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140)

  저게 맞나?

  카렌은 오랜만에 느긋한 여유를 즐기며 숲속을 걷고 있었다. 상쾌한 공기와 특유의 풀 냄새가 코에 들어오자 머리가 단번에 맑아진다.

  "흐읍. 정말 좋군요."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강이사도 잠시 눈을 감고 공기를 음미하면서 말했다.

  "일주일도 안 된 사이에 묘목이 벌써 숲이 되다니···. 역시 신수라 부를 만합니다."

  지금 둘이 걷고 있는 이 숲은 카렌의 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카렌이 처음 이사 왔을 때처럼 황폐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없던 곳이 지금은 이렇게 새가 지저귀는 숲이 되었다.

  "역시 나이가 들어가는지 이런 게 좋단 말이야. 그나저나 재단은 잘 썼어. 편하던데?"

  만약 헬기가 없었다면 그렇게 편하게 삼색의 일을 처리하지 못했을 거다.

  "아닙니다. 재단은 오로지 카렌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언제든지 편하게 이용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지금 민들레 재단 내에서 카렌님의 인기가 폭발적입니다."

  "뭐? 내가 뭘 했다고?"

  재단의 직원들과는 저번에 처음 만났는데? 그것도 조종사 둘과 승무원 한 명이었다.

  "그 셋이 자랑스럽게 소문을 퍼뜨린 덕분입니다. 그리고 연합을 구한 영웅이시지 않습니까. 세상은 몰라도 재단 직원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허...?"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이사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면서 강력했다. 자신도 회사원으로 시작해서 임원까지 올라가 봤으니 직장인의 심리를 잘 알았다.

  재단 직원들에 대한 월급은 최상위. 복지 최상위. 게다가 맨드레이크로 치료로 얽힌 인연. 이미 만약을 대비해 보안도 철저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떠한 불손한 행위도 없었다.

  "크흠···. 그리고 이런 말은 카렌님이 어떻게 들으실진 모르겠지만···."

  강이사는 헛기침을 하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얼굴이 들어간 영상은 원칙상 안 되지만 카렌님의 목소리가 들어간 무전 내용이 현재 직원들 사이에서 굉장히 뜨겁다고 합니다."

  "...응? 그게 뭐야."

  자신이 헬기에 타서 몇 마디 하지도 않은 데다가 대화 내용도 특별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저 신기하다. 대체 왜?

  "카렌님을 직접 본 직원들이 조금 과장되게 얘기한 이미지에 불을 붙인 겁니다. 그 덕분에 재단에 대한 직원들의 소속감이 엄청나게 강해졌습니다."

  역시 이미 냉철하게 분석을 마친 강이사였다. 하지만 카렌은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단번에 그럴 수 있나?"

  ?

  "조직의 장이 능력과 인물이 비현실적이니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좋은 것도 한몫했습니다."

  "내가?"

  "듣기 좋습니다. 살짝 저음에 비음 없이 깔끔하지 않습니까. 또 카렌님 정도 되면 뭘 해도 좋게 들립니다."

  "그건 그렇겠군."

  카렌은 강이사의 말에 어떠한 겸양의 말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백 년 넘게 잘생겼다는 말을 들었는데 스스로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그나저나 땅 문제는 잘 됐어?"

  원래 구리시에 동 3개 크기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지금 걷고 있는 숲이나 현무가 만든 호수를 만들려면 좀 작은 크기다.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 일단 백호와 현무에게 땅을 주고 토지를 매입하라고 말해 뒀다.

  ?

  "구리시 전체를 매입했습니다."

  "응?"

  카렌의 걸음이 살짝 주춤했다. 시를? 자신은 그냥 주변 땅이나 좀 사란 의미였는데?

  하지만 강이사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다.

  "그리고 구리시랑 붙어 있는 중랑구, 광진구, 노원구, 남양주시 땅도 조금 구매했습니다."

  "어...그게 됐어? 사람들도 많았을 텐데?"

  "예. 절대 강제로 사진 않았습니다. 대부분 위험지역으로 선정되어 어쩔 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 흔쾌히 승낙했습니다."

  속사포처럼 이어진 강이사의 보고. 역시 믿고 맡길 만큼 능력이 출중하다.

  ??

  "서로가 좋네. 잘했어. 그런데 강이사가 그 사람들이 불쌍해서 사준 건 아닐 텐데?"

  "맞습니다. 역시 카렌님이십니다. 이렇게 구매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강이사가 카렌을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내온다.

  "정보로는 지금 사 놓은 땅값이 곧 상승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걸로 재테크까지 할 생각을 한다니...카렌은 속으로 강이사를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데 뭔가 모순된 점이 한 가지 있다.

  "위험지역이라며? 그럴 수가 있나?"

  "저도 처음에는 그저 흔히 있는 찌라시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여기 자주 와 보니 그럴 듯했습니다."

  "뭐가?"

  강이사가 홀로그램으로 구리시 주변 지도를 띄웠다. 새빨갛게 물든 구리시와 주변. 반면 서울 중심부는 밝은 초록색이었다.

  "빨간색일수록 높은 마력 농도를 가진 땅이라 게이트가 나타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기억해 봐도 구리시에서 게이트를 본 적이 없습니다."

  카렌이 강이사의 말을 듣고 기억을 되짚어 봤다. 그러고 보니 여기 이사 온 후에 자신의 앞에단 한 번도 게이트가 나타난 적이 없다.

  저번에 한번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는데 어차피 별 위협도 안 돼서 잊어버렸지.

  "위쪽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낀 모양입니다. 조사 결과에 따라 땅 가격이 크게 뛸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더 떨어질 곳도 없으니 위험부담은 없습니다."

  "...그래. 잘했네."

  그야말로 손댈 곳 하나 없는 완벽한 일 처리. 평소의 허허 웃는 강이사는 어디 가고 순간 엘리를 가르치는 냉철한 선생님의 모습이 강이사에게서 비친다.

  `엘리가 강이사의 수업시간을 부담스러워할 만하네.`

  그렇다고 평소에 말을 들어보면 엘리가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생각하고 가르치는 마음이 느껴진다고 했던가.

  "주이이이인!"

  그때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언제 나오나 했다.

  분명 같이 숲에 들어 왔는데 신나서 어디론가 사라진 고양이 한 마리가 소리를 지르면서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파지지직!

  그런데 녀석의 모습이 평소와는 다르다. 몸의 털이 하늘 위로 솟아올라 있으며 노란색 번개 줄기가 몸에서 넘실넘실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삼색님! 전기! 전기!"

  강이사가 질겁해서 뒷걸음치며 삼색을 향해 소리쳤다.

  "아! 맞다. 이거 아직 조절이 좀 서툴다."

  삼색이 잠시 멈추고 집중하자 번개가 갈무리되며 몸 안으로 물처럼 스며들었다.

  "너. 그거 조심하랬지. 강이사한테는 위험하다니까."

  "미안. 그래도 이제 전처럼 사방으로 뻗어 가진 않는다."

  백호와 현무가 삼색에게 준 사신의 자리. 미호는 불꽃을 다루는 주작의 능력을 가졌고 삼색은 번개를 다루는 청룡을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아직 정식으로 임명된 건 아니다.

  "아직 견습생이어서 그런가?"

  삼색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게 아니라. 그 능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 그제야 진짜 사신이 되는 거지."

  "아하! 그런 거구나?"

  `이 사고뭉치 고양이가 청룡? 이게 맞나???`

  미호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저기서 맹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삼색을 보면서 카렌은 마음이 심란해진다.

  "힘을 다시 거둬갈 수도 있나?"

  "그게 무슨 말이냐? 이거 얼마나 멋있는데?"

  삼색이 발끈하자 다시 몸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번개가 줄줄 새어 나왔다.

  "으아아악!"

  옆에 있던 강이사가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뒤로 찧는다.

  ?

  "...강이사 오늘은 먼저 들어가."

  "네!"

  강이사가 그 말만 기다렸다는 듯이 카렌에게 꾸벅 인사하고 도망치듯 떠난다.

  삼색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머쓱해져서 발로 목 뒤를 탈탈 긁었다.

  "넌 익숙해지기 전까지 숲에서 나오지 마. 그런데 너한테서 뭔가가 떠오르는데....뭐지?"

  "응?"

  카렌은 삼색을 뚫어져라 관찰하며 보이는 특징을 하나하나 정리하기 시작했다.

  노란 색깔의 전기. 기다란 꼬리, 통통한 체형.

  "아! 알았다!` 한때 굉장히 유명했지만,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전설적인 그···.

  "피카···."

  "아니다! 그거 아니다! 걘 쥐잖아! 난 고양···. 아니 영물이다!"

  "왜 그렇게 화를 내?"

  "종이 다르다! 종이! 내가 주인보고 두 발로 걸어 다닌다고 원숭이라고 하면 좋냐?"

  호오...웬일로 굉장히 논리적이다. 카렌은 내심 감탄했다. 역시 자신이 불리할 때만 잘 돌아가는 녀석의 머리.

  "그런데 주인이 그 얘기를 하니까 문득 게임이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주인은 무슨 인재 수집하냐?"

  "그게 무슨 말이야?"

  "카드로 몬스터를 수집하는 게임이 있는데 주인이 그거 하냐는 말이다. 처음에는 나! 무려 S급인 삼색! 그리고 나보다는 좀 떨어지지만 그래도 S급 헌터인 채린."

  삼색은 게임 얘기가 나오자 신나서 설명을 계속했다.

  "비서인 강이사. 카페 NPC이자 지금은 B급 각성자로 승급한 오영준과 친구. 그리고 농사꾼 한민재. 지금 만나러 가는 미호. 최근에는 현무와 백호까지."

  "무슨 말이야. 그냥 하다 보니 만난 거지."

  삼색의 말에 지구로 와서 맺은 인연들이 주르륵 머릿속에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러고 보니 많은 사람과 영물들을 만났다.

  "마치 영주 같다. 내가 지금 방송하는 게임이 그런 컨셉으로 영지를 키우는 거다."

  "그러냐."

  "내가 해보니까 지금 주인에게 필요한 걸 알았다. 이제 전투원이랑 식량은 충분하니까 딱 한 가지만 더 채우면 된다."

  "뭔데?"

  "대장장이랑 건축가."

  삼색의 말을 들은 카렌이 피식 웃었다. 그럴싸하긴 하다. 실제로 마을에서 왕국을 일궈낸 자신의 경험을 비추어봐도 일리가 있었다.

  그때도 전투원은 차고 넘치는데 건물이 없어서 기사급 실력자들이 노숙하고 난리도 아니었지.

  "근데 그런 직업이 요즘 어딨냐."

  "하긴...요즘은 다 공장에서 만드니까. 어? 저기 미호 있다."

  삼색과 대화하다 보면 참 시간이 빨리 흐른다. 어느새 숲의 가장 끝자락에 도착하자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미호가 보인다.

  "아버님! 어서 오세요."

  인사하는 미호의 뒤로는 볼록 솟아오른 잘 정돈된 무덤과 그 앞에 묘비, 그리고 예법에 맞춘 수호 동물들의 석상, 작은 기와 담장들이 무덤을 둘러싸고 있었다.

  "자리도 옮겼으니 인사하고 가야지. 그래도 가장 좋은 자리를 내줬어."

  앞에는 백호가 사는 울창한 숲. 뒤로는 현무가 만든 호수. 무려 두 명의 신수가 지키는 경계선에 있는 숙종의 무덤을 보며 카렌이 챙겨 온 술을 꺼냈다.

  "내가 귀찮아서 예식은 됐고, 저번에 누가 말했듯이 마음이 중요한 거 아니겠어."

  "잠깐! 내가 하겠다."

  "응? 너가?"

  아무리 덩치가 커도 고양이가 두 발로 술 따르는 건 좀 모양이 그렇지 않을까?

  "내가 새로운 거 보여줄게. 주상이랑 주인 앞에서 처음 보여주고 싶었다."

  삼색이 잠깐 눈을 감더니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땀을 뻘뻘 흘린다.

  카렌이 이 녀석이 또 무슨 장난을 하나 주의 깊게 살펴봤다. 한참을 그렇게 끙끙대더니 마침내 뭔가 변화가 일어난다.

  파지지지직!

  갑자기 삼색의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기. 갑작스러운 밝은 빛에 카렌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들고 삼색을 보는 카렌과 미호의 눈이 놀라서 동그라졌다.

  "너..."

  "이거다! 나 이제 인간으로 변할 수 있다! 청룡의 힘이다!"

  삼색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덩이 뒤쪽으로는 기다란 고양이 꼬리가, 머리 위로는 뾰족한 귀가 볼록 솟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옷도 같이 만들어야지. 인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