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9/140)

  은밀한 제안과 예상치 못한 제안

  `인간이 대체 여길 어떻게 왔지?`

  안 그래도 인간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백호는 으르렁거렸지만, 현무는 생각에 잠겼다.

  ?

  오랜 세월 동안 신수들의 상식은 정립된 지 오래였고 그 범위 안에 인간의 한계도 들어 있었다.

  "싸우고 싶지는 않아. 대화하자고. 대화."

  한데 지금 자신들이 만들어낸 토네이도 안에서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태연히 말하고 있는 `저건` 과연 인간일까?

  현무의 머릿속이 오랜만에 혼란스러워진다. 인간을 훑어보니 그 와중에 뭔가를 안고 있다.

  `저건...고양이인가?`

  혹시나 잘못 봤나 다시 자세히 봐도 고양이가 맞다. 그런데 뭔가 낯이 익다.

  `잠깐...저 고양이 어디서 봤지?`

  "대화하기 싫나?"

  신수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카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현무를 향해 말했다.

  "아니면 이 고양이 기억 좀 읽어···."

  "감히! 건방지구나!"

  카렌의 말을 노성을 끊어버린 백호가 반말을 기폭점으로 더는 참지 못하고 꼬리를 거칠게 흔들어 바람을 날려 보냈다.

  "잠깐! 백호..."

  현무가 인간들도 그렇고 고양이에게 흥미가 생겨 말려보려 했지만, 이미 백호는 카렌에게 꼬리를 살짝 거칠게 바람을 날려 보낸 후였다.

  쿵!

  "호오..."

  순간 보호막에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카렌이 순수하게 그 위력에 감탄하며 얼굴이 흥미로 물들었다.

  과연 신수다운 힘이다. 가벼운 공격이 이 정도라니 말이다.

  "잠시 물러나 있어라."

  카렌이 감싸고 있는 보호막을 두 개로 나누어 미호와 삼색을 둥둥 띄워 한쪽으로 스윽 밀었다.

  "주인? 안 싸운다고···."

  "잠깐 통성명을 하는 거야."

  카렌이 어깨를 돌리며 앞을 바라봤다.

  `현무는 미호의 이야기처럼 온화한 성품이군. 저쪽은 걱정 안 해도 되겠어.`

  백호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엉덩이를 들썩임에도 현무는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자신과 따로 떨어져 있는 삼색과 미호를 공격할 기색도 없는 걸 보니 백호와 잠시 몸의 '대화'만 나누면 될 것 같다.

  "귀찮게도 이런 예상은 벗어나질 않아."

  삼색의 말대로 평화적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저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다.

  "열심히 구해주고 눈 떠보니 실험체가 되어 있는데 어떻게 바로 대화를 하겠어? 나 같아도 열 받겠다. 그럼 시작하지. 덤벼봐."

  카렌이 고개를 까닥거리자 백호가 낮게 울며 바람에 녹아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카렌의 앞에 나타난 백호의 묵직한 앞발.

  콰아앙

  ?

  아까의 바람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카렌이 보호막째로 뒤로 주욱 밀려난다.

  "역시 세긴 하네."

  이미 보호막에 전해진 충격만으로 일반인은 피를 토하고 죽었을 거다.?

  공격의 위력을 가늠한 카렌은 적당량의 마나를 발에 집중시키면서 발 밑의 실드를 울퉁불퉁한 형태로 바꿨다.

  "다시 와 봐."

  "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도발하는 인간을 보며 백호가 이를 악물며 다시 공격을 가했다. 아까의 배는 강한 공격이 다시 보호막을 강타했다.

  쿠우웅

  하지만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카렌은 단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다. 고고하게 우뚝 서서 공격받아내고는 백호를 향해 다시 말했다.

  "할 수 있는 거 다 해 봐. 화는 풀어야지?"

  "크아아앙!"

  마침내 폭발해 버린 백호의 분노.

  노성과 함께 백호가 다시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수백 개의 백호의 형체들.

  "오...분신도 있어?"

  카렌의 감탄과 달리 백호는 분신을 만들지 못한다. 그저 빠르게 이동했기에 마치 여러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죽어라. 인간."

  콰콰콰콰쾅!

  백호의 선언과 함께 백호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수백의 거센 바람이 단 한 명의 인간을 향해 쏟아진다.

  "이건 재밌네."

  카렌은 왼손을 중심으로 보호막을 강화해 쉼 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막고는 오른손 위로는 둥근 구슬을 만들어내었다.

  구슬 안에 하루살이 크기의 구슬들을 압축해 빡빡하게 채워 넣는다.

  더는 들어갈 곳 없이 구슬이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자 카렌은 만족한 얼굴로 구슬을 보호막 밖으로 냅다 던졌다.

  "그깟 걸로..."

  카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백호가 코웃음 치며 비웃었지만 이내 벌어진 일에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퍼어엉!

  구슬은 터지며 일제히 안에 들은 내용물을 밖으로 쏟아 냈고 촘촘한 그물 같은 공격에 백호의 움직임이 멈추며 분신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여전히 잘 먹히네?"

  수류탄을 응용해서 만든 기술이다. 하나, 하나의 위력은 약하지만 벨리알에서 귀찮은 은신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적들을 향해 잘 써먹었지.

  "으으윽..."

  마침내 백호가 모습을 드러내며 약한 신음을 흘린다.

  그 짧은 사이에 바람으로 벽을 만들었지만 조금 늦었는지 부상을 입은 모양이다.

  "진짜 가지고 있는 능력 자체는 정말 좋네."

  카렌이 백호를 보며 다시 한번 감탄했다.

  백호가 바람으로 주변에 벽을 만들면서 치료에 집중하자 몸에 박힌 구슬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감과 동시에 상처 부위에 바람이 일렁이더니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이제는 끝내자고."

  카렌이 오른손을 내밀어 손가락 사이로 멀리 있는 백호를 응시하면서 손바닥 안에 백호를 넣었다.

  자신이 구사하는 유일한 마법인 실드도 엄연히 마법의 일종. 마법이란 자신이 상상하는 이적을 마나의 도움으로 구현하는 힘이다.

  물론 파고들면 연산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자신은 무슨 선천적인 결함 때문에 실드 밖에 못 쓰지만 말이다.

  오랜 친구인 대마법사 녀석이 이유가 뭐랬더라...이름이 길어서 까먹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

  지금 카렌이 원하는 실드의 형태는 간단하면서 복잡하다.

  '?바람마저도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 '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그린다.

  평소라면 이런 과정이 필요 없지만 지금 하려는 일은 조금 심화 과정이니 손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크응!"

  그 사이에 몸을 빠르게 회복한 백호가 콧바람을 내뿜으며 재빨리 다시 움직인다.

  영물의 감이 저기 멀뚱히 서 있는 인간이 뭔가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억!"

  그런데 얼마 못가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간 찌그러지는 백호의 얼굴.

  "이게 뭐야?"

  백호가 주변을 둘러보자 반투명한 벽이 원형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된 듯한 더러운 느낌에 백호가 신경질적으로 전력을 다해 벽을 쳤지만 흠집도 나지 않는다.

  "그래봤자. 나를 막을 수 있는 감옥은 없다!"

  백호가 기세등등하게 바람으로 변하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실낱같은 빈틈도 보이지 않는다.

  평생 처음 겪어 보는 상황과 위기에 당황한 백호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카렌이 친절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거 내가 특별히 만든 거야. 그만큼 네가 강하다는 거니 기분은 나빠하지 말고. 조금만 줄일게."

  "...으어?"

  카렌이 손을 조금 오므리자 감옥이 빠르게 줄어들더니 이내 작은 방 크기에서 멈췄다.

  압사당할 거라는 원초적인 두려움에 공포에 질렸던 백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대화할 거지? 그쪽도?"

  카렌이 백호와 현무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그런데 백호도 풀어주는 게 어떤가? 감히 더 공격하지 않을 걸세."

  현무의 말에 카렌이 백호를 보자 자존심에 말은 안 해도 꼬리가 추욱 늘어져 있었다.

  "그러지."

  딱!

  카렌이 손을 한 번 튕기자 단번에 감옥이 사라진다. 풀려난 백호 옆으로 현무가 다가와서 나란히 카렌 앞에 섰다.

  "음..."

  근데 앞에 서니 둘의 덩치가 너무 커서 다리 밖에 안 보인다.

  카렌이 자신이 하늘로 올라가려다 순간 귀찮아져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너네 좀 작아질 수 있지? 너희도 이리 와 봐. 얘기할 준비 끝났네."

  백호와 현무가 카렌의 주문대로 작아지고 카렌의 부름에 삼색과 미호도 카렌의 옆으로 왔다.

  "어찌하려는가?"

  현무가 묻자 카렌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계속 말했잖아. 대화하자니까? 나 말고 얘랑."

  카렌이 삼색의 옆구리를 두 손으로 잡아 현무와 백호 앞에 내밀었다.

  몸이 액체처럼 쭈욱 아래로 늘어난 상태로 삼색이 둘을 보며 씨익 웃는다.

  "오랜만이야. 백호는 그 성질 좀 죽이라 그랬지?"

  "역시 금손이었구나."

  "뭐?"

  현무는 자기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백호는 금손 특유의 건방진 말투에 그제야 알아채고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간은 다 나쁘지 않아. 그리고 지구도 위험하니까 내 기억 좀 읽어 봐."

  현무와 백호의 머리속으로 삼색의 기억이 흘러 들어온다.

  치명상을 입고 땅 속에 숨었던 삼색을 구해 준 카렌부터 그 이후에 만난 사람들. 그리고 여신이 경고해 준 지금도 지구로 오고 있는 침략자들.

  "음...게이트가 그들의 짓이었다니."

  백호와 현무가 고뇌에 찬 신음을 흘리더니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다.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저울질 하던 이들은 마침내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라진 토네이도. 그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다.

  자신이 본 정반대의 따스한 마음을 지닌 인간들도 그렇지만 지구로 지금도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위협이 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사신들이 이미 둘이나 죽어버려 인간과 힘을 합치지 않으면 위험하겠군."

  "그리고 어차피 이 인간이 있는데 여기서 멈춰야지 어쩔거야?"

  백호가 특유의 성격으로 마지막까지 툴툴거렸다. 왠지 싸움에 진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투정 같다.

  "백호님은 충분히 강하세요. 여기 카렌님이 너무 특이하신 거죠."

  미호가 애써 위로했지만 상처 난 백호의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카렌의 눈에는 같은 고양잇과라 그런지 삐진 삼색을 보는 것 같다.

  "내 기억도 읽어 볼래?"

  백호가 살짝 불쌍해진 카렌이 제안을 하나 했다.

  ?

  "자네의 기억을?"

  "그래.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봐라."

  카렌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현무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는 거 맞지?"

  "맞네. 다만 격의 차이 때문에 모든 기억을 읽은 순 없어."

  만약 카렌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불가능 한 일이다.

  백호와 현무의 눈이 감기고 카렌의 기억을 대강이나마 엿본 후 백호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건... 그럴 만하군. 오히려 당연하다."

  카렌의 세월은 신수들에 비하면 짧았지만, 그 농도가 전혀 달랐다. 신수란 대게 산에 은둔하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들.

  하지만 그에 비하면 카렌은 자신의 힘으로 역사에 수없이 족적을 남겨왔다.

  "너의 인생에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무례를 사과하지."

  현무와 백호가 머리를 정중히 숙이자 미호와 삼색이 입이 떡 벌어진다.

  이들이 누군가. 영물의 정점인 사신이 인간에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아냐. 그런 건 낯간지러우니까 하지 말자고."

  카렌이 손사래 치자 현무와 백호가 다시 감탄했다.

  "겸손까지... 대단하군."

  물론 카렌은 진심이었다.

  "주인이 겸손이래...풋"

  삼색이 그세 참지 못하고 비웃자 카렌이 한 손에 녀석의 배를 휘감아 들어 올리며 일부러 털을 반대 방향으로 쓸었다.

  "주인! 이거 힘들게 그루밍해놓은 건데!"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손에 꽉차는 느낌이 없다. 지금껏 뛰느라 고생했는지 삼색의 배가 쏙 들어갔다.

  "맞다. 이 녀석 심장에서 무슨 실이 너희와 연결 됐다고 하던데?"

  살짝 안쓰러워서 삼색의 배를 보던 카렌이 문득 생각나서 심장 부근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맞다. 저 둘과 연결되어 있다. 지금도 보인다."

  말하면서도 삼색의 눈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신수와 연결된 실을 보고 있었다.

  ?

  "그건 못 없애? 너 안 불편하냐?"

  "조금 거슬리긴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계약자가 죽어서 어쩔수 없다."

  백호와 현무가 계약한 사람은 과거 숙종이니 죽은 사람을 무덤에서 불러 올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내가 대신 들어주면 되겠네? 네 주인은 이제 나잖아.

  "

  카렌이 슬쩍 백호에게 눈치를 주자 바로 답이 돌아온다.

  "그럼! 영물간의 계약이 신성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양보하면 된다. 별 것 아니야!"

  어차피 현무는 동의할테고 백호는 또 감옥에 갇힐까봐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게 되냐? 계약은 현무와 백호가 편하게 머물 땅이다.

  "

  신수들의 허락도 떨어졌고... 카렌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떠오른 기가막힌 생각에 박수를 '짝' 치며 환하게 웃었다.

  "땅이라...그렇지! 딱 좋네! 잠시 몸 좀 더 작게 만들어 봐."

  ?

  작아진 현무의 등껍질과 백호의 목에 자연스럽게 팔을 휘감은 카렌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경기도에 좋은 땅을 알고 있는데...거기서 이왕 머무는 김에 숲도 만들고 호수도 만들 생각 없어?"

  카렌의 뒷모습을 보면서 카렌이 미호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 저 장면 본 적 있다."

  "어디서?"

  "학원 드라마에서 항상 나오는 나쁜 청소년들이 돈 뺏는 장면이랑 똑같다."

  삼색이 뒤에서 뭐라 하던 카렌은 마침내 아무것도 모르는 신수 둘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거 나쁘지 않군."

  "맞아. 다가오는 침략자들을 대비하기도 쉽겠구만."

  "맞아. 이만한 땅이 어디 없다니까? 이 기회 흔치않아. 잘 잡은 거야."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손 하나 안 대고 해결할 생각에 카렌은 굉장히 기분 좋아졌다. 그리고 이어진 둘의 말에 카렌은 기분은 최고조가 되었다.

  "이렇게 받기만 할 수는 없지. 우리가 미안한 것도 있으니 자네와 삼색, 미호에게 보답을 하고 싶네. 자네에게는 우리의 가호를 주고 싶네."

  "오? 그게 뭔데?"

  "보통 인간에게는 잔병치레하지 않고 장수하는 정도라 워낙 강한 자네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 그냥 축복 같은 거라네."

  "나쁠 건 없지."

  영양제 같은 거라고 생각한 카렌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원래 좋은 건 많을수록 더 좋다.

  "그리고 금손...아니 지금은 삼색이지. 삼색과 미호에게는 지금은 사라진 청룡과 주작의 자리를 맡기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뭐?"

  "꾸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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