 삼색은 바짝 다가와 카렌의 옷자락을 양쪽으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좀 울적한 채린의 기분도 좀 풀어주고 싶다.

  "가자고 휴가."

  "휴가! 휴가!"

  어느새 고양이로 변해 신나서 '우다다'를 하던 삼색의 몸이 갑자기 '파지직' 거린다.

  "으아아악! 전기! 전기!"

  이 중에 유일하게 일반인인 강이사가 다시 기겁하면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카렌은 삼색의 주변에 실드로 네모난 상자를 만들어 가뒀다.

  이어서 쳇바퀴를 하나 만들어 넣어 주고는 말했다.

  "뛰려면 거기서 실컷 뛰어. 전기 제대로 조절할 때까지 못 나올 줄 알아."

  "주인? 나는 햄스터가 아니다!"

  "햄스터는 전기라도 안 뿜지. 너는 위험 대상이야. 잔말 말고 해."

  "꾸잉..."

  터덜터덜 전기를 내보내면서 쳇바퀴를 돌리는 고양이를 보면서 문득 카렌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거 발전소 같은 곳에 가서 일이나 시켜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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