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140)

  왕의 고양이도 생선 앞에서는 똑같다

  "저는 하루 내의 과거를 읽을 수 있어요. 보여드릴게요."

  미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우 구슬이 둥실 떠오르더니 영화관의 영사기처럼 빛을 쏘았다.

  빛은 형체를 이루어 솜털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과거를 비추었다. 몇 시간 전 엘리가 출근할 때 모습 그대로다.

  "이걸로 따라가면 돼요."

  제한 시간이 있는 만큼 시간이 생명이다. 카렌은 곧바로 미호를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여기가 그이의 방..."

  반가운 향기에 미호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이내 여우 구슬이 삼색의 방을 비춘다. 해가 막 떠오르고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시간대.

  "음..."

  카렌이 침음성을 흘렸다. 기억이 돌아오는 동안 밤새 삼색은 차가운 물에 들어간 듯 몸을 바들바들 떨었고, 코와 발바닥이 축축해져 있었다.

  만약 인간과 같이 땀샘이 온몸에 고루 분포되었다면 지금쯤 침대 시트가 푹 젖었을 거다.

  "..빨리 돌릴게요."

  미호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여우 구슬이 회전하자 삼색이 마침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잠시 자기 심장 쪽으로 앞발을 갖다 대었다.

  "계약이 돌아온 거예요. 영물의 계약서는 심장이거든요."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방 안을 뱅뱅 돌던 삼색은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자신의 책상을 뒤졌다.

  종이와 펜을 든 삼색은 두 발로 삐뚤빼뚤 카렌에게 쪽지를 남기더니 창문을 열고 훌쩍 사라졌다.

  "내 차로 가지."

  카렌과 미호는 차를 타고 여우 구슬이 비추는 과거의 삼색을 계속 따라가기 시작했다.

  "음..."

  그런데 도로를 달리던 녀석이 뭘 만났는지 갑자기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버님. 잠시만요. 어디로 갔는지 알 것 같아요."

  카렌이 차를 갓길에 잠깐 멈추자 미호는 주위의 표지판과 네비게이션의 지도를 잠깐 둘러보더니 어디론가 경로를 설정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서오릉(西五陵). 안내를 시작합니다.]

  "서오릉?"

  앞 유리 왼쪽 구석 디스플레이에 안내 표시가 떠오른다.

  "조선 왕들의 무덤이에요. 갑작스럽게 돌아온 기억 때문에 혼란스럽겠죠. 스스로 정리하러 간 것 같아요."

  과연 미호의 말대로 삼색의 모습이 다시 나타나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오릉의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자 곳곳에 녹슨 안내문이 둘을 맞았다.

  [명릉(明陵) 폐쇄 예정. 주의 요망]

  ?

  숙종이 묻힌 곳. 하지만...

  "왕의 무덤치고는 황폐하군."

  안내소였던 곳은 유리창이 깨지고 거미줄이 처져 있었고 길 곳곳에 성의 없게 대충 꽂아 놓은 안내판들이 보였다.

  "연합에서 사람들의 결속력을 위해 각국의 역사들을 모두 지우는 작업을 시작해서 그래요. 다음 달쯤이면 왕릉 전체가 모두 사라질 거예요."

  기업을 이끄는 사장이면 자기가 싫든 좋든 정치 쪽의 일정과 소문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미호가 주변을 돌아보며 복잡미묘한 시선을 보냈다.

  `옛날부터 높은 것들이라면 치가 떨렸는데 이렇게 보니 또 그러네.`

  조선 말기에 가서는 나라에서 영물들을 백성들을 홀리는 악귀라고 치부해서 사냥을 시작했었다.

  자신은 간을 빼먹는 요물 따위로, 산의 영기를 지키는 호랑이는 떡과 곶감을 좋아하는 멍청이로 만들지를 않나...

  "그러고 보니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조선을 지킨 건 삼색과 영물들이었군."

  "맞아요. 그래도 그 임금은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것 같은데... 하늘이 내린 수명이 아쉬울 따름이죠."

  그 때 숙종이 조금만 더 살았다면, 자신은 요물이 아니고 삼색도 묘두사 따위로 취급받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

  "저기 있네요."

  얘기를 나누다가 미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한 쌍의 묘가 보였다.

  "오른쪽 묘에 숙종이 묻혔어요. 그리고 그 옆은..."

  "네가 맞았다. 여깄군."

  저렇게 토실토실한 삼색 무늬를 가진 엉덩이를 가진 고양이는 연합에도 거의 없지.

  "저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지금은 둘의 일이 급하다고 생각한 미호는 눈치 빠르게 중간에 있는 사당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왕의 묘로 안내하는 길, 돌로 만들어진 어로를 걸어 카렌이 숙종의 묘 앞에 섰다.

  가까이서 보니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아 잡초로 무성하게 덮였고, 무덤을 둘러싼 작은 담장들은 무너져 내려 흉측하게 방치된 게 보였다.

  "...."

  그리고 그 앞에서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무덤을 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카렌은 삼색 옆에 아무 말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한참을 그저 말없이 앉아 있다 마침내 삼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하다."

  카렌이 삼색과 만나고 처음 들어 보는 슬프고 울음기 섞인 목소리.

  "그럴 수 있지."

  카렌은 그저 담담하게 응수했다.

  "그리고 또 가야 한다."

  "왜?"

  "현무와 백호를 봐야 한다. 깨어나기 직전인데 상태가 뭔가 이상한 것 같다. 이 날씨도 나 때문인 것 같고..."

  "같이 하면 되지."

  "하지만..."

  "기억이 돌아왔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심각한 생각하지 마라. 그냥 단순하게 서로 돕는 거다. 엘리니아에서, 성지에서 네가 날 도왔던 것처럼 말이야."

  "고맙다 주인."

  삼색은 카렌을 보며 씨익 웃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은 그대로지만 그래도 조금 얼굴색이 밝아졌다.

  "그래도 계약이니 내가 혼자 한 번 해보겠다. 현무와 백호의 상태만 잠깐 보고 얘기만 나눌 거다. 주인 귀찮은 거 싫어하잖냐."

  카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삼색을 평소처럼 끌고 와 이리저리 문질렀다.

  "악! 악! 갑자기 왜 그러냐!"

  "네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생각할 리가 없는데? 기억 말고 다른 악귀가 씌여 진짜 요물이 된 거 아니야?"

  "아니다! 나는 영물이다! 그리고 주인이 다른 사람이냐?"

  이렇게 버둥대고 말하는 걸 보니 확실하긴 한데...

  "100번 중의 1번, 영물로 돌아오는 그 시기인가?"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럼 99번은 뭐냐?"

  "당연히 그냥 고양..."

  "주인!"

  삼색이 앙칼지게 투덜거리자 카렌은 그제야 손에 힘을 뺐다.

  그러자 삼색이 카렌의 품에서 퐁 하고 빠져나가 땅에 살포시 착지한다.

  "그래. 내가 네 주인이다. 그것만 잊지 마. 힘들면 고집부리지 말고 언제든지 연락하고."

  "알았다. 어차피 둘한테 위험한 상황이면 내가 뭘 할 수도 없다."

  "그럼 너를 잘 키워서 분양해 준 사람한테 감사 인사나 한 번 하고 가자."

  카렌이 실드로 칼날 두 개를 만들어 내 조심스럽게 숙종의 묘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삼색도 조그만 손으로 향로에 쌓인 먼지를 털어 냈다.

  그렇게 이발을 마치고 보기 좋게 동그란 원래의 제모습을 되찾은 숙종의 묘.

  "이거 뿌려주라."

  "응? 이게 뭔데?"

  "전 주인은 오골계나 검은콩 등을 즐겨 먹었다. 그건 당장은 구할 수가 없으니 검은콩으로 만든 두유다."

  카렌이 삼색에게 두유를 받아 들고는 숙종의 묘에 부었다.

  "그런데 왕에게 이렇게 하는 게 맞나?"

  기억하고 있는 성묘 예절이랑은 좀 다른데 말이다.

  "주인도 나름 한 나라의 군주였으니 괜찮을 거다. 그리고 형식보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 아니겠냐."

  "그래. 고양이 한 마리 조선에서 현대로 입양 보내줘서 고맙소이다."

  "....."

  삼색이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숙종의 무덤과 카렌을 고개를 휙휙 돌려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다 왕이었네.`

  신기한 우연이다. 뭔가 운명이란 게 있는 걸까?

  인사도 했겠다. 삼색은 카렌에게 잠깐의 안녕을 고했다.

  "꾸잉, 금방 갔다 온다. 산책 간 걸로 생각해라."

  "지금 바로 가게? 저기 네 여자친구... 아니지 부인 안 보고 가?"

  ?

  카렌이 정자에 앉아서 팔을 괸 채 아련한 표정으로 주변의 풍경을 보고 있는 미호를 향해 턱짓했다.

  "부..부인?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삼색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이미 허락했다."

  "뭘 허락하냐?"

  "며느리 삼아야지 어떡하겠냐."

  "며...며느리? 주인 왜 그러냐?"

  삼색과 카렌이 그새 미니 노트북을 꺼내 회사 일을 처리하고 있는 미호를 바라봤다.

  "잘나가는 회사 사장이라 바쁠 텐데 너 일이라고 다 제쳐두고 온 것 봐라. 그리고 몇백 년 너 도와주고 기다렸는데, 뭐 어쩌게? 이제 기억도 돌아왔잖아."

  장난기 많은 삼색의 입도 이번에는 꾹 닫혀 버렸다. 그리고는 들릴 듯 말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부인은 당장 그렇고, 여자친구부터 시작할 거다."

  카렌이 입술을 꽉 깨물어 웃음을 참고는 삼색의 등을 툭 쳤다.

  "그럼 가서 얘기하고 갔다 와."

  "그건 아니다. 미호는 내가 얘기하면 무조건 도와주려고 할 거다. 주인이 잘 말해줘라."

  "뭐? 그걸 내가 왜..."

  말 끝나기 무섭게 삼색은 몸을 키워가면서까지 순식간에 땅을 박차며 사라져 버렸다.

  "...놀렸다고 복수 한 거냐? 네가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카렌은 한 방 먹었음에도 오히려 씨익 웃으며 흥얼거리며 미호 쪽으로 경쾌하게 걷기 시작했다.

  노트북을 다루며 발을 물장구치듯 동동거리고 있는 미호는 카렌이 다가오자 벌떡 일어서며 뒤를 살그머니 쳐다봤다.

  "삼색은 갔나요?"

  "그래."

  풀 죽어서 고개를 푹 숙이는 미호. 하지만 이어지는 카렌의 말에 눈이 동그라졌다.

  "지금 쫓아갈건데?"

  "네?"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내가 그 녀석을 뭘 믿고 보내?"

  "그게 무슨...?"

  "집냥이가 하루 아침에 산책냥이로 바뀔 순 없지."

  ".....?"

  카렌이 이해를 못 해서 눈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미호를 놔두고 워치를 조작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민들레 전담팀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편하게 미행할 수 있는 거 있어? 하나 보내줘."

  [민들레님 전용으로 배치 되어 있는 무소음 마석엔진이 탑재된 헬기가 있습니다. 보내드릴까요?]

  "그거 좋네."

  * * *

  "음료를 더 드시겠습니까?"

  승무원이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누워 있는 카렌과 미호에게 고급 술과 음료들이 가득 담긴 트레이를 끌고 와 말했다.

  "포도주 하나 줘."

  "예. 엘리니아 산 적포도주입니다."

  카렌은 손끝으로 우아하게 와인 손잡이를 잡고 한 모금 음미했다. 그리고는 과일 치즈를 하나 집어먹으며 홀로그램으로 떠오른 화면을 바라 보았다.

  미호의 여우구슬이 지상에서 삼색의 과거를 비추면 초소형 드론들이 실시간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저...아버님. 정말 괜찮나요? 삼색이 혼자 가고 싶어 했는데..."

  "녀석이 원한대로 혼자 가긴 하잖아? 우리는 무려 4시간이나 떨어져 있다고?"

  카렌은 도도하게까지 보이는 평소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다리를 받침대에 올렸다.

  이상하게 삼색과 관련된 일이면 카렌도 신기하게 아이처럼 장난끼가 발동된다.

  "이 의자 좋네. 균형이 예술이야."

  "원하신다면 집으로 배달해드리겠습니다.

  "아냐, 고맙지만 그래도 우리집 소파가 제일 편해."

  '그런데 아버님 능력이 엄청나시네.'

  5분도 안 되서 헬기를 호출한 것도 그렇고 지금 타고 있는 이 기종은 아직 정식 출시도 안 됐다. 게다가 전용 비행기도 아니고 이런 커다란 헬기라니...

  '나도 모르겠다.'

  미호는 자신도 밀린 회사 일이나 마저 처리하려 노트북을 꺼내며 승무원을 잠시 불렀다.

  "여기..."

  "와이파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당분간 부를일 없으니까 쉬어. 이상 있으면 부르고."

  "네. 감사합니다."

  맛 좋은 와인도 마시고,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살짝 살짝 느껴지는 헬기의 진동에 낮잠 자기 딱 좋은 환경이다.

  "하암..."

  카렌은 밀려오는 노곤함에 등받이를 최대한 제치고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앞의 홀로그램에서는 삼색이 1월을 추운 날씨에도 몇 시간을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고 있었다.

  밖과는 달리 너무나도 평온한 헬기의 내부. 그런데 앞의 조종석에서 다급한 무전들이 오고간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태풍 경보라니?]

  [이상현상이 갑자기 전 연합에서 나타 나고 있어. 빨리 VIP께 알려. 당장 착륙해야 해.]

  과연 점점 거세지는 바람에 점점 헬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들레님. 잠시..."

  카렌과 미호가 승무원에게 조종사들과 연결 된 헤드셋을 통해 상황을 전해 들었다.

  "현무와 백호가 일으킨 게 분명해요. 혹시나 삼색이 위험에 빠졌으면 어떡하죠?"

  미호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카렌의 머리는 더더욱 냉철하지며 담담한 목소리로 조종사들에게 말했다.

  "일단 비행해. 내가 알아서 하지."

  [알겠습니다.]

  카렌에 대해 정보와 주의사항을 들었던 조종사들은 어떤 반문도 하지 않고 계속 헬기를 몰았다.

  '절대적으로 믿으라 그랬지. 어떤 명령에도 의심을 품지 말라고.'

  민들레 재단의 인물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민들래 재단에 은혜를 입은 자들. 신뢰는 충분하다.

  "문 열어."

  카렌의 명령에 해재된 개폐구의 잠금. 과연 바깥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비까지 섞여 내리는 최악의 상황.

  카렌은 잠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다 한 손을 뻗었다.

  [세상에...]

  헬기를 중심으로 1km를 둥그렇게 감싸버린 반투명한 보호막에 헬기 조종사들이 당황해 순간 조종간이 흔들렸다.

  "앞에 뭐가 나타나든 방향을 꺽지 마. 미호야. 시간 맞춰서 계속 비춰라."

  ???

  [예!]

  "예. 아버님."

  카렌의 호위 아래 헬기는 어떠한 저항도 없이 쭉쭉 나아갔고 곧 미호가 알려 준 장소에 도착했다.

  지상에는 인간의 시체들과 한때 건물의 형체였던 처참한 잔해들이 보인다.

  [착륙...]

  카렌이 조종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훌쩍 지상으로 뛰어 부드럽게 착륙하자 조종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VIP에 대한 정보는 처음부터 다시 적으라고 해.]

  [오다가 토네이도 중심부를 그대로 통과한 게 믿기지 않는군.]

  [여기는 바이퍼. 민들레 호송 완료.]

  "미호?"

  "네. 하고 있어요."

  카렌이 말하기도 전에 이미 여우구슬을 조작하던 미호가 이내 익숙한 고양이를 잡아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건물에 잠입하고 있는 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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